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밥상 - 밥상으로 본 조선왕조사
함규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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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으로 본 조선의 정치
먹는 것을 즐기는 미식가나 식도락가가 아닌 사람이다 보니 특별히 음식이 흥미를 끌지는 못한다. 음식이 가지는 기본적인 용도라고 볼 수 있는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이 된다는 점에서 그치고 만다. 유독 먹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미식가들뿐 아니라 현대인에게 음식은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는 수준을 넘어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사항으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옛날과 오늘날, 절대적 빈곤의 사회와 선진국 등에서와 같이 음식이 가지는 의미는 시대상이나 그 사람의 처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의미를 갖는 음식이 절대 권력으로 상징되는 왕권시대의 왕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무엇을 주로 먹고 살았을까? 이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아보는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함규진의 ‘왕의 밥상’이다.

‘왕의 밥상’은 조선시대 절대 권력의 상징인 왕들의 밥상을 통해 왕들의 일상과 당시의 시대상을 비롯하여 권력의 역학관계를 밝히고 있는 책이다. 왕들의 밥상은 권력에 비래하여 그 시대 최고의 음식으로 채워졌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가정이 과연 옳은가로 부터 어떤 음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왕의 밥상에 오르게 되는가, 그리고 그 밥상이 가지는 의미는 또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친절한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다. 

태조, 세종, 연산군, 성종, 인조, 영조, 정조, 고종, 순종에 이르는 조선왕 27명의 밥상을 문헌에 근거하고 시대구분을 통해 밝히고 있는 이 책에서 왕의 밥상은 절대 권력자의 건강을 지켜가는 것 이외 숨겨진 다른 의미를 있었다는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것은 우선 절대 권력자 왕의 밥상이 생각보다는 소박하다는 것, 왕의 밥상을 채우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진상을 통해 올라온 것으로 꾸렸다는 것 그리고 때론 왕은 다양한 형태로 먹는 것을 조절했다는 점이다.

‘조선왕들의 밥상, 그 위에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양생하고 장수하려는 뜻과 정치 이념과 현실에 따라 왕의 정치적 역할을 다하려는 뜻이 함께 깃들어 있다.’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기본 이념에 의해 유지되는 나라였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왕은 그 선두에서서 모범을 보여야 할 위치에 있었기에 더 철저히 지켜 가야하는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다 보니 먹는 음식에도 왕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만 채워질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연산군처럼 예외적인 왕도 있었다. 또한 왕의 밥상을 채우기 위해 각지에서 올라온 진상품 역시 권력자의 욕심을 채우며 국민을 탄압하는 차원이라기보다는 밥상에 올라온 음식을 통해 전국의 실정을 파악하는 과정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기는 했지만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지되어 왔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감선이나 철선, 각선이라는 것을 통해 먹는 음식을 조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나라의 변고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왕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백성의 안위를 살핀다는 측면으로 상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영조 왕처럼 신하를 조정하려는 편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왕의 밥상’은 이렇게 왕에게 올려졌던 음식을 통해 왕과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펴본 것에 그치지 않고 수랏상이 차려지기까지의 과정과 담당했던 관리, 담당관청에 구성요소를 비롯하여 밥상이 가지는 사상적 측면까지를 살피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자는 ‘고르게 먹으려고 노력한 왕이 아무래도 선정을 베풀 수 있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이는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했던 왕들이 올바른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며 찾아다니며 먹는 웰빙 음식이 오직 자신만을 위한 차원으로 끝나고 마는 시대풍조를 되돌아보게 한다. 음식은 자연과 더불어 먹고 만들어지기까지의 사람들의 수고로움을 잊지 않을 때 진정으로 자연과 사람 모두에게 이로운 음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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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미스 프랭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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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의 이중성에서 흔들리는 인간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문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지속되어온 의문이 아닐까? 눈 밝은 사람들에 의해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려는 다양하고 지난한 노력은 철학이나 종교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펼쳐져왔음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두고 선과 악으로 규정하며 살피는 것은 종교나 학문의 영역을 떠나 인간의 구체적 삶의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문제이며 이 두 영역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발휘되는가가 더 중심적인 의문이 아닐까?

