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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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데 무려 1년이 걸린 책이 있다. 다름 아닌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읽으려고 마음을 먹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오바마 대통령 추천도서라고 엄청나게 광고를 때리기에(물론 이런 ‘추천’ 등은 사실 대부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며 벼르고는 있었으나 사놓고도 좀처럼 손이 가질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실물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책이 그야말로 거대하다. 들어보면 묵직한 것이 성경책만큼 두껍다. 이런 두꺼운 책은 보는 순간 일단 마음에 자동으로 장벽이 생긴다. 음.... 재밌을 것 같기는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듯 하니 우선 다른 책부터 보자!! 하게 되는 것.

더군다나 이 책은 1922년, 격동의 소비에트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떠올리면 눈앞에 자동으로 그려지는 이미지들이 있는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닥터 지바고, 러브 오브 시베리아.... 등등, 멋지고, 장엄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는 훌륭한 작품들인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매우 무겁고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분명 즐겁고 재밌으려고 읽는 것임에도 뭔가 자꾸 숙제하듯 미루게 되는 그럼 심경. 심지어 주인공인 로스토프 백작은 본래는 ‘청산’ 당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과거에 혁명에 동조하는 시를 썼던 덕분에 목숨만은 부지하게 되는 인물이다. 소설은 그런 백작이 호텔에서 감금생활을 하며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기록이고. 러시아, 백작, 혁명, 계급, 감금, 게다가 72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 분명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동시에 부담감이 팍팍 드는 요소의 집합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고로 계속 미루고 또 미루던 와중에 책장에 꽂혀있는 것을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이러려고 책 샀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이럴 바에 그냥 얼른 해치워버리자는 생각으로 드디어 집어 든 것이다. 1년 만에. 그런데 웬걸, 읽다 보니 생각했던 것과 정말 다르다. 그러니까 위에 언급한, 러시아, 백작, 혁명, 계급, 감금 등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어둡고, 암울하고, 진지하고, 무겁고, 장엄하고, 거대한 그런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예상외로 너무나 경쾌하고, 밝고, 명랑한 스토리인 것이다. 그렇게 일단 읽기 시작하니 두께에 비해서는 페이지가 상당히 빨리 넘어간다. 뭔가 다른 의미로 기대를 배반당한 느낌이라 아주 신선했다.

주인공인 로스토프 백작은 ‘백작’이라는 지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러시아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혁명으로 매우 혼잡한 상황임을 알고 있음에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신념 아래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명망뿐만 아니라 부유한 재산까지 갖추고 있던 그가 머무는 곳은 당연히 당시 최고급 숙소였던 호텔 메트로폴의 스위트룸. 그러나 가문의 재산을 쓰며 유유자적 보내던 백작의 우아한 귀족 생활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 날 재판에 불려 간 백작은 과거에 혁명에 동조하는 시를 쓴 공으로 사형은 면하지만 호텔 밖을 벗어나는 즉시 총살형에 처해진다는, 즉 ‘호텔 연금형’에 처해진다. 그것도 그간 머물렀던 스위트룸이 아니라 호텔 구석에 있는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작고 퀴퀴한 일명 ‘하인방’에서 말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일반적인 ‘감금 소설’ 등과 다르게, 백작은 방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호텔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식당, 이발소, 카페 등등등. 하기야, 방 안에서 있었던 일들만으로 700페이지를 써내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백작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선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 비좁고 어두운 ‘하인방’을 성심껏 꾸미고, 손님들이 버려진 책들을 주워다 열심히 읽고, 호텔의 식당을 비롯한 각종 상업시설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며 직원들과 친분을 쌓는다. 이처럼 온갖 등장인물과 다채로운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각종 에피소드들이 참으로 재미있다. ‘에피소드’라는 단어에 걸맞게끔 읽다 보면 일부의 사건들은 좀 빼도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좀 지루한 챕터가 몇 군데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작은 사건들마저 후반부에서 실로 하나하나 꿰어지는 것을 보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플롯을 공들여서 정교하고 세밀하게 짰는가를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점은 세계사를 잘 몰라서 그러려니 넘어간 부분들이 많았다는 것. 러시아 혁명에 대해 좀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훨씬 더 흥미롭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존인물들과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이 꽤 많이 등장하며 당대의 시대상이 잘 드러난다. 독서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마음먹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읽다 보면 무척 재미있는 작품이므로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역사서나 사회과학서적은 읽지만 소설을 잘 보지 않는 사람들 역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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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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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그만두고 4살 터울의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흔한 경력단절여성의 테크트리를 타던 정아은 작가는 ‘주부’라는 이름 아래 사회적으로 무능한 사람 취급을 받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끼고 어느 날부터인가 책을 읽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베스트셀러나 자기계발서, 육아서 위주로 시작되었던 그녀의 독서는 점점 더 반경을 넓혀 후에 소설책에까지 확장되는데, 어느 날 밤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읽은 뒤 갑자기 어떤 충동을 느끼고 책상 앞에 앉아 정신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고 한다. 쓰고 나서 보니 그게 다름 아닌 소설이었다고. 결국 정아은 작가는 그날을 계기로 계속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훗날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다. 물론 첫 소설을 쓴 뒤 등단하기까지의 사이에는 5년의 세월이 있었지만.

