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핀 청년시인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이상.박인환 지음 / 스타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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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맨 처음 실린 윤동주의 시 두 편. 『서시』와 『자화상』, 둘 다 분명 교과서에서 봤던 기억이 확연한데 왜 그때는 이런 감상과 느낌이 없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재작년쯤부터의 버릇인데 시집을 사면 시 하나하나 낭독하며 읽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얇디얇은 시집 하나를 읽는데도 꽤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이 책은 젊은 시인 세 명의 시를 한데 모아 묶었다. 무려 123편의 시가 실린 이 책은 며칠이나 걸릴까 약간의 걱정을 하며 읽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시와 4부에 실린 그의 주변인들이 남긴 추모글을 읽으면서는 영화 <동주>를 떠올렸다. 영화 속 동주의 역할을 맡은 강하늘의 목소리로 낭송해주던 '아우의 인상화'나 '쉽게 씌어진 시'가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느낌. 윤동주의 시집은 읽을 때마다 특히 마음에 드는 시가 매번 바뀌곤 하는데 이번에는 '아우의 인상화', '편지', '어머니'등 가족과 관련한 시들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추모글 중 '아우의 인상화'에서 자라면 "사람이 되지"하고 대답했던 그의 동생 일주가 남긴 글이 있었다. 시인의 인간적인 사생활의 편모라도 남길 책임을 가져 붓을 잡았다는 그의 글이 이 책에서 윤동주에 대해 가장 몰입하게 만들어주는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붓끝을 따라온 귀뜨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 라고  한 나의 글월에 『너의 귀뜨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고 답장을 주신 일이 기억 됩니다.  (… 중략 …) 십년이 흘러간 이제 그의 유골을 상재함에 있어 사제로써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으며 시집 앞뒤에 군 것이 붙는 것을 퍽 싫어하던 그였음을 생각할 때, 졸문을 주저하였으나 생전에 무명하였던 고인의 사생활을 전할 책임을 홀로 느끼어 감히 붓을 들었습니다. 이로하여 거짓 없는 고인의 편모나마 전해지면 다행이겠습니다.  

  1955년 2월. 사제(舍弟) 일주(一柱)  근지(謹識)

 

 - 4부 윤동주 추모글, '선백(先伯)의 생애' 중 97-98p

이상의 시는 매번 보아도 낯설고 매력적이다. 제멋대로의 띄어쓰기와 온갖 도형 및 방점, 온전히 해석하기엔 그 해석마저 주관적인 것으로밖에 읽히지 않는 그의 시는 붙잡고 있다 보면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간다. 최근 좋아하게 된 '이런시'와 '사과'라는 시가 실려 있어 개인적으로 좋았다. 윤동주와는 달리 추모글 대신 그의 생가를 시작으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듯 가이드 글을 실어 넣은 것도 인상적이다. 그가 태어난 곳, 부모님의 집과 큰아버지의 집, 결혼 후 생활했던 곳이나 다방을 차렸던 장소 등등 지금은 그 자취가 거의 사라졌지만 그 장소가 생각보다 내게 익숙한 장소들이었음에 놀랐다. 심지어 금홍과 싸우고 쫓겨나면 찾아가곤 했다던 박태원의 집은 이전 직장에서 정말 코앞인 장소였다. 


박인환은 앞의 두 시인에 비해 조금 새롭게 알게 된 느낌이 강하다. 물론 그의 이름과 '목마와 숙녀'라는 시는 교과서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생이나 생의 마지막 이야기는 낯설기만 했다. 유복한 집 출생으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운영하고 언론인(기자)으로 활약하며, 퇴직 후 미국 여행을 다녀오고 <아메리카 시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평소 술을 그리 잘 마시지 못하던 그가 이상과 그의 시를 사랑한 나머지 그의 추모회를 열어 사흘간의 폭음 끝에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사인도 참 독특하다. 시에 자주 등장하곤 하는 그의 '청순한 아내'와 2남 1녀의 아이들을 두고 갈 정도로, 천재적인 시인 '이상'을 잃어 동시대를 함께 더 살아가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된 걸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수록된 시 뒤로 이상과 마찬가지로 그의 발자취를 쫓는 글이 실려있다. 교보문고 빌딩 뒤쪽에 있는 박인환 생가 터 표석은 나도 본 적이 있는데, 그 표석의 문구가 두 군데나 틀린 곳이 있다는 게 놀랍고 한심했다. 책에 쓰인 대로 그 표석을 관리하는 사람이나 관련자들이 보고 수정해주길 바란다. 그밖에 해설에서 아쉬운 점은 '세월이 가면'과 '목마와 숙녀'만으로 그를 기억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정작 시에 대한 해설이 부족했던 점이다. 그의 시가 지닌 특유의 세련되고 감각적인 표현이나 감성적인 특징들은 조금 보이지만, 처음 접하는 경우가 많은  그의 시에 대한 정보가 워낙에 적어 일반적인 시집에 실린 것 같은 해설을 조금 원했기에 이런 아쉬움이 있는 것 같다. 



