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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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구입한 것은 여름이었고, 읽고 덮고를 반복하다 다시 두 편을 읽었다. 대상 수상작인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와 최정화의 「인터뷰」 이다. 김금희의 작품은 동명으로 소설집이 나와 있고, 리뷰를 읽은 기억이 있지만 이런 내용일줄은 몰랐다. 한낮의 종로. 맥도날드에 앉아 청년 시절을 회상하고, 그 때처럼 퀸의 노래를 들으면서 울고 걷는 필용.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나를 우쭐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내 이야기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건 상관없이 들을 줄 아는, 일종의 권력욕을 채워주는 그런 존재. 현재와 과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는 필용에게 양희는 자존심 회복제 같은 것이었을 터다. 그렇다고 양희가 적극적으로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준 것은 아니다. 그냥 나무처럼 그 자리에 있었을 뿐.

왜 ‘연애’인가. 왜 ‘한낮’일까. 우리 오늘부터 사귀자, 다짐하지는 않았어도 점심을 함께 하고 헤어지는 것... 매일 만나 대화한다는 것은 상대를 내 일상으로, 내 인생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양희의 고백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인지를 확인하고 안심하고, 그 마음이 날아갔을 때는 치졸한 반응을 보인다. 용기없는 것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하여, 과거 좋은 때를 떠올리며 기억 속 자신의 비겁함은 삭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원하는 것을 얻었던가. 오히려 한낮에 드러난 비참함에 눈물을 쏟았을 뿐이다.

최정화의 「인터뷰」는 이 작품집을 산 이유이기도 하다. 『지극히 내성적인』이라는 단편집을 읽고 그가 쓰는 장편이 궁금했다. 악스트 지에 연재되었던 소설이 얼마 전, 은행나무에서 『없는 사람』으로 출간되어 읽어보려 한다. 이 작품은 그 소설을 기다리면서 읽어보려고 산 것이고, 단편집에 수록되었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인터뷰」의 주인공도 공허하다. 허상을 좇는 피상적인 인간 관계 속에 지쳐 있는 주인공.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어 타인에게서 얻는 관심에 만족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탓, 탓, 탓. 벌어진 모든 것은 누구의 탓이다. 이 탓들 속에서 문득 건강하지 못한 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사회도 그 구성원들도 병들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현실을 비정하게 그리는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일반적인 인물이라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쓸모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는 것은 사회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주인공이 호프집에서 만난 커플에 대하는 태도나 사회나 장인이 주인공에 취하는 태도나 별 다를 바 없다. 그냥 아내가 불쌍하다. 부수적인 존재로 등장하기에... 이 단편을 읽고 나면 장르는 다르지만 홍상수 영화를 본 뒤의 느낌이 있다. 비교하긴 그렇지만 일종의 하이퍼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영화와 다른 의미로 최정화의 단편은 내 취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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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30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01 1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07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07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1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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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한참 유행이던 ‘힐링’이란 단어가 독서하는 내내 떠올랐다. 실은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지만, 개인사와 사회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을 좀 달래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겐자부로의 글을 읽고 힘을 얻었던 것처럼, 이번엔 제임스 헤리엇의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에서 위로를 얻었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만 키우고 싶지는 않다. 다른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무거운 일이다. 잠깐 강아지를 맡아 키웠고 금세 사랑하게 되었지만 중형견이 뛰놀 수 있는 집에서 데려 갔다. 그래서 반려동물을 데리고 산책하는 이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책소개에서 읽은 번역가의 글 때문이었다. 요크셔 시골 수의사 이야기가 우리나라에서 세 번이나 번역·출간되는 이야기. 이것이 무슨 연이란 말인가? 또 그만큼 대단하단 말인가? 그렇게 읽게 된 책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매번 별점 앞에서 고민하던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막 수의대를 졸업한 신출내기 의사가 암소의 출산을 돕는 장면에서 극한 직업 체험기인가 싶었다. 무사히 일을 마친 뒤, 털털거리는 고물 차를 타고 언덕에 오르다 차에서 내린 그가 땀과 오물에 흠뻑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자연을 마주하는 장면. 아주 감동적이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공감, 그리고 감동을 끌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빤하다고 할 수도 있을, 헤리엇의 시골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모든 생물’을 다루고 있다. 요크셔에 사는 가축, 반려동물과 그들을 돌보는 인간들, 헤리엇의 상사 시그프리드 파넌과 그의 동생 트리스탄, 그리고 농부와 농장주들. 밤낮 없이 울리는 호출에 응대하는 수의사들, 젊은이들의 고충에 껄껄 웃는 농부들, 엉망진창인 장부를 보며 눈을 치켜 올리는 새 회계담당자. 새벽 긴급왕진을 다녀오느라 꼴이 말이 아닌 헤리엇을 보며 그의 독특함을 논하는 술꾼들, 헤리엇이 사모하는 헬렌, 그들의 엉망진창 데이트.


