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 허난설헌 시선집
나태주 옮김, 혜강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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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어두었지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난설헌허초희(1563~1589)의 시 '연밥 따기 노래전문이다풀꽃시인 나태주의 편역으로 발간된 시집을 만났다. "시문의 영원함이여영광이여난설헌시인은 죽었어도 여전히 오늘에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난설헌에 대한 나태주 시인의 시각이 그대로 나타난 문장에 멈춘다.

 

여인의 속내가 고스란히 담긴 시에서 연꽃 피어나듯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른다반나절 부끄러웠다는 그 마음에 깃들어 있는 연꽃향기를 무엇으로 다 짐작할 수 있을까읽고 또 읽으며 반복한다.

 

익히 알다시피 난설헌은 허균의 누이로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이다스물일곱 송이 꽃이 책 다 피기도 전에 지고만 안타까움을 뒤로하고라도 그 삶을 반영하듯 애달프기 그지없는 시를 온전히 읽어낼 모진 마음이 서질 않는다시마다 맺힌 아픔이 읽는 이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힘을 거스를 수 없기에 한 편의 시조차 온전히 읽어낼 힘이 없다시인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여인이 감당해야할 몫이 얼마나 큰 무게로 다가왔을지 상상을 불허한다겨우 시에서 풍기는 느낌으로 짐작할 뿐이다.

 

남편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던 부인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시대를 앞서간 여인의 삶을 각기 다른 영역으로 분리할 수 없듯이 난설헌의 시에 담긴 감정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지극한 슬픔이 한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만큼 큰 무게로 안겨왔으면 이토록 진한 슬픔으로 넘칠까.

 

페이지마다 흘러넘치는 애달픔을 만회하려는지 화려하기 그지없는 그림으로 치장된 책은 그것으로 인해 더 큰 슬픔을 불러온다과유불급일까화려함의 극치가 지나쳐 시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방해하기도 한다그림만 보면 나무랄데 없는 작품이나 왠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나태주 시인의 감성이 난설헌의 마음과 만나 훨씬 깊고 풍부한 슬픔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50여 편의 시 하나하나가 모두 절창이다그 중심에 한과 슬픔을 폭로하는 감정의 극한을 표출한 것은 난설헌의 시가 갖는 특정인지 편역자의 적극적인 개입인지 의문이다쉬이 넘길 수 없는 페이지를 붙잡고 오랫동안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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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는 그릴 수밖에 없는 - 시각예술작가 아홉 명의 진솔한 그림 에세이
나현정 외 지음 / 청색종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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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는

주말을 이용하여 아트페어에 다녀왔다다닥다닥 붙어 있는 부스에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이 오밀조밀하게 걸려 있었다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쳐가는 이들의 노고가 한곳에 모여 있기에 보는 이들은 짧은 시간동안 한 공간에서 호사를 누린다수많은 작품들 사이를 얼핏 스치듯 지나가다보면 발걸음을 붙잡고 이야기를 걸어오는 작품을 만날 때면 누리는 호사는 배가 된다.

 

무엇이 발걸음을 붙잡게 하는 것일까작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이와 그런 작품을 통해 자신을 만나는 이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가 만나면서 일어난 일이다화가의 작품에서 자신이 끼어들 틈을 발견하는 일그것이 작가와 관람객이 소통하는 동기가 될 것이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니 화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되고 관람객은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면 된다.

 

아트페어든 전시회나 미술관 등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들은 늘어나지만 일반인이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그렇기에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은 매체를 만난다는 것은 소중한 기회가 된다.

 

시각예술작가 아홉 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 '그럴 수밖에 없는 그릴 수밖에 없는'은 그런 의미에서 작가들의 작품 활동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현정박혜원정정화양해영이록현송호철현병연안성진김흥민” 등 아홉 명은 서울 문래동이라는 공간적 활동 영역이 같다는 공통점에서 출발하지만 각기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

 

"드로잉회화설치조각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을 하는 시각예술작가 아홉 명이 모였다봄부터 매달 세미나를 열고 자기의 작품세계를 중심으로 담론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함께했다화가들은 어떤 고민을 하는가어떤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가이들의 세계는 어디로부터 출발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작가들이 모인 이유는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고 충돌하며 일어나는 새로운 작용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개성 강한 예술작가들의 담론강한 개성으로 어쩌면 더 큰 공감을 불러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범주를 넓히고 보면 시각예술작가라는 테두리 안에 들지만 구분하자고 보면 개성은 천지차이가 된다지극히 사소한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조금은 넓은 의미의 지역 공동체의 당면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는 작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다어쩌면 당연한 그것이 낯설게 다가와 깊은 그림자를 드리울 때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을 만나는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이 점에서 작가든 그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는 이든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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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의 사람
최옥정 지음, 최영진 사진 / 삼인행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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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볕 좋은 가을날의 오후가 볕바라기를 하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만큼이나 여유롭다가을이 주는 독특한 햇살의 질감이 얼굴에 닿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이 햇살의 질감은 봄과 여름을 무사히 건너온 여유로움이 있기에 가능한 마음가짐일 것이다계절의 가을과 삶의 가을이 닮은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그 여유로움처럼 넉넉한 책을 만난다.

