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벗과의 대화
안대회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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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꿈을 이루어 줄까?
우리 선조들이 남긴 옛글을 보면 부러운 것이 있다. 내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와는 사뭇 다른 시대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하지만 어디 사람 살아가는 근본에 차이가 있을까 싶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그 부러움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옛 사람들의 사람 사귐에 대한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의 옛글은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기에 현대인들이 접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아무리 좋은 뜻을 담고 있는 글이라도 읽기 못한다면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어려움을 적절하게 해결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정민 선생을 비롯하여 안대회가 바로 그러한 분들이다. 이분들의 노력에 의해 옛 사람들의 주옥같은 글들이 현대인들의 마음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천년 벗과의 대화’는 바로 우리 옛글과 현대인들을 이어주는 안대회의 글로 그동안 옛글을 읽으며 저자의 마음에 남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감회를 담은 책이다. 저자가 옛글에서 주목하는 이야기는 선인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일상에서 소소하게 가슴으로 다가서는 이야기들이다. 그렇기에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으며 오랫동안 잔잔한 울림으로 남는다. 

옛글에 담긴 것이 바로 그렇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아등바등 생활에 메어 하고 싶은 것 다하지 못하는 것이나 사소한 일들로 감동받고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글에 담긴 것에서 보면 우리 살아가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옛글로 사람들을 부르는 것일까?  

“공교롭고도 오묘하지오.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누가 그런 기회를 만들었을까요? 그대가 나보다 먼저 나지 않고, 내가 그대보다 뒤에 나지 않아서 한 세상에 같이 태어났고, (중략) 그렇기는 하지만 주고받는 대화가 구차하게 같거나 행하는 일이 구차하게 맞아떨어진다면, 차라리 천 년 전 옛사람과 벗하고, 백 세대 뒤에 사람을 미혹시키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옛글에서 찾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벗과의 사귐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박지원의 글이다. 이는 박지원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는 점이다. 옛글은 바로 이렇게 사람 도리에서부터 시시콜콜한 한 사람의 특별한 버릇까지 다 담겨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그 속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깨우침이 있다.  

모두 다섯 가지 분류로 구성된 이야기는 옛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옛 책들에서 시선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것으로, 모두 53편이 있다. 고려, 조선을 비롯해 당나라, 베트남, 일본의 이야기도 있다. 이런 글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저자는 자신의 일상으로 풀어내고 있다. 우리가 무엇에 주목하고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옛날과 현대를 이어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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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 -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적자생존의 비밀
프란츠 M. 부케티츠 지음, 이덕임 옮김 / 이가서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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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적자의 달팽이집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사회 문화적 규범에 의해 살아간다.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 적용된다. 마치 이를 따르는 것이 순리이며 사회적으로 성숙한 인간임을 강요받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지극히 개인적인 특징은 사회적 분위기나 사람들에 의해 무시되기 일쑤다. 때론, 그러한 사회적 규범의 작용에 앞서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설정하기도 한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은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의 척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예전엔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했던 행위들이 지금은 묵인되거나 은근히 조장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러한 것들 중에는 개인의 명예나 자존심과 같은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필수요소로 이를 통해 한 인간의 표상을 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은 개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세계적으로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프란츠 M. 부케티츠(Franz M. Wuketits)의 저서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바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규범에 의해 때론 강요되는 사람들의 표상에 대한 도발적인 제안을 하고 있는 책이다. 모두가 긍정의 요소로 보고 있는 ‘용감함’과 ‘비겁함’에 대해 역발상의 제안을 하고 있다. 살아있는 겁쟁이들에 대한 변명처럼 보이는 그의 주장은 다윈의 적자생존의 법칙을 근거로 다양한 생물들의 이야기를 비교검토하며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러한 행동의 근거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우선, 저자의 주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주장하는 이론의 근거가 되는 다윈의 적자생존 법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자자는 다윈의 자연선택에 따른 적자생존의 법칙에서 말하는 "적자(適者)"란 가장 용검하거나 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삶과 생존을 위한 전략을 갖추고 있는 개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자연에서 "가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동물은 어떤 의미에서 생존에 유리한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강한 동물의 선두로 꼽히는 호랑이나 상어, 공룡 등의 예를 통해 자연법칙에서 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핀다. 강함은 유전에 의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절대적 강함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는 행동의 범주로 보은 편이 강하다. 또한 이러한 강함은 다른 종과의 문제라기보다는 같은 종 내부의 문제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다윈의 적자생존 법칙이 바로 그것을 중심으로 밝혀낸 자연법칙이라고 보는 범주에 속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러한 개념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죽은 영웅은 너무나 많고 살아 있는 겁쟁이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조장되는 영웅적인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나 성원은 극에 달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보여준 용기 있는 행동의 의미를 축소할 마음은 전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속하는 범주는 사회적으로 기피하는 표상인 ‘겁쟁이’에 속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올바로 바라보고 사회적 인간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닌가 싶다. 저자의 이러한 시각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이 강제로 설정한 수많은 종류의 사회적 이념에 희생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돌려놓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우선에 두는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규범에 의해 강제되는 시각과는 다른 시각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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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이재갑 글.사진 / 살림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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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넘어 미래로 가는 길목에 서서
한일 양국 간 해소되지 못하는 민족감정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화해할 수 없는 과거의 역사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역사를 보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대륙의 여러 나라를 비롯하여 조선에 와서는 명나라나 청나라 그리고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이나 전쟁 또한 자주 일어났지만 유독 일본과의 마찰과 대립은 심한 생채기를 남기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이기에 민족감정이 그대로 남아 유지되거나 확대 되는 경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사회는 국경 없는 사회라고도 할 만큼 세계는 서로는 각국의 이해를 기반으로 활짝 열린 자세로 다른 나라를 대하고 있다. 그것이 자국의 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에 문호를 열고 세계를 대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시대 국경을 맞대는 한일 양국은 묵은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깊어져가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해결되지 않고 있는 양국의 문제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100여 년 전부터 일본이 한국에 행한 잊을 수 없는 악행이 바로 그 원인이 아닌가 싶다. 일제 강점기 국권을 빼앗고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벌인 다양한 정책의 기억이 남아 있고 해방이후 우리 스스로 일제 잔재를 올바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여기에 일본 정부가 그간 보여준 대한국 정책은 그러한 감정을 더 증폭시키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해결되지 못한 과거일로 인해 우리 스스로 발목을 밥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결되지 못한 것은 정당한 절차를 밟아 순차적으로 해결해 가면서 요구할 것은 분명하게 요구한다면 양국 모두에게 분명하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민족 간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이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간 보여준 양국 정부의 일련의 정책에 기인하고 있다.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양국 국민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화해 분위기를 정부의 정책은 역으로 돌려놓기에 일쑤다. 민간차원에서 오랜 시간 노력을 경주해 일궈온 국민들 사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등을 돌리는 결과를 정부들이 하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국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서나 양국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대의에서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한 사진작가가 일본을 지속적으로 일본의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옛 조선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노역을 해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유명을 달리해 찾기도 어려운 흔적들이지만 남아있는 곳을 찾은 것이다. 일본 내 조선인 강제징용과 그와 관련된 건축물에 대한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작가의 행보는 후쿠오카, 나가사키, 히로시마, 오사카,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일본 열도 곳곳을 다니며 군부대 진지, 탄광, 광업소, 댐, 해저탄광, 지하 터널, 비행장, 통신 시설 등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한이 서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 지금 현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은 말이 없다. 하지만 사진만큼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진에 담긴 모습들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담아내고 있다. 말이 없지만 말 없음이 오히려 강한 울림으로 다가선다. 저자의 발길이 머뭇거리고 때론 멈춰선 곳이 어디쯤일지 사진을 짐작하게 만들고 있다. 순전히 사진에 담긴 모습만으로도 지난 시간 조선인들의 삶을 되살리는 것처럼 말이다. 

