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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울 것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남성 작가가 쓴 소설보다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을 더 좋아한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그렇다고 남성 작가가 쓴 소설을 안 읽거나 일부러 피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에 작가의 성별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 작가가 쓴 소설도 즐겨 읽는다.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 중에서 재미, 완성도, 문학적 성취를 떠나 팬심과 사심으로 좋아하는 소설은 거의 대부분 여성 작가가 쓴 작품이다. 게다가 인생의 전환기라고 생각하는 30대에 접어들면서 같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관점, 가치관, 주관적인 생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친구나 같은 일을 하는 동료 혹은 엄마와 함께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생각을 그만의 언어로 만난다는 것은 나에겐 더 설레는 일이다.
이번에 읽은 임경선 작가의 <자유로울 것>은 은은한 파란색과 초록색 조합의 단아한 표지를 보는 것마저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설 연휴의 시작을 이 책과 함께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20, 30대를 통과하면서 뜨겁고 차갑게 연애하고 십이 년 간의 직장생활, 그리고 건강과 밥벌이 때문에 전업작가로 십삼 년째 살아온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일상을 스쳐가는 사소한 일들부터 인생을 관통하는 중대한 일들까지 담담하게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흔한 개의 부제를 두고 쓰인 글 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한결같은 사람들>과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지만>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한결같은 사람들
모든 걸 편하게 공유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고 마음이 꼭 잘 맞는 친구를 만나기 힘든 것처럼 분위기, 커피 맛,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위치까지도 내 취향에 꼭 맞는 카페를 찾는 것도 그만큼 쉽지 않다. 카페 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아침에 마시는 커피 맛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좌우될 만큼 커피에 집착하는 편이라 작가의 일터이자 엄마와 아내라는 직함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카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흐름을 깨지 않지만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커피 내리는 향으로 가득하고 사장님은 친절하지만 선을 넘지 않는(과한 친절은 가식처럼 느껴진다) 그 카페가 너무 궁금해서 이 부분을 다 읽으면 검색해서 찾아보려고 했는데 개업한 지 이 년이 지난 뒤에 문을 닫았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나의 단골 카페가 문을 닫은 것처럼 아쉬웠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꼭 가려고 마음먹었는데... 나의 아쉬움을 달래주려는 것처럼 서울에서 2시간 떨어진 곳에 같은 이름으로 다시 카페를 오픈하셨다는 걸 읽고 바로 검색했는데 이전 옥수동에 자리하던 그 카페 모습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 같았다. 부제처럼 '한결같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삶'에서 따뜻함과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지만
2년 전 겨울, 일을 안 하고 집에서만 지냈던 적이 있는데 워낙 혼자 있는 거 좋아하고 집에서도 놀 거리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무 일 없이, 벌이 없이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시간이 많으니 책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평소에 구매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샀지만 한 달에 두 세권 읽기도 힘들었고 습관처럼 밤에 한두 잔 마시던 술을 점점 더 늘었고 답답함을 풀기 위해 단순한 일에 집중하다 보니 쉬지 않고 뭔가 계속 먹게 되었다. 그래서 몇 달 사이에 5킬로가 늘었고 항상 기분은 축 가라앉았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내게 우울해 보인다며 무슨 일 있냐며 물어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약간 우울 증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모든 일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일상이 망가졌다. 암흑기 같았던 겨울이 지나고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오후 2-3시에 일어나던 습관을 버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하고 없는 옷들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옷을 골라 입고 매일 일하는 삶이 시작되면서 다시 생기를 찾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짧지만 감정적으로 너무 길었던 암흑기를 통해 '일'이라는 것이 그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돈이라는 대가가 가장 큰 목적이지만 일을 통해 돈과 함께 얻을 수 있는 건 나를 나답게 살 수 있게 하고 일상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만들어 가게 하고 휴식을 통해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고 존재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다는 걸 알게 됐다.
나이 들어가며 느끼는 쓸쓸함과 슬픔을 최대한 막아주는 것은 안티에이징 시술도 아니고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려는 의지도 아니다. 그것은 '가급적 오래오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치심과 생각의 유연성을 잃지 않으면서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면 가능한 한 오래도록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p.239)
임경선 작가 역시 나이 들어갈수록 일의 소중함에 대해 역설하는데, 최근에 내가 겪고 힘들어하고 깨달았던 내용이라 가장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젊어서 일을 할 수 있겠지만 50살이 넘어도 나를 필요로 하고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된다.
책을 읽고 온라인이라는 공간에 독후감을 쓰면서 아무리 책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해도 나의 감상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라는 사람에 대해 노출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드러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경계하게 되어 하찮은 독후감 한 페이지 쓰는 것마저 조심스러운데 한 권의 에세이를 낸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용기와 솔직함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소설을 읽을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독자를 설득하려고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만의 이야기를 할 때 작가의 삶에서 진솔함을 글을 읽으면서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 <자유로울 것>을 읽으면서 진솔함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