 

오후 세 시의 사람을 통해 사진작가 최영진과 글 작가 최옥정 남매가 건네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물음 속을 걷는다삼십 대 중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글 작가 최옥정은 소설은 픽션이지만 한 줄도 삶과 동떨어진 가짜여서는 안 된다는 다짐으로 “'소설은 진짜여야 한다.”고 강조한다그에 걸 맞는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담았다.

 

팽팽하게 돌아가는 일상의 긴장을 늦추고 사진과 글 사이를 서성이게 한다다소 느린 속도로 천천히 걸어야만 된다는 의무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여백이 넓고도 깊다정제된 언어로 군더더기 없는 글이 주는 담백함이 긴 호흡을 요구한다문장과 문장 사이를 건너는 속도는 느려지고 멈추길 반복하지만 끊어짐은 없다.사진 한 장에 글이 한 편씩 붙어 저절로 오는 긴장감을 사진이 주는 넉넉한 여백으로 인해 풀어지곤 한다.긴장과 이완의 적절한 조합이 남매의 깊은 정을 바탕으로 한 때문은 아닐까 싶다.

 

얻을 게 없어도 시선을 붙든 것에 마음을 한참 걸어 두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눈)

 

눈물을 훔치려 꽃밭에 간 사람이//꽃에게서 웃는 법을 배운다” (꽃의 말)

 

나는 좋아하는 건 너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너무 싫어해서 탈이다//그리고 내 인생은 대체로 너무 좋아하는 것들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비 맞은 풀잎이 되어)

 

뭐가 써 있을까//떨리는 마음으로 펼쳤던 당신의 첫 페이지” (당신의 첫 페이지)

 

사진도 글도 느긋하지만 늘어지지 않고채근하는 듯 하지만 오히려 다정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오후 세 시, “그림자가 서서히 길어지는 시간이자 볕의 온기가 까칠함은 누그러뜨리는 때다가을날의 오후 세 시는 그렇게 다가온다.

 

이 책에 담긴 사진과 어울리는 글들이 유독 오랫동안 서성이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또 너무 늦게 만났는지도 모른다글맛에 이끌려 글 작가 최옥정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2018년 9월 13일 앓던 병으로 인해 세상과 이별을 했다고 한다지극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늦게나마 글로 만났으니 다행이라고 억지스러운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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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처네 (반양장) - 목성균 수필전집
목성균 지음 / 연암서가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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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위로를 받다

연암 박지원의 글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호곡장론’ 이옥의 남자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나도향의그믐달’ 등은 찾아서 즐겨 읽는 글이다이 글들을 통해 글이 담아야할 그 무엇에 대해 하나씩 알아간다이와 같은 맥락으로 매우 흥미로운 글을 쓰는 이를 만났다.

 

저자도 저자의 글도 늦은 만남이다이미 이 세상과 이별한 사람이라 만날 수 없지만 그의 삶의 본성이 담긴 글이 있어 늦은 만남을 할 수 있었다. "죽어서 살아 돌아온 수필가라는 이 표현이 담고 있는 것은 뒤늦게 주목 받았다는 이야기 일 것이니 무엇이 어떤지는 접해봐야 알 것이다.

 

목성균은 “1995년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시적 언어 구사력과 탄탄한 구성력으로 작고 하찮은 것평범한 것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생명력 있는 수작들을 빚어내어 2003년 명태에 관한 추억을 출간하는 등 의욕적으로 작품을 쏟아내다 이듬해 세상을 떠난 수필가라고 한다. ‘누비처네는 그가 남긴 수필을 모아 엮은 책이다.

 

천상 이야기꾼이다짧은 글 속에 하고자 하는 의미를 잘도 풀어내고 있다할아버지가 사랑방에서 손자를 앉혀놓고 조근조근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과 같이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일상에서 만나는 지극히 사소한 대상에 주목하고 그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 의미를 갖게 되는 계기를 잡아내 삶의 희노애락을 다독이고 있다애써서 웅변하지 않지만 글이 가지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기억 속 가물거리던 추억이 현실로 되살려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게 하지만 그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때 내 손을 꼭 잡던 자기 얼굴을 달빛에 보니 깎아 놓은 밤 같았어.” (누비처네)

 

