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말

어딘가 먼 곳에 얼음 덮인 산봉우리가 있다. 산은 원시의눈에 덮여 하늘색으로 빛난다. 사람들은 산기슭에서 평화롭게 살고 평화롭게 사랑하고 똑같은 평화 속에서 죽는다. 그들에게 태양이 빛나고 사랑은 그들을 따뜻하게 감싼다. 그러나 그들처럼 살기 위해서는 분노도 칼도 없어야 한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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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아직도 옐레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전에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는 것일까? 어쩌면 바냐 말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고 그 방법도 모르는 것일 수도있다. 어쩌면 사랑 따위는 할 가치가 없는 것 아닐까?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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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나는 어떤 신에게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해야 할까? 나의 보호막은 어디 있고 수호신은 누구인가? 나는 혼자다. 그리고 내게 하나님이 없다면 나 자신이 나의 신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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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2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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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지키는 힘

보통 나는 이렇게 선과 악이 뚜렷이 구분되는 이야기에서 선을 지향하는 편이다. 아무리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해도, 예를 들어 한니발 렉터 같은 천재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내게는 악인의 특성이 더 두드러지기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장기말 두듯이 사람을 조종하는 것에 순수한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고 나에게는 인생이 조종당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결말이 좀 더 마음에 남기 때문이다. 한니발 렉터는 이러한 단순한 설명으로 한정시키기엔 그 인물 자체가 비범하기에 전무후무한 악인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한니발보다는 스탈링의 정의를 위한 불굴의 집념과 선한 것을 추구하는 힘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지금까지 마약전쟁을 다뤘던 소설과 영화 등 어느 매체에서나 선과 악의 구도로 그 전쟁을 다뤘기 때문에 그 익숙함으로 인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이 지루해질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것을 뛰어넘고 굉장한 흡입력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악인들의 캐릭터가 다채롭기 때문이다. 또한 악인들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 아트의 캐릭터도 악인들에 못지 않게 기대감을 충족시켜준다. 거대한 마약세력을 추적하며 그 과정에서 가족을 잃고 동료를 잃지만 마약 카르텔을 향한 복수심이 그를 붕괴시키지는 않았고, 결국 복수에 성공하는 그의 뛰어난 정신적 힘이 그의 주체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

워낙 악인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제일 인상에 남는 인물은 역시나 아단 바레라일 것이다. 바레라가 사업을 운영하는 과정과 그의 선택들, 그의 결심과 그의 속마음이 말하는 단 한 가지는 세상에는 정말로 명확한 악이 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개의 힘이다. 그가 군인들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받았던 순간이 그의 폭력과 권력을 향한 욕망을 각성시킨 것인지,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이 두 요인이 혼합된 결말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가 얻은 것은 실제로 그를 가장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는 마약사업의 정점에 군림하며 돈과 권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동생과 사랑하는 여자와 딸을 잃었다. 그가 잃은 것들이 얻은 것들을 보상으로 느낄만큼 무가치한 것인가? 그것보다 훨씬 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비교나 재단할 수 없는 더 소중한 것들을 잃은 것은 아닐까?

사람마다 어떤 것에 가치를 두냐에 따라 갈리는 대답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에는 아단의 결말은 너무나 그의 종적에 합당하다. 그가 했던 가장 잔인한 선택에서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는데 아이들을 계곡에 던지는 것이었다. 심지어 아이들의 머리가 계곡 밑 바위에 부딪쳐 깨지는 장면을 촬영하여 경쟁자에게 보낸 것도 참 할 말 잃게 만드는 대목이다. 사실 그렇게 생명체를 잔인하게 다뤘음에도 법이라는 시스템 하에 그가 온전하게 신체적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가 한 행동에 비해 굉장히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 다만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는 죽음보다 더 큰 형벌일 것이라는 점이 그나마 그의 악행을 제대로 처벌하는 것일 것이다.

마약을 다뤘던 가장 인상깊은 영화 중에 하나가 시카리오였다. 에밀리 블런트가 등장했던 2번째 시리즈에서 마약조직끼리 경쟁자와 그의 가족을 처리하는 그 잔인함에,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현실성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영화를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무력한 현실감과 또 다른 악행의 굴레가 계속 이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정치구조와 마약산업의 관계가 개의 힘에서도 시카리오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다는 것이다. 시카리오에서는 미국 정보기관이 마약조직끼리의 싸움을 이용하고 그들의 사업을 묵인하여 미국으로 들여오는 마약을 원천 차단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마찬가지로 개의 힘에서도 미국 정보기관이 남미에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약조직의 뒤를 봐주고 그들의 돈으로 공산주의를 저지할 군인들을 양성하여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반체제 인사들은 가차없이 죽인다.