귀엽고도 사랑스럽다. 물론 그런 이야기뿐만 아니라 가슴 뭉클하고도 또 한없이 인간적인 에피소드들도 있다. 넉넉지 않은 생활이지만 늙고 병든 개를 돌보려는 노인, 자기가 가고 나면 개와 고양이는 어쩌나 걱정하는 노인…. 매번 까탈스럽게 굴던 이가 어쩌다 한 번 베푼 아량이 시험에 오르자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선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의사가 고치지 못한 암소가 민간요법 덕에 일어나 뛰어다니는 모습, 말이나 소의 뒷발에 차여 헉헉거리는 의사를 가리키며 배를 잡는 농장주들, 자신의 동물을 콘테스트에 내보내려 막무가내로 우기는 사람들, 버터와 소시지를 나누는 인심…. 


가장 감동적인 에피소드는 역시 출산이다. 어미의 자궁에서 자리를 잘못 잡은 송아지의 머리를 찾아 혀를 만져 살아 있나 확인하는 장면. 할짝할짝 손가락 끝을 핥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작은 생명. 어떻게든 살려내려 애쓰는 수의사에 응답하여 양수를 뱉어내고 건강하게 선 모습은 또 얼마나 큰 감동인가. 백 년 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어쩌면 우리네 삶은 어떤 원형을 반복하고 재생산한다는 느낌이 든다. 매일을 생과 사의 기로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이겨내는 것에서는 삶에 대한 찬미를 읽었다. 젊은 수의사의 소명의식에서 피어난 감동, 다음 시리즈를 기대하게 하는 순수한 기쁨. 정말 ‘힐링’이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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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11-17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잘 지내시죠? 제가 한달 정도 북플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ㅎㅎ 이제 돌아오고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에이바 2016-11-17 12:30   좋아요 1 | URL
초딩님도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이에요. 자주 봬요...^^!!!

한수철 2016-11-17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 님이 ‘힐링‘이라는 단어를 쓰시니 거부감이 없네요.^^

...예전에 말티즈와 14년 가까이 산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애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를 추궁했죠. 죽었다는 거예요. 죽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좀 더 고압적인 어조와 표정으로 되묻자- 제 뺨을 후려치는 거예요. 잘 아는 사람한테 맡아 키워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당도 있고, 살기 좋을 거라고 하면서. 그래서 눈을 까뒤집은 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벌 받는다 어쩌구 소리를 질렀는데, 이내 입을 닫아야 했습니다. 똥 한 번, 목욕 한 번 시켜 준 적이 있느냐, 혼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는 일성 때문이었죠. 속으로는 몇 번 있었어, 중얼거렸지만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말귀는 알아듣는 편이었으니까요. 그로부터 며칠 후 형제들도 한바탕 난리를 피우더군요. 그런 형제들 앞에서 똥 한 번, 목욕 한 번 시켜 준 적이 있느냐고 소리쳤던 기억이 아령칙하게 납니다.

