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아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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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틱한 단편은 없다. 그저 어디든 다 있을 이야기들 뿐이다.

뭐랄까, 평소와 다르지 않게 걷는데 갑자기 발 뒤꿈치가 찌릿해오는 느낌이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데 애썼던 그 순간에 드는 감정은 딱 그정도의 고통이었다. 평범하게 대해왔던 것들이 상대에겐 따끔거리는 마음의 흠이 났었던 것이고 그게 나에게 되돌아온 고통이었다.


뒤늦게 알았던 서운함에 유나가 잘못한 것보다 미련했던 자신에게 생겼던 짜증도 그러했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숲속에서 일어난 일들에 그간 못했던 마음의 서운함을 이렇게 표현하나 싶었던 숲의 끝. 웃으며 그 때 왜 그랬냐며 꼭 답을 듣고팠던 문동, 호시절이라며 즐거워했던 엄마와 다르게 주인공에게는 전혀 호시절이 아니었던 어린시절 아파트 이웃들과의 생활. 누군가는 몹시도 애가 닳도록 마음과 힘을 다했고, 그에 반해 또 누군가는 사사로운 감정이라 여겼다. 상대가 허투루 다뤘던 마음에 상처를 받아봤다면 이 단편들에서 마음이 많이 요동쳤을 거다. 나처럼 공감도 했을 것이고, 왜 모르나 싶을 정도로 의문도 든다. 때로는 직설적인 말보다 눈빛들에 더욱 마음을 다치기도한다. 꼭 주먹을 휘둘러야 폭력이라고 성립되는게 아니다. 언어와 시선과, 감정적 폭력은 때론 더 깊은 생채기를 남기곤 한다.


자, 이제 이 단편들 속에서 어떻게 애써왔고 어떻게 마음앓이 해왔는지 각각의 인물들을 멀찍이 바라보며 제3자로서 바라보며 다양한 경우를 만났다. 그대는 어떤 답을 내렸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혹시나 허투루 다뤘던 타인의 마음은 없었는지 떠올려보자. 아마 생각보다 더 많은 애쓰지않아도 속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에도 안 써본 반성문을 오늘 거창하게 쓸 타이밍에 도달했다. 완독했다면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의 속편이자 내 인생의 반성문을 시작하자.



애쓰지 않아도‣ 사이비 종교에 빠진 엄마로 인해 전학을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전학을 오면 시선은 바삐 움직이고 어느 무리와 친해져야할지 아니면 이대로 혼자 생활을 해야할지를 선택하게된다.(초3 전학을 처음 왔던 나도 별반 다를게 없었고,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갈때, 그리고 성인이 되었다고 자부하던 대학때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그때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유나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고 무리에 끼워준다. 유나를 동경했던 마음이 커져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드러내면 더더욱 친해질꺼라 믿었으나 둘만의 비밀로 여겼던 그 이야기가 나만 모르고 있던 이야기로 알게된 순간 생각이 많아진다. 사람 그 자체가 좋았던 것인지, 그저 인기가 많았던 모습이 좋았던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낯선 환경에 들어와 어떻게든 동떨어지지 않고 싶었던 마음이 눈에 보인다. 그래서 점심을 먹을 친구부터 만들고 싶었고, 같이 무리지어 다닐 만한 친구를 찾게된다. 그리고 비슷한 관심사의 소근거림에 귀가 예민해진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우리는 마음이 참 팔랑거렸던 듯 하다. 초반엔 인기있는 몇몇 인물들 위주로 무리가 형성이 되고,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 그룹도 소원해져서 결국 마음 맞고 생각의 결이 비슷한 끼리끼리 또 모이곤 했다. 그렇게 초반부터 전전긍긍하지 않았어도 되는데 우린 참 바빴다.


그렇게 바쁜 학창시절의 학기초를 겪고 사회생활을 하는 지금의 어른이 된 후로는 애써봤자 그때 뿐이라는 걸 알고있다. 급히 뭉쳐진 모래알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분이 빠져 파스락서리며 쪼개지고 스르륵 흩어지고 마는 것 그게 결국 인간 관계였다는 걸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길 아이들에 백번 천번 해봤자 소용없음도 알고있다. 다 겪어 봐야 이해 할거다. 주인공이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생으로 같은 학교를 다녔던 유나에게 느꼈던 감정처럼 이건 시간이 흘러봐야 터득하는 애써왔던 마음이니 말이다.


데비 챙‣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둘. 동갑이었고, 여행하는 방식도 잘 맞았던 터라 함께 여행지를 다니게 된다. 그러면서 각자의 미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좀 더 멋있고 괜찮은 어른이 될 둘을 기대한다. 홍콩인 데비는 비행기 정비사가 될 것이며 지금 너무나 사랑하는 연인이 있고, 그녀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미래를 알려주는데 주인공과는 다른 확고한 미래의 계획에 자신을 비교하게 된다.


주인공은 본인이 말했던 것 처럼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자, 불안정한 가능성보단 적당한 불행과 적당한 익숙함에 심취한 무사안일주의자 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주인공은 데비를 질투할 인물의 범주에 넣지 못했다. 그냥 그는 나와 레벨이 다른 확고한 인생관이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 만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만난 동갑내기의 멋진 미래를 꿈꾸는 친구와 헤어진 후 간간히 연락을 이어가며 정말 원하는대로 뜻하는대로 다 이룬 사람도 있음에 살짝 거리감을 느낀다. 하지만 뜻밖의 만남에서 사랑했던 이와 사별하고 마냥 행복한 삶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된다.


그 후 또 한번의 만날 기회가 있었으나 주인공은 먼저 선뜻 연락을 하지 않는다. 왜애? 그토록 멋진 삶을 꿈꿨고, 또 이루었던 그가 대단했는데 너무 딴세상 사람 같아서 연락을 하지 못한걸로 봐야할까? 아님, 그렇게 잘난 사람이지만 결국 행복을 모두 다 누리고 슬픈 이별을 한게 쌤통처럼 여겼나? 아냐, 그렇다고 그런 이별을 한게 주인공의 탓도 아닌데? 뭐지?