그러한 사연을 읽으며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란 책은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소설이라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사람에게 글을 쓰고픈 충동까지 일으킨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알고 보니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소설인데, 국내 역시 2004년 출간된 이후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흔히 베스트셀러에 갖게 되는 편견에 더해, 2000년대 유행했던, 지금 보면 매우 촌스러운 일러스트 표지를 보면 결코 선뜻 읽고 싶은 기분이 들만한 책이 아니지만, 도무지 정아은 작가의 저 사연이 잊히질 않는 것이다. 주부를 소설가로 탄생시킨 소설이란 대체 어떤 내용일까. 그런 궁금증이 끝내 지워지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해당 글에서 소설에 대한 언급이 그것이 전부였다는 점이다. 나름 서평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이나 평가 등 다른 언급이 전혀 없다.

그런 고로 결국 읽어보았는데,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책에는 굉장히 중요하고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는데 어지간히 미스터리나 추리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도 눈치채기가 쉽지 않다. 결국 이 소설은 아무런 정보를 모르고 보아야 최대한의 재미를 느낄 수 있기에 제대로 된 서평을 쓸 수 없는 종류의 책이었던 것이다.

하여간 설마 재미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반신반의하며 읽었는데, 실제로 상당히 재미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얼마 전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라 자동으로 순위권에 드는 작품들을 제외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가는 경우에는 나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역시 다른 베스트셀러들이 갖추고 있는 요소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인물의 심리와 배경 설명은 최대한 간결하게 줄일 것, 등장인물은 나름의 능력을 갖출 것, 위기 상황에 대한 설명은 책의 초반부에 제시할 것, 독자가 쉽게 접하기 힘든 사회(연예계, 방송국, 범죄조직, 성매매 산업, 예술계, 다단계 기타 등등)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제시할 것, 등등등. 마치 베스트셀러를 위한 규격화된 채점표가 있다면 거기서 만점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한 요소를 아주 적합하게 갖춘 책이었다.

책 자체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주 깊다거나,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게 될 만한 ‘명작’이라고는 말할 수는 결코 없겠지만,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가끔씩 거슬릴 때도 있지만, 머리를 식히며 ‘재미’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일 때는 충분히 만족할만한 그런 책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읽는 게 가장 좋겠으나, 일단 ‘읽어볼 마음’이 들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기 때문에 아주 기본적인 설정만 이야기하자면, 순진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다단계 조직과의 싸움에 관한 내용이다. 매우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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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방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3
다니자키 준이치로 외 지음, 김효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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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거의 따라잡았(다고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일본과의 문화적 격차를 새삼 실감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일본의 근대문학을 접할 때이다.

1900-1950년 사이에 쓰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부터 미시마 유키오에 이르기까지, 일본 소설들을 읽을 때면, 그 뛰어난 문학성과 오늘날 읽어도 전혀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세련됨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동시대에 쓰인 한국 소설들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물론 한국소설 중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지만, 아무래도 수준 차이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살인의 방>은 이상미디어에서 나온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으로 제목과 같이 약간 으스스한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의 느낌이 나는 작품만을 엄선하여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당대 유명했던 4인, 다니자키 준이치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기쿠치 간, 히라바야시 하쓰노스케의 작품이 각각 2~3편씩 실려 있다.

