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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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이는 성장 소설로 분류하기도 했고, 또 어떤이는 언어로 소통하는 행위에 대한 주인공과 독자를 향한 응원의 이야길 담은 소설이라 했다.

생각보다 막힘없이 술술 읽혀진게 소설에만 갖혀있지 않는 일상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여서라고 느꼈다. 어느 소속에서든 한번은 볼 법한 이가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극복해가는 방식 또한 너무나 드라마틱하도록 특별한게 아니었으며, 너무나 흔해빠진 것도 아닌 적잖히 유추가 되며 힐끗힐끗 앞이 보이는 내용들이라 복잡하게 머리 쥐어짜며 읽는 소설이 아니어서 좋았다.

​잘 해주면 사랑에 빠진다고 소갤하는 사람. 누군가 한 손을 내밀어 주면 두 손을 내밀고, 껴안아 주면 스스로 녹아버리는 눈사람이라 이야길 하고, 잘해주기만 하면 돌멩이도 사랑하는 바보라고 스스로를 이야길 했다. 그러다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열네 살이 된 지금은 다르다'는 녀석.

스스로를 다짐하듯 말하는 아이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지만 글로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귀여워죽겠다. 하하하하하.

말 더듬는 소년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와 언어 교정원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을 관찰하며 자신의 상태와 비교하며 이야길 들려준다. 우리는 극복이라는 말을 참 쉽게 하지만 온전히 '극복'했다며 마침표를 찍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다.

말 더듬는걸 어떻게든 이겨내보려는 다부짐이 느껴지다가도 이렇게 스르륵 녹아내리기도 잘 하는 변화무쌍한 심경의 문장을 보니 팔랑거리는 소년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P12_ 자기도 못 하는 걸 할 수 있다고 거짓말하는 나쁜 어른. 원장은 내 마음이 들리기라도 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쉽게 고칠 수 있었던거면 진즉에 고쳐졌겠지. 내가 쉽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른 이도 똑같을 거라는 생각을 해선 안된다. 무심코 단어들을 뱉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입술끝에 걸려있다 힘겹게 한마디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 모두의 생김새가 다르듯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또한 다양할 수 밖에 없다는걸 알아주길 바라는 단락이라 여겨졌다.

 

P66_ 하기 어려운 말. 할 수 없는 말. 해도 해도 더듬는 말. 단어와 문장을 낙서하듯 써 내려간 깨알 같은 글씨가 장마다 가득했다. 그것은 마치 입술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가둬 둔 감옥 같았다. ..... 입술에 살짝 올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역시 더듬지 않았다. 참 이상하지. 말이 뭐길래, 소리가 뭐길래. 이렇게 한마디 하는 게 힘든 걸까.

그 언어교정원 참 맘에 든다. '스프링 언어 교정원'의 원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목구멍과 입꼬리에 달린 단어들을 살살 긁어낸다.  말을 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노트에 적는 것 만으로도 갈증을 해소하기도 한다. 쓰는 것에는 두려움이 없기에 어쩌면 손끝으로 더 정교하게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세심하고 신중했기에 입 밖으로 흘려버리는게 어려웠던건 아닐까 하는 다른 관점으로 보고싶어졌다.

 

P114_ 어차피 나만 보는 노트인데도 솔직한 마음을 쓰는 것이 어렵다. 직접 겪은 일을 쓰는 것도, 그때의 기분과 감정을 정확하게 쓰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럴 땐 거짓말을 쓴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닌 것처럼 그 일을 쓰고 엄마를 생각할때 드는 마음을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넣어 말한다.

엄마의 느슨한 태도와 걸 맞지 않는 집착을 가진 폭력. 이따금 느껴지는 아들을 향한 애정. 엄마의 애인에게서 받는 상처는 언어를 교정하러 갔던 곳의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고 편이되어준다. 그 부분을 보자면 왠지 성장드라마에서 한번쯤은 나와줄법한 장면이고, 여기에 빈틈없이 캐릭터들이 다 심어지고 있었다. 언억교정원 원장이라는 자가 나타나 소년의 엄마보다 더더욱 보호자 처럼 굴지를 않나 할머니는 친손자처럼 보듬어 주질 않나. 자양강장제를 들고와선 일단 뭘좀 먹여주고 시작하려는 모습과 이 집안에서 제일 머리좋기로 손꼽히는 이모같은 이의 등장으로 똑소리나는 대응까지.

화면이며 제일 꽉차는 한컷이 완성된다. 어허어허 오디오물리더라도 할말은 다 해야겠다는 소년의 보호자같은 이들의 목소리들. 어디 이거 언어교정원 그룹원이 맞나 싶을 정도여서 이 교정원 진짜 제대로 가르쳤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마음의 이야기를 글로 적은걸 보는 원장. '용서'와 '복수'라는 단어가 너무 많다며 다시 '용복'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데 여기 닉네임 맛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찰지게 지어주더라. 싫은데 내가 왜 이걸 싫어하는지 알게 해주면서도, 미워하고픈데 미워하긴 또 싫은 단어들로 지어주니 밀당을 제대로 한다 싶었다.

