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온 사나이
벨라 타르 감독, 틸다 스윈튼 외 출연 / 무비플렉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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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했다. 엄청나게 지루했다. 문득 시계를 보니 2시간이 지나가있었다. 벌써? 

영화에서는 대사가 나오고 있었다. "제가 어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대충 이런 대사였던 것 같다. 어제라고? 아직도? 


 로베르 브레송에 대한 강의에서 김성욱 프로그래머님이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브레송은 리얼리즘의 재현을 거부했다. 그는 영화가 단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재구성하려고 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 이런 말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런 식으로 들렸다.) 벨라 타르는 브레송과 정반대의 지점에서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현실의 재현" 이라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을 파편화하는 방법이 있는 반면(브레송) 그 재현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가 우리의 행동 - 집을 나서서 목적지에 가는 행위, 술을 마시는 것, 시선 등 보통 영화에서 생략하는 것 - 을 해부학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방법(벨라 타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영화는 런닝 타임이 150분이나 될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150분이다. 보통 영화에서 어떤 사건을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맞추는 것에 반해 이 영화는 사건의 시작부터 사건 이후의 시간까지 모든 시간을 다 보여준다. 불필요하다, 라고 관객이 느낄 때까지. 


 초반에 목격 스퀀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사에서 어느 감독도 벨라 타르처럼 그 장면을 찍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 컷으로 스퀀스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어느정도 지루함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그 지루함을 정확히 일상적인 것임을 말해주는 피사체도 함께 보여준다. 우리는 영화를 우리의 삶과는 멀리 떨어져있는 '주인공의 삶'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극장에 간다. 그곳에서는 기쁨도, 슬픔의 극복도, 쾌감도 발생하지만 살인도, 강간도, 신성 모독도, 죽음도 발생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로에 죽어있는 비둘기의 시체를 불쾌하다고 생각하지만 프레임 안에 있는 사람의 시체는 불쾌함보다는 (영화에 따라) 쾌락, 고통, 슬픔의 감정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벨라 타르의 영화에서는 '특별한 사건'들보다는 '일상적인 반복'이 주를 이룬다. 이 영화를 보고 지루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목적없는 목격. 누구도 아무 이유없이 타인을 관찰하지 않는다. 사랑, 증오, 관심이라는 감정적인 렌즈를 통해서만 우리는 '재미있게' 어떤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벨라 타르의 영화는 영화의 목적 자체를 전복시킨 것을 수도 있다. 


 언젠가 벨라 타르의 영화(토리노의 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일주일의 반복을 보여주면서 2시간 20분 내내 지루함을 유발하다가 마지막 10분으로 생각지도 못한 충격을 준 영화였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문득 아, 나는 정말 감정을 소모하는 방법을 몰랐구나. 라는. 왜냐면 나는 극장에 갈 때(혹은 책을 볼 때, 친구를 만날 때, 연인을 만날 때, 사람들을 만날 때, 밥을 먹을 때 등등) 항상 즐거움만을 생각하고 행동한다. 고통,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지루함까지)은 즐거움을 목적으로 했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부차적인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벨라 타르의 영화를 보면 누구나 지루함을 돈 주고 경험할 수 있다. 억울하다고 느끼기 전에, 먼저 반성할 것. 나는 왜 즐거움'만을' 위해 영화를 보고 있는가? 말도 안되지만, 어쩌면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어떤 한계가 있어서 계속 그곳에만 물을 주다보면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술 영화라는 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영화에는 예술이 없다. 어쩌면 모든 영화가 예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기준도 세우고 싶지 않고 누군가의 기준에 따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나에게 좋은 영화, 나에게 나쁜 영화만 있을 뿐이다. 어떤 점에서 런던에서 온 사나이는 나에게 좋은 영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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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 0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vbelt 2014-08-17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성욱 프로그래머님의 해설은 언제나 좋지요:)
바이바이몽키 저도 보고싶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이미 지나갔더군요 부럽습니다 ㅠ
도발적, 인 수식어를 가진 감독 중 요즘 가장 관심있는 사람은 고다르인데 언제 한번 아트시네마에서 특별전이나 해줬으면 좋겠네요
 