데비는 끝까지 근사한 사람이었다. 주인공은 변화도 두려웠고, 동시에 바뀌는 삶의 흐름도 거부하고싶었던 잔잔한 사람이었다. 데비는 원하는 삶의 방향을 이루었고, 최고의 행복을 맛본 동시에 최악의 슬픔도 겪었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그 것만으로도 감사한 삶이라 여기는 단단한 멘탈에 같이 있으면 자신이 더 초라하게 보일듯하니 거기서 인연의 끈을 끊은듯 했다. 세상에, '이런 사랑을 경험해보려고 태어났구나. 그걸 알게 됐으니 괜찮아.'라며 자신의 슬픔도 인생을 사는데 필요한 과정이라 여기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데비 그는 정말 나이가 들어도, 아픔을 겪어도 멋진 사람이었다. 옆에 있으면 자연스레 주눅들게되는 근사한 사람이에 쳇!(정말 많이 부러운 점들만 갖고있어서 질투가 나서 그런거다!)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 유리와 송문은 같은 인턴쉽을 하며 겹치는 시간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렇게 공유한다고 마음속의 결 자체도 같이 나누긴 어렵다는걸 느낀다. 사람의 성향은 주변인물에 의해 바뀔 수 있는게 아니다. 소위 물든다는 말 처럼 쿵짝이 맞는 사람 옆에 있다보면 상대의 습관이나 행동을 따라하기도하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기보단 잘잘못으로 판단하는 이와 있다보면 가끔씩 선을 그어 두며 여길 넘지 말아주길 바라게된다. 아마 송문은 유리에게 그런 마음을 느꼈을것이라 짐작해본다.


그래도 유리와 송문은 제법 괜찮은 방식으로 풀어가는 듯 하여 그 둘을 바라보는 내가 다 뿌듯했다.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에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을 적어보며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순간을 기록하며 유리도 자신의 방식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나는 유리와 송문의 방식에 잘한 일이라며 어깨를 툭 쳐주고 싶었다.



손편지‣ 각자의 사정은 굳이 손으로 긁어올려 끄집어 내지 않는다면 알 길이 없다.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소풍날 보물찾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헤집어 버린다면 마음을 열고싶은 결심이 생기다가도 이내 닫아버리게 된다


손편지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점장에게 그때엔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적어낸 글이다. 주인공을 위해주고 도와주려 애썼던 점장인데 억울하게 퇴사를 할 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주인공도 곧 퇴사를 하게되는 시점에서 점장을 떠올리며 써내려간다. 마음의 문은 억지로 당긴다고 열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대가 있더라도 함께 열고자하는 마음과 열어주고픈 생각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다. 그 때의 점장이 왜 그리도 잘 대해줬던건지 그 태도가 오히려 부담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이유를 알게되며 지난 순간에 감사함을 표현한다.


그 때의 나로 돌아 갈 수 있다면 마음써준 점장을 더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했는지의 반성문과같은 글을 보면 우리는 항상 한박자 늦어버리는걸 아쉬워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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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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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코너에서 계속 눈이 갔던 제목도 한몫했지만 책 소개에 적힌 단어 하나에 꽂혀서 계속 머물렀던것 같다. '돌봄노동'. 이는 타인의 건강과 안녕을 목적으로 하는 돌봄 노동을 결혼과 동시에 떠안게 된 이들의 목적만큼이나 광범위한 책임과 의무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내었다고 소갤 했다.


어느 항목에도 안 끼고 싶고, 공감하기 어려워 난색을 표하고 싶지만 책 소개 한줄로도 많은 장면이 지나간다. 일단 30대 중반으로서 제법 긴 시간동안 사회활동을 해온 직장인이며 회사에 몇 없는 기혼여성인 나로선 오만 구설수와 가십거리를 다 봐온 사람이다. SNS에만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내 주변에 널려있었기에 이 이야기들은 소설이라고 선긋고 시작 할 수 없었다. 무겁고 탁한 기운으로 읽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단어로, 이 단편들 중 하나는 정말 드라마처럼 사는 이들의 이야기가 하나만 있어주길 바랄뿐이었다.



대추_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대추를 기분 좋게, 맛있게 드시고, 그리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올가을이 지나기 전에 꼭


이 마음에는 할머니께 예쁨을 받았던 좋은 기억보단 우리 엄마를 고생시키는 존재로서의 분노가 응집되어있지 않았을까.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노부모의 수발의 대부분은 성씨도 다른 며느리가 도맡아 해오는게 관행처럼 내려왔다. 생면부지 남남처럼 살아온 존재였다가 결혼하나로 모든 대소사의 프로 참석러가 되어야하는 만능일꾼으로 변한다. 이러한 장면을 마주칠때마다 감정이입이 심하게 되는 이유는 나 또한 한 '집안'의 '며느리'이기 때문이겠지. 내 직업이 있고, 내 재능을 필요로하는 곳이 있지만 그 집안의 대소사를 위해서라면 만사 제쳐놓고 일단 두팔 걷어올려 일할 준비태세를 잡고 대기모드가 되어있어야한다. 이 '집안'의 며느리가 해왔듯이 나도 군말하지않고 해야하는 것. 그래야 그 '집안'의 예법을 어기지않고 큰소리 안 나고 조용히 하루가 지나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해결책이었다.


안_ 엄마는 내게 격려가 아닌 저주의 말을 쏟아 냈다. 이제라도 전문직이나 안정적인 직장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은 글러먹은 거라고, 내 말을 듣지 않아서 나중에는 결국 땅을 치고 후회할 거라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능력만 있다면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은 채 살아가길 바라는 간절함이 어쩌면 당신은 그러하지 못했기에 더욱 세차게 내뱉는 울분처럼 느꼈다. 이렇게 고생하는 니 엄마를 보고도 똑같이 살래? 라는 뉘앙스라 흘려들을 수 없는 마음도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악담처럼 여기며 다신 그런말 하지 말라며 더 소리를 질렀다면 속이라도 편했겠지.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엄마를 너무 빼다 박은 딸은 결국 삶마저 엄마를 닮아 흘러가리라는 걸.


나는 분명 글로 읽고 있는데 눈에 보여지는 장면이 너무 생생했다. 웹드라마를 보았던 건지, 아님 영화의 장면과 일치한 부분이 있었던건 아닌지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영상으로 본 내용은 아니었다. 그저 귀동냥으로 들어온 주변 이모님들의 이야기였고, 글로 접해왔던 그녀들 이야기라 기억속에 저장되어있던 에피소드 덕분에 안봐도 본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나보다.