“일제강점기 재일 조선인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됩니다. 현재 일본 내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철도 침목 하나가 조선인 한 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저자의 발길을 돕고 조선인 강제징용과 관련된 진실을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친 재일 한국인 배동록 씨의 말이다. 애써 외면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에서 울분을 토하지 않을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태도 또한 반드시 살피고 자나갈 일이다. 왜 당당하게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대변하지 못하는지를 말이다. 찾아간 곳 마다 조선인들의 피와 땀의 결실로 만들어 졌지만 유적을 보존하고 기념관이나 체험관을 운영하는 주체들은 어디에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일 양국의 공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 현 시대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현실은 양국의 화해와 공존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예견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무엇을 선행되어야 양국의 공종은 가능해 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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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빈 강씨 - 소현세자 부인
김용상 지음 / 멜론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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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의 세자빈이다
역사에서 치욕은 무엇일까? 외국의 침략을 받아 강압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일보다 더한 치욕이 있을까?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이름붙인 사건은 몇 번 있었다. 현재와 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역사에서는 청나라의 침략에 변변한 저항한번 해 보지 못하고 당한 인조 왕 때의 병조호란과 황후의 목숨까지 빼앗아간 일본의 침략에 어쩌지 못한 을사늑약이 있다. 이러한 치욕적인 사건의 원인 무엇일까? 막연하게 침략의 주범이 되는 외국의 탓으로 만 돌릴 수 있을까? 물론 일차적인 원인이야 침략한 외국에 있겠지만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정치가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김용상의 작품 ‘민회빈 강씨’는 우리 민족이 겪었던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인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의 세자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7세기 조선의 정치상황은 혼란을 거듭하는 시기였다. 광해군을 모라내고 왕에 오른 인조반정 후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한 논란과 인조반정의 주역들 사이에서 벌어진 세력다툼 등 이미 백성의 안위나 국력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만큼 안정되지 못한 정치 상황이었다. 정적 간에 죽고 죽이는 피를 부르는 정국은 왕이 왕의 권력을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왕위 계승문제에도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7년이 넘는 세월동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민회빈 강씨는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넘어선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다. 강한 조선을 꿈꾸며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며 훗날을 준비하는 것이다. 성리학이 주류를 이룬 조선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여인들의 삶은 대게 비슷했다. 그러한 여인들의 삶을 표현하는 바로 삼종지도가 그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세자빈 민회빈 강씨가 보여준 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당당함을 보여준다.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조선 최초 여성 무역상, 노예로 끌려와 고통 받는 조선인을 속환하기 위해 힘쓴 일,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접하면서 조선의 개혁과 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한 여인하며 미래 조선을 준비하던 모습은 현대의 눈으로 봐도 당당함이 넘쳐난다. 

