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식물상담소 - 식물들이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
신혜우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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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상생을 위한 길

저자는 식물분류학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서 자라며 많은 식물을 봐왔고, 자연스럽게 식물을 사랑하게 됐다.

시골에서 자라도 지천에 널린 식물을 무심한 태도로 바라보며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저자는 부모님의 영향과 식물도감을 공부하던 열정으로 식물분류학자가 되었다.

저자는 다양한 활동을 하던 중 식물을 키우는데 고민이 있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어 식물상담소를 열게 됐다. 하지만 많은 내담자들은 식물과 관련된 고민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생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게 됐고 저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과거를 반추해보기도 하고 내담자에게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많은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이 깊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잡초에 대한 식물학자의 따뜻한 시선이다. 나도 식물을 사랑하지만 사실 어디에나 있는 잡초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그저 인간이 분류해내지 못한 식물의 일종일뿐 잡초라고 불러서 식물의 가치가 낮게 판단될 수 있는건 아니라고 말한다. 난 이 생각이 너무 신선하게 다가왔고 식물을 바라보는 내 태도도 돌아보게 됐다. 나도 분명히 예쁜 꽃을 피우는 식물을 보는 것이 더 즐거웠지 잡초라고 불리는 것들을 보며 기쁨이나 행복을 느끼진 않았기 때문이다.

식물은 그저 존재하는 것인데 인간이 만들어놓은 관념 속에 갇혀 가치를 평가당하는 것이 식물에게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식물을 다르게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함부로 가치판단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식물을 진정 사랑하는 법이 아닐까.

또 다른 이야기는 인간의 욕심으로 품종개량된 식물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가 식물학 교수와 출장을 갔을 때 마침 그 곳에서 튤립축제가 있었는데, 같이 동행한 교수가 튤립을 보고 징그럽다며 빨리 걸어갔다는 것이었다. 일반인인 나는 왜 그것이 징그러운 것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저자의 설명을 읽고 이것 또한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안타까운 생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꽃 박람회나 축제에 가면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을 보며 즐거워하지만 사실 그것이 오직 인간만을 위해 품종개량된 식물이라면 마냥 즐겁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튤립의 잎을 크고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품종개량을 하면 아름답게 보일 순 있겠지만 정작 꽃잎이 너무 무거워 튤립이 계속 고개를 숙이게 된다. 식물을 사랑하는 식물학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징그럽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식물을 키우는 것 또한 생명을 키우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물이 자꾸 죽어서 고민이라는 내담자에게 저자는 자신이 키우고 있는 식물의 학명은 무엇이며 그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어떠한지 공부를 해보았냐는 질문을 던진다.

생명을 잘 키우기 위해서 생명이 원하는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당연한데, 식물은 수용하는 생명이라 그런지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었다.

나도 조그마한 화분을 사서 키워보려고 했는데 신경을 잘 쓰지 못했더니 금방 죽어버렸던 경험이 있는데 이 부분을 읽고 그 식물에게 미안해졌다. 식물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무심함으로 식물을 죽였던 경험이 떠올랐고 그것은 식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편의에 맞춘 조건적인 사랑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체적으로 식물을 사랑하는 저자의 철학이 돋보이고 진정으로 식물을 키우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어 좋았다. 또한 식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식물을 제대로 양육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는 것처럼 식물을 움직이지 않고 반응이 없어 수동적인 존재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생명으로 인식하여 제대로 양육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 서로 다른 성격과 기질을 발휘하여 꿈을 찾고 사는 것처럼 식물도 저마다 다른 기후와 토양에 적응하여 살아간다. 모든 생물들 중에서 인간만이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특혜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모든 종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식물이 한 번 뿌리내린 곳에 가만히 있으며 환경에 무력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생명활동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식물이 마냥 수동적이며 나약한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구에는 다양한 종이 살고 있고 서로 상생하고 있다. 인간은 환경파괴의 주범으로서 생명의 다양성을 유지할 의무가 있다. 지구를 이루는 요소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모든 생명체에 미치는 영향은 파괴적일 것이고 특히 인간은 그것에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자라고 나는 것들의 본질을 깨닫고 모두가 상생하는 길로 나아갈 때 진정한 상생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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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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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에서 돌아와도 죽음은 항상 곁에 있다.

