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의 비녀 같은 옥잠화玉簪花

天香荏苒透羅帷 천향임염투라유

雪魄氷魂白露滋 설백빙혼백로자

欲識玉簪眞面目 욕식옥잠진면목

請君看取未開時 청군간취미개시

풍겨오는 고운 향내 깁장막에 스며드니

흰 눈의 넋 얼음 혼이 흰 이슬에 젖었구나.

옥잠화의 진면목을 알고자 할진대

채 피지 않았을 때 그대여 와서 보오.

*조선, 세종 때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가 안평대군의 〈비해당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에 화답해 지은 〈옥잠〉시다. 흰 빛의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읊었다.

“옥잠화에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백학선(白鶴仙)이고 다른 하나는 백악(白萼)이라고 한다. 꽃이 하얗고 길이다 두 세 치쯤 된다. 꽃 모양은 밑둥이 적고 끝이 뾰족하다. 활짝 피기 전에는 마치 백옥으로 된 비녀처럼 생겼으므로 옥잠화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옥잠화의 잎은 질경이와 비슷하다. 여러 잎사귀가 뻗은 밑둥에서 줄거리가 솟아나 오뉴월이 되면 줄거리에서 가는 잎이 돋아나고, 줄거리와 가는 잎 사이로 열 몇 개의 꽃떨기가 나온다. 꽃이 필 때는 먼저 꽃 머리의 사면이 조금씩 터지면서, 터진 곳으로 황색의 꽃술이 비죽 나와 아주 좋은 향기가 물씬 풍긴다.”

뜰을 마련하고 하나 둘 식물을 심고 가꾸면서 꼭 들이고 싶은 것이 이 옥잠화였다. 비녀처럼 생겼다는 그 생김세도 좋지만 색깔인 ‘백옥’에 주목했다. 쉽게 물들거나 상하기 쉬운 흰색이지만 곱고 귀한 분위기의 그 느낌이 좋아 기꺼이 들였다. 뜰 한쪽 그늘진 곳에 있지만 꽃 필 때쯤이면 빈번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나저제나 꽃 필 날을 기다린다.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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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 운치를 지닌 패랭이꽃

節肖此君高 절초차군고
花開兒女艶 화개아여염
瓢零不耐秋 표령불내추
爲竹能無濫 위죽능무남

절개는 대나무의 높음 닮았고
꽃 피면 아녀자의 고움이 있네.
흩날려 가을철도 못 견디노니
대나무 되기엔 외람되도다.

*고려 사람 이규보의 시〈석죽화〉다. 이규보는 “고금을 통털어 모란시를 가장 많이 지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마음이 성에 차지 않아, 샅샅이 찾아가며 온갖 꽃을 다 읊고, 마침내 석죽화에까지 그 날카로운 시의 붓을 향하였다.”

석죽화의 속명이 패랭이꽃이다. 초립동이가 쓰는 모자인 ‘패랭이’와 비슷해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석죽화는 바위틈이나 산중의 건조한 곳에 자생하는 평범한 꽃이다. 하지만 그윽한 운치가 있고, 심으면 잘 나고, 옮겨 심어도 잘 살기 때문에 원예가들이 즐겨 재배한다.”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의 석죽화는 다만 붉은 색 뿐이지만, 중국산은 5색의 꽃이 다 있다”고 했다.

世愛牧丹紅 栽培滿院中 세애목단홍 재배만원중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수지황초야 역유호화총
色透村塘月 香傳隴樹風 색투촌당월 향전롱수풍
地偏公子少 嬌態屬田翁 지편공자소 교태속전옹

세상사람 모란 붉음 사랑하여서
동산에 하나 가득 기르는구나.
뉘 알리 황량한 들판 위에도
또한 좋은 꽃떨기 숨어 있음을.
빛깔은 방죽 달빛 스미어들고
향기는 언덕 나무 바람에 오네.
땅이 후져 공자님 찾지 않으니
교태를 농부에게 맡기는구나.

고려 때 시인 정습명(鄭襲明)의 시〈영석죽(咏石竹)〉이다. “석죽화가 아리따운 자태는 여름철에 사랑을 받는 봉선화만 못하고, 그윽한 운치는 겨울철에 맑게 피는 수선화에 미치지 못한다. 곱기로는 저 모란꽃의 발치에도 서지 못하고, 가녀린 것은 양귀비꽃을 바라보지도 못할 것이다. 또 순결한 자태는 숲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하얗게 피어 있는 백합에 비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하겠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정습명은 굳이 이런 평범한 꽃을 즐겨 예찬하였을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푸더분한 아내가 비록 자색이 빼어나지는 않아도 오히려 가정의 사랑과 기쁨을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석죽화는 시골 사람에게 볼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매년 낮은 산과 들에 봄꽃이 지고나면 지리산 노고단에 오른다. 높은 산에 피는 꽃을 보기 위함이다. 여기쯤 무슨 꽃이 피었는데 라며 두리번거리는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그곳 중 하나에 이 꽃이 핀다. 그것도 꽃잎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술패랭이꽃이다. 바람이 많은 곳에서 바람따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좋아서 매번 놓치지 않고 눈맞춤 한다.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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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을 잊게 하는 풀, 원추리

不惟萱草忘憂 불유훤초망우
此花尢能醒酒 차화왕능성주
훤초는 근심을 잊게 해주고,
모란은 술을 잘 깨게 해준다.

당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청화궁(淸華宮)에 놀러가서 양귀비의 어깨에 기대 모란을 감상하다가, 한 가지를 꺾어 양귀비와 함께 번갈아 맡아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훤초(萱草)는 우리말로는 원추리다. 《산림경제》에 훤초의 다른 이름은 망우초(忘憂草)니 사람이 이 꽃을 보면 곧 근심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초목기(草木記)》에는 훤초를 일명 의남초(宜男草)라 하는데, 부인이 임신했을 때 이 꽃을 차고 다니면 반드시 아들을 낳게 되므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한다.