크랙 캐피털리즘 - 균열혁명의 멜로디 아우또노미아총서 39
존 홀러웨이 지음, 조정환 옮김 / 갈무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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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캐피털리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본, 자본은 항상 나에게 비현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만질 수 없기에 추상적이며 어쩌면 형이상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것으로의 자본이 실재의 사물을 사고 팔 수 있는 것, 더 나아가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것들까지 가치 안으로 포섭되게 하는 것. 지금의 자본주의가 아니었던 시절부터, 말하자면 금세공상에서 처음 예탁증서를 발급해주었던 시절부터 자금은 그저 종이 위에 쓰여 있는 허상의 불과했다. 실제로 금고에 있는 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금이 유통되었고 금고에 있는 금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저 상징으로서의 금이었다. 그것들은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그 인정은 어느새 실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창조는 곧 자본에 의한 종속이다. 은행에서 유통하는 자본의 시스템은 태생적으로 불공평하다는 것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텐데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지 않는가? 언제부터 우리의 삶이 종이쪼가리에 종속되었으며, 언제부터 우리가 그것에 의해 감정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이미 상황은 너무 악화되었고 어쩌면 되돌릴 수 없다, 라고 애기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로 공산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혁명으로 자리 잡음과 동시에 다시는 시도하지 말아야 할 이데올로기가 됐으며 자본주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극복할 것처럼 변화했다. 그 변화는 언제나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내포했지만 기대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현실적인 대안은 존재하지 않고 언젠가 도래할 미래혁명 말고는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인들처럼 현실의 고통을 묵묵히 참으며 버티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지젝의 추상적인(이해하기 어려운) 제안과 유토피아적 넋두리>


 두 가지의 제안이 있다. 하나는 지젝의 제안. 그의 '실패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대한민국에 살기 때문에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던 나에게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준 제안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의 글은 너무 어렵다.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나에게는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라 너무 철학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제안으로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의 프레데리크 로르동이 말하는 하나의 대안이다. 그의 칼럼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써 코뮤니즘 밖에 떠오르지 않던 나에게 자본주의 안에서 어쩌면 새로운 자본주의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만큼. 그러나 매력이 큰 만큼 실현가능성은 낮아진다. 그가 말하는 사회는 그저 하나의 공상으로 존재하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나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그래서 조금의 부담은 감수 할 수 있지만 삶을 포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존 홀러웨이의 균열혁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아니오, 우리는 하지 않겠소'에 대한 불가항력으로써의 바틀비와 슈퍼트램프 또는 순수성의 문제>


 조금 과장을 해본다면, 자본에 온 몸으로 대항하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우선 허먼 멜빌의 바틀비는 '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월가에서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을 택함으로써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의 언행은 이해 불가능하다. 그의 선택하지 않음은 자본에 대항하는 반-자본으로써 저자가 말한 행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는 인 투 더 와일드의 슈퍼 트램프, 즉 일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바틀비보다 조금 더 나아가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나서고 타인에게 그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이것 또한 행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책을 읽고 바로 떠오른 이 두 인물은, 그러나 결말이 그리 좋지 않다.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굶어죽거나 독사한다. 이것은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지만, 어쩌면 자본에 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또 다시 자본으로 편입되어버리는 동일화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패배주의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성의 문제이다. 그들은 결코 자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비자본적인 순수성을 가지고 있을 때 더욱 빛난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순수성은 없다. 순수성이 있다면, 균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무인도에 사는 것이 아니며 좋든 싫든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한다. '우리의 균열들은 순수한 균열들이 아니다. 우리의 존엄은 순수한 존엄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단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단절은 여전히 그것의 모반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가 뭔가 다른 것을 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자본주의의 모순들은 우리의 반란 내부에 그 자신을 재생산한다. 우리가 아무리 반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순수한 주체들이 아니다. 자유화의 공간이자 고통스런 파열로서의 균열들은 우리 내부조차도 횡단한다."


<중요한 자기 결정의 탐구, 자본과 비대칭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균열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위이다. 우리는 균열을 일으킬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더 이상의 추상노동을 거부해야 한다. 추상은 개별적 예들에서 하나의 동일성을 추려내(추) 사물의 특징을 그 동일성으로 규정(상)하는 것으로써 간편하게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상은 필연적으로 개별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며(동일성이 중요시되면서 차이들이 제거됨으로써) 동시에 동일성의 강제를 만들어낸다. 이 강제는 차이를 언급한다는 자에게 몰상식, 비상식적이라는 비난을 가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폭력의 양상이다. 추상은 이렇게 이중의 폭력으로써 작용한다. 노동은 초역사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의식적인 삶-활동으로, 구제적 행위로 돌아갈 시간이다.”