한동안 '82년생 김지영'과 '며느라기'에 빠져서 자기감정 갉아먹기로 아팠던 순간이 있다. 주변 유부녀 선배들이 해준 이야기에 겁을 먹었기도 했고, 타이밍이도 절묘한게 마침 내가 결혼한지 얼마 안된 새댁이었기에 '결혼은 이런 것이구나.' 라는걸 모든 감각세포가 인지하고 벌벌 떨게 되었다. 왜 시댁에서 밥만 먹으면 목구멍에서 쌀알이 맴돌았던건지, 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임신이 아니면 큰 죄처럼 여겨졌는지. 차라리 주방에서 일하는게 맘이 더 편했던건지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몸이 반응하는 반사신경과 같았다.


여담이지만 오랫동안 많은 시청자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전원일기가 케이블채널에서 재방영을 하고있다. 친정엄마 곁에서 그걸 잠시 보고 있는데 내가 살아온 시대와 정서가 안 맞아서 속에 울화가 치미는데 엄마는 그땐 그랬지 느낌으로 회상하며 보고 계셨다. 나는 화딱지가 나서 못 보겠고, 엄만 공감이 너무되어 이걸 계속 봐야겠고. 봐서 좋은 기분은 하나도 안 드는데 왜 집중하시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보면 나는 시대를 잘 타고 났나보다. 그시절에 안 태어난 내가 참 고맙고, 3대가 사는 집안이나 종가집 맞며느리가 안 된걸 세상에 감사히 여기게 되었다.


공과 이야길 하면서 자신의 부모님은 나쁜 분들이 아니라고 그것을 알아야한다는 대화가 나온다. 그리고 윤미는 대화를 할수록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느낀다.

마음의 소리가 툭 튀어나온듯한 기분. 공은 이런 말도 했겠지. '어디 그런 뜻으로 이야길 하셨겠어. 그냥 너가 예민해서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야.' 이건 윤미에게도 독자인 나에게도 위로라는 말로 찌르는 듯 했다.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온한 세상에 내가 들어오면서 나만 느끼는 것이지 정말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윤미의 큰엄마가 생전에 해주신 말이 계속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나 하나 불편하면 모두가 편하고 웃게 된다. 결혼해서 여자는 그런 마음으로 살면 되는 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지만 다 안다. 다른 사람들이 안 알아주면 부처님이라도 알아주신다.”

윤미의 큰엄마가 생전에 해주셨던 말인데, 왜 우리 친정엄마가 하는 말 처럼 느껴지고 짠해지나 모르겠다. 마지막 한 문장이 더 외롭게 보여졌다. 다른사람들이 안 알아주면 한 이불 덮고 자는 남편이 알아주는게 아니라 신이라고 여기는 부처라도 알아줄거라는 말. 없는 존재인 신이라도 알아줄거라는 그시절 어머니들의 간절함이 베여있다. 끝까지 남편은 안 알아주는구나. 이래서 남편은 남의 편이라는 말의 줄임말인가 싶은 허탈함도 느꼈다. 이 단편의 제목인 '安(편안 안)'이라는 한자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여자의 머리에 위에 씌여진 집 면 모양. 사방이 지붕으로 덮어 씌워져 있는 걸 혼자 짊어지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아무런 탈이 없이 평안히 지낼수만 있다면 이 모든 무게를 묵묵히 견디겠다는 마음이 서려있는 듯 해 '편안 안'도 되고 '안쓰러울 안'도 이해 해당되어야 하는건 아닐지 생각을 해본다.




돌보는 마음_ 아이 없이 살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나? 물론 출산 정말 축하하고 너무 잘된 일이에요.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어요. 계획이 있으면 있다고 그때 말을 해 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아니면 신변에 변화가 생겼을 때 바로 이야기해 줬더라면 좋았겠다. 개원하자마자 팀장이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우니까 내 입장에서는 참 곤란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입장차이. 알지만 이렇게 밖에 말 할 수 없는 상황을 헤아려줬음 하는 상대방의 공감 강요. 양쪽의 입장을 다 보아온 제 3자라 어느 편도 못 들겠다.

특히 팀장을 너무 나쁘게만 몰아 세울 수도 없었다. 이야기의 시작점은 미연이라 할지라도 앞뒤 잴 수 없는 비난대 옹호는 접어두고팠다. 아마 미연은 팀장의 이 한마디가 뼈에 사무칠꺼고, 팀장은 일손의 공백이나 업무의 흐름에 걸림돌이 될 뜻밖의 요소에 난감했을 것이다. 잘 못한 사람은 없다. 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저 타이밍이 문제였다고 할 수 밖에. 여기서도 앞서 본 단편 '안'처럼 나쁜 사람은 없는 듯 하다.



특별재난지역_ 엄마, 아들한테는 이런 거 대놓고 해 달라고 못 하죠? 왜 마스크 구해 드리는 건 딸이나 며느리여야 해요?

아이고 속시원했다. 나는 남자 형제가 없어서 이러한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지만 친구들을 보니 오빠나 남동생을 온전하게 부르는 사람이 없더라. 죄다 엄마 아들이라하며 나완 상관없는 부류로 칭하고 싶어함에 피식 웃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씁쓸했던 말 한마디. 일남이 동생 정필에게 쏟아낸 말이 있다.

"그기 무신 소리고, 장남이 없으면 누가 상주를 한단말이고. 상주가 없는 초상이 어디 있다 카노!...."

상주는 누가하냐는 쓴소리. 딸둘만 키운 우리 엄마아빤 마지막 가는 길이 상주없이 쓸쓸해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편안하게 집을 지키는건 여자가 해야할 무게이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 완장차고 앞장서서 절하고 사진드는건 남자가 해야 하는 일로 정해진게 마음이 아프다. 이래서 아들 하나 안 놓느냐고 울 엄마를 타박한 둘째고모가 얄미웠던거고, 장손인데 대가 끊겼다고 혀를 차던 작은 할아버지가 싫었나보다. 마음이 쓰이고, 더 잘 해주고픈 마음이 들다가도 이렇게 구분짓고 니가 할일 내가 할일로 선긋기하는 모양새를 보면 좋은 마음도 어느새 싹 날아가버린다.




태풍주의보_ 어떤 비극은 원인조차 알 수 없는 형태로 삶을 엄습해 온다. 한편 어떤 비극은 너무 비극적이라 그 원인조차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 ... 이대로 이불에 딸려 아래로 추락해 버리면 어떨까. 사고사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충동에 몸을 떨었던 과거의 순간이 떠올랐다.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장면 너머에서 바라보면 안온하기 그지없는 가정처럼 보여지지만 한꺼풀만 들춰보면 곪아있는 마음의 상처들. 작은 상처 하나가 방치되고 그 옆으로 번진다. 괜찮다고 말은하지만 눈빛은 괜찮지 않음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차라리 힘들다고 나 좀 도와달라고 말을하면 되려 낫겠건만 이런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슬아슬하기만하다.

