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다

 

 

 

강희안(姜希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조선 15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편안하다. 나무도 바위도 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인 노인마저 원래 그 자리가 제자리인양 자연스럽기만 하다. 묵직한 먹 선이 주는 안정정감에 바람마저 멈춘 듯 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면이다. 그저 바라볼 뿐 더 이상의 더하고 뺄 무엇 하나 없다. 옛 사람이 자연을 노래하는 다양한 모습에서 이처럼 편안하고 넉넉한 여유로움이 넘치는 그림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선비는 오늘 한가로움을 얻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선비가 자아내는 잔잔한 삼매경과 여유와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나 또한 그림 속의 인물이 되고 싶다. 아니 그림 속의 인물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아난다.”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1417~1465)은 조선 태종~세조 때 살았던 선비로서 집현전 직제학과 호조참의를 지냈다. 선비로는 드물게 시, , 화 등 다방면에 능한 문인으로서 격조 높은 산수화, 인물화, 문인화를 그렸다. 온화하고 말수가 적은 그윽한 성품으로 청렴하고 소박하여 출세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원예에 관한 책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지었으며, 문신이자 문장가인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형이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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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초롬한

고운 여인,

마음자락에

스며들 듯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미인도(美人圖)

조선 19세기 초반, 비단에 채색

 

盤薄胸中萬化春(반박흉중만화춘)

가슴 속에 서리고 서린 봄볕 같은 정

筆端能與物傳神(필단능여물전신)

붓끝으로 어떻게 마음까지 전했을꼬

 

이 그림을 그림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 ?)의 제시다. 이 여인은 누구길래 이런 마음을 담아 그려낸 것일까? 조선 시대엔 여염집 여인을 그리지 않았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대부분 기생이었을 것으로 본다. 조선의 기생은 쉽게 술과 몸 파는 여인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없다.

 

옛 기생의 격조란 사람 따라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달랐다. 시문, 서화, 가무에서 예술의 절정에 오른 이가 있었는가 하면, 경전을 줄줄 외고 마상에서 활을 당겨 먼 과녁을 꿰뚫는 여장부가 있었다. 또 양반 아낙의 뺨을 칠 만한 굳은 절개를 간직한 기녀도 있었던 것이다.”

 

함초롬한 여인이 다소곳이 섰다. 손을 대면 부서질 듯 고운 아낙. 초승달 눈썹과 촉촉한 눈매가 꿈꾸는 듯하고, 반듯한 이마와 넓은 인당(印堂)이 시원해 마음 설렌다. 단정한 코에 앵도 같은 입술, 갸름한 얼굴은 애처로운 빛을 띠고, 동백기름 먹여 참빗으로 곱게 빗은 머리칼이 더없이 정갈하다.”

 

이 미인도를 놓고 후세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한다. 조선시대 미인의 전형이라느니 여인의 춘정을 그려낸 에로시트즘으로 읽기도 한다. 그림은 시대를 반영한다. 하여 확실한 것은 이 미인도가 담고 있는 조선 후기 한복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는 점이다. 트레머리, 옷고름, 짧은 저고리에 옥색치마, 자줏빛 댕기에 버선발까지 다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압권은 눈에 있다고 보인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정면의 상단을 바라보는 눈빛이 보통이 아니다. 신윤복이 마음에 담은 여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리 표현했을까 싶은 마음이 절로 인다. 한낮 기생이었다면 제시에서 표현한 대로 마음까지 전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담을 수 없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 영화 미인도를 통해 대중에 널리 알려진 신윤복은 그 최후가 베일에 쌓였다. 조선후기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3대 풍속화가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특히, 김홍도와는 달리 양반 관료들과 여성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혜원풍속도첩) 유교적 도덕관념이 강했던 시기에 양반들을 풍자하였으면서도 자신의 실명과 낙관을 밝히는 파격적이고 대담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처벌받지 않았고, 그는 자유분방한 예술세계를 구사할 수 있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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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음양오행,

지극히 굳세며

지극히 부드러운

 

 

정선(鄭敾) 금강전도(金剛全圖)

조선 1734, 종이에 수묵 담채, 국보 제217

 

정선은 민족의 염원이 깃든 금강산을 새해를 앞두고 그렸다. 당시 조선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염원을 담았다. 단지, 금강산을 묘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 민족의 정신을 담은 것이다.

