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Up - 초급과 고급 과정의 실전 페미니즘
율리아 코르빅크 지음, 김태옥 옮김 / 숨쉬는책공장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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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페미니즘 활동과 목표의 종류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 수만큼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유일한 페미니즘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주제도 없어요.(중략) 하지만 페미니즘의 가장 큰 과제는 왜 여전히 페미니즘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것이죠.   (142p, Q. 페미니즘에서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인가요? 에 대한 '줄리 자일링어'의 답변 中)​

 

하나의 거대한 페미니즘이란 없다. 페미니즘의 흐름이나 이론에 관해서는 "불일치"라고 표현하는 게 아주 적합하다.  (본문 중 146p)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와 그 이름에 얽힌 역사와 이론 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망설이게 된다. 그런 망설임은 무지에서 오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자들조차 그에 대해 위와 같은 답변을 내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정리하긴 어렵고, 할 말은 많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인 만큼 책의 구성도 약간은 혼란스럽다. 크게 <01. 기초>와 <02. 동등권,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는 굵은 목차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내부에서 여러 페미니스트들의 인터뷰(페미니즘에 대한 다섯 가지 질문)와 프로필, 저자가 작성한 토막토막 이어지는 본문과 다양한 통계자료, '짧고 간결하게'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개념 및 이슈 정리들이 제자리인 척 조금은 어지럽게 섞여있다.  오히려 목차에서 밝히지 않은 본문 내의 8가지 이름의 소 목록이 이 책의 내용이나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더 도움이 된다. 책의 앞부분에서 이런 정리된 목차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이 책의 독자들이 '페미니즘의 미로'에 빠져 마음껏 헤매고 직접 여러 가지 개념이나 편견과 부딪혀 싸워 결국 실전에까지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라는 저자의 의도가 들어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처음에는 본문과 상관없이(심지어는 문장이 이어지고 있는 본문과 본문 사이에도) 등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프로필에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읽다 보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듯한 내용들도 본문과는 상관없는 내용의 통계자료도 하나하나 흥미로워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하나를 통째로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개념이나 관련 내용들이 책 안에서 조금씩 나누어져 있어서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어느 정도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묘한 힘이 있는 책이었다. 서평을 작성하다 새삼스레 발견한 8가지 목록을 보니 '이런 내용을 읽었구나'하며 마구잡이로 들어온 다양한 정보들을 스스로 다시 점검해볼 수 있었다. 페미니즘 초급반이라 자칭하는 나에게 모든 내용들이 새로웠지만 26살의 젊은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저자가 기획한 톡톡 튀는 구성이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다. 특히 소 목록 중 <8. 이제 실전으로!>라는 부분에서 제시한 '탁월한 페미니즘 아이디어 열두 가지'는 간결하게 쓰여있지만 독자들이 실제로 시행해볼 법한 설득력이 있는 내용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내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이란 여성운동의 또 다른 이름이고, 남녀의 평등권을 주장하며, 성별에 있어서 (사회, 정치적 의미로) 약자인 여성의 참여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남녀평등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이지만, 부끄럽게도 실제로 그 '평등권'이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는 여러 가지 성차별을 그리 크게 느끼거나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사회의 갖가지 사건들과 주장을 듣기야 했지만 그저 남의 일인 양 흘려들어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성차별의 피해자가 되거나 가해자가 되는 상황을 분명히 겪었다는 걸 느꼈다. 알게 모르게 학습해온 여러 가지 편견들이 내 안에도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큰 범죄나 커다란 사건으로 번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차별과 편견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이 책은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페미니즘은 분명히 사회 운동의 한 종류이지만 사소하게는 주장을 가진 일종의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차별과 편견을 없애고 누구나 평등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내 맘대로 해석해도 그리 크게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그만큼 페미니즘에는 다양한 주장과 인식, 그리고 표현 방법이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에 사람들은 주저한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그것은 그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페미니즘이 가진 이미지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나는 한국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대해 종종 비꼬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미투 운동으로 신고당할 만한 짓은 하지 마', '미투 운동 조심해라'하는 말들. 단순하게 그런 짓을 하지 말라, 경계하라는 의미도 물론 있겠지만 미투 운동을 통해 자신의 피해 경험을 밝힌 피해자들을 자칫 가해자로 둔갑시켜 누군가의 신세를 망치게 만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뉘앙스를 풍긴다. 잘 설명하기 어렵지만 흘려듣는 소리라도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고 싶었다. 미투 운동은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매몰시키거나 돈을 뜯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있어선 안될 일이지만 혹여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미투라는 이름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도 그로 인해 이러한 인식이 퍼진다는 건 정말 억울한 이야기다. 내가 속으로 답답해만 하던 이런 부분과 관련된 내용을 책에서 찾아냈다. 권력과 관련된 치명적인 성차별에 대한 대응 및 처신에 대한 이야기 도중에 나온 내용이다. 