소년은 이름이 바뀌면서 생각도 바뀌고, 뭔가 마음이 다부져지는 게 보였다. 꼭 하고자 하는 말을 입밖으로 뱉어내는게 다는 아니라 여겼다. 말은 하나의 수단 일 뿐이라 느꼈다. 단숨에 읽기 좋은 길이감과 복잡하지 않은 인물. 알게모르게 내 주변에 있을 법한 이들. 그래서 더욱 페이지가 빨리 넘겨졌고 언어 교정원 원장의 커리큘럼에 박수를 칠 수 밖에 없나보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이 한 문장에 마침표 / 물음표 / 느낌표 / 쉼표 그 어느것도 끝맺음을 안 한 이유. 그 이유를 조금 알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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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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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점이 1900년대의 조선 김해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서인지 익숙한 지명과 사투리들은 낯설다기보단 오히려 음성인식되듯 아주 자연스러운 사투리로 쏙쏙 들어왔다.

어쩌면 나의 어머니 일수도 있고, 나의 할머니의 이야기 일수도 있는 이민 1세대 여성의 순간을 그려내고있다. '사진 신부'라는 낯선 단어. 하지만 당사자들은 그 '사진 신부'가 되어 포와에만 간다면 옷과 먹을것이 주렁주렁 열린다는 나무도 있고, 사탕수수라는 농장의 지주이며, 차도있고 돈도 많은 그곳의 남자들과 잘 살수 있을거란 기대를 품고 타국으로 떠나게된다.

왜놈들의 억압도 없고, 여자이기에 차별받던 높은 학업의 문턱도 없을거란 희망을 품지만 마냥 행복하게 놔두지많은 않았다. 내 가족, 내 새끼들 안 굶기게 하기위해 손이 부르트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바로 털고 일어나야했던 고된 순간들. 그 속에 '사진 신부'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언니동생하기도하고 동무가 가족보다 더 애틋한 사람이되어 힘을 얻는다.


✎공부만 할 수 있다면 호강하지 못해도 좋았다. 설령 고생을 한다고 해도 한 번쯤은 자신만을 위해서 하고 싶었다.

이렇게나 배움의 열망이 큰 버들인데, 마음이 아팠다. 다들 그렇듯 나를 위한 것 보다 내가 희생해야됨이 당연했던 그 시절. 동생들은 공부를 시킬 지언정 본인은 일을하고 가정을 유지할 수있는 환경을 만드는게 꼭 나의 엄마를 보는 듯 했다. 언니는 언니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마냥 어린 놈은 아들이니깐 대를 위해서라는 말도안되는 핑계. 둘째딸은 둘째라서 해주면 안되겠냐 싶지만 이 위치는 원한것도 아닌데 가족을 위해서 생계를 위해서라는 그런 역할긋은 왜 만들어 두었나 모르겠다.

 

거울 속 여자, 사진 속 남자

✎“어무이요. 쪼매만 더 고생하이소. 지가 호강시켜 드릴게예.

버들이 말했다.

“치아라. 내가 자식 덕 볼라꼬 니를 그 먼 데로 보내는 줄 아나? ...”

결국 '사진 신부'가 되기로한 버들. 어머니와 가족의 곁을 떠나고 나라를 떠나 아무리 팔을 쭈욱 뻗어도 닿지 않을 곳으로 영영 가버릴 아이. 돈을 받고 팔려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어머니는 성공해서 호강시켜드린다는 버들의 말이 당신의 가슴에 비수가 된듯 쿡쿡 찌른다. 하고싶다는 것도 제대로 맘껏 시켜주지 못한 아픈 손가락이 되려 당신을 위로하고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릴까. 핏덩이같은 아직도 그냥 앤데, 이제 보내버리면 영영 못 만날거 같은 마음에 어머니는 마음을 다잡고, 이른 아침 뜨듯한 밥을 먹이고, 혹여 가는 동안 배라도 곯을까 주먹밥을 싸주고, 옷가지와 베갯잇, 혹시 모를 손주가 될 생명이 입을 베냇저고리까지 살뜰히 만들어 챙겨준다. 그래 엄만 그랬어. 정 떼어두려고 맘에 없는 말은 하지만 뭐라도 챙겨주고픈 손은 따뜻하고 또 안쓰럽기까지 하지.

알로하, 포와

✎하루하루 새롭고 즐거운 생활에 빠져 언제부턴가 어머니와 동생들 생각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감싸 안고 있던 소중한 물건들을 가방에 빼앗기고 그만 버려진 보자기가 마치 어머니 같았다. 버들은 죄책감에 털썩 주저앉아 빈 보자기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조선에서 바로 갈 수 없는 포와. 조선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모든 항목을 통과해야만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포와. 그동안 사진속의 남편이 될 사람이 준 돈으로 처음 즐겨보는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들. 남편이라는 사람이 준 돈으로 예쁜옷도 사입고 처음으로 내가 고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 쓸 수 있는 가방도 구입하는 재미.  하지만 한켠에서 아려오는 죄책감. 나만 이렇게 호강해도 되나 싶은 미안함과 남겨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왜 안 그러겠어. 눈에 밟히는 어린 동생들과 자신의 몫까지 일하고있을 어머니의 손을 생각하면 울음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 일거야.