파울로 코엘료의 인간과 그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은 지금까지 발표된 여려 작품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 ‘악마와 미스 프랭’은 ‘그리고 일곱번째 날’의 연작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사랑, 죽음, 부와 권력의 일환으로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 이어 연작의 마지막으로 출간된 책이라 한다. ‘악마와 미스 프랭’은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부와 권력을 향한 인간의 본성이 발휘되는 모습을 황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날 때 어떻게 발휘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야기기는 모두 선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어느 조용한 시골마을에 한 이방인이 나타나면서 시작되고 있다. 이 이방인은 부와 권력의 언저리에서 성공한 삶을 살다가 예기치 않은 일에 아내와 두 딸을 잃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풀기 위해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이다. 그가 그의 실험을 위해 선택한 마을 ‘베스코스’는 한때 상업도시로 활발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쇠락한 마을로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있다. 이방인은 마을의 호텔에 근무하는 미스 프랭에게 황금 덩어리를 보여주며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제안을 한다. 일주일 안에 이 마을에서 누군가가 죽어나간다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평생을 쓰고도 남을 황금을 주겠다는 것이다.

부모도 없이 가난하고 답답한 일상에 묻혀 살며 자신의 삶에 변화를 원하는 미스 프랭은 이방인의 예기치 않은 제안을 받고 심한 갈등을 겪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의 제안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결과를 지켜보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 신부, 읍장, 지주 등의 유지들이 각자가 원하는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희생양의 필요성을 말하며 희생양은 마을에서 혼자 살아가는 베르타라는 노파로 모아진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삶은 우리를 난관에 봉착시켜 우리의 용기와 변화의 의지를 시험한다. 그럴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하거나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달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일주일, 그 정도면 우리가 운명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작가 노트’중에서

저자 파울로 코엘료의 관심은 명확하다. 황금에 대한 유혹, 일주일이라는 주어진 시간, 자신을 대신할 희생양의 선택 등의 과정에서 인간이 극한 상황에 직면할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가에 있다. 부와 권력을 손에 쥘 기회를 직면할 때 인간의 본성이 발휘되는 모습을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측면, 운명을 결정의 순간에 작용하는 선과 악의 모습 등으로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렇게 특수하고 극한 상황에서만 선과 악의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소한 일에서도 늘 상 대면하게 된다. 

‘악마와 미스 프랭’에서는 그간의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저자의 자아성찰이나 영혼의 울림에 대한 탐구과정에 대한 구성이 다른 작품에 비해 다소 미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황금의 유혹, 희생양, 악마와 천사 등의 설정이 다분히 인위적인 느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사랑, 죽음, 부와 권력이라는 3부작의 마지막은 부와 권력이라기보다는 ‘선과 악’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인간은 과연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는 한 인간이 절대적으로 양자 중 어느 하나의 본성을 갖는다고는 보지 않고 있다. 선과 악은 늘 동전의 양면처럼 내부에 함께하고 있으며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양자 사이를 왔다갔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습은 달리 나타난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내 놓으면서 타인을 위해 서슴없이 행동하기도 하지만 그냥 단순한 재미를 위해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폭행을 가하기도 한다. 

인간 본성의 무엇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일까? 저자 파울로 코엘료는 ‘악마와 미스 프랭’을 통해 인류가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다시한번 자아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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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에 대한 그리움 - 잊혀져가는 거의 모든 것의 아름다운 풍경
김종태 지음 / 휘닉스드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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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을 통해 현대인의 삶의 근거를 확인 한다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어느덧 나이 들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볼까? 분주한 아침, 느긋해지는 오후, 또 하루를 무사히 보낸 안도감, 달라진 아침 공기, 떨어진 가로수 나뭇잎 등이 문득 마음에 들어올 때면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보내는 듯싶지만 일상 깊숙이 시간의 흐름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일상에서 느끼는 것 보다 더 강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 많다. 기억 속에만 머물고 있던 추억에 관련된 물건이나 사람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그렇다. 떠나온 고향을 찾아 어린 시절 옛일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는 때에는 더욱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살아나며 시간의 흐름을 실감하게 된다. 하루아침에도 세상이 변해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렇게 변해가는 것에서는 당장에 느끼는 그리움이 덜하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추억이 쌓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옛것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우리 곁을 떠났거나 떠나고 있는 생활모습, 물건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놓은 책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 지금도 어디선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도 있기에 사라져가는 아쉬움이 더 큰 그런 것에 대한 아쉬움이 곳곳에 넘쳐나고 있는 책이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와 이웃들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생활모습을 담고 있는 것들은 아득한 정경, 못 다한 그리움, 꿈이여, 다시 한 번, 그래, 이 맛이야, 아, 옛날이여라는 분류로 구분하고 있지만 이런 구분하고는 상관없이 저자가 찾아내고 그리움을 담아낸 것들에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 어머니의 깊은 마음이 담긴 것들이다.

