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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파잡기 - 조선 문화예술계 최고의 스타, 평양 기생 66명을 인터뷰하다 ㅣ 18세기 지식 총서
한재락 지음, 안대회 옮김, 신위 비평 / 휴머니스트 / 2017년 11월
평점 :
평양 기생들의 삶과 예술
눈에 보이는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갖지만 그것들이 지향하는 방향성은 늘 한가지로 모아진다. 책, 꽃, 나무,음악, 그림 등으로 나타나는 관심사가 사람에게로 모아지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 본질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향점이 사람에게로 모아진다고 하더라도 각기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엄격한 남녀 구분이 확실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시대에 그것도 여성이고 기생이라는 특수 신분을 가진 사람에 대한 평은 금기사항이기도 했다.
한재락의 ‘녹파잡기’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집필된 특수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녹파잡기는 한재락이 1820년대 평양에서 가장 뛰어난 기생 66명의 시·서·화는 물론이고 춤과 노래, 연주를 일일이 감상하여 직접 인터뷰한 책이다. 여기에 기방 주변 명사 5명을 더했다. 한재락은 그들의 예술 세계와 삶의 애환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으며, 여기에 당대 문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신위, 이상적, 강설이 각각 비평과 '제사', '서', '제시'를 덧붙였다.
조선시대 문화예술의 한 축을 담당했던 기생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더불어 이 책을 쓴 한재락 역시 주요한 관심사 중에 하나다. 박지원, 이가환, 박제가, 이학규, 유득공, 이상적, 신위 등 조선 후기를 독특하면서도 당당하게 살았던 이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고 하니 그 흥미로움이 배가 된다.
"우아하고 차분하며 단정하고 소박하다, 또한 따듯하고 고아하며 총명하고 민활하다. 사람됨은 국화꽃처럼 담박하고, 재주는 비단처럼 뛰어나다." 기생 영희에 대한 평가 중 일부다. 고졸하고 독특한 문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어 사람됨에 주목하고 있다. 이렇게 짧은 들로 66명의 기생에 대해 각기 독특한 평가를 하고 있다. 여기에 양염처럼 맛을 더하는 “나를 대신하여 일지홍에게 말 좀 전해주게. 평소의 뜻이 참으로 기이하구나. 그러나 황금 한 바구니와 진주 한 말을 물리치는 일도 어렵단다. 그대의 뜻을 채우려면 아무래도 지렁이가 된 뒤에야 가능할 뿐이야.” 와 같은 신위의 비평은 웃음을 자아내는 한편 한재락이 평가하는 대상을 더욱 빛나게도 한다.
‘녹파잡기’는 조선 사회에서 천한 대접을 받았던 기생만을 따로 모아 그들의 용모와 예술적 소양 등을 평가하여 기록을 남겨놓았다. 조선시대 단행본 중에 기생을 주제로 한 유일무이 한 책이다. 평양 기생들을 중심으로 당시 기생들의 삶과 예술은 물론 평양 지역의 풍속과 문화까지 꼼꼼하게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사람에 대한 평이 이렇다면 남녀의 구별이나 신분의 귀천을 떠나서 사람을 보는 태도가 참으로 귀하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길 바라지만 한 발 나아가 누군가를 이런 눈으로 볼 수 있길 소망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안에 담긴 빛으로 세상을 본다. 누군가의 전아함을 알아볼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갈고 닦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