 

5월의 신부들

✎반지는 살갗에 상처를 내고서야 제 자리를 찾았다. 버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면사포는 되돌려 줘야 하고 꽃은 시들겠지만 반지는 영원히 손가락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공부를 하고 친정을 도울 수 있다는 증표 같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반지를 늘려준다는 말은 버들의 결혼이 순조롭지 못함을 예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맞지않은 반지를 욱여 넣으면서 그 자리가 본인의 자리라고 믿고 싶었겠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나마 '사진 신부'로 온 조선의 여인들 중에 본인의 남편이 될 사람은 외모를 속이지도 않은 듯 하니 모든게 내가 아는 그 사람의 조건 또한 속이지 않았고, 조선의 내 가족에게 보탬이되고 나도 공부를 할 수 있을 미래의 나를 짜맞추려 한게 짠했다. 어찌어찌 하더라도 이 남자의 아내가 되어야하는 버들.

 

삶의 터전

✎어쩌면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건지 몰랐다. 버들은 자기 살기에도 벅찼다.

눈뜨면 시작될 하루가 버들은 버겁기만하다.

조선을 떠나오기전 생각한 포와는 사시사철 날이 따숩지도 옷가지가 주렁주렁 열리는 신기한 나무도 없다. 당장이라도 피부를 태울 듯한 햇살 아래에서의 고된 노동과 함께 이어지는 현실 자각의 날들. 지주가 되어있을 남편도, 사진속의 말쑥한 청년도, 달콤한 글들로 설레게 만든 사람도, 자기차처럼 배경으로 두고 찍은 호탕한 모습도 모두 없다.

그래서 홍주도 송화도 먼저 연락할 수도 없었고 찾아가보지도 못한다. 생판 처음 들어본 나라에 나는 이방인인냥 뚝 떨어졌고, 거기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되는데 지지대가 되어주어야할 남편은 정을 주지 않으니 혼자서 모든걸 이겨낼 어린 버들은 많이 지쳤을테지. 어쩌면 공부는 맘껏 못하더라도 나고자란 익숙한 마을에서 어머니의 품삯을 도우며 큰 시련없이 잔잔하게 사는게 나은 선택이었을까 하는 후회도 분명 했을거라 느껴졌다. 오늘을 살아갈 버들은 자신을 돌볼 겨를 없이 세븐 캠프에 맞는 사람으로 변해야 했으니 말이다.

1919년

✎어두운 발밑을 핑계 삼아 태완의 팔짱을 꼭 끼고 걷다 보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어 있는 불행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목석같은 남편이 나를 그리 대했던 이유도, 마을사람들이 버들과 태완에 대해 쉬쉬했던 것들도 모든걸 한바탕 울음으로 털어낸 후 조금씩 변화된 두 사람. 그렇게 둘은 의지를 했고 그 속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았다고 여겼다. 마냥 따뜻할 것 같던 포와에 찾아오는 스콜처럼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픈 행복 뒤에는 깎아내리는 듯한 불행의 절벽이 있다는건 슬픈 일이다. 왜 그리도 빨리, 자주 찾아오는지 모를 날들. 이런 소설을 볼땐 느낀다. 소설에서라도 한번쯤은 눈 딱 감고 이들이 행복하게 내버려두면 안되나 싶은 순간이 많다. 나는 비록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리 고생한 버들에게 한번은 스콜이 비켜가길 바라는데 맘같지 않아 지금 이렇게 행복해할 그녀의 얼굴이 애잔하게 느껴졌다.

나의 엄마들

✎도대체 엄마 가슴속엔 상처로 얼룩진 이야기가 얼마나 들어 있는 걸까. 그런데 엄마의 고향 이야기가 나오자 그곳에 살고 있을 송화가 떠올랐다. 나는 얼른 그 모습을 지워 버렸다.

함께 시스터 런드리를 운영하는 버들의 이야기에서 시간이 한달음에 펄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넘어온다.(너무 순식간이었고, 이제 급하게 끝을 내야 하는 단락인가보다 하는게 느껴졌다.) 태완과 버들이 딸이라면 짓고팠던 진주라는 이름. 펄은 정말 버들의 딸이 된다. 펄이 딱 '사진 신부'가 되던 버들의 나이가 될때 이야기는 몇줄의 단어로 출생의 비밀을 로즈(홍주)의 추억상자들로 줄줄 풀어낸다. 진짜 버들의 딸이던 여자아이는 죽고, 산달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던 송화의 아이가 펄이 되기로 한다. 송화는 결국 무병을 이기지 못해 조선으로 돌아가 본인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아이들은 자라고 홍주를 재혼을하고 로즈라는 이름으로 다시 살게 된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된 펄은 자기의 엄마가 버들이 아니라 송화라는 것에 혼돈이 오지만 이걸 알지 못했다면 평생 가슴에 뭍어두고 품어줬을 엄마들(버들, 홍주, 송화)에게 한편으론 감사함을 느끼고 굳이 엄마들에게 알려 마음의 짐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엄마가 쉬엄쉬엄 말했다. 편안하고 환한 얼굴이었다. 나는 울음을 꾹 참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가난해서 팔려 오거나 일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처럼 꿈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엄마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엄마는 엄마로서 최선의 삶을 살아왔고, 그 덕에 나는(펄)은 좀 더 수월하게 사는 걸지도 모름을 급하게 마무리한 듯한 정리. 송화의 아이가 펄이 될 수 밖에 없던 내용이 조금이라도 더 나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나만 느끼는걸까 싶은 생각도 든다. 급하게 제목에 걸맞도록 나의 엄마들에게 잘 살아와줘서 고맙다고 하고픈 끝맺음. 시간이 된다면 여건이 되는거라면 작가님과의 대화나 인터뷰를 통해 듣고픈 후반부의 내용이 많다. 질문도 하고싶고. 이건 무지개계모임의 그녀들이 감추고싶은 오프더레코드의 일부라고 여겨야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아온 엄마들. 시대와 장소를 구분짓지 않아도 엄마들은 어떠한 언어를 막론하고도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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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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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민주화운동가였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딸의 시선에 담긴 모습들.