<보다 나은 가능성을 위한>


 여기에 하나의 전환이 있다. 노동을 위한 투쟁과 노동에 대한 투쟁의 차이점.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과 자본주의 만들기를 그치는 것. 이것은 이 책에서 내가 느낀 가장 값진 경험이고 이론이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사실 그렇기에 자본에게 속고 있었던 것을 저자는 정확하게 지적한다.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은 노동이다. 그렇기에 해고를 위한 투쟁 -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 우리에게 일할 시간을 달라’ - 의 형식은 반-자본이라기보다 자본적이다. ‘우리는 노동력을 팔아 자본을 만들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일거리를 달라.’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반-자본이라는 것은 아니다. 균열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일을 할 것이다.’ 혹은 ‘아니오. 당신이 바라는 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오.’ 노동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투쟁. 이 차이는 크다.

 노동이 자본을 만드는 것이라면, 결론적으로 자본을 만드는 것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하는 우리이다. 이 사유가 매력적인 것은 자본에 대항하는 행위는 우리 앞에 서 있는 거대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절망한 나머지 희생적인 영웅을 그리며 미래의 혁명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 그저 우리가 노동하기를 멈추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자본을 만드는 것을 멈추기만 하면 된다. 저자는 그렇다고 그게 혁명이 쉬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현실을 과장할 필요도, 왜곡할 필요도 없이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 각자의 실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단지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단지 창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부하고 - 창조하는 것. 이것이 현실에서 조금씩 나아가는 방법이다.

<다가올 미래>


 ‘균열이 확장되어 거대한 금이 되었을 때, 차가 더 이상 다니지 못할 정도로 도로에 잡초가 무성해졌을 때, 오게 될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 질문은 분명히 멍청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어떤 것(자본주의를 대체한 어떤 것)으로 존재함으로써 동사적 행위에서 다시 명사로의 흡수, 동일화 과정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균열을 일으킨 후에 오는 세상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어떤 세계’ 단순히 공간적인 것만을 지시하고 있는 반면, ‘어떻게’ 라는 질문은 공간과 시간 그것의 존재 자체에 질문들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이나 다가올 미래에나 중요한 것은 새로운 공간의 창출이 아니다. 창조하기- 이다. 가능한 세계를 위한 미완의 실험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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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거울 속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헬렌 맥클로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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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는 간단하게 설명 가능하다. 한 여교사의 도플갱어(생령 혹은 페치)가 다른 이들에게 계속 보인다. 그리고 다른 여교사가 도플갱어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그 도플갱어의 주인공인 여교사 역시 심장마비로 즉사한다. 여기에서 한 남자가 개입된다. 그는 두 여자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여자들이 죽음으로써 그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이상하게도 여기에서는 해석학적 시각이 존재한다. 범인은 그의 주장(즉 자신이 분장한 것은 첫 번째였으며 그 이후에 도플갱어는 초현실적인 것이다)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철회하지 않는다. 소설의 거의 대부분을 미스터리에 초점에 맞춘 저자에게 그 미스터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 그리고 탐정을 통해 확실한 범죄의 동기, 방법, 개연성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그 소설의 완성도와 관련되어 중요하게 다뤄진다. 언제나 추리 걸작이라 불리는 소설들은 스토리가 어찌됐건 탐정이 범인을 잡는 과정 자체는 정확성에 기인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탐정이 등장한다는 것은 반드시 범인이 잡힌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매클로이는 그것을 스스로 거부했을까? 왜, 추리 소설에서 열린 결말을 추구했을까?


 정신분석학은 안타깝게도 21세기에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으로 취급된다. 예컨대 심리학과에 다니는 대학생들은 프로이트를 믿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잠재의식’, ‘자아와 이드’, ‘히스테리’ 등의 용어와 해설들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논증이라고 믿어질 만큼의 정확성 때문에 관습처럼 굳어진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는 과학시간에 그것들을 배우지 않는가? 여기에는 그것의 진실/거짓 여부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개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진실로 믿는가, 거짓으로 믿는가, 라는 문제에서 보편적으로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 사실이 언제나 정확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문제도 관련이 없다. 작가가 말해 듯 언제나 어제의 과학적 사실은 오늘의 신화로 취급되는 문제니까.