堂栽不老桃 당재불로도
庭養忘憂萱 정양망우훤
집에는 늙지 않는 복숭아 심고
뜰에는 근심 잊자 원추리 기른다네.

성종 때 유학자로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죽음을 당한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雨餘階畔綠芽長 우여계반록아장
日午風輕翠影凉 일오풍경취영량
繁枝亂葉眞多事 번지란엽진다사
我正無憂賴爾忘 아정무우뢰이망
비 갠 뒤 뜰 가에 초록 싹이 길더니만
한낮에 바람 솔솔 그림자가 서늘하다.
숱한 가지 얽힌 잎이 참으로 일 많으니
네 덕분에 다 잊어 아무 시름 없노라.

세종 때 집현전 학사인 신숙주의〈비해당사십팔영〉중에서 원추리를 노래한 시다.

*원추리 편에서는 다른 꽃과는 달리 생태적 특성이나 재배할 때 유의할 점, 식용에 관한 정보까지 식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른 봄 원추리 새싹은 나물로 막을 수 있고 여름에는 제법 큰 꽃을 피워 눈길을 사로잡는다.

시골로 일상의 근거지를 옮기고 주변을 살피는 도중 원추리 새싹을 뜯어 나물로 먹었다. 입안에 머무는 달콤한 향내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덕유산 중봉이나 지리산 노고단 등 여름에 높은 산에 오르면 원추리 군락을 만날 수 있는데 안개와 만나면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어 그곳을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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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한 채로 지는 능소화凌霄花

“서울에 이상한 식물이 있는데, 나무에는 백송(白松)이 있고 꽃으로는 자위(紫葳)가 있다. 자위는 달리 능소화라고도 하는데, 중국이 원산이다. 수백 년 전에 조선 사신이 연경에 가서 가져다가 심은 것이라 한다. 그다지 아름다운 꽃은 아니지만, 매우 보기 드문 꽃으로 유명하다.”

화하만필 능소화 편의 머릿글이다. 중국 원산으로 매우 보기 드문 꽃으로 소개한다. 여기에 더해 이동운(李東芸)이 소장한 《한성지략(漢城識略)》 하권 각동조(各衕條)와 사묘조(祠廟條)에 능소화에 대해 이러한 기사가 실려 있다고 전한다.

“백운동은 인왕산 아래 있다. 월성위궁(月城尉宮)이 이 거리에 있다. 월성위 궁에는 능소화가 있는데, 6,7월 사이에 꽃이 피니 주황색이다. 덩굴이 노송 위로 나온다. 또 북송현(北松峴)의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 대감 댁에 홀로 능소화가 있다.”

“덕흥부원군의 사당은 사직동에 있다. 적장손(嫡長孫)이 대대로 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데, 사당의 앞 뒤에 능소화가 있다.”

화하만필에서는 능소화에 대한 식물학적 특성도 빼놓지 않고 설명하고 있다.

“능소화는 덩굴로 자라는 나무다. 다른 나무나 담벽을 타고 올라가 거기에 붙어서 산다. 그 잎은 등나무 잎과 같고, 꽃은 주황색으로 나팔꽃과 비슷하게 생겼다. 6,7월 복중(伏中)에 피어 꽃 피는 기간이 한 달 반에 이른다. 꽃이 질 때는 꽃받침 채로 떨어지므로 시들지 않고 싱싱한 채로 떨어져 땅에서 시든다. 이것이 이 꽃의 한 가지 특징이다.”

*지금 사는 집을 마련하고 능소화 가지 하나를 얻어와 들고나는 대문 옆 담장아래 심었다. 몇 년 사이에 담장 위로 자란 능소화가 하나 둘 꽃을 피우더니 지난해부터는 여름 동안 풍성하게 꽃잔치를 벌린다. 능소화가 주는 매력을 보고자하는 마음이 시작이었지만 한편으로 집을 찾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꽃을 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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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07-12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닥에 진 능소화를 한참 봤는데 이런 꽃이었군요. 잘 읽고 갑니다.
 

수도하는 여승의 청초함, 도라지꽃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가 스리살살 녹는구나

*민요 도라지 타령 중 일부다.
“도라지꽃은 청초하다. 한자로는 길경화桔梗花다. 한 송이 푸른 꽃이 산뜻하게 피어 있는 것을 볼 때, 텁텁하던 눈이 갑자기 밝아지며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도라지에 대한 민요는 많으나 주로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인 것에 주목하고 관상용으로 꽃에 관한 이야기를 남긴 것은 드물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도라지꽃에 관한 옛시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화하만필에서는 “도라지꽃으로 말하자면 잎과 꽃의 자태가 모두 청초하면서도 어여쁘기만 하다”며 “다른 꽃에 비해 고요히 고립을 지키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적막한 빈산에 수도하는 여승이 혼자 서서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시골에 자리를 잡고 퇴근 후 주로 한 일은 소일삼아 동네를 둘러싼 야산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한적한 산길을 걷다가 만난 산도라지 꽃이 어찌나 반갑던지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요즘도 여전히 드문드문 만날 수 있지만 식용보다는 꽃으로 먼저 보이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

남쪽에 장마가 시작된다며 비오는 것보다 더 요란스러운 일기예보가 연일 이어진다. 비가 제법 내리고 잠시 소강상태에 길을 나섰다. 길가에서 한창 꽃 피어 손짓하는 도라지 밭을 보았다. 차를 돌려 그곳으로 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와 함께 한동안 눈맞춤 했다. 올해는 유독 여기저기 도라지꽃이 자주 보인다.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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