시베리아에서 유형수이자 귀족 출신인 알렉산드르 빼뜨로비치가 감옥에서 10년 동안 지내면서 보고 느꼈던 기록들의 단편을 모은 소설이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도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4년 동안 했다고 하는데 그 점을 고려해본다면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감옥에서의 사건들이 사실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평민과 농부들에게 동료로 인정될 수 없었던 신분의 제한선과 인간적으로 공감받을 수 없던 고독함 사이에서 주인공은 고뇌하고 깊은 우울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사랑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랬기에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나마 잘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폭력적인 죄수도 있는 반면 심성이 착하고 정직한 죄수도 있다. 자유를 억압당하고 음식과 생활여건이 모두 최소한으로 이루어진 상태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여간 쉬울 것 같지가 않다. 죄수들은 서로 말다툼을 하고 때리고 싸우기도 하지만 크리스마스나 그리스도의 축전일과 같은 때에는 경건하게 마음가짐을 만들 줄도 알았다.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것이라기보다는 궁금해진 점이 있었다.

첫 번째. 도대체 200년 전의 농민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기에 감옥에 들어온 것을 만족스러워했을까?

감옥은 적은 양이지만 음식이 매번 제공되고 일정한 시간의 노역만을 하며 지주들의 횡포를 견디지 않아도 되어서 감옥이 차라리 낫다는 그들의 말이 섬뜩했다. 그 당시의 농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지 짐작도 못하겠다. 주인공의 묘사에 따르면 이들은 무감각한 표정과 무심함으로 지냈다고 하는데 그 당시 노동계급을 향한 부조리에 지치고 분노와 체념의 단계를 거쳐 고통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몸과 정신이 모두 타버린 재 같은 상태이지 않을까?

두 번째. 그 시대의 러시아 여성들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던 것일까?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시쉬꼬프라는 청년이 자신이 감옥에 들어오게 된 사건을 다른 유형자에게 설명하던 것을 듣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자신이 살던 마을에 한 여자를 어떤 못되먹은 자가 자신과 잠자리를 했다고 소문을 퍼뜨렸고 그 여인은 정식결혼을 하기 전에 정숙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모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지탄과 폭행을 당했다. 부모는 어떻게든 여인을 시집보내기 위해 시쉬꼬프에게 지참금을 주었고 그는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 여인은 소문과는 다르게 순결한 여자였고 그도 여인을 무분별하게 비난한 것을 사과하지만 그 때뿐이었다. 그는 여인의 소문을 유포한 자와 친구가 되면서 그의 말에 휘둘려 아내를 때리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때린 적도 있을 만큼. 그러다 친구가 군대에 가기 전 별안간 사실은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다며 그녀에게 나쁘게 군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하자 그녀는 용서하고, 그 자를 사랑한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의 목을 칼로 베어 죽였다.

일단 여인을 가지고 싶은데 여인이 자신의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자 악의적인 소문을 유포한 사람은 혐오스럽다는 표현도 아까울 정도다.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소유욕과 같은 징그러운 욕망일 뿐이다. 타인의 인생을 철저히 파괴하기 위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비열한 인간이다.

시쉬꼬프는 감옥 안에서는 다른 죄수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사람이었고 겁도 많고 소심했다. 강한 자에게는 꼼짝도 못하면서, 자신의 반려자가 아무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타인의 말에 휘둘려 아내를 때린 괴물이다. 첫 번째 남자나 두 번째 남자나 모두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다. 여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불완전함, 그것이 여인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아서 생긴 열등감이든 인정욕구든 그것은 여성을 상대로 잔인하게 발휘된 공격성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 또한 자신들보다 더 잔인한 이들에게 짓밢혀봐야 죗값이 치러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내를 적당히 때려야한다는 극중 인물들의 말은 그 당시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낮았을지 짐작케 한다. 그렇지만 현재의 러시아에서 또한 여성인권의 침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나는 지금도 러시아에서 가정폭력이 많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2017년에는 가정폭력 처벌법이 완화됐다고 한다. 이 법에 따르면 병원에 실려가지 않을 정도의 폭력 행위는 벌금형에 그친다고 한다.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아내가 가벼운 멍이나 뇌진탕이 생겨도 남편이 처벌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21세기에 이런 법이 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국가가 약자를 최소한으로도 보호하지 않는다면 힘없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구제를 받을 것인가?

세 번째. 과연 인간은 교화될 수 있는 존재인가? 죄수를 감옥에 넣는 것이 교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작중 주인공도 의문을 가진 부분이었다. 죄수들을 감옥에 몰아넣어도 그들 중 일부는 같은 죄를 저질러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인간적이지 못한 취급을 받으며 마음 속에 악의를 품게 된다. 이후로는 그 일련의 것들이 반복된다.