 그렇다. 이것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 사건을 중심으로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는 그저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 이것은 정신분석학과 관련이 깊은데,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이란 언제나 증명불가능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분석학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 욕망, 의도 등 절대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저 ‘인간’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두 가지, 혹은 여러 가지의 주장들이 모여 하나의 구도를 이룬다. 우리는 이 주장들 중에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다. 도플갱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바이닝이 배질에게 오해받는 것뿐이며 그는 무죄라고 주장할 것이다. 철저하게 검증된 과학만을 믿는 사람들은(즉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배질의 추리가 정확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주장을 증명할 그 어떤 단서도 소설 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차페크의 말을 곱씹어 볼만 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악은 없다. 언제나 옳다고 믿는 진리와 다른 진리 간의 충돌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악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악과 진리 모두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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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disc)
이창동 감독, 윤정희 출연 / UEK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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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시인이 사과를 꺼낸다. 일부러 준비해왔단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가 언제 사과를 본 적이 있냐고.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보고. 그렇다. 우리는 사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난 한 번도 사물을 그렇게 관찰한 적이 없다. 그저 그렇게 있다고 믿을 뿐. 사물들은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오해인 것이다. 확장시켜보자. 안다는 것은 어쩌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소통(서로 안다고 가정하고 상호 교류하는 것)이란 근본적으로 오해를 기초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인이 다시 말한다.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고. 그 이후에 시가 쓰이는 것이라고.

 

소통이라는 이름의 오해

 영화는 집요하게 소통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마치 세상을 안다고 가정된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컨대 아네스와 5명의 중학생들이 그렇고, 양미자 할머니와 학부모들이 그렇고, 양미자와 그녀의 딸이 그렇고 양미자와 종욱이가 그렇다. 그들은 주고, 받는다. 그렇지만 주고받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교류하지 않는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자기기만으로 애써 무시해버린다. 그들의 행동, 말이 전달 될 때 그것들을 가로막는 것은 '폭력(아네스/중학생들, 양미자/학부모들) 혹은 '사랑(양미자/딸, 양미자/종욱)이라는 이름의 벽이다. 처음에 나는 집요하게 시를 쓰려는 양미자 할머니의 시도는 마치 현실의 도피로 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도피할 현실이 있는가? 역으로 그녀는 현실은 가상이고 시를 쓰려는 시도가 현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려는 것이라고 믿는 것 아닐까?

 

시를 쓰는 양미자의 방법

 시를 너무나 쓰고 싶은 양미자 할머니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 그녀는 꽃을 보고 꽃말을 찾고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빛을 보고 땅에 떨어진 열매를 본다. 그녀는 그것들을 관찰하고 만져보고 느끼려한다. 그리고 글을 써본다. 이상하게 글들, 시구들은 써지지만 시가 써지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세상은 가혹하다. 시를 쓰려고 마음을 먹은 순간, 그녀에게서 낱말을 빼앗아 간다. 옥타비오 파스는 주저 활과 리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은 인간 자신이다. 우리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말은 우리의 유일한 실재이거나 혹은 적어도 우리의 실재를 표현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그녀에게 말을 잃는다는 것은 '앞으로 말을 못한다.'라는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고 그녀의 실존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반면 세상은 공정하다. 그녀에게 말을 빼앗아 간 후 그것을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시를 쓰는 다른 방법을 알려준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거잖아요. 그런데 만날 저런 와이당이나 하고. 꼭 시를 모독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시를 아름다움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녀는 '시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이것들을 하기 전에는 시 =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공식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있을 뿐이다. 그녀는 이제 시를 쓰기 위해 만지고 관찰하고 먹어봐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아니 그런 자연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가."

 

법과 합의

 한 소녀가 죽었다. 그녀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침묵한다. 그들은 '진정성 있는 사죄'를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을 덮으로 현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성공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죽음을 덮음으로써 그에 따른 의무 역시 '덮어버렸다.' 합의라는 이름의 창은 그들을 안전이라는 성으로 대려가 양심의 가책이라는 불청객을 쫒아낼 것이다. 종욱이는 낄낄거리며 다시 무한도전을 볼 것이고 세상은 예전처럼 잘 돌아갈 것이다. 양미자 함머니는 아네스의 사진을 본 후에 그것이 잘못됐다고 느끼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깨닫는다. 부모들과의 합의는 죽은 아네스에게 어떠한 사과도 하지 못한다고. 그 고통이 그녀에게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어쩌면 양미자 할머니는 종욱이에게 시를 쓰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법적 처벌은 합의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게 토론에서 가장 논쟁이 있었던 부분이었던 같은데요. 그녀가 종욱이를 자발적으로 신고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녀는 종욱이가 법적 처벌을 받는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거라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합의와 마찬가지로 그것도 아네스를 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사죄는 가장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방법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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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스티븐 달드리 감독, 랄프 파인즈 외 출연 / UEK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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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왜 영화를 보고 이 책이 났을까? 단순히 나치즘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어쩌면 감독이 한나의 캐릭터를 아이히만에서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아이히만인가, 라는 첫 번째 의문과 왜 아이히만인가, 라는 두 번째 의문에 답하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나'가 아닌 '왜 그녀가 그 시대에 경비원이었나'의 문제