오늘따라 제가 죄인 같군요.

저녁에 쥐포를 안주로 맥주 한잔 마셔야겠습니다.

에이바 2016-11-17 16:05   좋아요 0 | URL
고유명사가 아닌 다음이야 힐링이란 단어를 소리내어 말한 적이 없어요. 저도 거부감이 들어서요...

반려동물을 다른 곳에 데려다줄 때 탕이 될까 하는 염려 말이에요. 전 두려웠거든요. 그리고 똥이랑 목욕도 그렇지만 그 에너지 말이에요. 최선을 다했지만 애들이 점점 크니까... 한 생명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닌... 그건 그렇고 14년이면 노견 아닌가요. 존경해야 할 아기...ㅎㅎ 보내고 울적하셨겠어요. 저는 요즘 과일이랑 한 잔 합니다...

캔디캔디 2016-11-18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좋으니 리뷰마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좋은 책이었거든요.
별점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씀에 지극한 공감이 갈 정도로 제게 있어선 올 한 해 최고의 책이었습니다.
이 리뷰를 읽고 이미 다 읽은 책이지만 또 한번 펼쳐들고 싶은 마음이 물씬 솟아나네요^^


에이바 2016-11-18 18: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캔디캔디님. 저도 정말 좋았습니다. 일상적 소재가 놀라운 유머와 따뜻한 감성을 만나면 이런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두고두고 볼 책입니다. 댓글을 쓰면서 트리스탄이 제임스의 장난에 걸려들었던 장면이 기억나네요. 저도 엄청 웃었거든요. ㅋㅋ
 
소네치카 -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걸작선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최종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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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에 대해서는 지난 번 페이퍼를 한 번 쓰기도 했지만, 참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러시아 판 『여자의 일생』이라 생각하여 모파상의 작품과 비교하게 되면서도 그 대지에 대한 나의 편견이 발휘되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비롯한 러시아 작품들을 이야기 할 때 늘 반복하는 이미지가 있다. 넓은 시베리아 평원에 눈 나리는 소리, 그 고요한 자연의 호흡... 사실 이 표현은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안드레이 마킨이 한 말을 조금 빌려 쓰고 있다.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어쩌면 필연적으로 익히게 되는 포용력, 아니 넓은 스펙트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까. 러시아인에 대한 이미지... 인간 본연의 순수와 정신적 합일을 추구하는 시를 향유하다가도 하드코어한 인터코스, 어떤 육체적 행위에도 거리낌이 없는 그런 극단성. 이쯤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껴안을 수 있는 그런 모습을 이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작품에서 그런 장면들이 묘사되는 것은 아니고... 어떤 도덕적인 범주를 훌쩍 넘는 배신과 포용의 과정을 보았다. 마땅히 지켜져야 할 도덕적 규범을 어기는 것을 패륜이라 한다면, 그것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표제작 「소네치카」의 주인공 소냐가 의붓딸로 여기고 사랑한 아샤가 소냐의 남편 로베르트 빅토로비치의 애인이 되는 것. 소냐의 딸 타냐가 아샤를 연민하고 사랑하여 그녀를 부모에게 소개하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복잡해진다. 「메데야의 아이들」의 주인공 메데야와 그녀의 남편. 메데야와 대척점에 선 동생, 알렉산드라가 낳은 아이들 중 한 명의 아버지는 메데야에게 깊은 고통을 안긴다. 메데야는 자신을 잉태하지 못하는 몸이라 여겨 조카들을 더욱 챙기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조카들 중 마샤와 니카의 관계 역시 배신에 바탕한 사랑, 그 위선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고통과 상처를 안긴 이들은 어떤 처벌 없이 행복하게 잘 산다는 것이다.