죄수들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동경한다. 만약 그러한 욕구가 좌절된다면 그것은 자기비하나 타인을 공격하는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 죄수들이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인간으로 변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의문에 회의적이다. 적어도 교화의 목적으로 본다면 그러한 억압된 환경에서 인간성이 다시 꽃피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죗값을 치러야한다는 처벌의 목적에서는 감옥이 필요하다. 기록을 읽다보면 죄수들 간의 협동심, 배려, 따뜻함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섬뜩한 죄를 지은 죄수들의 이야기에서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위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아내를 살해한 죄목으로 잡혀들어온 시쉬꼬프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런 정신상태를 가진 인간이 감옥에 갇혔다고 하여 아내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부류는, 뒤틀린 사고회로 속에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과도한 이들은 처벌로도 교화로도 사회기준에 맞추어 살아가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감옥 안이든 바깥이든 격리가 필요하다. 다만 그들이 죄은 죗값에 마땅한 처벌이 필요할 뿐이고 이것은 심지어 그들에게는 관대한 처사이다. 그들이 앗아간 생명에 비해 그들의 목은 아직 몸에 붙어있지 않은가. 다만 수감생활이 길어질수록 충족되지 못한 욕구로 인해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게 그들을 향한 최대의 죗값일 것이다.

네 번째. 주인공은 왜 감옥에서 나오고 난 후 사람들과의 섞일 수 없었던 것일까?

주인공은 마침내 10년의 형기를 마친 후 출소한다. 마지막 기록에는 출소로 인한 기쁨,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환희, 새로운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 자신이 기대했던 삶을 살지 못하고 병으로 죽고만다. 사실 이 부분은 주인공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한 귀족남성에 의해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원하는 삶을 산 것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다.

그의 눈에 비친 주인공은 폐쇄적이지만 똑똑하고 내면에 정직함과 따뜻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주인공은 출소 후 시베리아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는데 수업을 위해 나오는 날 빼고는 그 누구와도 대화나 교류를 하지 않았으며 그와 친해지고 싶어서 무작정 그의 집에 방문한 서술자의 말에 따르면 서술자를 본 순간 주인공은 낯빛이 창백해지고 굳었다고 한다.

그러다 서술자가 잠시 마을을 떠난 사이 주인공이 방에서 약사도 부르지 않고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주인공의 통찰력과 따뜻함은 왜 출소 후에는 발현되지 않았을까? 주인공의 기록을 읽다보면 분명 사건 발생 순서 등에 있어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인간적인 순리를 이해하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뛰어난 관찰력으로 죄수들의 행태를 분석했고 그것을 통해서 제도의 불합리함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다른 죄수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아낄 줄도 알았으며 그 누구도 돌보지 않던 개를 돌보기도 했다.

감옥 안에서 고독과 우울함이 그를 삼켜도 꿋꿋이 감내하며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던 그가 왜 감옥 밖에서는 그러지 못한 것일까? 이것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나버린다.

아마도 현실에 나오자 자신이 지은 죄의 의미를 절실히 느꼈을 수도 있고 갑자기 주어진 자유가 익숙하지 않아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태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숙했던 집의 어린 소녀에게 글자를 가르치며 유난히 예뻐했다는 것과 소녀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은 그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사랑과 자유를 느끼며 온전히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오랫동안 박탈당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자유뿐이었다.

그를 격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이 그에게 좀 더 주어졌다면 삶과 죽음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궁금해진다. 그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죄수로 생각하며 죽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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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산문의 멋 - 연암 박지원이 감추어둔 보석 같은 생각과 만나다
박수밀 지음 / 현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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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 서고자 노력한 자

2년 전쯤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해석본이 아닌 원본을 그대로 읽었고, 한자에도 약했던 지라 모든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긴 힘들었다. 그렇지만 완독 후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연암의 상대적인 포용성이었다.

이 책은 각 챕터별로 연암의 글을 소개하며 연암이 개혁적으로 사고하면서도 현실적인 관점에서 국가적인 문제를 비판했던 다양한 예를 보여준다. 나는 연암의 다양한 말 중에서도 이 구절만큼 연암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눈과 귀를 믿지 말고 명심하라‘.

