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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린 지도

 

카프카의 수식어를 달고 있는 작가 중 가장 신뢰할만한 작가. (모옌의 글을 읽지 않았기 대문에 일단 가장 신뢰할 수 있다고 해두자) 모래의 여자는 내가 다시 일본 문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준 문학인 동시에 현대일본문학을 읽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 

 

신경숙, 김연수가 아닌 다른 이가 그리는 1980년은 어떠한가.

 

낮은 데로 임하소서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꼭 사게 되는 저자의 책이 있다. 폴 오스터, 사사키 아타루, 신형철의 책이 그에 해당한다. 그들의 글은 장르를 불문하고 있음 자체로 나를 흥분시킨다. 그 중 이청준의 글은 단연 최고다. 단언컨대 이청준 전집은 문학과 지성사의 기획 중 가장 훌륭한 기획이다.

 

결괴 

 

범죄, 김연수의 추천, 그리고 히라노 게이치로

 

연애 소설

 

그 남자의 연애사가 3개월 전에 나왔다. 나는 연애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을 잘 읽지 않는데 그 남자의 연애사는 오랜만에 즐겁게 읽은 책이었다. 그런데 연애소설을 읽은 누군가가 올해의 최고의 소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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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혜성처럼, 이라는 관용구가 이렇게 잘 들어맞는 작품이 있었을까. 살인 사건, 문학, 실종의 기묘한(그러나 익숙한) 조합. 근래 나온 책 중 가장 읽고 싶은 작품. 




뮬 


 이야기의 집중할 수 있는 정도는 그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디테일이라고 생각한다. 얼만큼 사실적인가보다 설계된 상황에서 얼만큼 믿게 할 수 있는가를 만들어내는 디테일. 뮬은 작가도, 출판사도, 번역자도 처음 접하는 것이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책. 




진저맨 


 달려라 토끼, 호밀밭의 파수꾼, 찰스 부코스키의 계보를 잇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느 기성 작가의 책과도 '다르다'고 하니 기대할만하다. 언제나 불안을 형상화하는 책들은 기대치만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읽고 싶은 이유. 



세번째 집 


 무산일기를 보면서 우리는 왜 그들을 핍박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스스로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이 가슴아프기보다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슴아픈 것이 더 슬펐다. 결국 동어반복이지만, 우리의 시선이 그들의 삶을 그렇게 만들었기 떄문에. 어쨋든, 무산일기가 영화적으로 뛰어난 이유는 우리 모두 소수자들을 돌봐요, 라는 도덕적 정언명령 비슷한 것을 강요하지 않고 단지 그들이 여기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번째 집 역시 그럴거라 기대하며... 




밤이 지나간다 


 이상하게도 '밤'이 제목에 들어있으면 장르가 어떻든 그것에 끌리게 된다. 밤이라는 어감이 주는 매력이 개인적으로 어마어마한데, 그것은 내가 밤을 좋아해서인지 (지금까지 봤던) 제목에 밤이 들어가는 작품들이 모두 만족스러웠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쨋든 밤과 편혜영의 조합은 김영하와 살인의 조합보다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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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은 나에게 죄책감의 달이다.

평소 한국문학을 즐겨보지 않는 나를 추긍하듯, 엄청난 책들이 쏟아져 나온 달.

 

 

 

 

 

 

 

 

 

 

 

 

 

 

 

 

야구란 무엇인가

 

정말 궁금한 것은, 광주와 야구를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왜 광주를 이야기하면서 야구가 나오는가? 읽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읽어지고 싶어지는 책.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부디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기를 바라며..

 

 

 

 

 

 

 

 

 

 

 

 

 

 

 

살인자의 기억법

 

솔직히 말해서 그를 즐겨읽지는 않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와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옥수수와 나, 그리고 엘레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정도. 그런데 정말로 이번 소설이 기대되는 이유는 연쇄살인과 알츠하이머라는 조합 때문일까, 아니면 이적이 추천했다는 사실 때문일까.

 

 

 

 

 

 

 

 

 

 

 

 

 

 

 

 

엄마도 아시다시피

 

아직 생강도 못 봤는데 벌써 신간이 나왔다니. 3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엄마도 아시다시피를 읽었다. 주인공이 흘리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좋았다. 그의 이상한 집착도. 그런 이야기가 7개나.

 

 

 

 

 

 

 

 

 

 

 

 

 

 

 

밤의 첼로

 

누군가가 나에게 책을 고르는 자신만의 방법을 말해주었다. 책은 아무 정보 없이, 그저 제목이 매력적인 것을 읽어야 한다고. 이번에 그 누군가의 방법을 적용해본다.

 

 

 

 

 

 

 

 

 

 

 

 

 

 

 

모래그릇

 

일본의 장르문학이 인기있는 이유가 세이초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다자이 오사무와 동시대에 살았음에도 그와는 전혀 다른 문학을 했다는 것도 그를 읽고 싶은 또 다른 이유. 가장 장르적임에도 장르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세이초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을 궁금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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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영화의 공식이 깨졌단다. 어느 잡지의 헤드라인이었다. 문제는 천만 관객의 영화가 공식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누구보다 먼저 아니오라고 대답할 영화기자들이 왜 이런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걸었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천만 영화라는 신화에 코미디-천만영화라는 새로운 신화를 덧붙인 것뿐이니까. 