가정에 헌신하는 여인과 능력을 키워 사회활동하며 활동영역을 넓혀야 한다고 세뇌시키는 여인 사이에서 자란 여성은 결혼을 하면서 온전한 자신의 몫 보단 이 집의 '안사람'이 되길 바라는 사회속에 들어와 혼선을 빚는다. 답도 없지만 오답도 없는데 계속 맞춤형 답안을 강요받는다.(1부 안)


결혼하고 집안에 맞춰드리면 끝인줄 알았지. 이건 퀘스트를 수행해도 다른 퀘스트가 또 생성되어 도저히 종료가 안되는 게임에 돌입이었다.


엄마되는 것도 힘든데 엄마되면 더 많은 분신술을 꿰어야한다. 조리원에서 모유수유 양으로 비교되는 엄마의 자질. 나를 갈아넣어야 굴러가는 것.(2부 조리원 천국) 꾸준한 경제활동을 위해 핏덩이 떼어놓고 돈벌러 나가야하는 조직사회. 이 돈 벌어 시터고용에 올인하더라도 나의 경력단절을 막아야했고, 아이의 제대로된 육아를 위해 사람을 고르고 의심하고 CCTV로 살피며 돈주고도 연신 죄송하고 부탁해야만했다.(2부 돌보는 마음)


생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순간에도 당신이 직접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사내놈이 와야 장례식장 완장을 찬다며 소리를 지르는 여인. 다큰 자식놈들 중 제대로 사람노릇 한다고 여기는 건 눈칫밥 얻어먹고 빠릿하게 살아온 딸이지만, 걸음마를 갓 뗀 갓난쟁이도 아닌 아들이 사고 쳐도 가엾고 딱해서 밑빠진 독에 물 붓듯 정성을 쏟는다. 당신도 그리 설움 당했음에도 이러한 대물림은 알게 모르게 딸과 아들에게 고대로 전수를 해주고 있었다.(3부 특별재난지역)


보면서 같이 아팠던 [82년생 김지영]이나  '왜 다 이래?' 라는 불편한 질문만 반복하던 [며느라기]와는 또 다른 감정이다. 가끔씩 툭툭 던지는 인물간의 대화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그렇지. 마냥 고구마 먹은 갑갑함 말고 통쾌한 사이다 한방도 있어야 사람이 살지.


화목한 가족이라는 핑크빛 희망을 망상으로 만드는 현실주의적이며 대단히 부끄러운 민낯 10편. 단편들을 보면서 나는 여기에 해당 안된다며 우리집만은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는 가정이 있을까?(아! 실수했다. 있을수도 있겠다. 정말 화목하기 짝이 없는 가정이거나, 정말 눈치가 눈꼽 만큼도 없는 사람이 느끼는 착각도 있다는 걸 간과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무한한 감정 노동과 누군가의 과도한 육체노동을 통해 편히 생활을 하고 있다. 대가성이 없는 활동이지만 그것은 무한한 자본이 아님을 계속 인지해야 할 것이다. 한 가정 속에서 사용기한이 만료된 이의 노동력은 쥐어 짜낸들 다시 채워지 않는다. 그 도움을 받은 다른 구성원이 먼저 애써온 사람처럼 또 나를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야 가정은 돌아가고 이전의 상태로 회복이 된다.


'돌봄'에 익숙해 돌아본다는 옛말을 외면해선 안되겠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보호받아오며 자란 사실을 잊지 않고 또 그걸 다시 해내야 한다는 걸 복기해야한다. 나는 이 가정 구성원 중 누군가의 피, 땀, 눈물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난 가정의 결실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이 서평은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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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딸이 이기적으로 살기 바란다 - 누군가의 딸, 아내, 며느리가 아닌 온전한 나로 서기
정연희 지음 / 허밍버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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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딸로 시작해서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부모로 온전한 내 이름 석자를 들으며 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더라. 오히려 10대 시절 학생의 신분이었을때가 더욱 온전한 '나'로서 불리워지던 때가 아니었던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저자 정연희는 자신의 딸이 마냥 어리다 여겼는데 결혼을 하겠다는 말을 듣게 된다. 생각해보니 딸아이는 품속의 아이가 아니라 엄연한 성인이었던걸 모른척하고팠던 부모였다. 그 한마디가 기점이 되어 작가는 그동안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어온 것들을 보태어 딸에게 해주고픈 말들. 이제는 엄마로서 여자로서 그리고 먼저 살아본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과 격려의 말들을 해주었다.


​006_ 딸의 인생엔 늘 엄마의 삶이 그림자처럼 숨어 있다. 싫어하든 좋아하든 어느 구석엔가 숨어 있다가 모습을 나타낸다. 어쩔 수 없이 내 인생에도 나의 엄마가 늘 어른거렸고, 딸도 살아가며 나의 그림자를 수없이 만나리라 생각한다.


싫든 좋든 나는 엄마 딸이라는 걸 증명하는 이른바 엄마의 복사본같은 느낌이라면 이해가 쉬울까? 어릴땐 이해가 되지 않던 모습들도 있었으나 결국 나도 엄마의 세월을 밟아가는 삶을 살다보니 이제서야 이해가되는 부분들이 있더라. 가끔씩은 삐딱선을 타며 '왜 저렇게 살아야하지'라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결국 엄마도 엄마의 엄마를 닮은 복사본이라 그 세월 흔적 일부를 몸에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을 알게되었다. 그 시절엔 그게 당연했고, 그 세월 속에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시대의 유행이며 그 시절의 암묵적인 룰 같은거지.

나 역시 엄마의 복사본이다. 일부는 진하게 적혀있어서 나에게도 베여있으며, 일부는 흐릿해서 복사판인 나에겐 보일듯 말듯한 흔적만 남아있는 구간도 있다.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나는 엄마의 일부이고, 또 어떻게 보면 나라는 주체적인 존재의 사람이라는 거지.


작가의 글들을 통해 나는 엄마의 일부를 만나고, 나머지 나로서의 일부를 좀 더 진하게 따라 적어보는 순간이 되길 바라며 프롤로그를 읽었다.


017_ “남이 너를 자기 딸로 여긴다니! 그 말이 너무 싫어서 배알이 꼴린 게 아닌가 싶다!”


