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회>
“그때 그 아이가 분명해.”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예전처럼 사방에서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
“어떡해!”“어떡해!”“어떡해!”“어떡해!”“어떡해!”
“어떡해!”“어떡해!”“어떡해!”“어떡해!”“어떡해!”
한결이는 찬이와 석우의 손을 꼭 잡고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아이……. 잡아먹자!”
“그래!”“그래!”“그래!”“그래!”“그래!”“그래!”“그래!”
“그래!”“그래!”“그래!”“그래!”“그래!”“그래!”“그래!”
“온다!”
한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수천마리의 그리들이 구령대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앗! 아얏"
석우와 찬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것들이 자신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아파! 이 녀석들 날 물었어."
석우가 자기 팔뚝에 새끼손가락만큼 작은 이빨자국이 생기자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그리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며!”
“나도 몰라”
찬이는 보이지 않는 그리들에 물리지 않으려고 사방으로 팔을 휘저었다. 한결이도 쏟아지는 것처럼 날아오는 그리들을 정신없이 피하고 있었지만 '그리'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지기만 했다.
“뭐야! 왜 그 놈의 용은 안 나타는 거야.”
“안되겠어. 이제 우리가 죽을 것 같아. 이 녀석들 벌에 쏘인 것 보다 아프잖아”
“잡아먹자!”
한 마리의 그리가 작지만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입을 벌리고 한결이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만 둬!”
한결이는 자신도 모르게 달려드는 그리의 몸통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러자 물컹하고 무언가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다.
“켁켁, 나 인간에게 잡혔다 나, 죽는다.”
“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
“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무서워!"
순식간에 그리들이 동작을 멈추고 외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한결이는 좀 끔찍했지만 발버둥치는 그리를 잡은 손을 꼭 쥐고는 이렇게 외쳤다.
“내가 이 녀석을 잡아먹을 거야.”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그리들은 주변을 날아다니면서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죽기 싫어. 도망가자!”
그리들의 무리 중에 한 마리가 이렇게 외치자 사방에 있던 그리들이 똑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도망가자!”
순식간에 수만 마리의 그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한결이가 오른 손에 움켜쥐고 있던 그리 한 마리를 빼고 말이다.
“다 없어진 거야? 응?”
찬이는 움츠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응, 지금 내 손에 잡혀 있는 한 놈 빼고.”
“정말? 한번 만져보자.”
찬이는 손을 뻗어 한결이의 움켜쥐고 있는 오른쪽 주먹에 가져갔다. 정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물컹물컹한 것이 느껴졌다.
“야! 신기하다. 아얏!”
찬이는 황급히 손을 뺐다. 손끝에 이미 작은 이빨자국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찬이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책에서나 보아왔던 괴물들이 정말 존재하다니! 찬이의 얼굴은 흥분해서 빨갛게 달아올랐다.
“용은? 용도 왔어?”
그리들을 피하다가 나동그라졌던 석우가 이제야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아니, 미르는 못 찾았어. 이제 어떡하지?”
“날 잡아 먹을 거지? 날 잡아 먹을 거잖아? 날 잡아 먹을 거지?”
한결이에게 붙잡힌 그리는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한 번만 더 소리치면 진짜로 잡아먹는다!”
한결이가 호통을 치자 “그리”는 금세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조용하면 날 안 잡아먹을 거야?”
“그래, 그러니까 조용히 해.”
“우선, 교실로 들어가자. 이제 점심시간도 다 끝나가잖아.”
“별 수 없군.”
삼총사들은 더 이상 미르를 찾는 걸 포기하고 교실로 들어왔다. 기운 없는 표정으로 교실 문을 여는 삼총사들의 눈 앞 에는 텅 빈 교실이 보였다. 교실에는 책을 읽고 있는 신철이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다음시간에 특별실이라도 가는 거야?”
찬이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신철이에게 물었다.
“아니, 아이들 지금 4층에 올라가 있어. 거기가 냉장고처럼 시원하대. 난 추운 건 질색이거든.”
“냉장고만큼 시원하다고?”
“찾았다!”
찬이와 한결이는 서로 동시에 외쳤다.
“늦기 전에 빨리 가자.”
“뭐야, 용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된 거야?”
