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어쩌면 엄마와 아빠는 아버지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들을사랑하고 환영하고 길을 잃을 때마다 보살펴주고 오매불망 귀향을 기다릴 누군가를 말이다.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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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늙어가는 건 일이다. 늙어가는 육신이 뇌를 고분고분 따르도록 설득하고, 결과적으로 뇌가 그 자신에게 고분고분 따르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한 마디로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일이다.
아빠는 평생 신앙과 불신, 회의 사이에서 방황했다.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한편으로는 잉그리드를 다시 만날 거라고 믿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는다는 건 촛불을 훅불어 꺼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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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그 아이의 사랑은 어머니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상상한 것보다 더 힘들었다. 두 팔과 다리와 커다란 치아와의견 차이. 그녀는 아이가 잠들어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 사랑하는 내 어린 딸. 하지만 모두가 깨어있을 때는 감당하기 너무버거웠다. 매달리는 아이. 매달리는 사랑. 아이는 마치 제 엄마속으로 다시 들어오려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아이가 떨어지려 하지 않아 괴롭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필사적인 갈망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고 자신이 누구이며 사랑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꽉 차 있다고 인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녀의가슴 깊은 곳에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혼자평온하게 지내고 싶은 갈망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호젓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바라다니 수치스럽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내면 - 어둡고 도금된 세계들은말끔하게 봉인되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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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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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너무 마음이 아프기도, 훌륭한 이야기를 읽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고양되기도 한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헨리 치나스키이다. 1930년대에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으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인물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모든 말이 맞다고 믿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아버지는 헨리를 교육시킨다는 명목 하에 끔찍한 체벌을 가하기 시작한다. 친구들이 주말에 즐겁게 야구를 하며 우정을 다지는 시간에 헨리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잔디를 깎아야 한다. 앞마당과 뒷마당 모두 깔끔하게 깎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일정한 높이 이상으로 솟아나온 잡초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는 매를 맞아야 한다. 그렇게 완벽하게 잔디를 깎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사실상 그것은 헨리를 내키는대로 체벌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행해질 수 있는 가장 비열한 형태의 폭력이다.

헨리가 처음으로 매를 맞았을 때의 느낌을 읽으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헨리는 그 경험을 무덤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작 초등학생일 아이에게 친구들과 놀 수 있는 자유시간을 빼앗고 잔디깎기라는 중노동을 시키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엉덩이를 때리는 체벌까지 하다니, 너무 폭력적이었다. 그 시절의 인권수준이 얼마나 낮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어린애한테 가혹할 수 있다니......

한 인간이 태어나서 마냥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어린아이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강압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한 세계를 철저히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으며 지속되는 폭력의 굴레를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개인의 영달과 자기만족이 가장 중요한 인간들이 부모가 된다면 헨리의 아버지처럼 아이에게 끔직한 폭력을 가하면서도 그것이 아이의 버르장머리를 고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 할 가능성이 아주 많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헨리의 어머니조차 헨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헨리의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을 방관한다. 헨리가 학교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 그 일이 부모에게 알려졌을 때도 헨리를 믿기보다는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라고 지레 생각하여 헨리를 비난한다. 헨리의 아버지가 공격적인 가해자라면 헨리의 어머니는 수동적인 가해자이다. 이 두 사람은 헨리를 비판할 자격도, 헨리의 사랑을 바랄 자격도 없다. 헨리는 양쪽의 부모 사이에 짓눌린 채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헨리가 자신의 부모보다 나은 점은 절대로 약자를 혐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헨리가 만약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숙함으로 헨리를 양육하고 헨리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부모를 만났다면 그는 분명히 사랑을 아는 사람으로 자랐을 것이다. 비록 헨리가 부모에게서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헨리는 약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았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기피하는 친구가 헨리를 찾아올 때도 내치지 않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고 거리를 떠돌아다는 개에게는 자신의 점심을 나눠주기도 했다. 어린아이인 헨리를 폭력적으로 다룬 그의 부모들보다 헨리는 훨씬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이다.