 

 

 

더이상 피는흐르지 않습니다. 고통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것은 있습니다.

피는 흐르지 않다 한들 흔적은 있기 마련이다. 그저 상처에 흐르던 피가 굳고 딱지가 앉는 것. 그러므로 그건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으며 지우려고 그 말라비튼 딱지를 손으로 억지로 뜯어 내려다보면 영영 지울 수 없는 흉이 지기 마련이더라. 종이에 베여버린 손끝의 상처도 그러한데 사람의 인생을 할퀸 상처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반창고로 가려볼거라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덧데여진 그 부분이 더욱 도드라지는 건데 왜 그걸 모를거라 생각을 하게 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나의 아버지의 일생에 담긴 상처는 누가봐도 뻔해보이는데 사람들은 그리고 세월은 안 볼 거라고 등을 돌리면 그게 끝인 줄 안다는 생각에 울컥해진다.

한 이름이 드러내고 다른 이름이 은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사랑이 세계를 바꿀 힘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용서나 관용, 무지 혹은 앎의 상태와는 어떻게 다르다며 구별될 수 있습니까. 용서 없이도 사랑은 성립합니까.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사랑은 무엇이 필요할까요.

사랑을 정의함에 있어서 생각해본다. 그 경계는 어디까지이며 비단 남자와 여자만을 만남과 애정을 사랑이라고만 단언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 사랑을 포옹력이며 이해와 내가 무언가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게 만드는 목표이기도 하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우리가 또다른 우리를 아끼고 우리들이 나라를 위해 애정어린 마음을 다해 지키려는 것. 그리하다보면 좀 더 괜찮은 시대가 올거라는 믿음으로 확장된 의미의 애정을 더한다. 가끔 나만의 일방적인 사랑 같아서 회의감이 들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지금이 아닐까.

 

 

개인을 위한 삶이란, 자신의 입에 밥을 넣는 것뿐 아니라 다른 식구의 입에 밥을 떠넣는 것을 포함하는 개인적인 삶이란, 당신은 이제부터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당신에게 더없이 낯설고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혼자였던 적 없이 언제나 함께 투쟁했고 그래서 우리는 형제였고 겨레였고 민중이었으며 바로 그런 우리 자신이 우리 나라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제 당신 동지들로부터, 벗들로부터, 민족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우리였던 당신은 한겨울 옷을 빼앗긴 맨몸으로 차가운 거리에 내던져진 듯하다.

가끔 당신들이 말하는 '개인'과 '우리'의 정확한 구분이 내가 아는 뜻과 다른건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우리'라는 울타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임을 말하는건지도 모르겠고, 당신이 열망하던 세상에 대응하던 우리들과 내가 지금 온몸으로 느끼는 우리는 참 많이 다름을 느낀다. 당신도, 당신의 딸도, 지금 이 글을 읽는 나도 '우리'라는 범주가 달라보인다. 시간이 지날 수록 '개인'에 가까워진 '우리'의 경계선. 그러니 당신이 본다면 내가 너무 야박하고 매정하다 싶을지라도 당신도 이 글을 읽는 내가 생각하는 '우리'의 개념속으로 좀 들어와주었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쟁이나 민중, 넋, 한, 그리움 이러한 단어들은 이제 개별적인 존재로 놓아주고 당신과 당신의 아내, 딸 이렇게만을 생각하는 '우리'가 되면 안될까 싶은 간청을 하게 만든다. 비밀을 적던 그 자그마한 수첩을 늘 지니고있다가 벗에게까지 영향을 끼칠까 싶어 경찰이라도 다가올라치면 삼켜버리던 당신의 그 시절의 '우리'에서 이제 좀 벗어나서 살아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커졌다.

 

당신은 이제 전기 배선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은 영어 시험 급수를 취득해야 합니다.

당신은 엑셀 함수값 계산법을 익혀야 합니다.

당신은 한글 프로그램으로 그래프 그리고 표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전산 자격증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자격증도 따야 합니다.

또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당신은 이제 신념있고 정의로우며 의로운 사람이 되어선 안되는 것이었다. 당장의 세상살이 고난과 '우리' 가족. 당신의 아내와 딸과 함께 살아야되는 이유만을 생각해야되는 거였다. 당신이 민주화운동을 하며 경찰에게 쫒기는 동안 옷 수선집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며 일하며 당신의 몫까지 삶을 살아야했던 아내. 경시대회를 준비하고 학급임원으로 수학문제 풀이를 하는 야무지게 제 역할을 다 하던 아이를 위한 이유.