우리는 종종 비난받는 것처럼 히스테릭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제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피해자 회원권(스위스 TV 진행자 외르크 카헬만이 강간 혐의로 재판을 받고 무죄로 풀려난 뒤 인터뷰에서 한 말로, 여성들은 항상 희생자 노릇을 하며 남성들을 가해자로 몰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옮긴이)이라는 것도 갖고 있지 않다.  #절규 운동, 경험의 교환, 성차별의 가시화,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인식은 자의식을 가진 표현방식들이며 필요에 따라서 구체적인 행동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본문 중 48p)
      
내가 아는 모든 여성들은 성별 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평등에 찬성하면서도, 누구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부르지 않는다- 미셸레 로텐   (본문 중 243p) 


누군가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요?' 하고 물었을 때 사람들은 '아니야, 하지만...' 전술을 사용한다. 일단 부인하고 페미니즘적인 사상을 조심스레 밝히는 것이다. 서평에서는 주로 단순하게 성차별이라는 단어만으로 언급했지만 평등권의 문제에 있어서 페미니즘이 필요한 영역은 상당히 다양하다.  월급과 사회생활(직장의 유무), 몸에 대한 인식(몸매, 제모, 나이 등), 힙합과 영화에서 드러나는 단면들 등등 이 책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 어느 사소한 부분이라도 누군가 더 알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페미니즘이 실전에서도 쓰일 수 있기를 바라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으므로써 나 역시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자문해본다.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으음... 아직은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내 안의 주장이 서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 막 첫걸음을 떼었으니. 하지만 페미니즘이 누구나 동의하는 '평등'에 대한 바른 인식과 변화를 바라는 태도라면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이 답변도 '아니야, 하지만' 전술을 써먹은 것이려나... ?) 일단은 저자가 추천한  '탁월한 페미니즘 아이디어 열두 가지' 중 "정보 얻기"부터 시작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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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담푸스 세계 명작 동화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사이토 다카시 엮음, 다케다 미호 그림, 정주혜 옮김 / 담푸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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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이 몸'이라 칭하고 인간에 대한 서슴없는 폭로를 내뱉으며 암컷 고양이 얼룩이에게 '선생님'이라 불리는 걸 은근히 즐기는 인물이 있다. 이 발칙한 인물은 아직 이름도 없는 '고양이'로 능글맞지만 사랑스러워서 이 책마저도 사랑하게 만든다. 원작은 나쓰메 소세키의 동명 소설이다. 책의 말미에 쓰인 엮은이 사이토 다카시의 말에 따르면 원작 소설은 제목과 내용의 파격은 물론, 소설의 문장들은 '제대로 익히기만 하면 현대 일본어의 기본이 다져질 정도로 좋은 문장'(엮은이의 후기 中)이라고 하니 이 동화책의 문장 역시 원작에서의 문장을 그대로 따오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원작이 워낙 유명해서 줄거리 등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본문을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동화책으로나마 실제 글을 접해보니 원작에 더더욱 흥미가 간다.


유쾌한 줄거리와 사랑스러운 등장인물, 친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꽉 찬 삽화는 동화책을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특히 동화책의 장점이자 강점은 삽화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의 그림은 동물이 주인공이라는 점에 플러스 효과를 받아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림작가 다케다 미호는 <마스다 군>시리즈, <웅성웅성 숲의 고집쟁이 시리즈> 등 많은 책을 작업한 베테랑이자 유명 작가였다. 개인적 취향으로 그림을 보고 동화책을 선택하는 사람으로서 '다케다 미호'라는 이름을 기억해둬야겠다.

 

 

