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풀린

자유로운

천성,

예술 속에서

살아나다"

 

 

 

오원 장승업(張承業) 호취도(豪鷲圖)

19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담채

 

취화선임권택 감독, 최민식 주연의 영화에서 만난 장승업은자유였다. 사회적 제약과 신분적으로부터의 구속을 벗어버리고 싶은 갈망을 보았다. 그에게 그림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무수히 많은 일화와 기이한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장승업의 삶에서 그림은 그의 전부였을 것이다.

 

장승업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이는 '호취도'의 독수리를 보면 살아 숨쉬는 장승업의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싶다. 취화선에서 지붕에 걸터앉아 울부짓던 장승업의 모습이 겹쳐진다. 위의 매는 살기등등한 눈매와 날카로운 부리로 금방이라도 먹이를 향해 달려들 것처럼 보이며 아래의 매는 막 사냥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지 조용히 앉아있다. 이처럼 상반된 모습의 두 마리 독수리가 화면을 장악하고 있다.

 

땅 넓고 산 드높아 장한 의기 더해 주고(地闊山高添意氣)

마른 잎에 가을 풀 소리 정신이 새롭구나(楓枯艸動長精神)

 

화제를 쓴 이는 정학교(丁學敎, 1832~1914, 조선말기의 문인서화가로서 장승업의 작품에 화제를 많이 썼다). 호취도의 독수리와 화제의 글씨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시와 그림에서 그린 이와 글쓴이의 마음이 저절로 통한 경지가 아닌가 싶다.

 

화폭에 선득하니 차가운 바람이 인다. 그것은 자연의 바람이 아니다. 기인奇人 장승업이 큰 붓에 진한 먹물을 듬뿍 묻혀 사납게 휘둘러 댄, 고삐 풀린 천성의 자유분방함이 일으킨 회오리바람인 것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나무는 나무, 독수리는 독수리, 풀잎은 풀잎이다. 어느 하나 틀에 맞춰 그린 것이 없으니, 과장과 왜곡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넘쳐나는 이 생명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이기 이전에 움직임이고, 보고 있는 동안 그대로 음악이다.”호취도에 대한 오주석의 평이다.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 단원(檀園) 김홍도와 혜원(蕙園) 신윤복과 비교해 자기가 그들 보다 못하지 않다는 자신감에서 나 자신도 원()”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말기에 근대회화로의 전통을 이어간 장본인이다. 산수, 인물, 영모, 기명절지, 사군자 등 다양한 화목을 모두 잘 그렸다. 술을 너무 좋아해 취명거사(醉瞑居士)라는 호를 짓기도 했다. 왕의 명으로도 잡지 못한 장승업은 그림 속에서 진정 자유로웠던 장승업이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대는 어찌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처럼

변함이 없는가?"

 

 

추사 김정희(金正喜) 세한도(歲寒圖)

조선 1844, 종이에 수묵, 국보 제180

 

시절이 하 수상타. 세상이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느라 분분하니 흙먼지 인다. 어제의 벗이 손바닥 뒤집듯 오늘의 원수가 되고, 그렇다고 진정 미운 사람도 없어서 누구하고나 쉽게 손을 잡고 웃음을 판다. 어느 세상엔들 이런 한심한 꼴이 없었으랴만, 돌이켜보면 세상이 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오주석이 세한도를 이야기하며 첫머리에 꺼낸 이야기다. 150여 년 전,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지에서 느낀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오늘의 현실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옛글에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사람은 그것이 다해지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 잣나무처럼 변함이 없는가?”

 

제자 이상적을 보며 김정희가 썼다. 세상에서 강제로 추방된 사람이 느끼는 감회가 고스란히 담겼다. 차가운 겨울바람 앞에 맨몸으로 서 있는 듯 갈필의 흔적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한양으로부터 천리 길 너머 그보다 더 먼 바다를 건넌 사람에게 세상인심은 등을 돌렸지만 늘 변함없는 한 사람의 마음이 있었고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 안았다. 이상적은 나중에 스승 김정희의 부음을 듣고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였네/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시 가운데서 이렇게 읊었다. 여기 추운 시절의 소나무가 세한도다.