쪽, 호롱불, 조롱박, 양은그릇, 맷돌, 화로, 골무, 절구, 부지깽이, 장승, 통행금지, 누룽지, 엿장수. 장독대, 골목길 등 지금은 잊혀진 이름뿐인 것, 추억이 떠올라 미소 짓게 만드는 물건들뿐 아니라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풍경과 소리들까지 담아두고 있다.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만 담은 것이 아니다. 잊혀진 그것들에 담긴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따스한 정과 그들이 살아온 삶의 지혜 그리고 지금 우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까지 담겨있다. 

저자가 되살리고 싶은 사라져가는 것들은 시대가 변하면서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흥망성쇠의 자연법칙이 있음도 인정하고 있다. 옛것이 다 옳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물건이나 생활풍속에 담겨진 조상의 지혜가 검증절차 없이 부문별하게 유입된 외래문물에 밀려나고 있으며 우리 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대주의 세태를 되돌아봐야 한다는 자기성찰이 있다.

존재하는 그 무엇이든 과거를 기반으로 두지 않은 것은 없다. 생활의 편리함을 주는 과학기술도 그것을 누리며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도 다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온 결과며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옛것을 돌아보는 것은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미래를 바르게 살아갈 근거를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리움’의 중심에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울고 웃던 우리들의 감정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 있기에 느끼게 되는 자연스러움 감정이 아닌가 한다. 무엇이든 이렇게 감정이입이 되어 있는 것이 그리움의 대상이 되며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그리움은 커져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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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정치를 말하다 - 보수와 진보의 뿌리는 무엇인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손대오 옮김 / 김영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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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주의자들의 세계관을 논하다
어떻게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며 의아하게 바라보는 상황들이 있다. 우리의 정치현실의 모습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주먹질에 욕까지 하는 모습은 당리당략을 위해 그렇다고 치더라도 서로가 언제 그렇게 싸웠는지도 모르게 야합하는 모습이나 보수정당이 그들이 보여준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서민들로부터 다수의 표를 얻는 모습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분면 세계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지라도 시원한 해석은 되지 않는다. 그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다. 

조지 레이코프(Grorge Lakoff)는 미국의 언어인지학자로 미국의 대표적인 지성 노엄 촘스키의 제자이라고 한다. 그는 언어의 본질을 해명하려면 반드시 인지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정치적 사고를 읽어내는 데 인지언어학을 적용하여 진보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를 제시해 큰 주목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인지의미론’, ‘몸의 철학’, ‘도덕의 정치’, ‘삶으로서의 은유’,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프레임 전쟁’, ‘도덕, 정치를 말하다’ 등이 있다. 

‘도덕, 정치를 말하다’는 바로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그 근본 원인을 무엇으로부터 찾아야 하는지를 안내하고 있다. 어느 나라든지 정치의 첨예한 대립현상은 선거에서 들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역시 매번 치러지는 선거에서 정당의 이해요구에 의한 정책과 이를 판단하는 국민들의 선택으로 판가름 나지만 그 결과가 꼭 예상하는 바대로 나타나지 않는 모습을 수없이 봤다. 이 책은 그 이유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돕고 있다. 

저자는 정치인들이 갖게 되는 세계관의 문제를 기본으로 하여 그들의 정치성향을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고 그 진보와 보수진영에 공통적으로 적용 가능한 요인으로 도덕성을 꼽는다. 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세계관에 의한 정체성에 따라 투표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단순한 당파성이 아니라 그들이 자라난 환경의 중심이 되는 가정생활에 기반하며 그로부터 받은 도덕성에 의해 영향 받는다는 것이 주요한 핵심이다.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저자는 이 책에서 세밀하면서도 지루할 정도로 개념정리를 시작한다. 진보와 보수가 보여주는 그들의 정치적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표출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도덕 개념 시스템’을 말하고 있다. 그들이 속한 가정이 도덕적으로 엄한 가정인가 아니면 자애로운 가정인가에 의해 진보와 보수가 갈라진다고 진단한다. 또한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세금, 범죄와 사형제도, 규제와 환경, 문화전쟁, 기독교 모델, 낙태, 나라를 사랑하면서 왜 정부는 싫어하는가? 등을 통해 진보와 보수진영이 현실정치에서 그들이 대립하는 정책을 놓고 진보와 보수 각 진영의 대결 모습을 차분하게 살피면서 도덕 프레임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한다.