로베르트 빅토로비치는 말년에 얻은 뮤즈로 인해 왕성한 예술 활동을 하다 복상사로 죽는다. 소냐의 주선으로 아샤는 잃어버린 가족도 찾고, 젊은데다 부자인 프랑스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파리에 가 산다. 알렉산드라는 방황을 마치고 부족하나 그녀를 귀히 여기는 남성에게 정착했으며, 니카 역시 부자에 너그러운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산다. 니카와 마샤의 사이를 드나들던 부토노프는 여전히 잡음없이 아내와 가정 생활을 영위한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감내하는 인물들은 어떤가... 소냐는 남편을 내어주고 그들의 추문을 가리기 위해 앞장서며, 메데야는 고통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내색하지 않는다. 마샤의 경우는 이를 견뎌내지 못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의 영향과 마샤 특유의 예술가적 기질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삶을 이어간다. 인내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마지막 단편 「스페이드의 여왕」의 주인공들에서도 드러난다. 강력한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딸과 그 딸의 이야기, 그 인고의 세월...

여성들이 이끄는 이야기 속에서, 강력하 여성들의 힘은 서로 반목하지 않는다. 배신은 상처와 아픔을 남기나, 그를 받아들이는 캐릭터들의 어떤 숭고함 때문에 용서는 더욱 위대해진다. 금기를 뛰어넘는 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단순함. 이런 단순성에 의해 움직이는 삶은 기쁨을 가져오는데, 그 기쁨이 다른 이의 관대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포용하는 대지, 마더 러시아를 떠올리게 한다. 그 안에서 캐릭터들은 힘을 잃지 않는다. 여성적 목소리로 가득 찬 신화... 역사의 부침 속, 그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선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반복되고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느낌. 어떤 이는 한없이 자애롭고 어떤 이는 한없이 자유분방하고. 극과 극을 오가기에 오히려 균형이 맞는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러시아 고전, 그리스 신화, 동명의 푸시킨 소설을 다시 쓰기 하며 위대한 러시아 고전을 현대성 속에서 되살린 울리츠카야. 한 번 읽어볼만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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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85
볼레스와프 프루스 지음, 정병권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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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국민소설로 일컬어지는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인형』이 출간되었다. 사실 폴란드 문학은 낯설다. 쇼팽에 관심을 가지면서 미츠키에비츠 등의 이름은 알게 되었지만 영 멀게 느껴진다. 곰브로비치 정도가 그래도 많이 알려진 작가가 아닌가 한다. 어찌 되었든 을유세계문학으로 만나게 된 『인형』은 너무 재미있어서 아주 오랜만에 소설의 세계로 푹 빠지게 되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소설의 배경은 1877년에서 1878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있던 시기의 폴란드 바르샤바이다. 서유럽에서 불어오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운은 폴란드 사회 공고하였던 계급적인 위계를 조금씩 무너뜨리는 중이다. ‘출생과 재산’이 작품의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죽은 아내가 남긴 상점을 가진 보쿨스키는 충분히 부자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에서 큰 돈을 벌어온다. 40대 중반, 부자에다 미혼인 그를 노리는 사람은 많지만 보쿨스키의 마음은 웽츠키 집안의 아름다운 이자벨라에게 향해있다. 살롱의 세계에 살고 있는 오만한 이자벨라는 보쿨스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 이 사업가의 마음을 알아챈 사람들은 충고하곤 한다. 그런 식으로는 아가씨의 마음을 살 수 없어요. 덫을 놓으려면 확실히 강제해야 해요. 이에 보쿨스키는 대답하곤 한다. 지배하지 못한다면 절대적인 자유를 허용하고 싶습니다. 보쿨스키는 이자벨라를 숭배하고, 그녀의 무심함에 가슴을 끓이면서도 감정을 끊지 못한다.