오늘날에야 장르소설, 대중소설, 순문학 소설 등이 뚜렷하게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으로 구분 지어진다면, 저 1900-1950년대 사이에는 소설가들이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소재를 다양하게 다루는 실험적인 작품들이 많이 쓰인 시대였던 것 같다. 그냥 장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인지 호러나 미스터리 장르의 결을 따라가면서도 장르문학 특유의 가벼움(?) 없이 마치 순문학과 같은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살인의 방>의 경우, 공포소설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에 한해서이긴 하지만(미리 말해두지만 귀신은 안 나옴) 장르소설 외에는 읽지 않는 사람, 순문학 외에는 보지 않는 사람 양쪽을 모두 커버할 수 있을만한 책이다. 실려있는 작품들이 모두 간결하면서도 아주 재미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기쿠치 간의 <어떤 항의서>라는 작품인데, 자신의 누나를 살해해놓고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뒤 멋대로 마음의 평안을 찾은 범인에 대한 원망을 외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봐도, 영화 <밀양>의 원작이라고 하는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미세한 설정이 다르므로 표절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렵겠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어떤 발상(?)이 너무나 흡사해서 여러모로 의구심이 들었던 작품이다. 시기적으로 따지면 당연히 <어떤 항의서>가 먼저 쓰였고, 아마 어떤 식으로든 이청준 작가가 영향을 받을만한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또한 히라바야시 하쓰노스케가 쓴 <예심 조서>의 경우 매우 짧은 분량임에도 플롯이 정교하고 설정이 매우 기발하여, 영화로 만들어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나리오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면 아주 좋은 참고가 될 만한 작품이었다. 핵심 구조는 그대로 가져오되 디테일만 바꿔서 장편화 시켜도 좋을 것이고.

그 외에 다니자키 준이치로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들이야 당연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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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
구보 미스미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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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정말 놀랐다. 중학생 때 엄마가 이동도서관에서 아마 별생각 없이 빌려다 주셨을 <채터리 부인의 사랑> 읽고 충격받았을 때만큼 놀랐다. 물론 당시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특정 페이지를 표시해놓고 반복에 반복을....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

처음 듣는 작가에 처음 듣는 소설. 어딘가에서 지나가다 언급된 것을 보고 살짝 궁금해졌었는데 하필이면 또 절판 도서에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라 도서관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알라딘 온라인 중고서점에 있었고. 냉큼 주문해서 받았더니 비닐로 쌓여서는 표지에 19세 미만 구독불가 딱지가 붙어있는 것이다. 뭐지? 하고 읽는데, 우와.....

진짜 어마어마 어마 하게 야하다. 물론 내가 포르노도 보지 않고 야시시한 콘텐츠를 전혀 소비하지 않기 때문에 더 놀랐을 수는 있다. 그러나 찾아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도 야하다고 하니 진짜로 야한 걸로. 심지어 그 야한 느낌도 대단히 일본스러운(?) 방향으로 야하다. 그..... 차마 말로 설명이 어려운데, 하여간.... 아무튼.... 음... 아주 간단한 예를 들면 오타쿠 주부가 남자 고등학생을 꼬드겨서 매일 성관계를 하는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음... 물론 여기에도 또 사연이 있습니다만 하여간.

소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줄거리도 짜임새 있고 인물과 설정도 독특하며, 문학적으로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단순히 야하기만 하면 그건 야설이나 포르노일 것이고. 작가에 의하면 “추하고 나약하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부분까지 서로 인정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유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다만 문학성이나 내용에 관계없이 수위가 이 정도쯤 되면 아무래도 읽으면서 받게 되는 어떤 충격(?)이랄까가 있는 것이다. 사고방식이나 의식의 흐름 역시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고. 그럼에도 페이지는 매우 잘 넘어갑니다요, 네.

그냥 소설집인 줄 알았는데, 5편의 단편이 나름 연결되는 연작소설이었다. 그러니까 옴니버스 형식으로 인물들, 남고생, 주부, 남고생의 여자친구 등등이 제각기 이야기를 가지고 한편씩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가만 보면 일본 소설에 유난히 이런 방식이 많이 사용되는 듯하다.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 중에도 이런 게 있었던 것 같고,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도 이런 스타일이고.