당장 무엇을 하고자 함이 없더라도 당신의 일부와도 같은 이를 위한 그 기나긴 시간에 대한 보상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무조건 고개를 조아릴 줄밖에 모르는 아이에게, 동전 몇 개를 잘못 받았다고 물건을 바닥에 던지는 사람에게, 술 취해 유리상자 속 인형을 뽑다가 잘 안 되면 가게에 들어와 애먼 사람을 향해 화풀이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도우려 애써도 빚을 지고 또 지는 형에게, 독재자의 따를 신으로 섬기며 매일 밤 그 신전에서 우리 형제의 미래를 기도하는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는 먹먹함으로 가슴 한구석이 꽉 메어오는 듯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너나 할것 없이 화가 가득한 세상 속에 사는 기분이 든다. 내 뜻대로 안되면 마녀사냥의 힘을 빌어서라도 내가 옳은거고 상대가 무조건 그른 짓을 했기에 질타받아도 마땅하다는 답변을 찔러 넣고 이겨먹으려든다. 전후사정없이 힘이 센 사람이 답을 이야기하는 자. 그보다 약한자는 먹잇감이 되는게 마땅해지는 곳이다. 그래서 힘이 센 독재자 편에 붙어서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하기 위해 옳고 그른 것 따위는 배제해두고 당장의 삶에 기대는 것. 시대가 지났다 하더라도, 요즘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라는 말로 시작하더라도 변하는 것 없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당신은 옳지 못한 짓을 한게 아니다는 것 알려주고싶지만 답은 나와있는데 답이 아니라고 하는 아이러니한 목소리들로 그득하다.

 

 

 

이제 수갑은 없습니다. 얼굴을 가렸던 검은 천도 없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을 묶는 포승줄도 없습니다. 결박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당신은 왜 그곳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까.

양심수라는 이름도, 진주교도소에서 수감하던 수감원도, 그 골방에 갇혀있고 낯선 진주라는 도시에 묶여있지만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존재로 살지 않아도 되는데 아버지는 그 기억에 갇혀 산다.

아이가 가정환경조사서를 낭독하며 너희 아버지는 무엇에 봉사를 하시는지에 대한 물음에 발표를 하던 시절에서 한참을 벗어났지만 아버지는 그곳에 머문다. 빠져나오기 두려운 두꺼운 벽안에 갖혀있다가 나온 당신. 이제 좀 놓고 살아도 되는데 한때의 청춘을 끓어오르던 신념을 배신하고 함께하던 이들이 사장과 정치인, 공무원이 되었으니 그들의 부정. 그들의 불의. 앞서 이야기했던 '우리'라며 어깨를 잡아 함께하던 순간에 대한 허탈함이 아직 놓아주질 못하나보다. 이건 누가 밖에서 끄집어 내지 못하고, 스스로가 발로 차버리고 나와야되는데 생각보다 보이지 않는 현실의 벽은 꽤나 두껍고 단단한 듯 하다.

 

 

오천만원을, 어림잡아 이십 년으로 나누어보자.

일 년은 이백오심만원 정도 된다. 이백오십만원을 삼백육십오 일로 나누면, 그의 하루는 만원보다 값싸다. 그 보상은 세 사람을 향한 것이므로 그것을 삼분의 일로 나누면......

처음 내 노동에 대한 가치를 책정받을때, '연봉계약서'라는 걸 썼다. 한 해 동안 내 육신으로 인한 노고에 대한 사측이 주는 보상. 그 보상에 대한 약속을 하고 우리는 일을하고 기꺼이 내 시간을 제공한다. 자그마한 내 노동의 댓가도 이렇게 보상을 받는데, 나라에 대한 민주화운동에 대한 보상이 참 작고 소박하다. 한 사람의 가장 화려한 시간을 오롯이 가져갔지만 나라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대단하고 화려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신문에 이름 석자가 찍히지도, 뉴스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은 유령같은 사람이라 기억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배려비용이라 봐야되는건지.

아빠는, 아이가 없거나 아이를 만나지 못하는 다른 친구들 때문에 꽃을 달 수가 없어.

꽃을 보면 저마다 집에 있는 아이 얼굴이 떠오르지 않겠니.

그 꽃은 아빠 가슴속에 있단다.

희안하다. 당신이 말하는 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왜 먼저 미안해하고 가슴아파하는지 모르겠다. 작가는 이해를 했을까? 어릴때나 지금이나 내가 느끼는건 당신이 말한 그 순간엔 이해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원망이 들었을 거라 생각된다.

'단번만 모른척 하고 아빠 가슴팍에 꽃을 달아주게 해주지. 다른 친구들 맘 헤아리기전에 내맘이라도 먼저 헤아려주지. 그냥 한번만 모른척 하고, 눈 딱 감고 오늘만 그 많은 날들중에 딱 하루인 오늘만 그렇게 해주지.'라는 투정어린 마음.

여전히 당신은 '개인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라는 전체에 갇힌 사람이겠지. 미련하고 우직하게도.

 

엄마가 집에 돌아와 아빠에게 넣었던 것과 같은 양갱을 사먹는 모습을 보면서 아빠도 같은 것을 먹고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같은 것을 나누는 시간일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같은 것을 나누는 시간일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지만 같은 공간에서의 행복감을 공유할 수 없는 부부. 그저 먹는 것이라도 편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간식신청을 하며 그것을 받아볼 당신을 그려보는 엄마. 함께하는 순간에 대한 바람보다는 내가 움켜쥐고있는 양갱을 아마도 당신도 먹고 있겠지. 그걸 바라보며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며 마음을 허투루 쓰지 않도록 도와주는 마음의 격려. 그게 엄마가 당신에게 보내는 응원이고 사랑이더라.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삶은 그런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려 했다.

