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빵 굽는 시간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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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의 고독함

처음으로 읽었던 조경란 작가의 작품이다. 한 때 파티시에를 꿈꿨었는데 제목에서 식빵 굽는 냄새가 나서 설레는 마음으로 선택했었다. 비록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지만.

매우 느리게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의 서술조차 애매하게 전달되는 부분이 많아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인물들의 끝을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주인공은 베이커리 개업을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말이 없는 아버지와 어딘가 묘한 매력이 있는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했으나 딸의 병문안을 번번이 거절했다. 어머니 곁에는 항상 이모가 있었고 이모가 간병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에는 하숙생이 있었다. 여자는 하숙생 남자가 외출한 날이면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 자거나 그 안에서 공상을 하곤 했다. 평소와 다름없던 날, 그녀가 예상치 못하게 빨리 돌아온 그 남자는 예상했다는 듯이 그녀의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남자는 어느 순간 훌쩍 떠나버린다. 그녀의 공허함을 공유할 수 있는 이는 남자의 여동생 뿐이나, 그 여자 또한 계속되는 남자의 부재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보다 더욱.

가족들과의 추억이 어린 빵을 구우면서 그녀는 어떻게든 혼자 남겨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그렇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을 떠난다.

어머니가 병원생활 끝에 죽게되고 아버지는 자신이 책임자로 있는 공사장에서 자살한다. 그리고 이모는 집을 떠나기 전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그녀가 이모로 알고 있는 자신이 바로 친모이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녀가 태어났다는 것. 언니는 자신과 남편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

제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피하고 싶지만 죄책감이 강한 원심력으로 그들을 붙잡았고 서로의 고통을 지켜봐야만 하는 속죄의 시간들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저 제자리를 빙빙 돌며 서로를 외면하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를 상기시키는 그녀마저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를 낯선 눈빛으로 쳐다봤다던 그녀의 어머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다른 누군가를 더욱 닮았을 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각인됐을 아이.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참아냈던 걸까 아니면 받아들인 걸까.

주인공은 진실을 다 알고 난 뒤에도 친모를 계속 이모라고 부른다. 이모가 짐을 챙겨 집을 떠났을 때도. 그녀에게 진실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녀 안에서는 이미 퇴적돼 있는 삶의 흔적들이 있었고 그건 변할 수 없는 고유함으로 그녀의 세계를 만들었으므로. 그래서 그녀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는 그 자체가 그녀에게 가해진 또 다른 폭력으로 느껴졌다.

어머니든 아버지든 이모든 그들은 모두 그녀에게 폭력을 저질렀다. 그들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거부했고 계속 삶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그녀의 고독함은 사라질 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는 모두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이들의 선택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그녀의 중심에 부디 고독함보다는 다른 무엇이 생기길. 그녀가 필요한 이들의 온정이 마음 속에 깃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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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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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신을 향한 진실된 믿음의 차이점

예전부터 읽으려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왠지 잘 읽혀지지 않는 느낌 때문에 실패하다 최근 들어 완독했다.

중세 오스만제국의 화원에서 펼쳐지는 살인과 사랑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을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게끔 매 장마다 각기 다른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첫 장은 누군가에게 살해된 자의 소개로 시작된다. 그는 화원에 소속된 금박이 세공사로서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카라는 10여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사촌인 셰큐레를 깊이 사랑했으나 그녀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고 상처를 안고 고향을 떠났었다.

10여년 전 카라의 사랑을 반대했던 에니시테는 술탄의 명령으로 특별한 화집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화집의 금박이 세공을 담당했던 이가 죽자 일이 심상치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카라에게 살인자를 찾을 것을 부탁한다.

에니시테의 집에서 이러한 부탁을 받으며 셰큐레를 다시 보게 된 카라는 다시 한 번 셰큐레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지게 되며 그녀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라도 에니시테의 부탁을 수행하고자 한다.

술탄이 제작하는 화집에 신성한 교리를 거부하고 신을 배반하는 그림이 들어있다는 소문이 돌만큼 그림들은 위험하고도 베일에 감춰져 있었다. 카라는 그 그림을 그리는 3명의 화원을 찾아가 그림을 향한 그들의 의지와 순수성을 시험하지만 살인자를 식별할 순 없었다.