저자는 이러한 ‘민회빈 강씨’의 모습에서 "이 시대 여성의 표상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소현세자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가 주목하고자 했던 바는 남성 못지않은 뛰어난 기개와 총명한 재능을 지닌 실용적인 여성 경영자라는 점과 현실을 파악하는 시대적 감각이 탁월할 뿐 아니라 미래 지향적 사고력을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상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서 저자의 시각으로 여성상을 찾는다면 바로 ‘주어진 현실을 주체적으로 개척해 가는 정신’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비운의 삶을 살았고 시아버지에 의해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이했던 세자빈 민회빈 강씨는 끝까지 조선의 여인, 조선 사람으로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나는 조선의 세자빈이다'라는 외침은 허공을 돌아 지상에 강한 울림을 전해준다. 

꿈에도 그리던 조선에 귀국 후 아버지 인조 왕의 태도에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과 심리적 압박이 얼마였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하여, 가정이 있을 수 없는 역사 앞에 가정을 해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가정을 하는 이유는 바로 현실을 올바로 바라보기 위함일 것이다.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준비하려는 마음이 역사의 가정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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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 - 태왕의 연인 여화의 비밀문서
정현웅 지음 / 자음과모음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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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발걸음이 모여 만들어진다
지나간 역사는 기록물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의 기록물은 종이게 의존하기 때문에 세월의 무게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그렇기에 역사를 보는 것은 매장유물이나 남아 있는 건물, 탑이나 비 등을 발굴하여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세월의 무게 앞에 자유롭지 못하기에 훼손되기에 이 역시 완전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더라도 역사 기록물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기록에 의존하여 역사를 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기록물에 대한 이해나 해석의 차이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 대두되며 올바른 역사로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뒤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호태왕광개토태왕비’다. 이는 동북아시아 고대사의 판도를 뒤집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에 이해 당사자인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유물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다분히 보는 사람에 의해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것이기에 ‘호태왕광개토태왕비’의 해석을 두고 일본이 주장하는 것이나 중국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처지도 같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밭침하는 여러 나라의 사료를 함께 검토하며 당시 시대상황을 종합하여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지난 시간의 기록물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거는 현재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근거가 되기에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정현웅의 ‘광개토태왕비’는 바로 그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전면에 두고 있다. 이는 현재 벌어지는 국제정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저자의 집필의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태왕의 여인이라는 비중 있는 인물을 설정하여 그 여인이 남긴 개인기록물과 역사서에 담긴 고대 동북아 질서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고구려 19대 왕 담덕에겐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들 중 이미 두 번에 걸쳐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었던 ‘여화’는 미모뿐 아니라 지방에 근거를 둔 할아버지의 배경으로 지혜와 용기 그리고 무술까지 겸비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황후로써 성에 머무는 것이 아닌 전장을 누비기도 하면서 태왕의 재사 역할까지 한다. 그녀가 고조선 이후 고구려의 역사를 정리한 역사서 발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이를 비밀스런 곳에 남겼다는 것이다.  

시점을 달리하고 있는 작품의 이야기 구성은 처음 시작이 한 대학교수가 중국 흘승골성에서 추락사한다. 자신을 둘러싼 음모가 있음을 알게 된 교수는 신문기자가 된 제자에게 문건을 남긴 비밀금고 열쇠를 주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을 세상에 발표하라는 말을 남긴 후 일이었다. 일본 학자와 정체가 불분명한 여인 그리고 신문기자가 중국 고구려 유적지를 함께 방문하고 교수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태왕의 황후가 남겼다는 역사서의 행방을 찾게 된다. 

두 시점이지만 주요한 흐름은 ‘여화’의 개인기록물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그 기록물은 한 남자를 사랑한 여인이 남자에 마음을 기록하며 당시 국제 정세를 비롯하여 고구려 내부의 정치상황 그리고 업적이 주요하게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 역사의 일면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는 작품의 제목 '광개토태왕'과 내용에서 표기된 '광개토대왕'의 차이가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매우 의문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나 전문가의 일만은 아니다. 한나라 국민 모두가 자신이 살아가는 나라의 역사를 올바로 알고 이를 후세에 전하려는 마음이 바탕이 되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이리라. 물론 국가의 정책을 책임지는 정부의 의지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근거가 될 것이기에 지금 정부의 역사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에 대한 도발에 대처하는 우리 정부의 대안은 그런 마음에 불안함을 전해주기에 심히 우려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역사는 지금 우리가 걸어간 발자국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우리 정부는 훗날 준엄한 역사의 평가를 어떻게 생가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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