모두가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함께 버텨온 사물들도 빛이 바래지고 같이 나이를 먹으며 잊어가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 야속한건지 얄미운건지 한 사람이 기억하는 세월속 사건들이라는건 쉽사리 잊혀지지 않고 이리저리 치여 더 날카롭게 자신을 찌르기도 한다. 무뎌지길 바라자. 그냥 조용히 잊어가길 바라지만 문득문득 생각이 날 당신. 당신을 바라보는 엄마. 알지만 모른척 해야되는 딸.

자전거 안장 뒤쪽을 붙잡아주며 함께 달리는 아버지가 있다.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아버지. 그래서 이제부터 함께 살게 될 아버지. 세상의 아버지들과는 다른 아버지.

나는 민주화운동을 영상과 글로만 접한 세대 중 한명이다. 학생시절에도 대단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을 했고, 내가 그 시절의 그분들이었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지만 선뜻 나서기 어려워하는 '우리'보다는 '나'라는 개인에 더 갖혀있는 사람이다. 그때도 그러했고, 머리가 굵어진 지금도 변함이 없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누군가가 해주길 바라는 아주 나약한 존재인걸 안다. 성공을 한다면 정말 대단히 칭송받고 우러러 보겠지만 만약 안될 경우 나는 물론이거니와 내 사람들이 겪을 고통을 더 먼저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중 하나다. 그시절 나같은 사람도 분명 있었겠지만 당신들같은 사람 덕분에 지금의 나는 아주 편히 숨쉬고 할거 다 하고 누릴거 다 누리는 약은 인간중 하나라해도 할 말이 없다.

언론이나 기록물에 다 올라가지 않은 이름모를 이들의 노력. 가장 푸르던 청춘들의 삶과 맞바꾼 지금의 평화. 누군가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의 반짝이는 시간들. 그 빛나는 시간들로 얻어사는 우리는 적어도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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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딸에게 - 세상 모든 엄마와 딸을 위한 노래
김창기.양희은 지음, 키큰나무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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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만남"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진 노래인데, 이때가 내가 결혼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해이다. 27년가까이 엄마곁에 붙어살고 껌딱지처럼 떨어질 생각조차 안하다가 결혼을 하고, 분가를 했는데 그때가 가장 힘들었고 정신없었던 기억이 있다. 누가 보면 진짜 멀리멀리 떨어져 살았나 싶겠지만 결혼하고 직장으로 인해 친정과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거주를 해도 매일 보던 얼굴이 아니라 그런지 전화를 해도 멀게만 느껴지는 내가 아는 어휘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들에 생각이 많아지곤 했다.

 

전주 없이 시작하는 노래의 첫 부분처럼, 책 또한 앞 부분엔 '엄마'가 자기 독백적인 말들을 한다.

 

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 있었고, 넌 항상 어린 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었고

엄마의 인생은 나로 인해 하고싶은 걸 모두 포기한채 살아오셨다.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며 부업과 식당일을 함께 하셨기에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패턴. 엎어지면 코 닿을 데의 거리에서만 오가시면서 30년 가까이를 살아오셨다. 어디 좋은 데를, 남들 다 간다는 한번의 해외여행도 친구와 함께 간다는 계모임 단풍구경도, 햇살이 좋은 날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서는 벚꽃여행도 없었다. 그저 집에서부터 일하시는 식당으로 가는 길목의 가로수를 통해 계절이 변하고, 시간이 흐르는걸 느끼셨을 터.

그렇게 하루, 한달, 일년.... 그러한 반복된 시간 속에서 엄마는 나를 낳던 27살의 여인에서 딱 곱절의 세월을 넘긴 것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정신없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라는 생각이 얼마나 들었을까.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 뭣하나 나를 알아주는 가족들이 없다는 생각을하면 한없이 허무하고 허망할 것이다. 내 속으로 낳은 놈은 사춘기에 접어들어 대화 자체를 안하려하면 얼마나 야속할까.

조막만한 녀석이 마냥 어린 아이 같았는데 스스로 할 줄 아는게 늘어가면서 제 또래랑만 어울리고 학업에 바빠 온갖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쏟아내면 얼마나 엄마의 가슴에 비수가 꽂힐까. 왜 나는 그 때 바로 알아 차라지 못하고, 이제서야 후회를 하게 되는지 그 어린 시절의 내가 원망스러워 질 때도 있다.

1절이 엄마가 이야길 하는 거라면, 2절은 딸이 망설이다 조금씩 풀어내는 마음속의 이야기들이다.

난 항상 예쁜 딸로 머물고 싶었지만 이미 미운 털이 박혔고,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알고픈 일들 정말 많지만 엄만 또 늘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내 마음의 묻을 더 굳게 닫지....

조금 더 다정하고 상냥한 딸이 되고파도, 뒤돌아서면 다시 틱틱거리는 사춘기의 반항심 많았던 딸이 되기도 했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내가 하려했던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라는 생각은 하지만 정말 마음과 다른 말들로 들어주는 엄마도, 나도 속으로 같이 울었을거다.

어느날은 쫑알쫑알 미주알 고주알 다 말해주며 안기는 애살쟁이가 되기도하고, 또 어느날은 가시돋힌 선인장보다 더욱 따갑게구는 예민쟁이로 변하기도 했으니 엄만 이 변덕쟁이를 오죽 어려워했을까. 그걸 나는 성인이되고, 엄마의 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느꼈다.