그러다 결국 에니시테가 살인자에게 죽게 되고 살인자긴 가장 중요한 그림마저 훔쳐가자 술탄은 극대노하여 재무대신과 궁궐수비대장을 통해 카라와 궁중 화원장 오스만에게 반드시 그 살인마를 잡을 것을 명한다.

카라는 오스만과 함께 살인마의 단서를 쫓기 시작한다. 살인자가 전수받아온 역사성이 깃든 화풍을 추적하며 마침내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고 피투성이 추격 끝에 살인마의 정체를 밝혀낸다.

살인자의 입장에서도 글이 전개되기 때문에 인상깊은 스릴러 소설을 읽은 기분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이가 살인자가 아니어서 더 재밌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스릴러적인 부분과는 달리 이 소설은 무엇인가 더 심오한 메세지를 던져준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카라와 셰큐레, 셰큐레를 사랑하는 시동생 하산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신을 향한 숭고한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의 중요성을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정작 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천편일률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옛날부터 대가라고 칭송되는 이들만의 화풍을 잇는 자들이 신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는 이들로 여겨졌고, 그들이 모범적인 화원으로 칭송받았기 때문이다.

화원들은 절대로 그림에 자신의 서명을 해선 안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져서도 안된다. 유럽의 화풍이 표방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원근법이나 사람이 그림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초상화 등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대상은 오직 신의 눈 아래에서만 있을 수 있고 이 세상의 중심이신 신만이 그림의 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화풍과 유럽의 화풍을 비교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는 것이 죄악이라고 2권에 걸쳐 설명하는 화원들의 논리가 난 전혀 이해되지 않았고 도대체 종교가 무엇이기에 상상력과 논리를 오로지 한 가지 특성에만 결부시키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 옛날의 종교적 특성이라고 이해하기에는 현재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을 생각했을 때 그 때보다 더 불수용적이고 폐쇄적으로 악화됐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믿음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논리와 종교적 맹목성이 결합된 결과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정말로 신이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용인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과연 자신의 뜻대로 화원들이 그림을 그리도록 옛 대가들의 화풍만을 따르라고 했을까? 신이 인류를 위해 여자는 남자의 종으로서 교육도 받아서는 안되고 오직 남편의 허락 하에 모든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명했을까?

모든 것은 신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한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말들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유의지와 개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으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라고 거꾸로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은가.

자신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가지는 것이 그렇게 종교적으로 위험한 일일까? 그것이 위험한 이유는 종교가 신을 향한 위로써의 순수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의 정치 및 자본과 권력관계를 맺기 위한 아래로써의 서열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통일성을 가져야하는 이유는 정치가와 자본가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다. 종교는 언제나 권력과 결탁해왔고 신이라면 용납하지 않을 일들도 신을 대신하는 이들답지 않게 해온 역사도 있다. 한마디로 피지배계층을 보다 편하고 쉽게 지배하기 위해 남용된 인간의 관념적인 산물이다.

나는 부처님을 믿는다. 전국의 사찰에 다니며 공양미, 기와불사, 소원등 달기를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이 활동들 모두 일정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부처님께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할 수 있지만 부처님께 간절한 소원을 빌 때는 돈이 따라붙는다. 부처님은 부의 소유등급에 상관없이 모든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하사하셨겠지만 인간은 욕망을 참을 수 없다. 나 또한 부처님께서 소원을 이루어주실 거라는 욕망으로 자본을 지불하고 부처님께 소원이 실현되기를 빈다. 부처님께서 한낱 자본에 좌지우지되며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다.