 

우선 제시를 보자

 

"만 이천 봉 겨울 금강산의 드러난 뼈를

뉘라서 뜻을 써서 그 참 모습 그려내리

뭇 향기는 동해 끝의 해 솟는 나무까지 떠 날리고

쌓인 기운 웅혼하게 온 누리에 서렸구나

암봉은 몇 송이 연꽃인 양 흰빛을 드날리고

반쪽 숲엔 소나무 잣나무가 현묘(玄妙)한 도()의 문()을 가렸어라

설령 내 발로 밟아 보자 한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

그 어찌 베갯맡에 기대어 실컷 봄만 같으리요!"

 

묘한 배치다. 사이 간()자를 중심에 두고 좌우 글자 배열이 심상치 않다. 일부러 뜻을 담아 썼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제시를 쓴 이유를 비롯하여 금강산 모습 또한 예사 그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조 왕 치세의 새로운 기움을 담아내고 겨레의 정신이 담긴 금강산을 어떻게 표현할까 심사숙고한 모양세가 그대로 나타난다고 본다.

 

오주석은 그의 다른 저서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2’에서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주역의 뜻을 담아 금강산을 그렸다는 것이다. 일만 이천 봉우리로 묘사되는 금강산의 이모저모를 주역의 원리로 풀이한 정선의 주역 공부가 얼마나 심오한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금강산 뭇 봉우리를 원으로 묶었다. 그리고 반씩 쪼개어 태극을 빚어냈다는 것이다. 맨 아래 장경봉에서 중앙 만폭동를 지나 소향로봉, 대향로봉을 거쳐 비로봉까지 이르는 S자 곡선, 이것은 바로 태극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주역에 익숙치 않은 사람으로 주역으로 해설하는 금강전도가 쉽게 다가오지 않음도 사실이다.

 

그림으로도 모자라 제시까지 주역의 원리를 이용해 금강산 그림을 그린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모름지기 영조대를 살았던 정선의 마음자리가 조선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이 그림을 해설하는 대다수 학자들의 설명이다.

 

정선은 그의 벗 이병연과의 사귐도 주목할 만하다. 이 둘의 사귐은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마음으로 서로 그리는 정을 시와 그림으로 화답했다고 한다. ‘경교명승첩이 그것이다. 이병연의 덕에 금강산을 두 차례나 방문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신묘년풍악도첩해악전신첩으로 남았다.

 

진경산수화의 시대를 열었던 겸재 정선의 그림을 단순히 대상을 묘사한 그림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정선이 그 속에 담긴 뜻이 너무 커서일까?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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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한 손에 쥐고

솔솔 부치면

 

 

겸재(謙齋) 정선(鄭敾), 금강내산도, 조선 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부채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 겸제 정선이 그린 금강산그림이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바위사이를 불어오는 바람이 부채에 담겨 더운 여름을 나기에 안성맞춤이 아닐까 싶다. 금강산을 사랑하는 마음에 더위를 이겨낼 부채와의 정묘한 결합으로 선조들의 마음씀씀이를 알 수 있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이런 부채는 피서의 도구뿐 아니라 선비들의 소지품으로도 애용하였기에 그 속에 금강산을 그려 넣었다는 것이 돋보인다.

 

오주석의 눈에 든 이 그림은맨 처음 눈에 띄는 산 둘은 유난히 먹빛이 짙다.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하늘 반 땅 반이다가 점차 올라가면서 산은 가파르고 하늘은 가까워져 급기야 최정상 비로봉에 이르자 하늘이 머리에 닿겠다. 메다꽂듯 내리찍은 암봉의 필획들은 빠르고 예리하고 각지고 중첩되니, 봉우리마다 변화무쌍 하나도 같은 모습이 없다. 또 어떤 곳은 붓 두 자루를 한꺼번에 쥐고 그었는데 짙고 옅은 농담의 변주가 절묘하다. 골짝 사이로 아스라이 먼 곳에 절집이 어른거린다. 이렇게 절경을 빚어내는 솜씨는 조물주에게나 비길 수 있으리라.”

