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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평점 :
다정한 매일매일
몇 달 전 소설집을 감명 깊게 읽고 좋아하게 된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이 갑자기 나와서 반갑게 집어들었다. 빵과 책을 굽는 마음이라는 부제로 길지 않은 빵이야기와 책이야기를 섞은 글들이 엮여 있었다. 여느 소설가들의 에세이와는 살짝 결이 달라서 신선했다. 감성 터지는 책표지와 삽화 역시 이 책의 큰 매력이다.
알아보니 경향신문에 책 굽는 오븐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엮었다고 한다. 한 챕터당 네 페이지가 넘지 않는데 막상 읽어보면 그 네페이지가 결코 짧지 않은 느낌이다. 빵이야기와 작가의 일상 경험, 느낌, 생각들이 담겨있고 책 한권의 이야기까지 버무려지다보니 읽고 나서도 마음이 한참을 머무르게 된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부터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건반 위의 철학자, 종이 동물원, 사랑의 역사, 스토너, 디어 라이프 등 개인적으로 감명 깊게 읽은 소설들에 대한 백수린 작가의 감상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나와는 다른 시각과 지나쳤던 대목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덤으로 개인적으로는 몰랐던 소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추천받는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빵이야기 책이야기도 좋지만 백수린 작가 특유의 감성을 옅 볼 수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들 역시 일품이었다.
작가의 말 부터 각 챕터의 후반부에 마무리 짓는 문장들 모두가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이었다.
이상하고 슬픈 일투성이인 세상이지만 당신의 매일매일이 조금은 다정해졌으면. 그래서 당신이 다른 이의 매일매일 또한 다정해지길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여유를 지녔으면.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만 같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빌어줄 힘만큼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이므로.
빵이야기
그 빵집을 발견했던 때는 그런 한낮의 산책을 하던 날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곳은 제빵사의 이름 석 자를 걸고 오로지 식빵만을 파는 작은 가게였다. 요란한 간판이나 진열장도 없이, 나중에는 소보로빵을 팔기도 했던 것 같지만, 처음엔 제빵사 한 분이 우유식빵 딱 한 종류만을 만들어 팔던 그 빵집을 나는 퍽 좋아했다. 하루치 만들어둔 빵을 다 소진하면 더 이상 만들어 팔지 않는 가게라 때로는 빈손으로 돌아와야 할 때도 있었지만, 운이 좋게 갓 구운 통식빵 한 덩이를 사서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귀한 것을 품고 걷는 사람처럼 마음이 기쁨으로 찰랑이기도 했다.
사랑이야기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를 쉽게 떠올리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게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넘치는 건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 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도.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마침내 사랑은 그 눈부신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
책 이야기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만큼 이토록 기이하고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방식으로 정체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을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사랑의 역사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아름다운 완성의 형태를 보여준다. 무한히 번져갈 때에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에 완성이 영원히 지연될 수밖에 없는 사랑 사랑의 속성이 그런것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오늘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