줄거리가 소설 원작의 부분을 취하고 있다 보니 맨 마지막 장의 마무리가 이야기로서는 조금 뜬금없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장면 자체가 선사하는 유쾌한 매력을 부인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서생이라는 인물을 포함한 인간들의 별 볼 일 없음을 폭로하며 고정관념을 깨어주는 것이 (원작에서)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라 치면 유쾌하게 고양이에 대한 편견을 깨어주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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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만년 살 것 같지? - 멸종위기 동식물이 당신에게 터놓는 속마음 만화에세이
녹색연합 지음, 박문영 만화 / 홍익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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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멸종 위기 동식물의 이야기를 만화와 짧은 에세이에 담았다.
멸종 위기의 동물 이야기는 여러 가지 캠페인, 광고나 다큐멘터리 등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반면 식물이나 곤충들의 이야기는 조금 더 생소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이용되는 구상나무나 평창 올림픽의 유치로 스키장 부지를 만들기 위해 벌목된 500년된 보호림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최근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들 말하는 평창올림픽의 비화가 한둘이겠냐마는, 그저 올림픽 유치 성공과 선수들의 메달 수에만 열광하며 그 외의 사항들에는 무관심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우리나라의 국민들에 비해 독일의 뮌헨 주민들이 보이는 모습은 여러모로 달랐다. 국제적인 행사라는 명예에 휘둘리지 않고 올림픽 유치 반대 표명을 하며, 자신들이 가진 환경에 대한 자부심과 그걸 지켜나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은 그들이 얼마나 자각 있고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여러 환경단체를 비롯해 비슷한 움직임을 가진 이들이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무관심한 국민들에 비해 미미한 세력이라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자연의 흔적을 보러 간 곳에는 사람들의 흔적만 가득하다 

    - 본문 중 69p (초록에세이, 산에 든다는 일)

 

"도로로 덮인 흙은 원래 우리의 땅이었어. 그러니 왜 건너냐고 묻지마"

(…) 우리가 도로에서 만난 죽음은 '생명'이었다     

       - 본문 중 80, 82p(8. 삵)

보호받고 싶은 마음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있다.  

   - 본문 중 141p (14. 점박이 물범)

 

만화에서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문제 되고 있는 상황이나 동물들이 입고 있는 피해를 보여주거나 경고를 날리고, 그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운동이나 작은 캠페인 등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에 비해 글은 만화에서 다루었던 동식물이나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겪었던 이야기들을 결부해서 조금은 더 부드럽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처음에 책에 그려진 만화를 보며 그림은 엉성하지만 만화 속 동물들의 대사가 참 독하다-라고 생각했다. 멸종 위기의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만화에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대변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동물의 입을 통해 인간들에게 던지는 비아냥, 푸념, 경고, 충고, 권유, 부탁의 말들이 참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표현되어있어 가슴에 콕콕 박힌다. 처음에는 그런 표현들이 조금 불편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면 찔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의 욕심에 많은 동식물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명확히 드러나있는 사실이며 그들의 존속에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얼마나 무관심한지도 새삼 느끼게 만들었다.    


책 속에 나오는 멸종 위기 동식물은 물론 인간 역시 자연생태계의 한 부분으로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문 중 나오는 한 파트의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본문 중 184p) 우리는 자연과 모든 동식물의 주인이 아니며 그들에게 여러 도움을 얻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그들을 마음대로 휘젓고 이용해 이득을 취할 권리를 가진 특별한 존재들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책의 제목처럼 인간들은 모두 천 년 만 년 살 것 같은가? 언젠가 인류가 멸종 위기가 되고 나서야 그들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너무 늦다. 지금부터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일단 알게 되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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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등고래 모모의 여행
류커샹 지음, 하은지 옮김 / 더숲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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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떠올라서 반가웠고, 우리 세대의 처지를 표현한 고래 그림(작은 링을 통과하려고 그 앞을 서성이는 커다란 고래 그림)이 떠올라서 내 멋대로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졌다. 외로움과 겁은 많은 데다 삶의 목표를 잃고 바다를 헤매는 고래의 이야기라니 더욱 그랬다. 헤매더라도 일단 길은 나섰으니 무언가 느끼고 찾아내었겠지, 가만히 그대로 둥둥 떠 있는 채 숨만 쉬는 것보다는 무언가 변했기에 이야기가 되었겠지 하는 기대를 걸고 책을 펼쳤다.