엄마에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나였고, 대화를 가장 많이하고 통화를 많이 하던 사람도 나였고, 처음 문자쓰는걸 가르쳐주고 오타 가득한 단어들이지만 가장 많은 문자를 보냈던 사람도 나였다. 처음 영화관의 큰 스크린을 본것도, 구하기 어렵다는 뮤지컬의 맨 앞좌석도, 타지의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자그마하고 분위기있는 카페를 함께 간 것도 나였다. 갱년기의 호르몬 변화로 힘들때 매일 밖으로 끄집어내어 바람쐬며 추운 밤거리를 쏘다녔던 것도 엄마는 다른 친구나 동생들이 아니고, 딸인 나랑 함께했던 것들 이었다. 지금에서야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고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왜 나는 엄마의 마음을 이렇게도 몰랐을까 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엄마의 청춘을 모조리 받쳐 나를 키우느라 애쓰셨는데, 그 청춘에 대한 보상이 이정도로 되긴 할까 라는 생각도 들면서 내가 엄마의 엄마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글의 내용은 엄마와 사춘기에 접어든 딸에 대한 이야기인데, 굳이 사춘기의 딸을 향한 이야기들은 아닌 거라 느껴졌다.

엄마에게 딸은 늘 어리고 마냥 여린 존재인 듯 하고, 딸에게 엄마는 생각만해도 눈물나게 만드는 눈물샘의 주인 같다.

 

내가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던 걸 용서해줄 수 있겠니

넌 나보다는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약속해주겠니

이미 이렇게 나를 키워준 것 만으로도 대단하고 감사한 분인데, 왜 당신은 늘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실까. 당신이 가진 10개를 다 주어도 하나를 더 못 주어 애닳아하는 사람이 엄마라 그런가보다 싶다가도 왜 나한테 다 주려고만 하는지 생각만하면 엄마가 답답하기도하고 미안해지는 건 왜일까.

 

책에 그려진 삽화를 보며 과거의 나를 회상하고, 단어를 손으로 밑줄긋듯 매만지며 읽어내려갈땐 굳이 글밥이 많지 않아도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엄마만큼 멋진 엄마가 될순 없을 거 같아. 그래도 적어도 엄마에게는 자랑스럽고 어디 내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도록 나는 열심히 살꺼고, 내가 엄마 나이만큼 늙어도 영원히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남고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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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온 시 너에게 보낸다 - 나민애가 만난 토요일의 시
나민애 지음, 김수진 그림 / 밥북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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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보니 사람이었고, 자라다 보니 시인이 아버지(나태주)였던 '시 큐레이터' 나민애.
시인의 딸로 산다는 것. 그러다보니 시를 이해하고 공부하게되며 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그녀.
시들의 쓰임새에 맞게 조금 더 쉽도록 알려주는 그의 해석을 모아둔 책이라 할 수 있는데, 확실히 시만을 읽는것보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이해하는게 더 편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공감되는 구절은 되려 시보다 그녀가 풀어낸 이야기들에 집중이 되었다.


시 큐레이터 나민애가 정성스레 고르고, 단락과 단락에 숨어있는 마음들을 끄집어내어 말해주는 걸 읽고있으면 그래 맞아, 나도 그래요 라고 공감의 맞장구를 치게 만들어준다.
그녀가 일러준 시의 조각들이 나에게 와서 울어주고 털어주는 그 생각들 처럼 어느 하나 허투루 적힌 단어들이 없듯 시가 나에게로 찾아와 제 역할을 하고 쓰임새를 찾아가니
나 역시도 '나'라는 개인적인 서사 중 '시'라는 부분이 갖는 의미가 이렇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웠음 한다.

 

 

 

36-37P_ 윤호(1956-) 시 '완생'
'당신은, 끝난 것이 아니라 완성하신 겁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마지막 인사가 아름답게 단정하다. 역시 어머니의 마음은 그의 아들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시의 마지막 문장 '구십 생애를 비로소 내려놓으셨다.' 는 문장으로 어머니의 삶이 끝난걸 알 수 있다.
시의 제목인 '완생'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큰 하늘에서 이젠 작고 여린 존재가 되어진 어머니가 눈한번 깜박이면 그 찰나에 돌아가실까 하는 마음에 아들은 마음이 쪼그라들어간다.
그리 좋아하시던 홍시를 구해와도 게장을 발라드려도 넘기질 못하시는 분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까. 그게 마냥 먼 이야기이며, 마냥 타인의 삶에서 한장면이라 생각이 들진 않는다.
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나의 부모 역시도 같은 시간의 테두리안에서 자기만의 인생의 끝을 달려가고 있는걸 아니 말이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 '호상'이라 말하며 장례식장에서 위로아닌 위로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호상?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라는 말인데, 호상의 기준이 무엇인가.
이렇게 좋은 분이 가신게 마음이 아프지만 그분을 기억하고 함께 생각 할 수 있도록 모이게 해주신 분에게 감사하는 의미라 하더라. 그렇지만 나는 쓰고 싶지 않은 단어 중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외롭지 않도록 곁에서 함께 눈을 맞춰주며 그녀의 완생에 함께 한다는것.
윤호시인처럼 나도 그때쯤이면 담대하고 굳건하게 보내드릴수 있을까?