 

세한도는 두 사람의 마음과는 달리 험난한 여정을 밟는다. 제주도에서 그려져 이상적에게 보내졌다가 연경까지 다녀왔고, 다시 김정희에게 갔다가 이상적이 소장하게 되었다. 그러다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에서 그의 아들 김준학으로 2대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 경성대학 교수 후지즈키의 손에 들어가 광복 직전인 194310월 현해탄을 넘고 말았다. 그러다 천운으로 서화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일본 도쿄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석 달 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양도받아 다시 우리 땅으로 오게 되었다.

 

세한도에는 세상의 매운 인정과 그로 인한 씁쓸함, 고독, 선비의 굳센 의지, 옛사람의 고마운 정, 그리고 끝으로 허망한 바램에 이르기까지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다. 석 자 종이 위에 몇 번의 마른 붓질이 쓸고 지나간 흔적에서 이러한 정서를 담았기에 문인화의 정수라 불리고 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익살로

피어난

삼절의 내면

 

 

표암 강세황(姜世晃) 자화상(自畵像)

조선 1782, 비단에 채색, 보물 제590-1

 

꿋꿋하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개, 의지, 태도나 마음가짐 따위가 매우 굳세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입은 옷하고 머리에 쓴 모자가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직에 나간 관리가 예를 갖춰 관복에 쓰는 모자인 오사모(烏紗帽)를 평상복에 쓰고 있으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상화나 자화상을 그리는 기본은 사람의 정신까지 오롯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얼굴의 점이나 터럭하나 다르지 않게 그려야하지만 모양만 닮으면 초상화의 완성으로 보지 않았으며 엄격한 기준에 의해 그려졌다. 이점은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체제공의 초상하에서는 사팔뜨기 눈을 그대로 그렸던 것에서도 볼 확인할 수 있다.

 

예원(藝苑)의 총수라고 불리는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이다. 그가 왜 자신의 자화상을 이렇게 그렸을까? 그 이유를자화상머리의 좌우 여백에 빼곡히 쓴 찬문(贊文)은 강세황 자신의 써놓았다. 글씨인데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 사람이 누구인고? 수염과 눈썹이 새햐얀데/머리에는 사모 쓰고 몸엔 평복을 걸쳤구나/오라, 마음은 시골에 가 있는데 이름이 벼슬아치 명부(名簿)에 걸린 게라/가슴엔 수천 권 책을 읽은 학문 품었고, 감춘 손에 태산을 뒤흔들 서예 솜씨 들었건만/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내 재미삼아 한번 그려 봤을 뿐인데/노인네 나이 일흔이요, 노인네 호는 노죽(露竹)인데/자기 초상 제가 그리고 그 찬문도 제 지었으니/이 해는 바로 임인년(壬寅年)이라."

 

오주석에 의하면 글에도 장난꽃이 가득 피었다고 보았다. 강세황은 36녀 중에서도 64세에 얻은 막내로서 많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늦둥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유달리 밝고 해학적인 성품을 지녔으니 그 제자인 김홍도 역시 농담에 능했고 시서화악(詩書畵樂)에 이르는 여려 교양을 섭렵한 것이 모두 스승 강세황으로부터 온 내력이었다는 것이다.

 

강세황(1713~17910)의 호는 표암(豹菴), 표옹(豹翁) 등이다. 그는 문인이자 화가, 평론가로 두루 활동하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노년에 한성판윤, 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예원에 머물며 오직 학문과 서화에 매진했다. 강세황은 5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조선시대 화가로는 매우 보기 드문 사례다. 또한 그가 송도松都(지금의 개성)를 여행하고 난 후 그곳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송도기행첩>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기여해 18세기 조선미술에 변화와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홍도의 스승이자 후원자로서 단윈의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통통한 고양이,

건강을

누리소서

축원하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

조선 18세기 말, 종이에 채색

 

옛그림을 보다보면 그림의 소재가 되는 것들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송달송 할 때가 많다. 이런 그림들은 특정한 목적을 가진 그림일 때가 많다. 장수, 출세, 다복 등을 축원하는 목적으로 그림 속에 그 뜻을 담았다. 그렇기에 이런 그림속 장치를 알지 못하고 그림을 본다면 껍데기만 보고 알맹이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많은 것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듯 그림 역시 그 영향으로 봐야 할 것이다.

