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제목을 연관 지어 얘기해보자면, 그녀는 불가피하게 물고기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제목이 나타내고 있는 중첩된 비유는 언제나 늘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왜 그녀가 물고기일 수밖에 없는지, 물고기는 무엇인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물은 어떤지, 그리고 왜 ‘황금’인지를 생각하는 것. 이것이 이야기를 항상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물고기>

 

 그녀는 이름도, 고향도, 부모도 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누군가에게 건네진다. 그리고 그 ‘건네짐’은 삶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이 건네짐의 물살에 의해 이동하게 되는 그녀의 삶을 물고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대부분 그녀의 행동에는 의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의 삶에서 도망가고 따라가고, 무언가를 배우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머무는 행위를 하게 만드는 숨은 주체는 ‘누군가’이다. 그 ‘누군가’는 단 한번도 ‘그녀 자신’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물고기가 물이 없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것들, 예컨대 폭력, 운명, 사랑, 배움 등이 그녀를 가두는 동시에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좀 더 확장해보자. 소설의 화자인 그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특수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그녀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것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가? 우리도 어떤 물살에 떠 밀려다니는 물고기가 아닐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소설 속의 환경과 달리 표면적으로 우리의 의사를 결정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위의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물고기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면, 왜 그녀는 ‘황금’ 물고기인가?

 

<황금 물고기>

 

 물고기를 수식해주는 황금이라는 형용사는 화자의 모든 상황을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황금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첫 번째로 그녀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피부색. 이 피부색으로 인해서 연쇄적으로 다른 특징들을 갖는다. 그녀가 백인 사회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희귀’해진다. 그리고 또한 ‘독특’해진다. 백인 남성 혹은 여성들에 의해서 그녀는 관계를 맺는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이 된다. 그녀가 끊임없이 하는 집안일도 백인들이 흑인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형성한다. 이것이 황금이 나타내고 있는 역설적인 진실인 것이다. 두 번째로 특징지어 질 수 있는 것은 ‘빛남’이다. 이것은 같은 흑인이 그녀를 바라보는 하나의 감정인데, 그녀는 다른 의미에서 그 흑인들과 ‘같아’질 수 없다. 예를 들어 하킴에게 그녀는 공부를 해서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시몬에게는 귀가 멀었다는 이유로 뛰어난 가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녀를 소유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성공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백인 사회에서 흑인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만들어낸다. 보편적으로 백인들에게 흑인은 단지 소유물일 뿐이며 이것은 역사가 형성해온 하나의 폭력이다. 그리고 흑인들에게는 ‘다른’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과 같은 문화 안에서 같은 방식으로 좀 더 우월해지는 것을 선택하게 하는 또 다른 폭력을 발생시킨다. 하킴이 박물관에서 비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흑인들의 문화가 백인들에 의해 전시된다는 사실이다. 이 전시 행위는 흑인의 문화가 전시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보다 백인들에 의해 규정되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절망적이다. 그런데 하킴은 미국에서 배우며 성공을 꿈꾼다는 점에서 스스로 또 하나의 조각상이 되려 한다. 비교적 지식인으로 대변되는 하킴 역시 비판적인 동시에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을 통해 백인-흑인 사이에 뿌리내린 인식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준다.

결국 이 황금이라는 형용사는 정확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로서의 황금을 대변한다. 그것을 둘러싼 폭력과 허황된 꿈의 상징으로서 황금 말이다.

 

<귀환 혹은 반복>

 

 결말 부분에 작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두 가능성은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어 하나의 역설을 이룬다. 그녀의 귀환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데 비해 결국 그녀는 그곳에서 장이라는 백인 남성에게 의지한다는 점에서 그녀가 아직도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녀가 출산을 준비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근원을 찾았음을 알리는 동시에 그녀의 아이도 역시 그녀와 같은 운명을 반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알 수 없다. 작가의 말처럼 ‘부족의 시대를 벗어나 사랑의 시대’로 들어서는 것인지 아니면 끊임없는 폭력에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그책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의 재현일 뿐이다.


 1760년. 마을에서 힘들게 밭을 개간하던 사람들은 어느 날 영문을 모른 채 쫓겨나게 된다. 그들이 밭을 일구는 대신 양을 키우는 게 더 땅을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지주들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농사를 짓던 이들은 떠돌며 농장 노동자가 되고 어떤 이들은 공장 노동자가 된다. 우리는 이것은 인클로저 운동이라 배웠다.

 1811년. 영국 노팅엄의 직물공업지대. 사람들이 공장으로 몰려간다. 그들은 광기어린 몸짓으로 기계들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눈에는 기계들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진보가 아니라 자신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그래서 착취해버리는 괴물로 보였다. 그들은 노동하기 위해, 기계를 파괴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배웠다.