헨리에게 심한 피부병이 생기면서 그는 더욱 내면의 깊숙한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누구나 자신만의 우물을 갖고 있지만 헨리는 어린시절부터 부모의 폭력과 방관 속에 힘든 나날을 보냈고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의 친구들, 그가 읽은 책들 모두 그를 우물 속에서 꺼내주진 못했다. 헨리는 외면에서도 내면에서도 고통스러웠고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모든 폭력에 맞서 모든 제도와 절차를 비웃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난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의 생애를 읽고 같이 호흡한 독자로서, 헨리의 고통과 아픔을 안타까워한 개인으로서 헨리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함부로 재단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헨리는 정말로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을 비웃기로 결심한 그의 선택이 마음이 아팠다. 그는 고독을 자처하고 술을 진탕 마셔서 주변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친구와 피터지게 싸운다.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그를 비웃고 비난하고 경멸한 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모르고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비웃으며 살아갈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이들이었다면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겠지만.

타인과 비교를 하고 그들을 함부로 재단하며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그 모든 일련의 행위들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만든다. 의식화된 우월감은 경멸을 만들어내고 공동체 내로 전파되며 인간의 개성을 악하게 오염시킨다. 개인의 현실과 미래를 철저하게 파괴한다. 그리고 그 파괴성은 개인을 넘어 인간 자체의 선함을 무너뜨린다.

헨리가 개인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폭력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단으로 세상을 비웃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도 쉽게 행해지는 폭력의 형태를 인식하고 그것에 놀아나는 인간들을 비웃는다. 일상에서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를 비난하고 죽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폭력적인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선택에 의해서 태어난다. 그 어떤 아이도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아닌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태어났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부모는 정말 최선을 다해 그것이 강요가 아닌, 사랑에 의해 아이가 태어났음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랑으로 아이를 키우고 사랑을 아는 인간으로 만들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등한시해서 아이를 고통에 빠트리면서도 그렇게 된 것에 아이를 비난한다면 정말 비겁한 짓이다.

미래를 파괴시키는 폭력을 제어하는 힘은 온전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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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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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삶의 비극적 상관관계

기본적인 줄거리는 매우 간결하다. 마까르 알렉세예비치라는 하급 문관과 그의 먼 친척인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의 가난한 생활을 편지를 통해 서술한다.

이 둘은 서로를 정말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기꺼이 상대방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 가난함 속에서도 서로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선물한다. 이들에게 선물의 값어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자신에게 선물한 이의 소중한 마음을 깊이 느끼고 선물을 주는 사람은 그것을 받고 기뻐할 이를 생각하며 자신 또한 만족해한다. 서로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는 선량한 사람들이다.

초반부에 이들의 상황이 이렇게 묘사됐기에 읽으면서 내심 불안했다. 작가의 특성 상 필시 후반부로 갈수록 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역경에 들게 하는 고난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후반부의 흐름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이들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때조차, 셔츠의 떨어진 단추를 기울 수 없을만큼 비참하게 가난할 때조차 이들은 마지막 인간적인 모습을 놓지 않는다. 서로가 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위로받을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 있기에 가난과 수치심을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주요하게 느낀 감정이 수치심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선함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도 느꼈다. 마까르 알렉세예비치가 묘사하는 직장에서의 자신의 모습과 가난으로 인해 경멸당하고 놀림받는 처지를 읽을 때는 참 슬펐다. 타인의 몰이해와 그를 향한 비인간적인 대우는 그에게 깊은 자괴감과 수치심을 주었다. 그는 남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단지 가난할 뿐인데 왜 가난함은 그렇게 쉽게 비난받아야 하는가?

결국 마까르는 그런 수치심을 견디다 못해 술을 진탕 마시고 자신을 놓아버리고 만다. 바르바나가 그의 그런 행동을 꾸짖고 계도하지만 그는 절망적인 자신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도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마까르에게 우연한 행운이 찾아오며 그는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비극은 또 다시 찾아온다. 기껏 가난한 생활에서 탈출했건만 그토록 사랑하는 바르바나와 헤어질 위기에 놓인다.

바르바나 또한 심한 생활고 때문에 미래가 매우 불안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시골의 지주에게 시집가기로 결정한다. 그 당시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으므로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마까르와 바르바나는 어쩌면 서로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바르바나의 남편이 될 사람은 그녀의 묘사만 보아도 자기중심적이고 인색한 사람이기에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마까르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마까르는 가난함이 불러오는 수치심과 사랑하는 사람까지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견디면서 살 것이다. 바르바나는 자만심이 강한 남편과 살며 그의 인색함을 참아야 할 것이고 마까르와 만날 수 없는 슬픔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사랑도 보내야하는 가난함은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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