석우는 영문을 몰랐지만 한결이와 찬이의 뒤를 쫓았다.
“어디 가는 거야? 4층은 더 올라가야 하잖아. 왜 내려가는 거야?”
“우린 옥상으로 가야해! 옥상 키는 교무실에 있잖아”
“옥상? 거긴 왜?”
“바보, 교실에서 4층이 가장 시원하다면 용이 어디에 있겠어.”
“아 그렇구나!”
석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익”
옥상 문이 열렸다. 삼총사들은 선생님을 간신히 설득해서 옥상 키를 얻을 수 있었다.
“뭐야, 여긴 완전 빙판이잖아!”
한여름인데도 옥상은 완전히 얼어서 빙판이 되어 있었다. 석우와 찬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미르는 코고는 소리를 내며 옥상 한가운데에서 자고 있었다.
“녀석, 아직 아기용이라더니 잠을 자러 옥상으로 올라간 거였구나.”
한결이는 옥상에 있던 미르를 찾느라고 사방을 헤매던 자기 자신을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음 잘 잤다. 어, 한결아! 넌 왜 올라왔냐?”
“이 말썽꾸러기 녀석, 자러 가려면 이야기를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졸려서 죽겠는데 넌 싸움하느라 내 목소리는 듣지도 못했잖아. 난 잘 때는 원래 몸집으로 돌아와야 한단 말이야. 그렇다고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잘 순 없잖아 안 그래? 그리고 작은 몸으로 생활하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라고, 그럴 땐 하루에 두 번은 낮잠을 자야 한단 말이야.”
“알았다 알았어. 어쨌든 다행이야. 난 네가 도망가 버렸는 줄 알았어.”
“도망가긴 왜 도망가. 너하고 약속 했잖아 옆에 있기로.”
“…….”
“그런데 오른 손에 들고 있는 건 그리잖아. 와! 내 간식거리도 챙긴 거야?”
“거짓말 했어. 날 잡아 먹는 거구나. 날 잡아먹어.”
한결이에게 붙잡힌 그리가 벌벌 떨었다.
“무슨 소리야. 이건 안 돼! 내가 살려준다고 그리에게 약속했단 말이야.”
한결이의 말을 듣고 ‘그리’는 놀랐는지 눈을 껌뻑였다.
“미안, 미르에게 정신 팔려서 널 놓아주는 걸 깜박했어. 자 넌 이제 돌아가 다시는 붙잡히지 마.”
“이상하다! 이상해!”
‘그리’는 중얼거리며 잽싸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쳇, 배고파 죽겠는데 먹지도 못하게 하고 주머니 속에 갇혀있게만 만들고……. 날 보살핀다면 서 그게 보살피는 거야?”
“알았어. 앞으론 주머니 속에 있지 않아도 돼 하지만, 대신, 학교 안에서는 모습을 작게 하고 있어야 해 알겠지?”
“오호! 좋아 알았어.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 군.”
미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푸욱 푸욱 입김을 뿜었다. 한결이도 미르의 등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침부터 미르를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만 앞섰지 결국, 미르나 석우 그리고 찬이 모두를 고생시킨걸. 생각하니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누굴 돌본다는 건 쉬운 게 아닌 것 같아. 엄마 아빠도 날 키우면서 이런 기분이 들으시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집에서 고집만 피우는 자신의 모습이 좀 부끄러워졌다.
“저, 저기 한결아 그런데 네 옆에 그러니까 그 미르라는 용이 있는 거야?”
공룡박사 찬이는 아까부터 한결이를 쭉 지켜보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궁금한 것은 석우도 마찬가지였다.
“맞아, 인사 해. 여긴 멋지고 강한 푸른 용 미르야. 미르야, 여기 있는 두 친구는 석우와 찬이야.”
석우와 찬이는 얼떨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바라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뭐야? 이 싸움도 못하는 겁쟁이 녀석들은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미르가 입김을 후 불었다, 그러자 석우와 찬이는 계속해서 재채기를 해 댔다. 석우는 그 바람에 빙판이 되어버린 옥상 바닥에 꽈당 넘어지기 까지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 찬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결이도 넘어진 석우도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얘들아.’
빙판도 차갑고 재채기도 나왔지만 한결이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따뜻한 무언가가 차오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