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해가는 미국 남부의 총체적 난국 시리즈
1. 윌리엄 포크너 단편집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 워낙 유명한 이야기다. 꼬장꼬장한 남부 명망 있는 가문의 아가씨 에밀리, 쌓여가는 세금 고지서 따위는 무시하는, 이 동네에선 이제 거의 볼 수 없는 전통이며 사그라들만하면 다시 타오르는 관심의 대상이자 낡아가는 것에 대한 향수이며 지난날의 그리움과 안타까움, 호기심의 대상이다. 당당했던 에밀리의 아버지와 아름다웠던 그녀는 어쩌면 남부의 전성기 시절을,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과 홀로남아 저택과 같이 낡아가는 에밀리는 남부의 쇠락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느껴진다.
그런 에밀리가 아무래도 수준이 낮아 보이는 북부의 뜨내기 호머 배런과 연애를 시작한다. 그리고 에밀리 사후, 모두가 호기심에 차서 그녀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비소를 먹여 죽인 에밀리의 장미, 호머 배런의 해골과 마주친다. 에밀리에게 바쳐져 잘 말라 납작해진 해골 옆엔 그녀의 철회색 머리카락 한 올이 남겨져 있다. 아니면 그 늦은 사랑에, 에밀리가 스스로를 시간에 가두어 자신을 바친 것일까. 낡고 바스라질 것 같은 메마른 장미는 에밀리였을까. 아니면 낡고 오래된 남부의 마지막 전통과 쇠락을 보여주며 사그라든 에밀리에게 우리가 바치고 싶은 한 송이 장미일까.
<헛간을 태우다>는 가진 것 없는 노동자이며 분노와 불안, 그리고 무모함만을 가득 가진 에브너의 이야기다. 그는 감당못할 일을 저지르곤 헛간을 태운다. 정작 태우고 싶었던 건 헛간이 아니라 자신이 아니었을까. 또 다시 고용주의 헛간을 태우려는 아버지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에브너의 아들은 고용주의 집을 향해 달리고, 그렇게 또 다시 길을 잃고 추운 밤을 헤메게 된다. 간절하게 따뜻한 불빛을 바라는 마음으로, 헛간이 다시 타오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잠이 들다 말았다 하며 춥고 무서운 얼음의 길을 걷는다. 그에게 타오르는 헛간은 무모한 아버지 그 자체이며, 아버지가 방화를 그만두기를 그래서 유랑과 지치고 헐벗은 삶의 불안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이 책 속 단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남성은 여성을 박해하고 우습게 생각하며 벌레처럼 본다. 백인들은 유색인종들을 사람취급 하지 않으며, 인디언들은 흑인들을 무시한다. 돈 많은 백인들에겐 흑인이든 인디언들이든 가난한 백인들이든 그저 가축일 뿐이다. 멸시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 이 곳이 미국의 남부다.
<메마른 9월>에서 억울한 흑인 편을 들던 이발사, 상식적이고 제대로 된 마음을 갖고 있지만 그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 날의 저녁놀>에선 돈을 주겠다며 강간을 하곤, 그 돈도 주기 싫어 얼굴을 때려버리는 악독한 스토벌과, 그런 스토벌에게 맞아 치아를 잃은 흑인 낸시가 있다. 결국 자살을 택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한 낸시, 그렇지만 백인들은 흑인들의 자살조차도 믿지 않는다. 생각도 주체도 없는 벌레 같은 흑인들이, 고뇌하고 고통받고 몸부림치며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붉은 나뭇잎>에선 인디언들이 족장을 위해 흑인노예를 순장하려 한다. 인디언들에게 흑인은 노예이며, 새끼들은 백인들에게 팔 가축일 뿐이다. 흑인은 “식용으로 쓰기엔 너무 값어치 있는 존재”이다.
<와시>에선 가난한 백인 노동자 와시가 흑인에게조차 백인쓰레기란 소리를 듣는 인물로 나온다. 그가 믿었던 부유한 백인 서트펜은 자신의 손녀딸을 농락하고 가축취급을 한다.