심지는 깨끗한 창호지로 하는 거여그래야 맑은 불빛을 얻을 수 있지심지 굵기는 꼭지에 낙낙하게 들어가야 해굵으면 꼭지에 꼭 끼어서 기름을 잘 못 빨아올리고가늘면 흘러내리느니그리고 꼭지 끝에 불똥을 자주 털어 줘야 불빛이 맑은 거여.” (등잔)

 

곶의 안쪽이 만이고포구는 만 안에 있다곶이 만을 감싸고 포구는 남편 잘 만난 아낙네처럼 얌전하게 만의 품에 푹 안겨 비 맞고 몸부림치는 곶 끝의 으르렁거림에도 불구하고 혼곤하게 잠들어 있다.” (장마전선을 넘어)

 

글의 흐름을 따라가다 만나는 문장 하나가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아 다시금 글 속으로 이끌어간다문장을 건너가는 호흡이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놓치지 싫은 감정이 이입되어 자꾸만 문장 사이에서 멈춘다상황을 묘사하는 탁월한 문장에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다 속으로 그렇지’, ‘...맞다’ 와 같이 맞장구를 친다.

 

시대가 변했다지만 사람 살아가는 일은 겉모습의 달라짐에 있지 않다서로 의지하고 아껴주며 울고 웃으며 더불어 사는 세상의 근본 바탕엔 무엇이 깃들어 있어야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그의 글은 따스한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다독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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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닥토닥, 숲길 - 일주일에 단 하루 운동화만 신고 떠나는 주말여행
박여진 지음, 백홍기 사진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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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그 특별함을 일상으로

지난 늦은 봄 이른 길을 재촉하여 안면도 솔숲을 찾았다제법 먼 길이었지만 이른 아침 솔숲 향기를 맡으며 그 숲에 핀 꽃을 보고자 함이었다아침 햇살이 채 숲으로 들기 전이라 느긋한 마음으로 솔숲을 걸으며 찾고자 하는 꽃의 위치와 분포 정도를 확인하는 동안 소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그 빛을 받은 꽃을 마음에 품듯이 카메라에 담았다숲에서 벗어나 만나는 가슴 후련하게 확 트인 서해바다는 덤으로 얻은 행복이었다.

 

이런 나들이는 눈 쌓인 이른 봄부터 서리 내리는 늦은 가을까지 꽃을 본다는 핑개로 산으로 들로 다닌다때론 높고 험한 산을 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숲길에서 머문다그러는 사이 꽃이 피고 지는 숲은 다정한 벗이 되었다.

 

'토닥토닥숲길'은 바로 이런 숲과 그 숲을 찾아가는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번역가 아내 박여진과 기자 남편 백홍기가 전국을 누비며 찾아낸 가장 걷기 좋은 아름다운 산책길 62곳을 소개한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따라 걷는 강화 교동도에서 출발한 여정은 여운이 짙게 남는 신비한 숲 영월을 지나 흔적만 남은 성곽 아래 평화로운 공주를 거치고 늙은 느티나무를 따라 세월을 돌아보는 괴산에 머물다 발길 닿는 곳마다 삶이 반짝이는 바닷가 마을 남해 미조항천하마을물건마을노도에서 멈춘다북에서 남으로서쪽에서 동쪽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나선 길이지만 무리수는 두지 않는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어쩌다 한번 있을까 말까하는 년 중 행사처럼 치루는 거창한 나들이가 아니다그들이 여행길에서 만끽했던 모든 맛과 멋의 중심에서 주목한 것은 쉽고 일상적이며 반복된’ 나들이에 있다.큰 비용이나 거창한 준비가 없어도 되는 나들이그 중심에 걷기가 있고숲이 있고마을이 있으며사람이 있다. "일주일에 단 하루 운동화만 신고 떠나는 주말여행"이기에 가볍고 부담스럽지 않다뿐만 아니라 여행안내서 답게 현지의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정보가 담겨있다.

 

인근 큰 도시에서 이웃마을로 이사 온 부부와 길을 나섰다차로 10분이면 도착하는 그곳에는 임도가 나 있고 그 임도를 차로 오를 수 있고 산 중턱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다암자 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임도를 따라 한적한 숲길을 걸었다암자의 유래와 지금은 사라진 비자나무를 이야기한다모퉁이를 몇 개 돌아서 만나는 반대편 산 아랫동네를 보며 자신이 이사 온 마을의 위치를 확인하며 이사 오길 잘했다며 환하게 웃는다숲길을 벗어나며 도시락 싸 들고 다시 찾자는 약속을 한다.

 

굳이 먼 길을 나서지 않아도 좋다는 이야기다이 책의 주인공들이 주말마다 길을 나서듯 가까운 곳을 반복적으로 찾아서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그곳이 어디인가도 중요하지만 얼마만큼 자주 누리느냐에 주목하고자 한다그것이 '토닥토닥숲길'이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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