 

 아이히만과 그녀의 유사점은 이 대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중 한 장면. 판사가 한나에게 묻는다. “사람이 죽을 것을 알았으면서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죠?” 한나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저는 경비원이었으니까요.” 이 지점에서 나는 한나와 아이히만이 겹쳐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들 말고도 수많은 독일인들이 그것이 ‘명령’이기에 수행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을 ‘평범성’으로 규정한 후, 그의 악행은 그가 남들보다 사악하지도, 비윤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가 무고한 유태인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남들보다 조금 ‘천박하거’나 ‘사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사유의 불가능성, 이것이 그들의 문제이다. 한나가 문 앞에 서 있을 때에 그 문 뒤에는 600명의 유태인이 불에 타 죽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러한 상황은 윤리적으로 선택해야할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명령 체계에 복종하는 것의 문제, 이것이 본질이다.

 

reader와 leader의 사이에서

 

 그렇다면 그녀는 그렇게 되었을까? 그곳에 그녀와 함께 있었던 다른 가해자들을 보자. 그들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행위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과 한나의 차이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들(한나를 포함해서)을 손가락질 할 수 있다. 당신들은 비윤리적이라고, 사람이 못 할 짓을 저질렀다고. 그러나 대답은 다를 것이다. 한나는 나는 나의 할 일을 했다, 라고 대답할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나가 시켰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차이는 단순히 솔직함과 비겁함의 차이가 아니라 혹은 멍청함과 순응력의 차이가 아니라 ‘사유’ 자체의 문제이다.

 

 영화상에서 가장 극명하게 두 그룹 간에 드러나는 차이는 한나가 글을 못 읽는 문맹이라는 것이다. 문맹의 상징은 일방적인 소통의 상징, 즉 주고, 그것을 받는 알레고리로 설명된다. 한나는 절대 교류하지 못한다. 다만 받을 수 있고,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꼭 그와 같은 방식으로만 가능하지 그것이 절대로 다른 것으로는 대체될 수 없다. 예컨대 그녀는 글을 읽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글을 읽어줄 것이다. 이것이 한나의 기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그 누군가가(reader) 그녀에게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면 그녀는 그것을 듣고 울 것이다. 나무위의 남작을 읽어주면 그녀는 웃을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어주면 역겨워할 것이다. 그녀는 전달자가 전달해주는 방식으로만 그것을 이해한다. 비판이 없고 비난 또한 없다. 그저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그녀에게 reader는 그녀의 사유에 있어 leader가 되어 버린다. 이제 그녀에게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느냐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그녀에게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그 시대에, 당신은 경비원이 되었느냐고. 혹은 질문 받는 자를 대체해야 한다. 그녀에게 명령을 내린 주체, 혹은 그보다 위에 있는 주체에게.

 

카타르시스는 극장에서

 

 그녀의 죄는 단지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는 이유,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멍청이라는 이유로 증발되어야 하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그들이 한 행동으로 피해자가 발생했다. 그 피해자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삶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거시적인 것이야 어찌되었든 미시적으로 보자면 분명 피해자가 있고 그것을 가해한 자가 있는데 그들의 죄가 어떻게 -법적이든, 윤리적이든(후자가 더욱 중요하겠지만) - 용서받을 수 있을까? 감독은 한나와 유태인 사이에 마이클을 위치시킴으로써 그들 사이의 인류애적 화해를 만들어내는 이끌어내는 역할을 그에게 주는 것처럼 영화를 만든다. 깜빡하면 속을 뻔 했다. 한나가 자살하고 마이클이 한나의 유품을 가지고 생존자에게 가는 장면에서 나는 마이클이 어쩌면 한나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녀의 죄가 단지 ‘실수’였다고 생존자에게 선처를 부탁하러 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 내에서도 마이클의 행동을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인다. 생존자 앞에서 마이클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그녀를 변호할 때, 생존자는 말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면 극장으로 가라고. 이것이다. 마이클은 그녀를 용서할 수 있다. 왜냐면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으로 그녀가 그의 삶을 망가뜨렸더라도 그에겐 그녀에 대한 추억, 향수, 애틋함이 남아있기에. 그렇지만 유태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통, 참혹함, 등등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카타르시스는 극장에서, 라고 말 할 때 마이클의 화해의 제스처는 오만이 되어버린다. 그는 그만한 고통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법에 의해 판단되는 종류의 고통, 수치화 되는 고통, 남에게 이해되는 고통이 아니라 실존 그대로의 고통, 절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 그들에게 있기에, 그녀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겪은 일은 영화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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