아마 딸 가진 모든 엄마의 영문모를 배앓이 순간이 바로 이 타이밍 일거다. 사돈될 사람과 처음 마주하는 상견례자리. 결혼을 어떻게 진행 시킬건지에 대한 의견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각자의 자식들이 커온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길 하다가 끝맺음은 이걸로 마무릴 하더라. 딸로 여기며 잘 해주겠노라, 아들로 생각하며 예뻐하겠노라는 상견례 자리에서의 고정 엔딩멘트. 알고보면 오랜 과거부터 이어진 자동완성형 문장인데 곰곰히 단어들을 곱씹어보니 마음이 안 좋으신거였겠지. 당신도 살아보니 며느리와 딸은 단어부터 다르니까. 작가는 알수없는 배앓이를 했다 하지만, 우리 부모는 아버지가 그러하셨더라. 작가의 한마디를 통해 다시 떠올랐는데 말이야. 아빠가 그럴줄 몰랐어. 하하하.


079_ 말의 선언으로 며느리가 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한다는 말로 단박에 사랑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달콤하고 멋있는 말로 마법 같은 세상이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린 알지 않는가? 세상은 마법의 세계, 동화의 세계가 아님을.


가끔 도리라는 기준이 말하는 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삼아야할까, 듣는 이가 느끼는 경계까지를 도리라 삼아야할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다 생각하지만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석연치않은 점이 보인다. 작가는 자신이 산후조리를 다 하지 못한 후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었던 순간을 떠올리고, 시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산후조리하며 힘들어하는 걸 보며 예전 며느리가 당신들을 위해 애써온 그 순간을 곱씹게된다. 그제서야 당신은 며느리가 얼마나 애썼는지를 다시금 떠올리며 그제서야 진심의 마음을 보태어 고맙다는 말을 한다. 고맙다는 말이 참 얄궂은게 단어의 표면이 불투명하고 두껍지 못하고 습자지처럼 얇고 속이 비친다는 점이다. 입모양으로 씰룩이는 고맙다는 단어를 들여다보면 이게 진심의 따수운 단어인지 허울만 있는 단어인지 들여다 보인다는게 문제더라.

아직도 떠오르는게 올 봄에 병실에서 들었던 '고맙다, 미안하다.'라는 말이다. 입도 굳어가고 혀도 바싹하니 말라서 단어 한마디 내 뱉는것도차 어려우면서도 시어머니는 당신이 많이 미안했고, 고맙다는 이야길 하셨다. 그동안 며느리 맘을 못 알아주어 많이 미안했다며 힘도 안 들어가는 손이 내 손을 잡을 땐 이렇게 달콤하고 밋었는 말을 더 이상 못 들을 듯한 느낌을 받을 땐 아쉬움이 컸다. 좀 더 마법같은 말들로 당신과 내가 행복하게, 좀 더 길게 살 수 있다면 진짜 재미날텐데 결국 말은 다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어 홀로 이 흔적을 쥐고 사는 이는 더욱 더 말이 야속하기만 하다.



112_ 난 늘 나 자신의 도전만으로도 힘들었는데, 그분들은 지나가는 말로 나의 도전을 믿을 수 없이 험난한 도전으로 밀어붙였다. 그 지나가는 말들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슬픔과 두려움, 조바심을 불러일으켰음을 그분들이 상상이나 하였을까 싶다.


스스로도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점을 안다. 그렇지만 더 치열하게 살아도 되겠다 싶어 도전을 하게된다. 작가가 공부하고 학위를 따는 것보단 덜하겠지만 나역시도 하고픈게 있다면 한번은 시도를 하며 배우려하는 욕구가 큰 사람이다. 욕망의 덩어리가 학창시절에 샘솟았어야하는데, 늦바람인건지 다 커서 생긴다는 거다. 나이가 든 후 느낀건데 모든 배움에는 때가 있다지만 때와 함께 쩐도 있어야 됨을 알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하는도전들은 딱 내 깜냥에 맞게 하더라도 타인이 보기엔 일하고 살림살고 공부까지 하는 것이 벅차보이니 하나라도 잘 하길 바라는 잔소리로 번역이 되기도 한다. 내가 걱정이 되시는 걸까 가정에 충실치 못해서 함께 사는 이들이 옳게 대접받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시는 걸까 싶기도 해서인지 가끔은 정말 아무런 조건없는 응원이 고파지기도 한다.

201_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힘들다’ ‘어렵다’가 아니라 ‘참 고단한 일’이었다. 신의, 사랑, 존경이라는 좋은 단어들 뒤에는 인내, 외로움, 고통, 수행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었다.


가끔 남편과 우스개소리로 했던 말들이 있다. 내 통장 비밀번호며 간편인증 번호를 알려주며 혹여 내가 먼저 가거들랑 그거 다 챙기고, 내가 먼저 가는 것에 서운해하지말고 딱 3년만 그리워하고, 다른 좋은 사람 만나라는 말. 그러면 남편은 내 유언아닌 유언에 한술 더 떠서 말을 한다. 가는 거는 순서 없다며 본인이 편할라면 자기가 먼저 가겠다며 뒷일을 부탁한다는 말을 맞받아치곤 한다. 역시 당신은 내 남편이 될 자격이 충분해.ㅋㅋㅋㅋ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지만, 그 어려움을 알고서도 뛰어든 둘이다. 그래서 인내, 외로움, 고통, 수행을 감수하고 당신을 택한 거였다. 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나에게 이러한 시련과 댓가를 요구하나 싶지만 내 지랄같은 성격을 받아주기 위해 태어났기에 겸허히 그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나의 그대여 연애5년과 결혼생활 7년을 버텨온다고 고생했소이다. 아직 버텨야 할 날이 창창하니 좀 더 애써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저녁 맛있는 고기반찬을 올려봐야겠다.

262_ 누구의 딸이거나, 아내이거나, 엄마이거나, 며느리이기 이전에 너는 처음부터 너였단다. 어찌 자랐든, 어떤 생김새든,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든, 누구와 현재 살고 있든,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너는 네가 아닌 적이 없었단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사랑하는 딸에게 해주는 문장은 이거였다. 다른거 없다. 그냥 모든 본질의 시작은 '너'라는 것을 잊지도 말고 잃지도 말라는 말이다. 때때로 씌워지는 가면으로 누군지 헷갈릴 지언정 그 모든것이 나라는 점. 그러니 그 모든 순간에 등장하는 배역은 달라도 등장인물의 실명은 딱 한사람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음을 알고 있으니 너도 그렇게 믿으라는 말이었다.