백인은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고독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고 사랑을 할 수 도 있다. 그렇지만 흑인은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사랑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아니다. 흑인을 셀 때도 마리로 셀 뿐, 말 하는 동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실상 백인과 유색인종의 차별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빈부의 차, 남녀, 백인과 흑인, 흑인과 인디언, 그들은 차별당하고 차별하며 실존을 위협당하고 있다.
이런 차별은 선긋기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늘 존재했던 차별이다. 그 때 그 때의 이득에 따라 움직이며 과거엔 세습되고 태어나면서부터 낙인처럼 차별받았다. 지금은?
지금은 다를까. 지금도 수많은 선긋기가 있다.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는 시선들. 어른들의 아이에 대한 시선, 남녀 사이에서의 시선의 차이, 난민에 대해, 유색인에 대해, 가난한 자에 대해 여전히 남아 있는 선 긋기. 모두들 자신이 주류라고 또는 자신은 차별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그어진 선을 발로 지우며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2.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가족의 모습은 포크너의 단편 속 한 가족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느낌이다. 가난한 백인 가정의 모습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머니의 시체는 부패하고 관 위로는 말똥가리가 난다.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상황, 거지발싸개 같은 모습으로 가족들은 어머니의 소원대로, 어머니의 시신을 고향에 묻기 위해 떠난다. 그 소원조차도 사실은 어떤 의미이며 무슨 뜻이었는지, 정확한지조차도 알 수 없다.
노새를 사기 위해 아들 주얼의 말을 허락 없이 팔아 버리고, 또 다른 아들 캐시의 부러진 다리에는 시멘트를 붓고, 방화를 한 아들 달이 끌려가는 것을 방치하고, 딸인 듀이델이 남자친구에게서 받은 낙태비용 10달러를 기어이 빼앗아 의치를 해 넣고 새아내를 데려오는 아버지란 남자 앤스.
어머니의 존재는 그렇게 희석된다. 죽음 또한 희미해져 간다. 슬픔도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희석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렇게 살아가겠지. 어머니를 묻기 위한 긴 여정이 우스꽝스런 촌극처럼 느껴져, 보편적으로 죽음이라면 가져야하는 예의와 엄숙함마저 지워버린다.
엄마가 죽어 누워 있는 관 앞에서도, 캐시는 축음기에만 관심을 가지고, 달은 미쳐버린다.
주얼은 분노하고, 듀이델의 머릿속엔 임신한 아이를 없앨 생각으로 가득하다. 어린 바더만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진열장의 가질 수 없는 기차를 떠올리고, 남편은 의치와 새부인을 얻는다면, 누워있던 죽은 아내조차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 그렇지만 죽은 아내이자 엄마인 에디는, 청소마저 끝내고 죽을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이제 조용히 구덩이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에디에겐 사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 휴식은 죽음이 아닐까.
차별받으며 살아간다. 엉뚱하게 자신을 차별하는 대상이 아닌, 자신이 차별할 수 있는 대상에게 분노를 풀며 살아가는 미국의 하층민들의 모습. 끓어오르는 분노와 무모함이 합쳐져 헛간에 혹은 고용주의 거처 어딘가에 불을 지른다. 다 타버리고 재만 남는다면 우린 공평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아닌 자, 인정받지 못하며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도 성냥으로 그은 불 앞에선 전지전능하다고 무엇이 된 것처럼 느끼는 걸까. 불은 제멋대로 타올라 불을 그은 자조차 태워버린다. 누군가는 헛간에 불을 지르고, 누군가는 깜뚱이에게 불을 지르고, 누군가는 자식과 아내 혹은 남편에게 불을 지른다. 다 다른 모양의 불이지만 결국 그 누군가 또한 불에 삼켜 지고 재는 날아가버린다.
( 어려운 책 ㅠㅠ 헛간을 태우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