하지만 내 상상과는 조금 다른 책이었다. 강어귀를 역류해 늪지로 찾아가는 모험을 하는 모모는 늙은 고래였고, 죽음을 앞두고 있었으며,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흔히 '방황'과 '모험'하면 떠올리기 쉬운 젊음과 활기와 역경을 극복해가는 과정 등이 다이내믹하게 진행되는 그런 이야기도 아니었다. 물론 젊은 고래였을 시절, 바이야와 함께 늪지까지 회유하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그때도 모모는 역시 삶의 재미를 잃고 겁 많은 고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은, 모모는 한결같이 모모 다웠으며, 그가 살아온 과정을 추억했을 때 특별하게 느껴졌던 생의 마지막에 꼭 다시 해야 할 일을 찾아내었으며, 그 과정을 지금까지처럼 자신만의 템포로 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화와 소설을 동시에 읽고 있는 기분이었다. 책 도중에 삽입된 그림에는 몇 줄의 짧은 글이 함께 쓰여있는데, 본문의 글에서 내용을 함축하거나 장면에 맞게 재편집하여 쓰여있다. 그림보다 앞서 나온 내용이거나 뒤쪽에 쓰인 내용이어서 자연스레 이어진다기 보다 그 그림이 그려진 동일 원작의 그림책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한가지 색으로 정성스레 그려진 그림은 책의 저자가 직접 그린 것으로 정갈한 분위기나 실물에 가까운 생생한 멋이 있어서 실제로 그림책으로 출간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혹등고래 모모의 이야기와 할아버지를 따라 늪지를 찾아온 샤오허의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진행되는데, 두 이야기의 인물들이 만나는 지점이 두근거리면서 감동적이었다. 작가가 실제로 강에 출현한 고래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처럼, 그 고래의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 거대한 생명체(그것도 자주 볼 수 없는)의 특이 행동을 바라보는 것은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생각과 감동을 전해줄 것 같다. 인간들의 허둥지둥하지만 그 고래를 위해 행동하는 모습이나 고래가 노래를 부른 후 유유히 되돌아가는 모습은 정적이었던 전체적인 이야기 안에서 꽤나 유쾌하고 로맨틱한 느낌마저 주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해보는 일을 해보기도 하고(모든 수컷 고래가 호위 고래가 되어 암컷 고래와 짝짓기를 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용기에 편승해서 일생일대의 도전(바이야와 함께 한 강으로의 역류)을 해보기도 한다. 모모가 늘 있던 익숙하던 바다를 떠나 강의 밑바닥과 늪지를 찾아가는 과정은, 젊어서는 도전이 되기도 하고 늙어서는 휴식이 되기도 한다. 책의 후기에서 저자가 밝힌 바로 혹등고래의 수명은 40~50살이라고 한다. 사람보다 조금 더 짧은 삶이지만 모모의 이야기는 마치 한 사람의 삶을 엿보는 것과 같았다. 생의 마지막에 짧게나마 마주친 인간들과의 만남이 모모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기를, 그리고 인간들이 들려준 노래가 그의 마지막 휴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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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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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제발, 저도 지금 도착할 가족들처럼 자라나게 해주세요.

 늙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되게 해주세요."   - 본문 중 61p

"우리 아가. 우리는 너를 사랑한단다. 모두 너를 사랑해. 네가 우리와 다른 존재라도, 네가 언젠가 우리를 떠나게 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단다." 어머니는 소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네가 죽음을 맞이해도 우리는 네 뼈를 건드리지 않을 거란다. 약속할게. 영원토록 편안히 누워 있게 될 거야. 매년 핼러윈 이브가 찾아올 때마다 너를 보러 가서 단단히 붙들어줄 거야."   - 본문 중 82, 83p​


유령 혹은 그 이상의 모든 미신적 존재들은 모두 한 가족이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그들은 시월, 핼러윈 이브를 맞아 시월의 저택에서 가족모임을 맞는다. 물론 시월의 저택에 상주하는 가족도 있는데 천 번 고조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세시, 그리고 티모시가 바로 그들이다. 그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간'의 아이 티모시는 온 가족이 모이는 핼러윈 이브를 맞이하며 자신이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저택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 그리고 저택에 잠시 머물다 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미국 환상문학의 대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연작소설이 하나의 소설책으로 모였다. 1950년대에 주로 쓰인 단편들, 그리고 책의 출간을 위해 개작 혹은 새로 쓰인 단편까지 합해 하나의 소설이 된 이 이야기는 장르의 이름만큼이나 환상적이었다.



"죽음은 신비로운 것이란다." 어머니가 티모시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삶은 더욱 신비롭지. 네가 고르면 된단다. 그리고 삶의 끝자락에서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일도, 모두 단순히 이상하다고는 표현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니?"
"그렇겠죠. 하지만-."
"받아들여." 아버지가 포도주 잔을 높이 들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 기적을 축하해라." -본문 중 180p



아침에는 잠들고 해 질 무렵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며, 침대가 아닌 상자에 몸을 뉘고, 몸이 사라져도 어딘가에 깃들어 유지되기도 하며,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머무는 것이 가능한 존재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인간들이면 갖지 못하는 특징을 지니고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어린 티모시는 그들의 가족으로 자라며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길 바라며 그들과의 이질성을 순수하게 느끼고 반응한다. 티모시 이외의 등장인물들을 단순히 유령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어색하지만 그들과 티모시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살아있음'과 '죽음'이 아닐까. 시적인 상상력과 풍부한 은유가 가득한 문장들은 꽤나 담담하고 생기발랄한 느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지만 그 안에서 자주 등장하고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테제 또한 삶과 죽음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온 티모시는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하니, 책의 마지막에서 티모시가 준 힌트처럼 '귀를 기울이면' 나도 언젠가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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