이 두 개의 시민운동은 자본이 인간을 대할 때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알려준다. 자본주의라는 소용돌이에서 살아나려면 우리는 항상 쫓겨나는 자보다는 쫓아내는 자가, 기계를 파괴하는 자보다는 그 파괴에 분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항상 인간을 대할 때의 제 1 원칙은 합리성이 되어야 한다.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알랭 바디우는 말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 자본 자체가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이 책은 자본 안에서 윤리를 지우고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너무나 절박하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1997년 IMF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절벽으로 몰아붙였다. 구조조정의 다른 말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네가 죽어야 되는 것이다. 문제는 수많은 ‘네가’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결국 전자의(살아남는) 우리와 후자의(죽어야 되는) 우리는 절대로 같을 수 없다. 이것은 현재 1%와 99%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액스의 주인공 버크는 물론 후자이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더 일 할 수 있지만 유행처럼 번지는 인원감축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3년간 무직으로 지낸 버크는 하나의 결심을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자를 죽이는 것. 이것은 그의 생각이 아니다. 그는 이미 한 번 당한 피해자이다. 여기에는 윤리와 생존의 선택이 있다. 윤리는, 생존이 보장 된 후에 갖출 수 있는 인간의 교양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안에서는.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과 같은 처지인 실업자를 죽이는가? 왜 자신을 자른 임원을, 사장을, 자본가를 죽이지 않는가? 문제는 간단하다.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실업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자신과 처지가 같은 (그러나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판단되는) 실업자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일할 곳에서 운이 좋아 일을 대신하고 있는 한 명의 노동자만 죽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좀 더 합리적이다. 합리적으로 살인하기. 이것이 자본주의의 생존 법칙이다.

 그렇게 그는 한 명씩 죽여 나간다. 운이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지 의문도 품지만 그 의문 역시 살인이 반복될수록 천천히 정당화된다. 나의 생존과 타자의 죽음을 저울질 할 때 더 무거운 쪽은 당연히 나의 생존이다. 이 정당화는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왜냐하면 그가 걸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단지 윤리의 문제로만 다뤄지고 법/불법의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6, 7번의 살인 후 안전하게 취직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이 이야기가 동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화 속 세상에서만 권선징악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현실의 조각일 뿐이다.


 말 그대로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해고는 살인이다, 라는 말은 진실이다. 그리고 해고를 한 자의 살인(즉, 해고)과 해고를 당한 자가 다른 자를 살해하는 것(말 그대로 살인)은 역시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법의 문제다. 걸리지 않으면 처벌받지 않는다. 더 똑똑하고, 더 빠르고, 더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 자이다. 나는 언젠가 이 소설의 텍스트가 실재의 세상에서 똑같이 재현된다 해도,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이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 자본 자체가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
디디에 드쿠앵 지음, 양진성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사회의 총체적 위험만이 철학자의 조용한 잠을 방해하고 

그를 침대에서 끌어낸다. 그의 창문 아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목을 벨 수 있다. 

살해당하는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양쪽 귀를 두 손으로 막기만 하면 그만이다. 


- 장 자크 루소 


 누군가가 이런 말을 내게 해줬다. 책을 볼 때 첫 페이지에 인용구가 있다면, 그 인용구가 책의 전부다. 과연 그런가?. 적어도 제노비스에서는 그렇다. 루소를 인용한 드쿠앵은 이 두 문장으로 책의 전부를 표현했다. 루소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보인다. 그 비유가 너무나 적확하기 때문에. 


 드쿠앵은 글 전체에서 제노비스를 죽인 모슬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38명으로 추정되는 방관자, 또는 살인 방조자이다. 어느 평화로운 마을의 아파트에서 한 여자가 30분 동안 잔인하게 살해된다. 그녀는 끊임없이 소리쳤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위해 밖을 나와 도움을 주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녀가 죽기 전까지는. 만약 책이(혹은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 위의 나열된 사실이 전부라면 이 책은 단순한 기사, 가십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보다 좀 더 나아가 진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모두들 무언가를 보거나 들었고, 모두들 '이제야' 무언가 할 말이 있었다."

하나의 문장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 문장에서 '모두들'과 '이제야'의 관계는 소설 전체를 꿰뚫는 핵심으로 작용한다. 그 모두들은 38명의 방조자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뉴욕 타임스의 기자 마틴 갠스버그, 저자, 그의 아내 길라를 포함한 우리 모두일 것이다. 모두들은 38명을 강조하는 대명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의미의 모두들이다. 저자는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 같다. 불행하게도 그는 너무나 강력하게 그들을 비판하는데, 저자는 그들과 자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저자와 38명의 목격자를 나누고 있는 경계는 그 장소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만약 내가 거기 있었더라면' 이라는 질문에 절대로 옳은 답을 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이 사후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38명 중 재판의 참여한 자들의 증언과 마틴의 기사와 드쿠앵의 소설책은 정확한 동일성을 같는다. 그들의 말, 글, 책은 '이제야' 라는 단어에 묶여 사후적으로 규정될 뿐이다. 



 에필로그의 실험 결과(방관자 효과 또는 제노비스 신드롬)은 38명의 방관자들이 모즐리처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다. %로 나누어지는 책임의 분산이 실제 상황에서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지만 적어도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과 공범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드쿠앵의 말처럼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이다. 

 에필로그가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는 그 죄의식을 더욱 더 강화시켜 준다. 에보니 가르시아의 죽음, 이 죽음은 우리가 이전에 겪었던 일을 교훈삼아 반드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 잔인한 일을 겪을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 방관자 아님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지독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보거나 들은 순간,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38명의 죄를 벌하려는 것도 아니고 모슬리가 사형선고를 받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의도도 있겠지만) 다시 한 반 그런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그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알 수 없는 마비 증상에 사로잡힌 목격자들의 침묵 속에 사라져간 첫 번째 희생자는 키티가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희생자도 아니었다. 키티 제노비스 신드롬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