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언어 - 삶과 죽음의 사회사, 2024 아우구스트 상 수상작
크리스티안 뤼크 지음, 김아영 옮김 / 북라이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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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인으로 자살은 죄악이라고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무신론의 사회에서는 이런 종교적 가르침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은 자신의 것이며 따라서 삶을 마감할 권리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살은 다른 동물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인간 고유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살과 안락사(조력사)를 진지하게 성찰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가면서 여러 번 자살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아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뿐입니다. 인간이 자살을 통해 삶을 포기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려면 살고자 하는 본능을 꺾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이 자살할까요? 자살 위험 요인은 많습니다. 가족 중에 자살로 사망한 사람, 술과 약물에 노출된 사람, 우울증을 앓는 사람, 헤어짐, 괴롭힘, 생활고 등을 겪는 사람, 등등. 우리는 자살을 권장해서는 안 되며, 안락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해서는 안 됩니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죽음의 순간에 두려워지고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안락사 방법이 공유되면 죽을 필요가 없는 사람, 죽고 싶지 않은 사람까지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살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람에게 안락사를 돕는 일이 과연 잘못된 일인지 저자는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실제로 스웨덴에서는 불치의 병으로 고통당하는 고령의 사람으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온전한 정신을 가진 분들은 법적으로 조력사(안락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살과 조력사에 관한 윤리적 문제의 핵심은 자기 결정권의 문제입니다. 과연 인간은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될까요? 조력사도 결국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니,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이것은 살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은 아닐까요? 또 조력사는 종종 나치가 저질렀던 것처럼 악용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책의 저자는 잘 통제된 조력사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그는 위기 계획 수립프로젝트를 통해 자살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상황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이번 독서를 통해 자살이나 조력사를 선택한 사람들의 상황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화 등 사회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자살과 조력사를 용서받지 못할 죄로 너무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조금은 폭넓고 깊게 생각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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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해방이다 - 자유이자 금지였고 축복이자 저주였던 책 읽기의 역사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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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도발적입니다. <독서는 해방이다>! 독서가 단순한 정보를 얻는 행위를 넘어 부조리한 현실을 넘는 자유와 해방의 길을 열어준다는 저자의 주장을 어떻게 그림 해설에 녹아냈는지 궁금해하며 책을 펼쳐봅니다. 박홍규는 책이 그려져 있는 70여 점의 그림을 시대별로 묶어 제시하면서, 책의 역사 혹은 독서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그림 해설이 아니라 그림을 매개로 해서 책에 관해 말합니다.

나는 책 읽는 여성그림에 집중하면서 독서에 대한 작가의 주장을 따라갔습니다. 저자 박홍규에 따르면, 로베르 캉팽의 <수태고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마리아는 여성의 해방 혹은 각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15세기 최초의 직업적 여성 작가 크리스틴 드 피장의 <숙녀들의 도시>에 실린 삽화에서 여성이 든 책은 여성이 남성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탄식한 마테올루스의 <탄식>이랍니다. 크리스틴 드 피장은 <탄식>을 읽고는 화가 났다죠. 그래서 거울을 든 이성의 여신, 자를 든 공정의 여신, 저울을 든 정의 여신의 도움으로 여성들의 도시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책을 썼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에 이런 페미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니 놀랍군요. 소포니스바 안귀솔라의 <자화상>은 당당한 여성 화가를, 아뇰로 브론치노의 <라우라 바티페리의 초상화>는 단테에 버금가는 여성 시인을, 렘브란트의 <책을 읽는 노파>는 희망을 품고 앞을 바라보는 여인을, 피테르 얀센스 에링하의 <책 읽는 여인>은 개인적인 즐거움과 자유를 추구하는 여인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구스타프 아돌프 헤니히의 <책 읽는 소녀>, 카미유 로코의 <책 읽는 소녀>, 앙투안 위르츠의 <소설의 독자>에서 그림 속 책은 어떤 책일지 추측합니다. 당대의 책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절대로 추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테오도르 루셀의 <책 읽는 처녀>에서 나신의 여성은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요? 저자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그리고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떠올립니다. 나는 책과 여인을 그린 명화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림에서 여인들이 읽는 책을 추측해 내는 저자의 박식함에 놀랐습니다. 여성의 독서에 대해서만 생각해도 책은 여성에게는 자유와 축복이며 여성을 억압하는 자들에게는 금지와 저주임이 분명합니다. 비로소 <독서는 해방이다>라는 책 제목이 선명하게 이해됩니다. 독서에 관한 멋진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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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드리 노니다가 - 라종일의 탐미야담, 1983년 어느 가을밤, 젊은 정치학자 마음에 깃든 옛이야기
라종일 지음, 김철 옮김 / 헤르츠나인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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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하면, 대표적으로 헌화가(獻花歌)와 구지가(龜旨歌) 그리고 저 유명한 처용가(處容歌)가 떠오릅니다. <헌화가>는 한 노인이 아름다운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는 노래이며, <구지가>는 임금이 없던 시절 백성들이 임금을 맞이하기 위해 부른 민중의 주술적인 노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라종일은 두 향가를 연결해서 용과 미녀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용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인을 경외하고 숭배한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오직 자신만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용은 여인을 납치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인은 수많은 군중을 모여들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닷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녀가 사라짐으로 더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용은 인간의 소원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인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여인은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자가 만들어 낸 이야기에는 용과 싸우는 영웅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닷가에 모인 민중의 모습이 보입니다. 민중 앞에서 권력가를 상징하는 용은 슬그머니 여인을 돌려보냅니다. 주술적으로 임금을 맞이하는 <구지가>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꽃을 바치는 <헌화가>와 엮여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변했네요. 작가의 탐미적인 상상력이 빛을 발합니다.