사찰은 인간의 그러한 욕망을 이용하여 자본을 들인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소원등을 달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것이 참 이상했다. 내가 아는 부처님은 자비로우신 신인데 왜 돈이 없으면 등을 달지 못하는 걸까?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등이 더 밝혀져야 하는게 아닐까? 성장하고 보니 부처님과 불교를 믿는 것이 서로 같은 것이 아님을, 불교가 사람들을 모으고 종교적 힘이 있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함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신을 향한 믿음이 거북스러웠다. 신을 핑계로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 신을 향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눈을 바늘로 찔러 장님이 되는 인물, 나쁜 짓을 하고도 신이 자신을 돌봐주기를 바라는 인물 등 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 너무 쉽게 신을 찾으며 터져나온다. 이들은 자신이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종교에 기대어 자신들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적으로 사는 것은 신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신을 믿는 것은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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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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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입부분의 단편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말 그대로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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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자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4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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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청춘의 나날들

읽는 중에도 읽고 난 직후에도 이 책의 주제의식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중심인물들의 서사가 각자 그려지는 와중에도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과 청춘들의 사랑이야기가 혼잡돼 있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와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명확해지는 것이 있었다. 청춘의 무의미한 방황은 없지만 그 끝은 허무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바자로프라는 인물과 오진초바 등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범상치 않다.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로서 물질적인 것이나 실생활에 적용된 수 있는 유용한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개념이나 사상에 종속되길 거부한다. 그는 시와 문학과 사랑을 추앙하는 낭만주의를 혐오한다. 그는 그 어떤 것에도 길들여지길 바라지 않고 사랑은 유치하며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조롱한다. 그런 그도 사랑에 빠지게 되는 여자가 나타난다.

오진초바는 독립적이고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매력적인 여자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부자인 남자와 결혼했고 그가 죽자 모든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 그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부와 안정적인 마음의 상태이다.

그래서 바자로프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호기심과 호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못했다. 다른 귀족이나 지주와는 다른 야생적인 인간에 잠깐 흔들리는 듯 했으나 그녀가 쌓아놓은 자존심의 성벽을 허물지는 않았다.

바자로프는 그녀에게 거절당한 뒤 친한 친구의 아버지의 집에 머물다 그 아내와 밀회를 하게 된다. 바자로프 그 자신은 사랑과 낭만주의를 거부하면서 매력적인 여자에게는 사랑을 느끼는 것이 그가 가지는 삶의 태도의 허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가 친구의 아버지와 삼촌의 생애나 어른들의 자연에 감탄하는 태도 등을 무시하는 것이 무례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바자로프의 사랑에 대한 태도가 그를 어리석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 자신이 진정한 니힐리스트라면, 정말로 그 어떤 관습과 신념을 거부한다면 남의 부인이 됐든 친구의 여자이든 상관없이 사랑을 쟁취할 수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일부일처제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잡고 도피하는 것이 어리석을 뿐더러 낭만주의적이어서 그러지 못했다면 그것은 자기합리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인식한 채 그 제도의 한계를 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그는 사랑에 연이어 실패하며 우울한 나날을 이어간다. 그를 끔찍히 사랑하는 부모님의 보살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 그러다 병균에 감염되고 결국엔 죽게 된다. 그가 가진 비대한 자아에 걸맞지 않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오진초바가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무엇보다 우선시한다는 것에 공감이 갔다. 불분명한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고 삶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정하는 그녀의 독립성이 때로는 타인들의 삶을 재단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단점으로 드러날 때도 있지만 마음이 악한 인물은 아니기에 공감의 마음이 더 컸다.

나는 바자로프와 같은 니힐리스트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사랑 그 자체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게 왜 그렇게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하는지 알 수 없다. 바자로프가 죽어서도 그의 부재를 온 몸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님이었다.

인간은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원동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곁을 흐르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와 발맞춰 걸어가길 원한다면, 그래서 종국에는 시간에 편히 누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부정하기보다는 내 자신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유연하게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한 날들이 방황보다는 노력의 날들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시간을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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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자식

쳐다보기만 했다. "형, 내가 뭘 떠올렸는지 알겠어? 예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다툰 적이 있어.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내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셨지………. 결국 나는 어머니께 이렇게말했어. 어머니는 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세대에 속해 있으니까요. 어머니는 무섭게 화를 내셨지만,
난 ‘어쩔 수 없잖아?‘라고 생각했지. 약은 쓰지만 삼켜야 하잖아. 그런데 이제 우리 차례가 닥친거야. 우리 후계자들도 우리에게, 당신들은 우리 세대가 아닙니다, 약을 삼키세요, 라고말할 수 있어."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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