엄마들은 다 그런가봐. 작가도 그러했고, 나의 어머니도 그러했다. 그녀의 문장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읽다보면 따뜻하면서도 물기가 스미는 듯 하다. 딸이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며, 아이의 엄마가 된다 한들 엄마에겐 가장 소중하고 소담스러운 딸이니 자신이 겪어온 힘든 과정을 따라 겪지 않았음 하는 애틋함이 있었다. 작가도 아는거였다. 작가의 딸도 본인의 복사본처럼 많이 닮아있음을 알고있으니 힘들고 험한 과정은 힘껏 점프하여 지나쳐주길 바라는 거겠지.

각각의 글들은 몇해 전 내가 결혼식을 올리고 폐백을 드린 후 친정부모님이 봉투에 곱게 접어준 편지처럼 여겨졌고, 시간을 쪼개어 그녀의 허한 순간을 채우기 위해 나섰던 모녀 데이트같았다. 엄마가 신이나서 내 어릴적 이야기와 과거의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는 듯한 오붓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페이지가 휘리릭 넘겨졌고, 여전히 나는 엄마의 귀한 딸이라는 확신을 한번 더 주는 듯 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게 맞는지 아닌지 헷갈릴때 쥐어주고픈 모든 딸들을 위한 응원의 책 같아서 책 페이지를 다시 처음으로 넘겨 표지에 적힌 제목을 매만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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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인주의자의 결혼생활
이정섭 지음 / 허밍버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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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랑 비슷한 부부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또 궁금해서 찾아본 이정섭 작가의 책. ‘두 개인주의자의 결혼생활’이라 함은 결국 우리 부부 또한 개인주의적 성격의 지분이 많아서 이렇게 사는 걸까? 싶은 의문형도 생겼고, 따로 또 함께 라는 일상의 행복 중 모르고 지나친 것은 없었는지 얻어갈게 많은 글이겠단 기대감으로 시작을 했다.




■019_ 주변에선 “각방 쓰면 멀어져” “그래도 자식은 있어야지”등 남들이 만든 정답과 기준을 끊임없이 들이밀었지만, 우린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 우리가 진짜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행복할 수 있었고, 독립적이기에 진짜 필요한 순간 지치지 않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다.

참 많이도 들었던 말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그 순간마다 넘어야 하는 필수 수행 과제가 있는 느낌이다. [초→중→고]에서 끝날 줄 알았던 우리의 반 강제적인 인간 완성 모양틀.(얼음트레이에 비유) 모양틀에 나를 부었을 때 넘치면 버려야하고(버려지고) 남는 공간은 부단히 노력해서 채우고, 그러고 나서 성인이 되면 더욱 까다로운 세부 공정으로 이어진다. [대학→직장인→연애→결혼→출산→육아&직장인→부모와 자식의 보호자]로 분신술까지 해가며 나를 여기저기 필요로 하는 곳곳에 심어 두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뭐지? 뭐가 남지?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누구의 남편이나,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보호자. 그 누구들에게 필요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주체적인 ‘나’란 놈만의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않기를 다들 한결같이 강요하고 있던 건 아니었나 싶은 질문과 답을 하며 더욱 복잡해진 길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니 제발 부부간에 결정지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입을 대지 않았음 하는 마음이 크다. 감 나라 배 나라 한다고 진짜 당신들의 말처럼 감도 자라고 배도 자라는 뿌리면 뭔들 못하겠소. 당신들도 못했던 인륜지대사에 대해 강요하지 않았음 하는 간절함이 크다.

그래서 우린, 진심을 다해 우리의 소리만을 귀 담아 듣기로 했고 그 외의 이야기는 흘리자 다짐했던 신혼 초가 생각났던 단락이다.(사람 나름이라고 흘리고 싶어도 흘려듣지 못하면 때때로 그 말의 독성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나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병이 생기기도 하니 흘려듣자 할 때 미련 없이 흘려버리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022_ 모든 사소한 일이 연인과 함께라는 이유로 즐길 거리가 되는 셈이다. 어제와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사랑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게 달라 보이는 경험을 한 번쯤 해 봤을 것이다.

어제와도 같으며, 그제와도 별반 다르지 않는 일상이며 똑같은 장면의 연속이다. 으레 매일매일 방영하는 일일 드라마였다면 구독자는 다시보기 할 때 스크롤을 당겨보거나 스킵을 누를 장면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 가장 재미난 장면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연애를 하면 모든 것들이 우리 위주로 돌아가고, 모든 사랑 노래가 우리 이야기였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118_ 예측 불가능한 존재인 인간 둘이 만나 이루는 결혼이란 우주가 그리 단순할리 없다. 남들의 기준에 휘둘리지만 않으면, 뒤집어 말해 부부가 자기들의 기준으로 결혼생활을 꾸려 나가면 거기에 일반론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둘의 의지와 노력만 남는 셈이다.

광활한 우주 속, 그 지구라는 작은 행성, 수많은 나라와 인구 속에서 당신과 내가 만날 확률만큼이나 우리는 참 많이 다르기도 하고, 어쩜 이래? 라는 의문이 날 정도로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린 천생연분인가보다 싶은 생각을 하고, 다르면 당신의 모자란 부분을 내가 채워주려고 이렇게 만난 것이라고 멋대로 로맨스 소설을 짜 맞추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우린 부부이고, 그러니깐 어쩔 수 없이 당신 옆에 내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 이왕 그렇게 제멋대로 내 맘대로 지어낸 사랑이야기라면 끝까지 기승전행복론을 이어갔음 한다. 은비 까비 속 동화도 그랬고, 배추도사 무도사 아저씨들도 이야기 보따리 속에서 꺼내준 것들이 전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론이었으니 옛 어르신들의 말씀이 틀린 것 하나 없다는 믿음을 이어가며 우리도 행복하자는 거다.

결국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당신과 나 뿐이니깐 우리 둘만 잘하면 되는 거야.



■157_ 사람들은 우리 부부에게 나이 들어서 둘만 있으면 외롭지 않겠냐고 말한다. 다음 세대가 없으면 어떤 희망이 있냐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처럼 희망이 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 눈엔 반복돼 보이는 삶 속에서 사소한 발전을 찾기로 했다.