 

금강산에 우리민족에게 어떤 의미일까? 수많은 선비들이 직접 금강산을 다녀와서 유산기를 남겼고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유산기를 읽으며 금강산을 그리워했다. 특히, 화가들이 남긴 금강산 그림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금강산을 향한 열망을 담아내 주는 역할을 톡톡해 했다. 정조 임금도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김홍도를 시켜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여 감상하며 금강산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

 

수려한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은 한민족의 자랑이요 국토애의 원천이다. 온 겨레가 이 산을 너무나 사랑하고 외경했기로 산 이름도 철따라 달라진다.”금강산(金剛山), 봉래산(蓬萊山), 풍악산(楓岳山), 개골산(皆骨山)이 그것이다.

 

금강산을 그린 그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정선은 이 금강전도 외에도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에 들어있는 금강산내총도, 단발령망금강, 장안사, 불정대, 벽하담, 백천동장, 옹천, 고성문암관일출, 해산정, 총석정, 삼일포, 시중대를 비롯하여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에는 피금정, 단발령망금강, 정양사, 불정대 망십이폭, 백천교 출산도, 삼일포도, 옹천도, 총석정도 등이 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영조 때의 화원으로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가장 큰 업적은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하고 성행시켰다는 것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랐던 일군의 화가를 정선파라고 부른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연꽃 한 송이가 탐스럽게 피었다.”정선의 금강내산도를 해설하는 오주석의 눈에 이 그림은 연꽃으로 보였다. 그린이 정선의 마음과 보는 이 오주석의 마음이 만나 한 송이 연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순간이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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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는

경치대로

대단했어도

나는

여전히

나일 뿐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중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

조선 1757, 종이에 수묵담채

 

18세기 중반 조선의 그림일하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눈에 익은 산수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그림이다. 하지만, 표암 강세황이 평안도 개풍군 오관산 영통동으로 들어가는 길을 그린 작품이다. 민둥산에 커다란 바위가 제각기 자리를 잡고 그 사이로 난 산길을 말 타고 가는 사람이 화가 강세황으로 보인다. 거대한 산과 큰 바위 사이 보일 듯 말 듯 한 크기로 그려졌지만 유독 눈길이 가는 것은 이 말구종과 말을 탄 사람에 있다.

 

왼쪽 상단의 강세황이 쓴 화제를 보면

"영통사 계곡 가에 어지럽게 흩어진 바위들은 정말 굉장해서 크기가 집채만큼씩하며 시퍼런 이끼로 덮여 있다. 처음 대했을 때 눈이 다 휘둥그레졌으니, 전하는 말로는 저 아래 연못에서 용이 나왔다고 하지만 믿을 만한 말은 못된다. 그러나 그 주변 웅장한 구경거리는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지극히 단순화 시킨 산과 바위의 모습이 오히려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기존 옛그림의 산수화와는 다른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산과 바위를 채색한 느낌이 새롭고 더욱 사람의 크기를 자세히 보아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그렸다. 자연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일수도 있지만 영통동구의 느낌이 화가 강세황에게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가는 놀랄 것 다 놀라면서도 제 정신만은 끝내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맑고 낙천적인 기분이 편안하게 작품 전체에 녹아 있다. 구성은 단순하며 바위의 세부 표현 역시 아주 간결하다. 특히 이 그림은 유별나게 개성적이고 이채로워서 비슷한 예를 다른 그림에서 찾아낼 수 없다.”

 

오주석은 그의 책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에서 영통동구도에 대해 한 말이다. 강세황이 활동하던 당시에 이미 서양화법이 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강세황의 송도기행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의 유행한 화풍이다. 기존 중국의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던 것에서 조선 산수의 실경을 바탕으로 화가가 추구하는 정신세계를 담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겸제 정선의 경우 남종화법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화격을 이룩하고 전통 실경산수화의 면모를 일신하여 새로운 진경산수화의 정형을 수립하였다. 진경산수화 작품으로 정선의 금강전도’, ‘인왕제색도를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 강세황의 송도기행명승도첩’, 김홍도의 사군첩등이 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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