 

김홍도의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에도 그림 속에 많은 장치들을 담았다. 고양이, 나비, 패랭이, 제비꽃, 돌까지 각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뿐 아니라 옛그림 속에는 게, 잉어, 소나무, , 사슴 등 사람들의 염원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많다. 다분히 그림을 통해서라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세속적 욕망을 이루길 소망하는 것이겠지만 그 마음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오주석의 설명에 의하면 "고양이가 나비와 노는 그림"은 생신 축하 선물이다. 중국어로 고양이 묘()는 칠십 노인 모(), 나비 접()은 팔십 노인 질() 자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각기 칠팔십 세의 노인을 상징하는데, 고양이가 나비를 바라보니 칠십 고개를 넘기고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께 드린 그림인 듯 하다. 왼편의 크고 작은 돌은 두말할 것 없이 장수의 상징이다. 패랭이꽃은 석죽화(石竹花). ()은 축하한다는 축() 자와 통하니 역시 '돌처럼 장수하시기를 빈다'는 뜻이다. 이 꽃은 분단장한 듯 고운 까닭에 '청춘'을 뜻하기도 한다.

 

제비꽃! 함초롬한 자태의 이 봄의 전령은 여의초(如意草)라고도 부른다. 제비꽃은 꽃자루 끝이 굽어 꼭 물음표(?) 머리같이 생겼다. 그 생김새가 가려운 등을 긁을 때 쓰던 도구, 즉 여의(如意)와 닮았는데, 여의란 내 맘대로 어디든 척척 긁을 수 있다는 뜻이다. 뜻은 여전히 "만사가 생각대로 된다"는 상징을 갖는다. 그러니 전체 그림을 합쳐 읽으면, 생신을 맞은 어르신께서는 부디 칠십 팔십 오래도록 청춘인 양 건강을 누리시고 또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하는 축원이 된다.

 

생신을 축하하고, 건강한 몸으로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그림. 후손의 마음이 담겨 있어 더 정답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 '풍죽도'(風竹圖)

조선 17세기, 비단에 수묵

 

 

거친 바람 속

끝까지

남는 것은

대나무의

정신이어라

 

점차 기온이 내려가는 가을 한복판이다. 심란한 바람이 불어 간신히 견디고 있는 마음에 찬 기온을 더한다. 바람 앞에 의연하면서도 제 빛을 잃지 않는 대나무의 푸름이 빛을 발하는 시기가 오고 있는 것이다.

 

대나무는 옛사람들의 기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으뜸이었다. 이정의 풍죽도를 보며 옛사람들이 왜 대나무에 기대어 선비의 기상을 표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모진 바람 앞에서도 굽히지 않은 모습으로 의연한 자태가 멋과 함께 기상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정의 풍죽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그림 속에는 4그루의 대나무가 있다. 먹의 진함과 연함에 구분을 두어 앞의 대나무와 뒤쪽 대나무 간의 거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 간격에는 또 바람이 들어있는 것 같다. 대나무의 상태에 따라 바람을 맞는 모양이 제각각이다. 각기 대나무들이 모여 모진 바람 앞에 서 있는 불안함 말고도 안정감이 담겨 있어 묘한 느낌이다.

 

이정의 풍죽도를 언급한 글에서 오주석은 대나무를 사람이라고 한다. 대나무는 다섯 가지 훌륭한 덕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대나무는 뿌리가 굳건하다. 둘째, 줄기가 곧다. 셋째, 속이 비었다. 넷째, 마디가 반듯하고 절도가 있다. 다섯째, 사계절 푸르러 시들지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대나무는 대단히 어진 사람이며, 대나무는 군자라 칭한다. 모두 대나무의 생김새와 그로부터 기인한 이미지에 의한 이야기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나무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아닌가 한다. 밤사이 눈이 대나무 잎에 내려앉은 모습은 대나무의 초록과 눈의 하얀색의 조화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이 풍경에서 다나무의 기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다가오는 겨울, 눈 내린 아침 대나무를 보러갈 생각에 겨울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은 세종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다. 시서화에 능했는데 특히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묵죽墨竹 화가로 꼽힌다. 그는 풍죽(風竹), 설죽(雪竹), 우죽(雨竹) 등 다양한 대나무를 화폭에 옮겼다. 그의 묵죽화는 절제 속에서 긴장과 생동감이 조화를 이루고 명암의 대비가 두드러지며 마치 서예의 획을 보여 주는 듯 힘이 넘치고 아름답다. 탄은 이정의 <풍죽도>는 어몽룡의 월매도와 함께 오만원권 지폐의 뒷면 배경그림으로 채택되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