지나치게 천박하다거나 불쾌하거나 한 소설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까지 자극적일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도 든다. 호불호가 매우 갈릴 수 있는데, 좋아할 만한 분들의 리스트가 좀 떠오르지만.... 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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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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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을까. 한때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잊어버리고 싶을 때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을 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자극적이고 신기한 재미를 느끼고 싶을 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목적으로 소설을 읽는다. 나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 내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소설을 통해 만나며 얻게 되는 대리만족.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사람들은 자신을 잊기 위해서 뿐 아니라, 기억하고 싶을 때 역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경험했던 어떤 순간들, 감각들,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되살리고 싶어서, 잊고 싶지 않아서, 혹은 잊고 지나쳤던 것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고.

많은 훌륭한 소설들이 위의 두 가지 범주에 속한다.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세계로 접속하게끔 만들어주거나, 나의 과거로 연결시켜 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마주하게 만든다.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명백히 두 번째에 속하는 소설이다. 나의 과거, 내가 잊고 지내던 어떤 순간들, 있는 줄도 모르던 미묘한 감정들을 상기시키게 만드는 그런 소설.

얼핏 과학서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제목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총 10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집으로, 무려 데뷔작이다. 작가인 앤드루 포터는 이 데뷔작을 통해 미국에서 최고의 단편소설에 주는 플래너리 오코너 상을 수상했고, 평단으로부터는 극찬을 받았다. 문학적으로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으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2008년, 국내에는 2011년에 출간되었던 이 소설은, 많은 해외소설이 그렇듯이 5년여 만에 절판되었다가 성원에 힘입어 올여름 다시 출간되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던 터이지만, 직접 읽어보니 정말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아무리 극찬을 받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은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알아가듯 경계심으로 가시를 바짝 세우고 긴장된 상태로 들어가기 마련인데, 몇 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완벽히 무장해제되어 버렸다. 10개의 짧은 이야기는 모두 우리가 흘려보낸 어떤 순간들을 연상시킨다. 잊고 지내던 어떤 기억들, 분명 무언가를 느꼈지만 그게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던 어떤 감정들, 잊고 싶었던, 혹은 끝내 잊을 수 없었던 마음들.

10개의 단편이 모두 좋았지만, 굳이 하나만 꼽자면, 역시나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가장 좋았다. 물리학도인 주인공은 황당하도록 어려운 시험 문제에 기가 질린 동급생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홀로 남아 끝까지 문제를 풀고, 그것을 계기로 교수였던 로버트에게 초대를 받게 된다. 둘은 매일같이 차를 마시며 우정을 쌓아가고, 그러는 사이 주인공에게는 콜린이라는 뛰어난 운동선수이자 전도가 유망한 의대생, 학교의 인기스타인 남자친구도 생긴다. 주인공은 남자친구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로버트와의 관계에서도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혼란을 느끼고 갈등에 빠진다.

연인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어떤 끌림을 느끼게 된다는 이 흔해빠진 상황을 두고, 이토록 미세한 감정의 결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이렇게 아름답고 절제된 언어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놀라웠다. 한 줄 한 줄 읽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고 감정을 섬세하게 읽어낸다는 것은 앨리스 먼로나 레이먼드 카버와 비슷하지만, 앤드루 포터의 작품에는 그 둘 보다 조금 더 서정적인, 그래서 연약하고 바스러질 것 같은 느낌이 있었고, 그것이 너무도 좋았다. 물론 다른 두 작가 역시 몹시도 좋아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포터가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 작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쁜 이야기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가에게 의문을 던지게 만들고, 좋은 이야기는 읽으면서 독자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게 된다는 말이 있다. 훌륭한 소설을 읽을 때면, 어느 순간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나를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나의 시간, 나의 과거, 나의 추억, 나의 감정들. 결국 이 소설을 읽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제 새벽 늦게까지 자지 않고 짧은 단편소설 하나를 쓰고 말았다.

읽는 내내 이토록 훌륭한 소설을 읽을 수 있음에 너무나도 행복했던, 그런 아름다운 책, 잊지 못할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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