보쿨스키의 어설픈 계략, 아니 구애는 이자벨라에게 닿지 않는다. 첫째, 보쿨스키는 귀족이 아니며 둘째, 그는 대토지를 소유한 것이 아닌 상점을 가진 사업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쿨스키가 이자벨라를 위해 벌이는 구애는 그녀에게 그를 ‘짝’이 아닌 집사나 어떤 기계의 부속품 정도로 인식하게 할 뿐이다. 소설은 보쿨스키가 뛰어드는 귀족의 세계에 도사린 허영과 무지, 특권의식 등을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 백작이 폴란드 사교계에서 이런 뉘앙스의 말을 한다. 푸른 피는 별 것 아니오, 그냥 수저를 잘 물고 태어난 것이지. 시대는 변하고 있다네. 폴란드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고 이해도 하지 못한다.

보쿨스키를 돕는 변호사는 그를 처량하게 생각하여 이렇게 말한다. 귀족들에게는 의지의 병이 있다네... 추진력이라곤 없는 그들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렇다면 보쿨스키라는 인물은 어쩌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일까. 젊을 적부터 보쿨스키는 의지가 대단한 인물로, 모두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대학에 입학하여 당당히 과학을 탐구하였다. 1963년 러시아에 대항한 봉기에 참여하여 시베리아 유형을 당하였고, 그 곳에서 사업을 벌여 재산을 좀 모은다. 바르샤바로 돌아와서는 오랜 친구 제츠키의 조언으로 상점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를 눈여겨본 여사장의 유혹을 거절하였으나 끝내는 혼인하게 된다. 이는 자신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다.

젊음과 사랑을 돈과 바꾸었다는 죄책감은 의부증에 가까운 아내의 집착과 함께 서서히 그를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아내가 죽고,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그를 구원한 것은 바로 이자벨라였다. 순전한 아름다움, 순수한 오만. 이자벨라의 주변을 맴돌지만 존재조차도 인식당하지 못하기를 오랜 시간, 보쿨스키는 그녀에게 구애하겠노라 다짐하며 전쟁터에서 큰 돈을 벌어온다. 이자벨라의 명예를 위해 결투를 벌이기도 하고, 그녀의 집을 크게 손해보며 구입하기도 하지만... 이는 계략조차 되지 못하는, 사랑에 발로한 어리석음일 뿐이었고 이자벨라의 변덕에 어울리느라 보쿨스키의 사업도 위태로워진다.

경제관념이 없는 귀족들은 그를 돈줄로만 여겼기에, 보쿨스키가 이자벨라를 위해 벌인 일들은 일종의 계급투쟁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자벨라의 행동들은 허영처럼 느껴지기 보다는, 그녀가 허영 그 자체로 느껴진다. 그런 세계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영어를 못한다고 그를 무시했기에 보쿨스키는 영어 과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 덕분에 이자벨라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똑똑히 알게 된다. 오랜 친구 제츠키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쿨스키를 염려한다. 보쿨스키는 소리친다. 나도 살고 싶어, 나도 살고 싶단 말이야. 나는 왜 사랑을 하면 안 돼? 이 많은 재산이 무슨 소용이야. 나를 태우면 한 줌의 재만 남겠지...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서! 라는 보쿨스키의 외침은 얼마나 공허한가. 돈 쓰는 자신을 경멸하는 보쿨스키, 비스와 강 언덕 너머의 비참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보쿨스키, 사회는 개인의 힘으로 구제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타인을 도우려는 보쿨스키를 보며 참 가슴이 저려왔다. 돌아보지 않는 상대를 향한 애타는 마음을 알기에. 눈길 닿는 곳들을 질투하다가도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현타를 맞는 보쿨스키. 나이에 맞지 않은 순수한 감정을 보노라면 이자벨라와의 나이 차이도 잊게 된다. 두 사람은 거의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자벨라가 상대의 면면을 따지는 동안 보쿨스키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도 그녀의 속성을 꿰뚫어 보았는지도 모른다. 보쿨스키가 보는 이자벨라는 뭔가 신비로운 존재로, 그 아름다움과 기품은 성상화에서 빠져 나온 듯한 분위기처럼 느껴진다. 좋은 교육을 받은 지성은 또 어떠한가. 언젠가 어떤 동화에서 진정한 공주는 일곱 겹 매트리스 아래 콩 한 알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쇠락한 저택의 기운에도 아랑곳 않는 보쿨스키... 그를 단순히 계급이라는 어떤 트로피를 얻기 위한 야망있는 사내로 볼 수는 없다. 세라 워터스의 『리틀 스트레인저』는 헌드레즈 홀로 상징되는 계급을 손에 넣으려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2차대전 이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여전히 넘을 수 없는 계급이라는 선이 느껴진다. 하물며 70년 전의 폴란드는 어떠했겠는가.