... ... 5년 뒤 혹은 10년 뒤를 생각했을 때 우리 곁에 사소한 변화는 있을 것이고, 그 정도 희망의 감정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결혼 초반에 이 질문을 받으면 감정이 요동치며 반감이 더 세게 들었다. ‘당신이 왜?’라는 반박을 하며 양 손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그렇게 혼자 가시를 세우지만 정작 표현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도 나이를 먹으며 느끼는 감정으로서는 당신이 보기엔 내가 평범한 다른 이들과 다르니 ‘걱정’되어 하는 말 이었구나 라는 생각으로 고쳐 받아들이고 있다. 작가의 주변 사람들처럼 우리를 둘러싼 친구네 부부들도 아이 없이 둘만이 행복하게 잘 살자고 마음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듯 결혼과 출산의 순서를 밟아가는 가정도 있다. 인류의 다양성 중 한 갈래로 좋게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작사가 김이나님이 한 예능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희 같은 부부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식을 가진 기쁜 우주를 체험해보지 못하겠지만 다른 부부들은 체험 못 하는 아이 없이 부부끼리만 사는 즐거움은 (그 부부들이) 절대 못 경험하니까.”라는 대답이었다. 12년째 아이를 갖기 않고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너무 만족스럽고 좋다고 이야길 하는 모습이 우리가 하고팠던 대답이고, 계속 이어나갈 목표이기도 하다.




■176_ 그래서 노후를 위해 또 한가지 준비할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일상을 즐기는 습관이다.

내가 자녀를 안 낳으려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 부분이기도 하다. 내 노후를 위해서 자녀를 낳진 않고 싶었다. 본인의 의사에 따라 태어난 것도 아닌데, 부모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아이가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을 심어주고 싶진 않았다. 그 아이도 존재로서의 가치와 삶의 이유가 있을 텐데, 어느 시점부터는 본인보다 부모의 부양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그게 재미난 삶으로 분류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 때문이다. 으레 자기를 낳아준 부모라면 부양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애쓸 자식들이다. 결국 나도 그러한 수순을 밟고 있으니 효자 효녀 유전자는 대물림인가보다.

나는 그러한 유전자를 내 선에서 끊어냈으니 배우자와 나를 위해 더 견고하게 노후를 준비해야한다. 노후 대비를 다 하더라도 둘 중 한명을 먼저 이승으로 보내기라도 한다면 그 허전함은 남은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슬픔의 공간이다. 가족들의 탄생과 사망을 다 본 나로선 슬픔과 행복의 깊이와 농도도 어느 정도 가늠이 된다. 그렇다고 그 죽음에 대한 대비만하며 살기엔 죽기만을 바라는 삶처럼 여겨지니 서글프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될지 모르는 일상에서 슬픔보단 기쁨의 순간이 더 많았으면 한다. 그게 남겨질 사람에게 남아있을 추억도 될 테니 말이다.

내 또래라면 이 CF 광고 문구를 기억 할 것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광고에서도 인생을 즐기라며 말하는데, 이렇게 산다고 누가 뭐랄 것도 없으니 제발 누리고 즐기고 표현했음 싶다.





■185_ 그러다가 생각한다. 둘만이 존재하는 완벽한 순간이다. 이렇게 행복한 날들이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너랑 내가 좋아서 한 결혼이고, 그래서 같이 살 자 했으니 다른 것 필요 없고 ‘너랑 나’만 생각하며 살자고 했던 남편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문장이다.

작가의 부부의 일상들과 우리 부부의 에피소드들이 참 많이 겹쳐 보이던 책이다. 비슷한 생각과 행동들 덕에 이 책에 더 깊이 몰입을 했고, 나의 속 이야기를 잘 들여다보고 말해주는 듯한 문장들이 가득해서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차마 말하기 어려웠던 부분, 내가 말해도 이해 못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이 책을 보여주면 내 모자란 어휘력 때문에 표현하지 못한 내 생각들을 다 알아주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우린 공장에서 찍어낸 인간1, 인간2가 아니다. 각자의 뜻하는 바와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삶의 기대치 또한 다른 것을 인정해 준다면 마주보는 부부 사이에서도, 우리를 바라보는 부부와 타인간의 시선의 온도도 조금은 따수워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크다.


이 리뷰는 출판사 허밍버드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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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 인류 - 균은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켜왔나
박한선.구형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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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시작된 마스크 생활화는 이제 일상이 되어 생필품 구매 목록의 0순위가 되었다. 1년이 넘어선 지금은 언제 끝날지를 예측하는 언론의 보도에 콧방귀를 뀌듯 쓸데없는 소리로 여겨진다. 당장 올해? 아니 내년? 글쎄 가까운 시일 내는 아니라고 보여지니깐. 의료계 종사자도 아닌 내가 보기에도 우리의 일상에 너무 녹아든 감염균. 

작년 봄 예전에 읽었던 '페스트' 를 다시 찾아 완독했던 기억이 있다. 과거엔 세계문학 명작이라고 읽었다면 다시 읽어보면서부터 나도 어쩌면 이 시대속의 어떤 이가 되는 건 아닐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며 본 기억이 있다.

계속 변해가며 견고해지는 감염병의 온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 보기로 한다.


■ 뭔가 이상한데도 그 이유가 확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격다짐으로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대부분 아주 유치한 원인을 들이댑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국민성'이죠. ... ... 이렇게 서로 병립할 수 없는 음모론이 난무합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미국인 네명 중 한명이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믿습니다.

음모론. 그리고 여론 흔들기. 이런 사건들과 기사들은 대기업들이나 정치적인 사건을 두고 사건을 이야기 할 때 쓰이는 단골 용어라 여겨왔다. 그런 음모론이 이러한 감염병을 두고 나오는 단어라는게 기가 찰 뿐이다. 그리고 이런 키워드를 가지고 자극적인 결말을 이끌어 내는 이야기들을 믿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에도 집중을 해야 한다. 수 많은 정보들 중에서 정확한 펙트만을 집어내어 이해하는 것. 그것에 집중 할 수 없다면 이 책을 읽어본 후에 보도기사 솎아내기도 괜찮은 방법이라 여겨지는 초입이었다.


​■ 코로나-19 상황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심리적 고통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우리 조상의 삶, 우리 조상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시의 인류가 역병을 접했을 때 보이던 행동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는 '우리 안의 원시인' 입니다.