 

 

 

86-87P_ 이은봉(1953-) 시 '큰아이에게-엄마, 엄니, 어머니로부터'
어머니는 어머니가 되는 순간, 영혼의 일부분에 자식의 방이 생겨남을 느끼게 된다. 그 방에 자식의 세계가 생겨나고, 커지고, 자라난다. 그래서 어미니는 자신의 삶과 함께 자식의 세계를 더불어 살게 된다. 어머니는 오래 사랑하고, 항상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한다. 그 마음은 물리적인 법칙보다는 신비로움에 가깝다. 자식이 어디에 있든 어머니의 마음은 자꾸만 자식 곁으로 가려고 한다.


상추를 씻다가, 된장국을 끓이다가, 콩나물을 무치다가 너를 생각한다는 엄마, 엄니, 어머니.
별거 아닌 것에 전부 '나'를 갖다붙이는 엄마. 그냥 당신만 생각해도 될 건데 왜 또 승질 더러운 딸을 생각하나 모르겠다.
우리 주야 이거 좋아하는데....(경상도에서는 이름의 끝 글자만 따서 부른 경향이 있다. 우리 언니는 정아~ 나는 주야~)
그렇게 병아리 눈물만한것만 보아도 딸을 생각하는 걸 보면 엄마에게서 자식이란 존재는 정말 떼어낼 수 없는 일부인가보다.
나민애 큐레이터가 마지막 문단에 적은 내용을 너무나 공감했다. '이 시를 읽어도 다 알 수 없다. 어머니가 가진 사랑이란 자식이 쉽게 알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고 한 것 처럼.
글쎄 나는 아이가 없어서인지 이러한게 진짜 내리사랑의 방식인지 언니도 언니 아이를 바라보면 이러한 생각이 드는건지.
우리 엄마만 이렇게 애닳는 마음들인지.

나도 엄마가 하시는 것 처럼 따라가야되는데, 그림자도 못 밟는 수준의 마음이라 늘 죄송스러워진다.
이렇게 생각만 하다가 퇴근 후 친정엄마에게 전화해서 오늘 하루 므슨 일이 있었는지 뭘 했는지 물어보며 또 썽질부리겠지.
아왜- 그걸 또 왜 날 줄라고 그래요. 엄마나 좀 잡솨! 라고.

 

 

124-125P_ 양애경(1956-) 시 '사랑'
시인이 말하기를 사랑이란 둘이 함께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와는 반대로 둘이 걷다가 어느새 혼자 걸어가게 되는 것을 일러 우리는 '이별'이라고 부른다. 사랑과 이별을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일로 바꾸니 그 뜻이 참으로 잔잔하다.


나민애 큐레이터도 말했지만 이 시에선 '사랑'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다. 그래도 읽다보면 이게 사랑인거지 라며 느끼게 된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걸으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종종 듣게되는 결혼식 축사의 단골 문장들.
시에선 '문득 정신 차려 보니 혼자 걷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 앞에 적힌 문장이 더 아려온다. '둘이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라는 대목.
함께 하고있는 줄 알았으며, 쭈-욱 함께하리라 믿었던 마음들인데 사라진 상대에 대한 아련한 마음.
그래 상대가 다른 이를 보더라도, 아님 이세상에 없더라도, 사랑이 끝나버리는건 아니지. 다만 실존하는 존재로서의 대상만이 보여지지 않을 뿐이지 여전히 애닳고 짠하고 눈물나는 존재임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200-201P_ 나기철(1953-) 시 '엄마'
대문을 열고 들어와 마루에 가방을 휙 던졌는데 집이 텅 비어 있는 기억 말이다.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어깨가 축 처진다. 나를 반겨주던 얼굴이 없으면 세상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 사람이 없으면 집의 의미도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집은 곧 엄마고, 엄마가 곧 집인 셈이다.


어릴땐 하교해서 달려가면 맞이해주는 엄마라는 존재로 인해 돌아가는 길이 즐거웠고, 나이가 들어선 나를 맞이해줄 아내가 아른거려 퇴근하고 가는 길이 그리 즐거울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나민애 큐래이터가 말한 '집에 돌아올 때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 준다면 감사한 일이다.'라고 해석했다.
맞아.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있을 사람이 있는 곳. 그래서 현관문을 열면 다다다 뛰어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한 얼굴로 맞이해주는 사람이 있는 정말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곳. 그래서 우리는 '집'이 갖는 의미가 돌아갈곳이며, 나의 자리라고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플때 엉엉 울며 엄마를 찾고, 놀랄때 움츠려드는 어깨와 함께 엄마야 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냥 시도때도 없이 엄마를 찾나보다.
그렇게 그분이 품고있는 단어들과 의미하는 바는 상상 이상의 단어의 조합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도 줄줄이 엮은 문장이 아니라 시로서 숨겨두니 더 애틋해진다.

같은 시를 보아도 각각 살아온 시간의 사전의 언어들로 해석하기 마련이다.
나민애 큐레이터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아버지(나태주작가)의 영향을 안 받을순 없었을 거라 생각을 한다.
생각을 담을수 있는 광주리의 크기와 깊이가 확실히 달랐을거라 여겨진다. 어깨넘어 배우는 것들을 무시 할 순 없는걸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남들보다, 아니 이걸 읽는 나보다 좀더 따숩고 다정하게 풀어줌을 느낀다.
나를 위해 울어주고 '정성껏' 슬퍼해준다는걸 알려준 그녀의 문장. 그덕에 생전 처음 만난 시의 페이지들 속에서도 나를 위해 울어주고있더라.
참 고맙기도 하지. 나를 얼마나 잘 안다고 몇몇 단어들의 조합이 감히 나를 위해 이렇게 울어주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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