사실 보쿨스키는 귀족이다. 어릴 적부터 명철했던 그는 계급에 매달리는 아버지를 어리석다 생각하고 상업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가 대토지, 장원을 가진 귀족이 아닌 다음에야 이자벨라가 눈 하나 깜짝 할까. 그를 보며 사랑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큰 돈을 벌어 온 인물들을 떠올렸다. 에밀리 브론테의 히스클리프, 제인 오스틴의 웬트워스 대령, 피츠제럴드의 개츠비까지... 이들이 보쿨스키와 다른 점은 여자 주인공의 사랑과 애정을 한때나마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이유로 그들을 배신하였고, 그에 상처를 입어 전쟁이나 불법에 손을 담가 재산을 모아 다시 사랑을 얻기 위해 돌아온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적절하게 여주인공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보쿨스키는 이도 저도 아니다. 그는 잘생기지도 젊지도 않다. 계급도 보잘 것 없고 재산은 많지만 시내에 있는 상점을 운영하는 사업가이다. 대학에 다녔지만 중퇴했고, 귀족들이 중요시하는 교양도 갖추지 못했다. 이자벨라를 위해 벌인 일들은 그녀의 자존심을 다치게 했고, 첫 단추를 잘 못 꿴 탓인지 인상도 좋지 않았다. 그가 연애에 빠삭하거나 아니면 교묘하기라도 해서 이자벨라를 빠져 나올 수 없는 덫에 빠뜨리기라도 했다면 좀 나았을까.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과정은 정말 비참하기까지 해서, 이자벨라와 이루어지기보다는 그녀를 깨끗이 잊고 새출발하기를 바랐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랬다.

보쿨스키의 로맨스가 그려지는 동안 과거와 현재 사회는 제츠키의 회고로 메워진다. 나폴레옹을 숭배하며 1848년 헝가리 혁명에서 혁명군 측에 입대하여 전장을 다녀온 이야기, 보쿨스키의 과거 및 현재 상점이 어떻게 운영되며 사장의 평판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귀족들의 반응은 어떠한지와 같은 내용들이다. 집안에서 이자벨라의 좋은 짝이 될 것이라 여겨지던 오호츠키는 젊을 적 보쿨스키를 연상하게 하는 인물인데, 과학에 깊이 매료되어 있다. 이야기가 제츠키와 보쿨스키로 흘러가는 걸 보면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오호츠키가 아닐까 한다. 위인의 헛된 희망은 그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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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톨의 밀알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왕은철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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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한 소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조응하며 어떤 희망을 남기는, 과거와 현재의 갈등을 오롯이 담은 그런 소설.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비추었던 것에 비해 현재는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 붙들려 있는 케냐의 정치와 사회적 상황을 가늠하게 하는, 고전 소설 분위기를 품고 있는 작품... 이 소설을 읽고 난 만족감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응구기 와 티옹오의 다른 소설들이 궁금하지 않을 정도이다. 거장의 세계를 엿본 듯한 아니 맛본 듯한 그 만족감이 기묘하게도,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을 제거해버린다고 할까? 아프리카 문학, 제 3세계 문학으로 분류되겠지만 고전이라 불리는 어떤 작품과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작품이다.