<처용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습니다. 통일신라 사회의 정치적 도덕적 퇴폐를 보여주는 은유, 혹은 지방 귀족과 중앙 귀족 간의 권력 투쟁의 표현, 혹은 무당 처용이 역신을 쫓아내기 위해 부른 노래 등등. 저자는 이런 학설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오직 탐미적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저자는 처용을 혼자서 호랑이를 해치운 용맹한 남자라고 상상합니다. 용감한 자가 아름다운 아내를 얻는다는 말처럼, 처용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처용은 외로웠습니다. 그는 애욕의 허망함을 깨닫고 탐욕과 집착을 벗어던집니다. <처용가>를 이렇게 해석하다니, 참신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분 같습니다. 고대 향가를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엮은 그 파격적인 상상력에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살짝 아쉬운 점은 본래 이야기를 앞에다 싣고 다양한 학설을 간략히라도 소개한 뒤, 저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 이야기를 펼쳤다면 독자도 상상의 나래를 펴며 더 재미있게 이 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나는 <주몽(朱夢) 설화>, <유리(琉璃) 설화>, <지귀(志鬼) 설화>의 원작(?)을 일일이 찾아보았습니다. 학창 시절 공부했던 내용도 상기하면서, 작가의 상상력으로 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추억과 상상력의 바다에 풍덩 빠진 멋진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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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기원 - 아기를 통해 보는 인간 본성의 진실 아포리아 4
폴 블룸 지음, 최재천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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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도덕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에게는 강하고 누구에게는 약합니다. 누구는 타인에게 험한 말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누구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을 해하고 심지어 죽여도 자책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또한 도덕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요, 후천적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일까요?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폴 블룸은 아기들을 연구해보면 인간에는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성이 있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지만 도덕성은 후천적으로도 고양된다고 봅니다.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이 책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무척이나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도덕성에는 어떤 요소들이 중요하게 작용할까요? 사이코패스에게는 병적인 허언과 죄책감 부족 등의 증상이 있지만, 핵심적인 결핍은 연민입니다. 저자는 연민과 공감을 구별하는데, 연민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쓰고 돌보는 것이며, 공감은 그 사람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타인을 돌보려는 연민의 마음이 없다면 도덕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편, 우리는 타고난 도덕성을 문화와 관습으로 뛰어넘습니다. 나는 종교가 도덕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어떤 이는 유일신 신앙의 가르침에서 도덕적 통찰이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이들은 종교가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인종차별과 여성 경멸 등을 낳았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어느 쪽 주장이 맞을까요? 분명한 것은 종교는 어느 사회에나 있으며, 종교가 도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종교적 신념보다 종교적 소속감이 사람의 도덕성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종교적 신념이 도덕적 신념을 초래하기보다 종교적 신념에 도덕적 신념이 반영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많은 요인이 우리의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의 도덕성을 연구할 때 먼저는 우리가 타고난 것을 다루어야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그저 아기로만 멈추지 않는 그 이상의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도덕성 가운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발달이 진행되는 동안 발현되었습니다.

이 책, 인간의 도덕성과 관련된 다양한 학문적 연구 결과를 수많은 사례를 통해 매우 쉽고 흥미롭게 들려줍니다. 도덕성에 관한 균형 있는 토론에 매료되었습니다. ‘선악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선을 증진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본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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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땅에서 말씀 찾기 - 베들레헴에서 욥바까지 인문 기행
권종렬 지음 / 샘솟는기쁨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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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감각으로 성경 읽기! 이 책이 추구하는 성경 읽기는 성경 텍스트 밖으로 나와 텍스트에 언급된 지역과 사물의 실체를 확인함으로써 텍스트의 의미를 더 생생하게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에필로그에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며 일상적 감각으로 성경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특정 설교자의 가르침에 묶인 이데올로기적 신앙에서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읽고 깨닫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기쁨을 생각해 볼 때, 그의 바람은 독자들에게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내가 지금 성경의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네게브 지역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왜 에셀나무를 심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싯딤 나무는 광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야의 등대같은 나무입니다. 하지만 에셀 나무는 싯딤 나무보다 더 많은 물이 필요해서 오아시스 지역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네게브 지역에 흔하지 않은 에셀 나무를 심은 것이지요. 저자는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삭이 후에 브엘세바에서 다시 우물을 팝니다. 브엘세바의 우물 앞에 서면 이삭의 애잔한 인생이 그려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었죠. 하나님의 간섭으로 중단되지만, 당사자인 이삭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과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아브라함 혼자 모리아 산에서 내려와 브엘세바에 거주합니다(22:19). 이삭 이야기가 사라진 것이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이 사건을 알았는지 브엘세바가 아니라 기럇아르바에서 살다 죽습니다(32:2). 이삭도 브엘라해로이에서 살았습니다(24:62). 아브라함이 죽은 후 이삭은 아버지의 흔적이 가득한 브엘세바로 돌아오고,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계시하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삭에게 복을 주어 자손을 번성하게 하시리라 약속하십니다(26:24). 그동안 아들 이삭은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저자 권종렬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온 세상이 칭찬하는 믿음 좋은 아버지, 그런데 아들은 그런 아버지처럼 믿음 좋은 사람 되는 것이 한없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p. 77). 그렇습니다. 이삭은 매정하게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믿음의 아버지가 두려웠고,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한 하나님이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살다 보면 믿음의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는 법이고,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두려울 때도 있는 법입니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 텍스트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과 동떨어진 자유로운 상상력이 아니라, 텍스트가 일어난 당시 상황과 인간들의 생각을 실감 나게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성경 텍스트가 더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행복한 독서 여행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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