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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평점 :
박완서 작가는 엄마의 말뚝이라는 책으로 처음 접했다. 그책도 그렇고 이책도 한결같이 시선이 따뜻하다. 하지만 이 책은 더욱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였기 때문에 그녀의 시선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 한순간에 그녀가 위대한 소설가에서 동네 할머니처럼 느껴졌고 그녀가 하는 고민, 겪었던 아픔도 모두 우리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에세이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 그녀가 대학졸업 후 바로 소설가를 꿈꾸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부 생활을 하며 쭈뼛거리며 썼던 작품으로 데뷔한 것이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적잖이 위로가 되어주었다.
"올 겨울의 희망도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다시 꿈을 꾸고 싶다. 절박한 현실 감각에서 놓여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만 한가해지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꿈을 단념할 만큼 뻣뻣하게 굳은 늙은이가 돼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태껏 만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나에게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상하게 했지만 살날보다 산 날이 훨씬 많은 이 서글픈 나이엔 어릴 적을 공상한다."
"내 기억의 창고도 정리 안 한 사진 더미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뒤죽박죽이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고 나라는 촉수가 닿지 않으면 영원히 무의미한 것들이다."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 가장 처량해진 나이이다. 만추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아무리 생각해도 생명에 대한 애착이 손톱만큼도 없는 게 확실하건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용기인지 팔자인지, 죽는 게 무섭다는 것과 생명에 대한 애착하고는 어떻게 다른지 아직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