저자는 자신이 진보주의자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진보와 보수정치의 어느 편에서 서술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보수진영이 갖는 세계관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정책에 대해 이해했을 때에야 비로소 진보진영의 미래가 있다고도 한다. 

도덕성은 진보진영 정치인들의 상징처럼 이야기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보수진영이 그들의 정체성에 따른 철저한 도덕성에서는 앞서가는 모습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정치 현실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마련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바라볼 때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이다. 진보와 보수의 정책 대결 이전에 갈등과 대립만으로 책임져야할 그들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목소리만 높이는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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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역사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영화는 역사다 - 한국 영화로 탐험하는 근현대사
강성률 지음 / 살림터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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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담겨 있는 우리의 자화상
책을 읽는 사람들은 주로 어느 때 감동을 받게 될까? 사람마다 각기 다른 세계관이 있고, 각기 다른 세계관으로 책 속에 담고 싶었던 저자의 이야기를 접하기에 책을 통해 감동을 받는 이유 또한 그만큼 다양할 것이다. 저자가 책에 담고 싶은 이야기와 책을 읽어가는 독자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동질감과 속 시원한 느낌을 전해주는 책, 그런 책을 만날 때 독자의 기쁨은 몇 배가 될 것이다. 이는 책을 읽는 것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음악, 그림, 영화 등 작가나 제작자의 감정이 이입되고 그들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 그 무엇이든 이와 비슷한 경험의 기회를 주게 된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나와 거의 같은 시각으로 그것도 주요관심사의 한 분야를 만난다는 즐거운 경험을 한다. 우리 현대사와 영화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민족적 과제를 만난 것이다. 이런 기회를 가져다준 책이 강성률의 한국 영화로 탐험하는 근현대사라는 부제를 단 ‘영화는 역사다’이다.

저자 강성률은 영화를 좋아했지만 사정에 의해 문학을 공부하다 늦깎이로 영화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 자자가 보는 영화는 단순히 문화예술의 한 장르에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학이나 예술 장르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대중 친화적이라는 점이다. 그런 영화와 역사를 연결시켜 인문학적으로 영화를 통한 역사의 재해석이라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현재 시점에서 특정 시기의 과거 사건이나 과거를 영화 속에서 다루는 것이다.’ 이라는 역사 영화의 스펙트럼을 통해 현재 우리가 바로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저자가 살피고자 하는 영화들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일제식민지의 청산과 분단이라는 민족적 과제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영화를 선별하고 이를 그만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 영화사의 흥망성쇠를 일제강점기로부터 한국전쟁과 분단시기, 군부독재 시기, 2000년 이후라는 흐름 속에서 파악한다. 시기별로 우리민족이 처한 현실을 살피며 영화와 영화인들의 모습 속에서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시대정신을 통해 살피고 있는 것이다. 

‘집 없는 천사’, ‘사랑과 맹세’나 ‘낮은 목소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통해 일제강점기와 영화와 영화인의 이야기를 하며 ‘이재수의 난’, ‘웰컴 투 동막골’, ‘태백산맥’,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칠수와 만수’, ‘송환’, ‘우리 학교’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우리의 현대사와 연결하여 미완의 민족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또한 군부독재 시절 영화를 통해 독재정부가 획책하고자 했던 철저한 반공주의를 비판하고, 영화를 통해 우리 살아가는 현시대 삶의 모순을 다룬 봉준호의 영화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특수성도 살핀다. 마지막으로 한국 영화의 산 증인이며 ‘국민감독’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통해 영화와 영화인들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시각이 무엇인지도 말하고 있다. 

‘영화는 역사다’라는 저자의 말은 어쩌면 영화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예술의 모든 장르에 담긴 우리 역사의 질곡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자신의 역사인식의 명확한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영화를 통해 바라보는 우리의 현대사의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문제이며 어떻게 하든 분명하게 해결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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