1952년 시작된 무장봉기 마우마우 운동으로 1959년까지 비상사태가 선언된 케냐. 식민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 생활을 했던 인물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1963년을 배경으로 한다. 독립, 나라(부족)의 존망 앞에서 각자는 결정을 내린다. 그 결정은 곧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이었고 원하든 원치 않았든 오롯이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저항 운동의 상징인 키히카는 연인을, 무고는 양심을, 기코뇨는 동지들을, 카란자는 조국을, 뭄비는 배우자를  배반한다. 이러한 배반은 소명 때문에 혹은 사랑 때문에, 흥분에 따른 순간의 충동 때문이었고 그 결과는 역사의 흐름 속 개인의 생에도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과연 그들을 배반자라 손가락질 할 수 있을 것인가?

키히카는 말한다. ‘노예한테 삶이란 게 있을까.’ 기코뇨는 얘기한다. ‘나 자신의 자유를 살 수 있다면 케냐 전체라도 백인에게 팔아넘겼을 것입니다.’ 독립의 결실을 맛보는 자들은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 식민 통치는 주체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배경을 달리한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들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프랑스의 동화 정책을 생각하는 톰슨은 어떠한가. 옥스포드 출신의 역사학자인 그는 자신을 아프리카의 ‘프로스페로’처럼 여긴다. 뒤떨어진 문명을 도덕적으로 갱생하여, 사회와 문화를 재교육함으로써 그들을 해방시켜주겠다는 오만한 생각. 당시 지배층 대부분을 지배하는 생각이었을 터이다.

자치 대장으로서, 식민 당국의 앞잡이었던 카란자는 자신을 백인 힘의 일부로 여겼다. 여인들을 욕보였으며, 형제들의 피로 몽둥이가 흠뻑 젖었다. 카란자는 왜 배반했던가?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지만, 배반의 과정과 결과를 자신이 즐겼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린드 박사는 비상사태 동안, 집에서 일하던 요리사와 남자들에게 윤간당하고 키우던 개도 잔인하게 죽는다. 이러한 장면은 존 쿳시의 『추락』을 떠올리게 한다. 남아공 독립 이후, 시골에 정착한 루시 역시 흑인 남성들에 윤간을 당하고 개도 죽는다. 루시는 이를 이 나라에 머무르는 대가처럼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린드 박사 역시 새로운 개를 키우며 케냐를 떠날 생각이 없다.

식민 통치를 했던 인종과, 식민 통치를 받았던 인종의 시각은 다르다. 『추락』과 『한 톨의 밀알』의 시각 차는 거기에서 기인한다. 서로를 두려워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한 톨의 밀알』에서 본국으로 송환될 톰슨은 아주 가차없는 인물이었으나, 독립을 앞둔 케냐인들의 열망에 두려움을 품는다. 어쩌다 위대한 제국이 이렇게 되었지? 못생긴 백인 노처녀, 린드 박사를 본 순간부터 증오했다는 코이나는 주인을 짓밟았지만 여전히 건재한 그녀를 보며 불안함을 느낀다. 마치 그들의 땅에 늘러붙은 제국을 상징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흑인 여성에 대한 폭력은 집단적으로 서술되지만 백인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개인적이며 상징적이다. 이마저도...

키히카는 스코틀랜드 교회 학교에서 여성의 할례가 야만적이라는 선생에게 주장한다. 그런 말은 성경에 없으며 잘못되지 않았다고. 모계사회였던 케냐가 부계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은 ‘임신’으로 여성들을 땅에 묶어둔다. 숭배하던 여성을 타락했다 점찍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에서 배부른 여성은 새로운 탄생과 희망이라는 상징을 남긴다. 여성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신격화야말로 억압일 터이지만... 이러한 장면들은 독립국가들이 전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다시 돌아봐야할 자취들로, 기코뇨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장면들과 함께 새로운 여지들을 남긴다.

