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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비밀, 그때 그 사람 ㅣ 명화의, 그때 그 사람
성수영 지음 / 한경arte / 2025년 7월
평점 :
정말 잘 읽히는 책이었다. 저자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오는듯했다. 미술책에서 자주 만났던 예술가들이지만 새로이 알게된 에피소드들도 많았고, 그림 한 점 한 점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예술가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은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들이 되기도 했다. 유명한 예술가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범한 당신의 삶과 비교할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들도 예술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니까. 예술가는 가고 없지만 그들의 고뇌, 슬픔, 사랑, 열정의 결정체인 작품들에서 사람들은 위로받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기도 한다. 그것이 예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서양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일본 화가로 유명한 가쓰시카 호쿠사이.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고, 돈에도 관심이 없고, 그림 그리는 시간이 아까워 청소와 세탁을 안해서 집은 너무나도 더러웠다고 한다. 그의 열정은 정말 대단했다.<부악백경>이라는 그림책을 내고 책 말미에 썼다는 작가 멘트를 옮겨본다.
"나는 여섯 살때부터 여러가지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지금보니 일흔 살 전에 그린 건 다 변변찮네. 일흔셋인 지금 간신히 세상의 온갖 동식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지. 그러니 여든여섯 살이 되면 지금보다 더 잘 그릴거고 아흔 살,백 살엔 더더욱 잘 그릴거야. 시간이 더 흐르면 내가 그린 그림에선 점 하나, 선 하나가 모두 살아 움직이겠지. 장수의 신이여, 나를 오래 살게 해주면 이 말을 증명하겠다. 그림에 환장한 늙은이 씀."-p92
89살까지 살았다는데 그래도 많이 아쉬워했을 것같다. 이렇게 생의 마지막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던 예술가들을 보면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도 그런 화가들의 에피소드를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를 살게 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화면 가득 찬란한 빛을 떠올리면 호아킨 소로야가 떠오른다. 그림을 보면서 눈이 부신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하는데, 모네는 그를 '빛의 거장'이라고 불렀다한다. 스페인의 깅렬한 빛을 담아낸 것에 더해,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너무 멋지게 다가왔다. 영감을 얻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람기 있는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호아킨 소로야 미술관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회화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라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말처럼 소로야의 작품은 보는 이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단순히 그림 기술이 탁월해서만은 아닙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그가 이 세상에서 받은 사랑이 따뜻한 빛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이렇게 표현하곤 합니다."삶을 기념하는 황홀한 축제"(<텔레그래프>)라고.-p210
러시아 화가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가가 일리야 레핀이다.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이라는 책에서 처음 만났던일리야 레핀의 작품은 강렬했다. 그림으로 스스로 자유민의 신분을 획득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어 러시아를 등지고 핀란드인이 되기를 선택했던 그의 삶, 역사와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에 담았다는 일리야 레핀이다.
몇 년전 베르나르 뷔페의 전시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날카롭게 뻗은 직선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많아서 어둡다고 느꼈었다. 이후 처음 만난 뷔페다. 미술책에서 그리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임팩트는 강하게 남아있다. 사람들은 세계최고 화가라고 떠받들었던 그가 롤스로이스를 타는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비난을 퍼부었다고 했다.가난한 사람들을 소박하고 거친 선으로 그려내는 화풍때문에 만들어진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예술가로서의 자질, 작품까지 비하하는 대중의 모습이 비열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뷔페는 꿋꿋이 작품활동을 했고, 혹평도 따랐지만 현대에 다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한다.
인간의 삶이나 예술에 대한 평가는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후회하지 않으려면 순간의 분위기나 편견에 휩쓸려 속단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보고 깊이 생각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그런 다음에 내린 평가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p296
이 책에서도 시간이 흘러 재평가되는 화가들이 많이 등장했다. 비단 예술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맞춰주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흔들리다보면 후회만 남을 지도. 당장 확신이 생기지는 않더라도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얻었지만 사랑에는 실패하고 고독한 삶을 살았던 토머스 로런스, 뇌졸중으로 장애를 가지게 되었지만 아내의 지극한 사랑, 삶에 대한 집념과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가졌던 로비스 코린트, 모델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화가가 되고자 했던 수잔 발라동등 24명의 예술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을 느끼는 순간은 내 이야기와 맞닿아있는 지점을 발견했을 때가 아닐까싶다. 또한 예술가들의 삶이 녹아있는 그림이기에 그들의 삶을 엿보게 된다면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을까싶다.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담은 에세이을 좋아해서 많이 읽는 편이다. 때론 너무 가벼운 책을 만나서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성수영 작가의 책은 읽고 나면 뿌듯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알찬 내용들로 가득차있다. 전작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은 읽었는데,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은 아직이다. 이 책도 꼭 읽어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