이것 또한 가치싸움이다. 시카리오에서는 이상과 현실이, 개의 힘에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가치가 서로 대립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그들이 정말 인간을 위해 가치를 지키고자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 없는 부분이다. 사실은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싸우면서 자신들의 이상이 위대한 것인 양 행세하는 이기주의자이자 소시오패스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진정으로 그러한 가치를 수호하는 이들은 한 개인으로 묘사된다. 시카리오에서는 에밀리 블런트가, 개의 힘에서는 아트켈러가 그렇다. 에밀리 블런트가 연기하는 역은 최대의 악을 저지하기 위해 최선의 악을 선택하는 것에 고뇌하고 아트켈러 또한 바레라를 잡기 위해 정부의 비리를 덮고 그 대가를 바레라를 처단하는 것으로 이용한다. 두 캐릭터 모두 개인으로서 거대한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무력감과 자신의 조국이 사실은 마약과 더불어 세상을 양분하는 또 다른 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가치는 비열한 자들의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들을 죽이기 위해, 다시 말해 인간애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세운다.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도 된다는 논리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인간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대적하는 것들은 인간의 욕망이 계속되는 한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지만 진정한 정의를 외치는 자들 또한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인간이 타락하여 개의 힘을 얻는다면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칼의 힘 또한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작용과 반작용처럼.

미친 개가 세상을 휘젓고 다니지 않도록 누군가는 칼을 들어야 한다. 그러한 칼의 힘이 진정한 가치를 지키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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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6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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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여행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모든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한데도 어느것하나 흐트러짐없이 조화롭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공작이 백치라고 불리지만 실상 그는 누구보다 선하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무언가 그 안에 내재돼있는 열정이 튀어오르게 되면 뛰어나던 통찰력이 붕괴되고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 그를 아무말이나 떠드는 백치로 만들어버린다. 공작의 열정은 때로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으로도,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도 표현되지만 거진 다 실패로 돌아가버린다. 그 단계까지 왔다면 공작은 이미 사람들에게 백치로 낙인찍혀버리고 거의 아무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랑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가 스위스에서 요양을 했을 때 만났던 불쌍한 소녀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봐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그의 인류애적 사랑을 보여주고 공작을 더욱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적 특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결말을 읽고보니 복선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는 깊고 넓은 사랑이 깔려있다. 물론 레베제프 같은 비열한에게 짜증도 내고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와 같이 사람들을 이용하고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파괴된 인간을 진심으로 연민하고 사랑한다. 스위스의 그 소녀도 나스따시야도 모두 사람들로부터 지독한 멸시와 고통을 받았다. 그 원인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조롱과 비난을 받는 것이 그들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겼는지 가늠할 수 없다.

공작은 그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위로했고 구원하고자 노력했다. 그것이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이지만 그 자신을 고통스럽게 살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는 상처받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상처에서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길 수 밖에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를 생각하고 움직이게 하는 그 자체의 본성인 사랑이 그를 해치는 칼날로 변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것이 그를 다시 백치로 만든 주요 원인이다.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때로는 누군가를 구원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오직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때에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타인에게는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하여 그들도 몰랐던 그들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의 사랑은 너무 타인에게 집중돼 있었고 정작 자신을 그처럼 사랑하지는 못했으며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서 찾았다는 것이 그가 다시 백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스위스의 소녀는 자기희생적인 수용으로 고통을 감내하여 공작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스따시야는 자기혐오와 자기파괴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견뎠기 때문에 공작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스따시야가 잘못된 것일까? 그리고 꼭 한없는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

읽는 내내 나스따시야를 동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비난하지도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모든 행동이 사실 자신을 견디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스따시야가 보여주는 모든 말과 행동은 깊은 자기혐오에서 비롯된다. 본인이 더럽혀졌으니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혐오해도 된다는 자기파괴와 그런 사람들을 증오하는 공격성이 동시에 발현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오직 그것만이 그녀 내면의 축이 되어 자신을 지탱하게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작의 사랑이 버거웠던 것이고 그에게서 도망치면서도 구원을 바랬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스따시야가 몰랐던 것은 그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구원이 아니라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치유의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독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 공작의 순수한 사랑을 오염시키고 공작마저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에게서 도망쳤지만 공작이 자신의 독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어 그를 붙잡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구원의 구심점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 있었다.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동시에 타인도 용서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큰 에너지와 통찰력이 필요한 일이다. 자기성찰이라는 길고 긴 터널을 오래도록 걸어야 하는 일이다. 나스따시야 같이 상처로 너덜해진 영혼이 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공작은 그것을 알고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녀 내면에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의 선택은 비극으로 종결됐다.

그의 선함과 고결한 사랑이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인물들의 선택을 통해 쓸쓸하게 체감하게 된다.

사실 난 공작의 선택에 대해 예브게니처럼 분노했고 그를 마음속으로 비난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런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예브게니가 공작에게 구구절절히 비난하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공작의 깊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백치라고 단정지어버리는 편견적이고 대중적인 시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사랑하는 아글라야를 버리고 나스따시야에게 갔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로고진과 공작이 예수의 그림을 보는 장면도 그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공작의 사랑은 의도적이라고 생각될만큼 예수의 운명을 따라간다. 고통스러운 채찍질을 견디면서도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지켰던 그처럼 공작도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사랑했지만 그로 인해 그의 정신은 부활할 수 없었다. 그의 사랑이 소멸됐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그저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터널에 들어간 것일 뿐이다. 세상을 여행한 대가가 이렇게 잔혹할줄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때 구원의 길은 열려있다. 그가 그 길을 걸어 평화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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