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을까. 한때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잊어버리고 싶을 때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을 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자극적이고 신기한 재미를 느끼고 싶을 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목적으로 소설을 읽는다. 나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 내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소설을 통해 만나며 얻게 되는 대리만족.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사람들은 자신을 잊기 위해서 뿐 아니라, 기억하고 싶을 때 역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경험했던 어떤 순간들, 감각들,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되살리고 싶어서, 잊고 싶지 않아서, 혹은 잊고 지나쳤던 것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고.
많은 훌륭한 소설들이 위의 두 가지 범주에 속한다.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세계로 접속하게끔 만들어주거나, 나의 과거로 연결시켜 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마주하게 만든다.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명백히 두 번째에 속하는 소설이다. 나의 과거, 내가 잊고 지내던 어떤 순간들, 있는 줄도 모르던 미묘한 감정들을 상기시키게 만드는 그런 소설.
얼핏 과학서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제목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총 10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집으로, 무려 데뷔작이다. 작가인 앤드루 포터는 이 데뷔작을 통해 미국에서 최고의 단편소설에 주는 플래너리 오코너 상을 수상했고, 평단으로부터는 극찬을 받았다. 문학적으로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으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2008년, 국내에는 2011년에 출간되었던 이 소설은, 많은 해외소설이 그렇듯이 5년여 만에 절판되었다가 성원에 힘입어 올여름 다시 출간되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던 터이지만, 직접 읽어보니 정말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아무리 극찬을 받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은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알아가듯 경계심으로 가시를 바짝 세우고 긴장된 상태로 들어가기 마련인데, 몇 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완벽히 무장해제되어 버렸다. 10개의 짧은 이야기는 모두 우리가 흘려보낸 어떤 순간들을 연상시킨다. 잊고 지내던 어떤 기억들, 분명 무언가를 느꼈지만 그게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던 어떤 감정들, 잊고 싶었던, 혹은 끝내 잊을 수 없었던 마음들.
10개의 단편이 모두 좋았지만, 굳이 하나만 꼽자면, 역시나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가장 좋았다. 물리학도인 주인공은 황당하도록 어려운 시험 문제에 기가 질린 동급생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홀로 남아 끝까지 문제를 풀고, 그것을 계기로 교수였던 로버트에게 초대를 받게 된다. 둘은 매일같이 차를 마시며 우정을 쌓아가고, 그러는 사이 주인공에게는 콜린이라는 뛰어난 운동선수이자 전도가 유망한 의대생, 학교의 인기스타인 남자친구도 생긴다. 주인공은 남자친구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로버트와의 관계에서도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혼란을 느끼고 갈등에 빠진다.
연인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어떤 끌림을 느끼게 된다는 이 흔해빠진 상황을 두고, 이토록 미세한 감정의 결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이렇게 아름답고 절제된 언어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놀라웠다. 한 줄 한 줄 읽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고 감정을 섬세하게 읽어낸다는 것은 앨리스 먼로나 레이먼드 카버와 비슷하지만, 앤드루 포터의 작품에는 그 둘 보다 조금 더 서정적인, 그래서 연약하고 바스러질 것 같은 느낌이 있었고, 그것이 너무도 좋았다. 물론 다른 두 작가 역시 몹시도 좋아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포터가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 작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쁜 이야기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가에게 의문을 던지게 만들고, 좋은 이야기는 읽으면서 독자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게 된다는 말이 있다. 훌륭한 소설을 읽을 때면, 어느 순간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나를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나의 시간, 나의 과거, 나의 추억, 나의 감정들. 결국 이 소설을 읽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제 새벽 늦게까지 자지 않고 짧은 단편소설 하나를 쓰고 말았다.
읽는 내내 이토록 훌륭한 소설을 읽을 수 있음에 너무나도 행복했던, 그런 아름다운 책, 잊지 못할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