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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2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4월
평점 :
가치를 지키는 힘
보통 나는 이렇게 선과 악이 뚜렷이 구분되는 이야기에서 선을 지향하는 편이다. 아무리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해도, 예를 들어 한니발 렉터 같은 천재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내게는 악인의 특성이 더 두드러지기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장기말 두듯이 사람을 조종하는 것에 순수한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고 나에게는 인생이 조종당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결말이 좀 더 마음에 남기 때문이다. 한니발 렉터는 이러한 단순한 설명으로 한정시키기엔 그 인물 자체가 비범하기에 전무후무한 악인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한니발보다는 스탈링의 정의를 위한 불굴의 집념과 선한 것을 추구하는 힘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지금까지 마약전쟁을 다뤘던 소설과 영화 등 어느 매체에서나 선과 악의 구도로 그 전쟁을 다뤘기 때문에 그 익숙함으로 인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이 지루해질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것을 뛰어넘고 굉장한 흡입력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악인들의 캐릭터가 다채롭기 때문이다. 또한 악인들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 아트의 캐릭터도 악인들에 못지 않게 기대감을 충족시켜준다. 거대한 마약세력을 추적하며 그 과정에서 가족을 잃고 동료를 잃지만 마약 카르텔을 향한 복수심이 그를 붕괴시키지는 않았고, 결국 복수에 성공하는 그의 뛰어난 정신적 힘이 그의 주체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
워낙 악인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제일 인상에 남는 인물은 역시나 아단 바레라일 것이다. 바레라가 사업을 운영하는 과정과 그의 선택들, 그의 결심과 그의 속마음이 말하는 단 한 가지는 세상에는 정말로 명확한 악이 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개의 힘이다. 그가 군인들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받았던 순간이 그의 폭력과 권력을 향한 욕망을 각성시킨 것인지,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이 두 요인이 혼합된 결말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가 얻은 것은 실제로 그를 가장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는 마약사업의 정점에 군림하며 돈과 권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동생과 사랑하는 여자와 딸을 잃었다. 그가 잃은 것들이 얻은 것들을 보상으로 느낄만큼 무가치한 것인가? 그것보다 훨씬 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비교나 재단할 수 없는 더 소중한 것들을 잃은 것은 아닐까?
사람마다 어떤 것에 가치를 두냐에 따라 갈리는 대답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에는 아단의 결말은 너무나 그의 종적에 합당하다. 그가 했던 가장 잔인한 선택에서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는데 아이들을 계곡에 던지는 것이었다. 심지어 아이들의 머리가 계곡 밑 바위에 부딪쳐 깨지는 장면을 촬영하여 경쟁자에게 보낸 것도 참 할 말 잃게 만드는 대목이다. 사실 그렇게 생명체를 잔인하게 다뤘음에도 법이라는 시스템 하에 그가 온전하게 신체적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가 한 행동에 비해 굉장히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 다만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는 죽음보다 더 큰 형벌일 것이라는 점이 그나마 그의 악행을 제대로 처벌하는 것일 것이다.
마약을 다뤘던 가장 인상깊은 영화 중에 하나가 시카리오였다. 에밀리 블런트가 등장했던 2번째 시리즈에서 마약조직끼리 경쟁자와 그의 가족을 처리하는 그 잔인함에,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현실성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영화를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무력한 현실감과 또 다른 악행의 굴레가 계속 이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정치구조와 마약산업의 관계가 개의 힘에서도 시카리오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다는 것이다. 시카리오에서는 미국 정보기관이 마약조직끼리의 싸움을 이용하고 그들의 사업을 묵인하여 미국으로 들여오는 마약을 원천 차단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마찬가지로 개의 힘에서도 미국 정보기관이 남미에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약조직의 뒤를 봐주고 그들의 돈으로 공산주의를 저지할 군인들을 양성하여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반체제 인사들은 가차없이 죽인다.
이것 또한 가치싸움이다. 시카리오에서는 이상과 현실이, 개의 힘에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가치가 서로 대립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그들이 정말 인간을 위해 가치를 지키고자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 없는 부분이다. 사실은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싸우면서 자신들의 이상이 위대한 것인 양 행세하는 이기주의자이자 소시오패스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진정으로 그러한 가치를 수호하는 이들은 한 개인으로 묘사된다. 시카리오에서는 에밀리 블런트가, 개의 힘에서는 아트켈러가 그렇다. 에밀리 블런트가 연기하는 역은 최대의 악을 저지하기 위해 최선의 악을 선택하는 것에 고뇌하고 아트켈러 또한 바레라를 잡기 위해 정부의 비리를 덮고 그 대가를 바레라를 처단하는 것으로 이용한다. 두 캐릭터 모두 개인으로서 거대한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무력감과 자신의 조국이 사실은 마약과 더불어 세상을 양분하는 또 다른 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가치는 비열한 자들의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들을 죽이기 위해, 다시 말해 인간애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세운다.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도 된다는 논리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인간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대적하는 것들은 인간의 욕망이 계속되는 한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지만 진정한 정의를 외치는 자들 또한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인간이 타락하여 개의 힘을 얻는다면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칼의 힘 또한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작용과 반작용처럼.
미친 개가 세상을 휘젓고 다니지 않도록 누군가는 칼을 들어야 한다. 그러한 칼의 힘이 진정한 가치를 지키는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