키히카라는 저항 정신을, 조국 케냐를 배반한 이는 누구인가? 지난 과거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벌을 받아야 할 배반자를 찾는 것. 이 작품을 관통하는 질문은 양심 선언, 어떤 숭고한 희생과 용기로 막을 내린다. 장거리 경주를 응원하던 열망, 사람들로 가득 찬 들판은 텅 비었으며 양심 선언을 한 인물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케냐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던 조모 케냐타. 그는 물러간 식민 통치를 이어받아 케냐인들을 억압한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응구기 와 티옹오는 ‘하람베’, 화해와 상생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길지는 않지만 놀라울 정도로 꽉 차 있는 작품이다. 직접적인 묘사는 피하면서도 충분히 그 고통과 절망이 묘사되고 있으며 캐릭터들이 제시되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면들은 클래식하다. 다소 낯선 이름들에 익숙해지면 이제껏 읽어 온 작품들을, 우리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역자 해설을 참고하면, 이 작품은 조지프 콘래드의 『서양인의 눈으로』를 상호텍스트로 활용한 작품이라 한다. D. H. 로런스의 영향을 받았고, 응구기가 영어로 쓴 마지막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름을 제임스 응구기에서 기쿠유 식인 응구기 와 티옹오로 바꾼 후로는 기쿠유 부족언어로만 글을 쓰고 있다고. 이 다음에는 포스트 식민시대를 대표한다는 작품, 『피의 꽃잎들』을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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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11-08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박경리문학상...인가 받았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거의 완벽한 소설˝이라고 하시니, 확 당깁니다.^^ (글은 나중에 제대로 읽을게요. 요새 통 뭔 글이든 안 읽힙니다.)

에이바 2016-11-08 17:32   좋아요 1 | URL
흠결없는 작품이에요. 서양 고전 읽는 기분이었고 왠지 모르게 노벨상은 못 받을 것 같더라고요... 다음에 생각나면 한 번 보셔요.

AgalmA 2016-11-08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쿳시가 그 땅의 문제들을 먼저 캐치해 여러 작품을 써서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일까요. 존 쿳시의 여성 화자와 시점도 워낙 탁월했죠.
응구기 와 티옹오 소설 읽고 존 쿳시와 비교해 보고픈 충동이 생기네요~

에이바 2016-11-08 18:50   좋아요 1 | URL
쿳시랑은 좀 다르게 느껴지고요... 음 아무래도 이 작품이 1960년대에 쓰인 것도 있고, 작품들은 이 소설을 원형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느낌이래요. 쿳시 번역한 왕은철 교수님 역이고요. 아갈마님께서 응구기와 쿳시 비교해주시면 넘 좋죠 ㅎㅎ 아무튼 읽는다면 피의 꽃잎들 한 작품만 더 읽지 않을까... 한 권의 소설로 족하기는 오랜만이에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요.

AgalmA 2016-11-08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60년이면 존 쿳시보다 더 앞서 목소리를 낸 건데....흠. 존 쿳시가 작법에도 만능이라 라이벌로는 어려운 상대죠. 두 작가 나이대(티옹오가 2살 더 많네요)도 비슷하고, 같이 살아온 시대와 여건 생각하면 여러가지로 비교 지점이 있군요.
왕은철 교수님 번역이라면 더 신뢰가네요.
암튼 티옹오 작가도 한 권으로 읽고 말 작가는 아니군요.

존 쿳시 얘기 먼저 꺼내신 에이바님이 비교분석 먼저 하세요~ㅎ

에이바 2016-11-08 22:02   좋아요 1 | URL
1967년에 출간된 건데... 그쵸 남아공이랑 케냐, 서로의 인종이 달라서...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대한 권위를 무시할 수 없단 생각도 들고 또 응구기는 케냐의 역사를 겪어낸, 핍박받은 지성인이기 때문에 달리 느껴져요. 쿳시는 이천년대 초반에 몇 작품 읽었는데 가물가물하네요. 정확히 기억나는 건 추락 정도... 쿳시가 폴 오스터랑 주고 받은 서간집 번역된 거 좋더라고요. 다음에 쿳시도 다시 찬찬히 읽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ㅎㅎ 늘 그렇듯 저는 읽기 계획을 또 세워 보겠습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