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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나에게 경계를 가르는 무엇, 흰
무디고, 더디며, 답답하다. 긴 호흡이 필요해 수시로 책장을 덮고 먼 산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소설‘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에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까지 내리 읽어오면서 느꼈던 소감이다.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는 작가 한강의 방식에서 얻는 그 느낌은 여전히 함께하며 최근 발간한 소설 ‘흰’을 마주한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작가 한강의 최근 소설 '흰' 의 첫 부분 '나'의 도입부다. 긴 호흡으로 한강의 여섯 권을 내리 읽어오면서 이제 내가 가진 마지막 작품을 손에 들었다. 그간 읽어온 작품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 '흰'에서는 다른 만남이 되길 바란다.
흰,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 다양한 색과 그로부터 각기 다른 감정을 얻을 수 있는 단서로 읽힌다. 그렇게 읽은 흰이라는 단어 속에서 내게 각인된 이미지는 하얀 운동화다. 고등학교 일학년 딱 일 년 간 누렸던 꿈같던 그 시절을 대표하는 물건이다. 교복 자율화 시대가 오기 이전 다니던 고등학교는 비교적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당시 학생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학생모를 과감히 탈피하여 중절모를 교모로 선택하고 신발 자유화에 두발까지 비교적 자유로운 학교생활이었다. 점정모자에 검정운동화에 가방까지 모두 검정색 일색인 시절,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자유 그 자체였다. 그렇게 떠오른 시절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하얀 운동화다. 하얀색의 테니스화 그것은 단순히 신발을 넘어 고등학교 일학년의 자유 자체였다.
그렇다면 작가 한강에게 흰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목록 작성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이 작품은 ‘나’와‘그녀’와 ‘모든 흰’이라는 세 개 카테고리 속에 총 65개의 이미지화된 단어가 등장한다. 한 사람의 가족사이고 성장기이기도 하며, 자기고백을 넘어 스스로와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의 근원적 물음에 대한 성찰의 결과로도 읽힌다. 그만큼 밀도 있게 이미지화된 단어들에 대해 그려가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베어나기 때문이다.
짧은 문장에 건조한 문장이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여전히 무게감으로 다가오지만 순간순간 숨을 쉬며 자신을 돌아볼 틈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 틈에는 “견고해 보이는 기준이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들을 영상,사진, 퍼포먼스, 설치 등을 통해 표현한다.”는 미술가 차미혜의 사진도 한 몫 한다.
작가 한강의 작품에서 오는 무게감으로 버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지만 여전히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추구하는 길에 숨 쉬는 틈과 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