유교의 합리성과 현실성은 그 당시 조선 사회에서 절대적이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원칙과 개념은 때로는 상대성을 평가절하하고 다양성을 제한하며 개인성의 출현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고전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 새로운 문체나 글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재혼한 여성의 자식은 벼슬에 오르지 못한다는 국가이념 등은 고루함을 넘어서서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특히 연암이 활동했던 시기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졌던 시기인데 조선의 양반들은 청의 문화를 명나라의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매우 멸시했다. 그 당시 청나라의 첨단기술과 다양한 문화 등은 인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이 보고싶어하는 청나라의 잘못된 관습에만 집중했다. 그 잘못된 관습조차 명나라가 그 동안 지켰던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는다는, 지극히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됐다. 형식과 실재 사이에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철저하게 형식만을 따졌다. 그들은 청나라가 잘못됐으며 명나라만이 옳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옳음과 그름이 과연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었고 모든 인간은 철학적인 사유를 통해 그것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구조적으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가 어떻게 절대성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절대적인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오로지 두 가지 경우에서만 가능한다. 먼저 첫 번째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독재와 같은 강압적인 구조에서이고, 두 번째는 상대적인 논리를 절대적인 진리라고 합리화했을 때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를 만든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큰 축을 담당해왔던 진리는 다양성이지 절대성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절대적인 선이란 결국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고유한 개념으로 전환되며 그 과정에서 절대적인 선이 마땅히 가져야 할 본질도 흐려진다. 그것이 어느정도의 절대성을 가질 수 있는가의 여부는 자신이 정립한 개념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주느냐에 달려있으며 완전한 절대성은 인간이 집단최면에 걸리지 않는 한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명나라를 그토록 따랐던 것은 그 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배구조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조선사회는 소수의 기득권을 위해 다수의 인간들이 희생해야 했던 기형적인 사회구조였으며 그들의 논리에 반대한다는 것은 지배계층에 반항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즉, 절대적인 진리가 통용될 수 있는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만족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강압적인 환경과 상대적 논리인 유교를 합리적인 국가이념으로 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인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연암의 비판의식은 빛을 발한다. 현재 선비들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고전도 한 때 중국에서는 풍속적인 유행서였다는 점을 들며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문체로 글쓰기를 좋아하는 제자가 그에 대한 비판을 받아 갈피를 잡지 못할 때는 잘하고 있다며 격려하기도 한다.

또한 연암은 중용을 중시하지만 조선의 양반들은 유교이념이 절대적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바꿀 수 없었던 지배계급의 논리를 이용하여 피지배계층을 착취하는 형태로써 중용을 받아들였다. 연암이 말하는 진정한 중용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개혁적인 사고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누군가의 논리를 받아들일 때 다양성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조선에서 다양성이 인정될 수 있었다면, 눈과 귀로 알 수 있는 그들만의 합리적인 관점을 다시 재정립할 수 있었다면 조선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듣는다면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의 지성은 퇴색되고 사회는 경직된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진정한 열린 마음으로 상대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기르라는 말로 들린다. 연암의 이런 상대적 포용성은 현 시대에서도 참 이루기 어려운 일인데, 이것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예견한 연암이 더욱 위대해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갔던 부분은 연암이 자신의 마음상태에 따라 계곡의 물소리가 달리 들린다고 했던 부분이었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명심(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에 더욱 신경쓰고 있기도 하다. 내 마음이 슬프면 노을도 슬퍼보이는데 내 마음이 평안하면 노을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시작해 마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그렇지만 마음의 파도가 계속 출렁이기 때문에 파도를 잠재우는 것이 쉽지 않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내 인생의 최우선 과제는 내 마음이 평정심에 이르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어느정도 과제를 이뤘다는 편안함이 있지만 그래도 불쑥 치고 들어오는 파도의 물결을 보고 있자면 심란할 때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음의 평정심을 찾으려고 애썼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연암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남의 날선 반응을 마음에 두지 말고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마음에 담다보면 어느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나와 다른 생각들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의 말과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만큼 내 마음이 여유가 없다는 증거인데 이 때만큼 평정심을 유지하는게 어려운 때가 없다. 내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다양한 것들에 넘어가지 않고 내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은 아마 죽을 때까지 수련해야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암은 참 멋있는 인물이다. 내가 느끼기에 세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명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명심에도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외부와 철저히 고립시키고 나만의 동굴로 들어가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방법과, 타인과 소통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정하고 마음을 잔잔히 하는 법. 두 방법을 적절히 쓰다 보면 어느새 명심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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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산문의 멋

비록 지극히 미미한 사물들, 이를테면 풀, 꽃, 새, 벌레와 같은 것도 모두 지극한 경지를 지니고 있단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하늘이 부여한 자연의 현묘함을 엿볼 수있지.
• 박종채, 『과정록』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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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얘야, 너는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어느 때고 말이야 일에있어서건 사랑에 있어서건. 특히 사랑에 있어서, 현실적이지않은 사랑은 불운한 사랑이야. 너는 이걸 어떻게 말하면 될까? - 너는 한 줌의 모래와 백 만 개의 아름다운 단어로는 집을 지을 수 없어. 내말 듣고있니?" - 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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