그런데 그 기준은 왜 항상 천만이 되어야 하는가, 이다. 어떤 영화가 극장에 걸렸을 때 관객이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가장 큰 것은 투자자일 것이다. (물론 감독, 배우, 스텝 등도 같은 바람일 것이지만 그 바람은 질적 차이가 있을거라 믿는다.) 우리는 왜 그들에게 동화되어 천만 영화에 열광하는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관객의 수는 단순히 관객의 수만 나타낼 뿐이다. 그것은 어떤 것의 비유이거나 상징일 수 없다. 천만이라는 숫자는 '많이 보았다'라는 의미 이상의 것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한 가지 더 '그 영화는 돈을 많이 벌었다'라는 것. 


어떤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고 해서 그 영화가 좋다, 라고 말할 순 없다. 그 호/불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어떤 절대적 기준도 없기 때문이다. 관객의 수는 단순한 양화이다. 마치 성적표가 숫자의 평균 분포로 좋은 학생 / 나쁜 학생의 기준을 가르는 것 처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는 영화도 관객 수에 따라 그 행복이 결정된다면 이보다 더 한 아이러니가 어디있겠는가? 


관객의 수는 관객을 제외한 모든 영화적 환경의 조건을 결정짓는다. 감독은 또 다른 영화를 찍을 수 있고 제작자는 좋은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될 것이며 배우들이 일자리를 잃을 걱정을 당분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지 관객들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것을 파시즘의 징후라고 보는 것은 억지 중의 억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를 선택하는 것에 있어 그 영화의 관객수가 절대적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겠지만 나라도) 한 번 상기하고 가자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또 관객의 수로 영화를 판단하는 저 위에 계신 배급사/투자사 분들은 그만 좀 하라고, 귓 속에 얘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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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로서의 예술? 권리를 획득하는 예술이 모든 것 위에 선다? 선행의 옹호자로서의 예술? 누가 너에게 이런 걸 가르쳤나? 누가 너에게 예술이 선전문구라고 가르쳤지? 누가 너에게 예술은 '민중'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지? 예술은 예술에게 봉사하는 거다. 그렇지 않은 예술은 사람의 관심을 끌 가치조차 없어. 주커맨 군, 진지한 문학작품을 쓰는 동기가 무엇인가? 물가를 통제하는 적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서? 진지한 작품을 쓰는 동기는 진지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야. 사회에 반역하고 싶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말해주지. 잘 쓰는 것이다. 잃어버린 대의명분을 끌어안고 싶어? 그럼 노동계층을 대신해서 싸우지 마라. 그들은 잘 해나갈거다. 노동자들은 플리머스에서 그들 심장에 들어갈 내용을 가득 채울 거야. 노동자가 우리 모두를 정복할 거다. - 생각없는 값싼 감상이 넘쳐흘러 이 속물 같은 나라의 문화적 운명이 될 거다. 우리는 머지않아 노동자와 농부의 정부보다 더 나쁜 것을 갖게 될 거다. - 농부와 노동자의 문화를 갖게 될 거야. 잃어버린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고 싶나? 그럼 '말(言)'을 위해 싸워라. 과장된 말, 고무시키는 말, 이건 좋고 저건 싫다는 말, 억압 받고 짓밣히는 사람들 편에 선 네가 보다시피 훌륭하고 존경스럽고 인정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광고하는 말이 아니다. 이 땅에 사는 빌어먹을 소수의 지식인에게 너는 말의 편이라고 알려주는 단어를 위해 싸워라! 네가 쓴 이 극본은 쓰레기다. 끔찍하고 짜증난다. 이건 조잡하고 원시적이고 단순하고 선동적인 쓰레기다. 단어들로 세계를 흐리고 있어. 너의 고결함은 저 하늘 높은 곳까지 악취를 풍긴다.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망보다 예술에 더 사악한 효과를 미치는 것도 없다. 관념론의 끔찍한 유혹이지! 무엇보다 너는 네 과념론뿐만 아니라 너의 미덕, 너의 부도덕을 지배할 줄 알아야 한다. 너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해 심미적인 통솔력을 갖춰라. - 너의 분노, 너의 정치, 너의 슬픔, 너의 사랑! 자리 잡고 설교를 하자면, 그리고 윗사람으로서 너의 관점을 바라본다면 너는 예술가로서 가치도 없고 우스꽝스럽다. 왜 이런 선언문을 썼나? 네가 세상을 둘러보고 '충격'을 먹었기 때문이냐? 세상을 둘러보고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야? 민중은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자기감정을 둘러댄다. 그들은 즉시 느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충격'이나 '감동'을 주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다. 가장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지. 주커맨 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충격은 항상 가짜'다. 선언문. 선언문에 쓰일 예술은 없다! 그러니 자네의 사랑스런 쓰레기 작품을 들고 이 사무실에서 나가주게."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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