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속)
특정한 꽃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여느 여름날 초등학생인 아이의 손을 잡고 지리산 칠불암에 올라 한적한 경내를 거닐다 언덕바지에 핀 상사화를 만났다. 그후로 여름이 끝나는 무렵이면 칠불암과 함께 떠오르는 꽃이다.

터전을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여러 종류의 상사화를 모았다. 각기 다른 색깔로 피며 특유의 느낌을 가진 꽃들이지만 몇몇은 구분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다양한 사연이 담긴만큼 하나하나가 특별하다.

한창 더울때 피는 상사화부터 구분이 쉽지 않은 붉노랑상사화과 진노랑상사화, 흰색의 위도상사화, 짠물 건너온 제주상사화와 매혹적인 붉은색 백양꽃, 붉기로는 으틈인 석산과 흰색의 석산에 이르기까지 제법 많은 꽃들이 순차적으로 핀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달려 있을 때에는 꽃이 없어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한 다는 의미로 상사화相思花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따지고보면 무릇 처럼 비슷한 식물이 있지만 유독 상사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늦거나 빠르다는 것은 사람의 기준이다. 꽃은 제 순리대로 알아서 핀다. 가장 늦은 흰색의 꽃무릇이 지면 꽃 따라 사람들 가슴에도 가을 바람처럼 그리움이 일렁일 것이다. '순결한 사랑'이라는 꽃말에 깃들 서늘함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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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30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상사화란 이름보다 꽃무릇이란 이름을 더 좋아해요^^
 

인생 제1낙樂

맑은 창가에 책상을 깨끗이 정돈하고,
향을 피우고,
차를 달여놓고,
마음에 맞는 사람과 더불어 산수를 이야기하고,
법서法書와 명화名畵를 품평하는 것을
인생의 제1낙樂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장서가와 서화수장가로 유명했던 담헌 이하곤李夏坤(1677~1744)의 말이다. 출사하여 입신양명을 중요한 가치로 치던 조선시대에 출세에 미련을 버리고 마음 맞는 사람과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무엇에 대한 가치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사람이 벗을 찾아 함께 누리고 싶은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가 아닌가 싶다. 깊어가는 가을이 주는 정취는 자기를 돌아보게 하며 사람과 사람의 사귐에 대해 성찰을 요구하는 시간이다.

같은 때 같은 곳에 머문다. 소회를 묻는 말에 오히려 특별한 것이 있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정신 없이 빠져나왔던 곳에 들어가 일년 전 그때를 되뇌여봤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다른가?

자유는 매이는 것으로부터 풀려남이니 마음이든 몸이든 평소에 무엇에 매일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 새삼스레 일상의 평범이 귀함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나에게 있어 인생의 제1낙樂은 무엇일까.

'침잠沈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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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는수요일



귀 떨어진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얻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지켰어야 할 약속과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장석주 시인의 시 '밥'이다. "마땅히 했어야 할" 무엇들에 잡혀 하루가 다 지났다.

#류근_진혜원_시선집 #당신에게_시가_있다면_당신은_혼자가_아닙니다 에서 옮겨왔습니다. (15)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나무물고기 #구례통밀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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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속내를 밝히면 이런 색일까? 다 붉지도 못하는 애달픔이 아닐까도 싶다. 무엇하나 혼자 저절로 이뤄지는 것 없음을 알기에 자연이 담고 있는 그 오묘함에 다시금 놀란다.

잔디의 뿌리의 도움으로 꽃피고 열매 맺는 타래난초 처럼 억새의 뿌리의 도움으로 꽃을 피운다. 연분홍 속살을 오롯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제 할일을 다 했다는 듯 빙그레 웃는다.

'야고'는 억새에 의해 반그늘이 진 곳의 풀숲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기생식물이다. 꽃은 8∼9월에 연한 홍자색으로 원줄기 위에 한 개의 꽃이 옆을 향한다.

담뱃대더부살이·사탕수수겨우살이라고도 한다. 꽃이 피었을 때 꽃대와 꽃 모양이 담뱃대처럼 생겨 담뱃대더부살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올해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늦게 만났더니 온전한 색을 보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무엇이든 제 때를 만나야 온전히 볼 수 있지만 못 본것 보다는 나으니 그것만으로도 좋다.

야고는 한자로 野菰라 쓰는데, 들에서 자라는 줄풀이라는 의미이다. '더부살이'라는 꽃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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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影自贊 사영자찬

貌有形 모습에는 형상 있고
神無形 정신에는 형상 없네
其有形者可模 형상 있는 것은 그릴 수 있지만
無形者不可模 형상 없는 것은 그릴 수가 없네
有形者定 형상 있는 것이 정해져야
無形者完 형상 없는 것이 온전하다네
有形者衰 형상 있는 것이 쇠하면
無形者謝 형상 없는 것은 시들해지고
有形者盡 형상 있는 것이 다하면
無形者去 형상 없는 것은 떠나간다네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자기의 초상화를 보고 쓴 글이다. 23세 젊은 때를 그린 초상을 늙고 쇠잔한 때에 마주보는 감회가 담겼다.

삶을 돌아본다는 것은 죽음에 임박한 때나 늘그막에 와서 기운빠져 할 일이 없을 때나 하는 일일까. 가끔 접하는 옛사람들의 글 속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음 가짐을 다잡는 글이 많다. 모두 자기성찰에 중심을 두고 있다.

셀카가 일상인 시대다. 어느 시대보다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시대를 산다. 셀카를 찍으며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모습들이 참 좋다. 겉모습 뿐만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로 삼는 이런 노력이 더해지면 뒷모습도 그만큼 아름다워진다고 할 수 있을까.

한나절 물매화 핀 풀숲에서 어슬렁거리며 놀았다.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것보다는 다른 것을 탐하는 마음이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지나고보면 맹숭맹숭한 그것이 심중에 남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처음 눈맞춤하는 붉은 기운의 그것보다 치장하지 않은 민낯의 모습이 더 오래 기억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전히 낯설기만 한 내모습이다. 물매화를 보며 심중에 그려가는 내모습이 이랬으면 싶다. 부려도 좋을 욕심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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