사회적 갈등. 심리적 불안. 오늘을 살아오면서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산 건 아니다. 우리는 탄생의 순간부터 다양한 균속의 일부가 되어 자라났다. 과거 오랜 시간동안 생존해왔을 감염균도 있을테고, 그 질긴 인연의 고리를 끊고자 개발된 감염균 퇴치 항생제를 몸에 투여하면서 인간은 좀 더 우월한 생명체로 살아왔다. 우리가 손에 꼽기도 힘들도록 수 없이 앓아온 감기부터 시작하여 그 나이 또래들이 한번씩 앓는다는 수두나 수족구까지. 과거엔 치사율이 높았더라도 지금은 치료제가 개발되어 병원 주사 한방이면 끝이나는 단순 과정으로서의 절차로 오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모든 혜택을 누리는 우리는 과거 인류가 느꼈던 많은 갈등을 무시해선 안되겠지. 우리 이후의 세대가 과거 인류의 기록을 찾아볼 땐 똑같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대처하고 있는거라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 애써 개발한 항생제도 결국 다양한 내성균을 양산했지만, 그래도 항생제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항생제 덕을 참 많이 본 나로서는 내성균보단 맨몸으로 버티는게 더 두려운 순간으로 여겨진다. 인생의 큰 굴곡 없이 살아왔지만 잔잔한 너울은 무시 할 수 없더라. 잦은 잔병치레와 함께 가족의 걱정과 근심이었던 나로서는 묵묵하게 감염병과 싸워 이기는 것 보다 하루라도 빨리 병원에 가서 항생제를 처방받아 멀쩡해지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으니 인류의 많은 고난과 함께 개발된 치료제가 가장 고마웠던 수혜자였다.

과로를 해서 20대 초반에 대상포진에 걸렸던 악몽같은 기억은 면역력에 대한 중요성도 일깨웠지만 항생제 없이는 어찌 버티며 다시 일하러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면역력이 크게 떨어지거나 심한 염증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결정을 할 텐가. 내성균에 대한 예후보다는 당장 내가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결정이 우선시 되리라 본다. 그러니 항생제가 없는 세상은 상상 그 이상으로 고난과 재난이 겹친 재앙의 핵이 될지도 모르겠다.


■ 아이가 새로 태어나거나 오래 두고 먹을 음식을 새로 만드는 것, 이렇게 중요한 일일수록 경험적 행동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게 됩니다.

의례와 관습화된 절제된 행동규약. 전통적으로 내려온 감염에 대한 대응. 예전 우리 또래는 알 거다. 배추도사 무도사나 은비까비의 전래동화 TV만화들을 보면 그 마을에 새로 아이가 태어나면 문 밖에 금줄이라며 고추나 숯, 솔잎을 볏집 사이에 엮어서 걸어두며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두었다. 그러면 그 집에는 금줄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게되고, 더욱더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게 된다. 그 시절 면역이라는 단어가 있었겠는가. 그저 세상의 빛을 본 아이에게 악한 기운이 외부로부터 깃들지 않도록 하자는 옛 선조들의 지혜가 스며든 삶의 방식이지.

그걸 지금의 눈으로 보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신생아의 면역을 위해서도, 외부의 감염균에 대한 대응을 위한 최선의 조치. 거리두기이자 자가격리와도 같은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관례와 규범 덕에 인류는 그 많은 고비를 다 넘기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모두가 모두를 혐오합니다. '나'말고는 다 더럽답니다. 점점 심각해지는 감염병 상황에 부닥치면 모두 불안합니다. 누가 감염자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약간의 부정적 단서만 있어도, 금세 역겨워집니다. 서로를 의심하기 쉽습니다. 감염병 유행에 원인 제공자라고 지목되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삿대질을 하고 눈을 흘깁니다. 강력한 처벌, 엄격한 법 집행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성이 차지 않으면 사적 제재에 나섭니다. 악순환의 고리는 점점 가속화됩니다. 고리를 끊지 않으면 끔찍한 비극이 발생합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이미 무수하게 겪어온 일입니다.

모두가 모두를 혐오하는 세상이다. '나' 말고는 다 더럽다는 저자의 문장에 살짝 비틀자면, 가끔은 '나'마저 더럽다는 느낌을 주는 세상이다. 지역감염자 번호로 메겨지는 순간 '나'의 존재에 대한 본질은 사라지고 감염자인 내가 했던 모든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더불어 다시 사회에 스며들어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되는 갉아먹고 뜯어먹는 댓글과 혐오성 발언들. 최선을 다해 방역하고 조심하며 애써왔던 순간이 감염자와 동선이 겹쳤고 그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보람 없는 시간. 

저자는 프롤로그 말미에 이런 이야길 했다. '우리는 분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되돌아가는 길은 막혔고, 앞에는 아무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희망은 있습니다.' 이 얼마나 허무한 말인가. 또, 이 또한 얼마나 절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문장인가. 


뭐, 인류가 겪은 어떤 팬데믹도 단기간에 종결된 적이 없음을 미리 이야길 해주었으니 짤아도 몇 년, 길면 수백 년 감당해야 할 몫이긴 하다. 1년이 지옥같았고, 1년을 넘긴 지금은 익숙함에 젖어들어 습관이 되어버린 탓에 마스크 이전의 삶이 어색하고 낯설기만하다. 오죽하면 TV재방송을 볼때 길거리의 시민들이 얼굴이 노출(?)된 채로 지나는걸 볼 때 이 녹화는 코로나 사태 이전인가보다 라는 날짜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페스트'에서는 페스트균이 졀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있을 수 있다고 했다. 꾸준히 살아남아있다 또 다시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행복한 도시로 그것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름돋는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모든게 픽션같지만 팩트로 다가온다. 


감염병을 중심에 두고, 인류학 / 진화학 / 종교학 / 면역학 등 다양한 분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느 하나 배제할 만한 학문이 없었다. 인류가 만들었으며 사회가 키웠고 미래엔 더 복잡한 지도를 그려가며 확대해 나갈 진득하고 끈덕한 인류와의 대립적 정체. 같은 인류라면 말이라도 하고 설득이라도 할 텐데, 이 균은 무언(無言)의 형태로 분열하고 번식하며 생을 이어간다. 그래서 더 환장할 노릇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이가 아니다. 기초 과학만 아는 정규교육만을 받아온 평범한 사람1에 불과하다. 의료계 종사자도, 과학분야 발전에 기여하는 인물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이가 감염병에 대해 좀 더 수월하게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기록들을 뒤져보는 수고로움 없이 책 한권으로 이해하기엔 참 괜찮은 페이지들의 조합이다.


다만 에필로그에서 말한 어두운 미래에 나왔던 페스트의 문장이 바로 코앞의 미래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덮게 된다.


◎ 이 책은 창비 출판사의 스위치 서평단을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고 기록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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