세 사람은 전부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제목대로 '못다핀 청년시인'들이다. 그 불행한 공통점을 제외하고 그들을 엮는 인연은 무엇이 있을까. 윤동주와 박인환이 모두 이상의 팬이었다는 것 정도? 어쩌다 이 세 사람을 묶어 청년시인이라는 이름 하에 한 권의 책이 나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각 시인이 만들어낸 시의 인상이 너무나도 달라서 세 권의 책을 연달아 읽는 기분마저 들었다. 못다 피운 그들의 시와 인생이 이제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조금이라도 더 크게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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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문자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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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은 그리 찾아보는 편은 아닌데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꽤 여러 권 읽었던 것 같다. 추리소설이 한층 더 잘 팔린다는 더운 여름,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 중 하나인 '11자 문자 살인사건'이 재출간되었다. 하드커버에 꽤나 두꺼운 책이지만 그의 책이 늘 그렇듯 좋은 가독성과 술술 진행되는 사건의 전개에 빠지듯 읽어갔다. 제목에서 언급되는 11자 문자는 다음과 같다. 서늘한 느낌이 절로 드는 살인 예고장의 문자이다. ​
'무인도로부터 살의를 담아'(monologue 1 중, 8p)



위의 문자가 쓰인 범인의 첫 번째 모놀로그를 뒤로하고, 본편의 이야기는 추리소설 작가인 여자 주인공 '나'의 애인 가와즈 미사유키가 살해당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이야기의 전반은 가와즈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가 남긴 말과 그의 유품을 건네받는 과정에서 일어난 수상쩍은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 후 일어나는 연쇄적인 살인사건 등을 담당 편집자이자 친구인 후유코와 함께 취재라는 명목하에 적극적인 추리에 나서는 '나'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진행은 빠르고 주인공 '나'의 추리와 함께 독자가 보기에도 무언가 수상한 허점들을 틈틈이 남겨가며 사건은 계속 벌어진다. 



그리고 책의 후반에 밝혀지는 사건의 전말은 이 책의 소개에서 밝혔던 두 가지 시사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절대적인 선인과 악인이 없는 살인사건이 가능한가, 최선은 과연 모두에게도 선인가 하는 질문들. 전자에 관해 생각했을 때 나는 살인사건에서 선인은 없을 수 있지만 악인이 과연 없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아마도 불가능하리라는 쪽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그런 마음으로 가해자가 곧 악인이 되는 뻔한 공식을 깨뜨리는 좀 더 파격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어서인지 요트 여행에서부터 이리저리 얽힌 이야기는 그저 각 인물들의 합리화 과정 같았달까. 악인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대답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결국엔 한 사람이 죽었고 그 인물을 죽인 범인은 악인인가 하는 질문에 내 대답은 역시 '악인이다'라는 입장이다.

타인의 죽음에 관여하여 어느 정도 주도적인 행동을 했는가와 그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느냐는 두번 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최선이라는 이름으로 한 결정에 누군가는 진심으로 동의하고, 누군가는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또 누군가는 분위기에 압도당해 그저 끌려갈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한 희생은 '최선'이라는 말로 무마될 수 있는 문제일까. 개인적으로 '최선은 모두에게 선인가'라는 질문에는 즉시 아니라는 대답을 돌려줄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서 늘 최선의 선택을 하길 원하고 그 과정에서 익숙하게 다수결의 논리를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다수의 의견이 늘 옳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희생당하는 소수의견이 있음을 알고 소수가 언제가 다수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가 있는 것도 흔한 일이다. 이 사건에서 이 설명이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비슷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런 사건이 벌어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결정하게 된 '최선'이란 과연 믿을 수 있는 선택일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가가 던진 이런 화두를 독자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자신만의 답을 내리길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르고 가해자에게 징계를 내리기 위해 범인을 찾는 탐정이나 경찰을 주인공으로 두지 않고, 일반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아닐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사건의 전말을 경찰에 신고하거나 누군가를 벌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하나 남기고 침울해진 기분으로 혼자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 소설의 이 마지막 장면에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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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 부자 편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이케다 가요코 지음, 더글러스 루미즈 영역, 한성례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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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제목의 시리즈를 찾아 읽은 것은 2014년, 출간 연도는 거의 10년도 전이어서 읽을 당시에도 조금 더 최신의 통계가 적용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던 게 기억난다. 나 같은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올해 같은 제목에 '사람/이웃/환경/부자'라는 부제를 달고 새롭게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그중 '부자편'으로 다음과 같은 글귀로 시작한다. 

2000년, 세계에는 61억 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5년ㅡ
세계에는 73억 명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을 100명의 마을로 축소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본문 중 10-12p)

조금은 추상적이거나 상징적인 파스텔톤의 그림과 한글 본문 아래 좀 더 작은 글씨로 영어 본문을 실은 구성은 그대로 유지된 반면 내용은 최근 버전의 통계(2016년 10월 기준)가 적용되었다. 이전 버전의 책들이 같은 제목에 1,2,3 등의 각 권마다의 내용 구분이 모호한 표제를 달고 있던 것에 비해 조금 더 내용을 파악하기 좋은 부제를 달아서 한 권마다 각자 하고자 하는 말을 조금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본문의 내용 자체-대표적으로 본문의 글자 수-가 늘어난 것도 눈에 띈다. 

이 책은 주로 전 세계의 화폐, 경제, 빈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아가 빈곤문제의 해결을 위한 구체적 금액을 제시하고 그 금액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금에 대한 말을 꺼낸다. 책에서 제시한 "만약'으로 시작하는 다양한 세금들은 몇몇 나라에선 실제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방법들이 한층 더 현실적이고 희망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의 초반 부분을 제외하면 이 세계를 100명의 마을로 비유하는 문구는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퍼센트(%)나 실제적 금액(주로 -억 달러의 단위)을 드러내는 경우가 더 많다. 또 본문에서 세계경제에서 가장 큰 부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인 미국과 저자(엮은이)의 나라인 일본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점은 이 책이 사람들의 생각과 실행을 촉구하는 책이란 걸 느끼게 해준다. 


책의 초반 실려 있는 한국만의 추천사를 빼더라도 책의 본문 외에 해설이 30페이지 가량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간결한 비유와 핵심적인 언급으로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본문과는 달리 해설은 그보다 더 직접적으로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에 대한 엮은이나 경제전문가들의 주장을 펼친다. 본문의 내용에 대한 해설은 물론 현재까지 일본 또는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졌던(혹은 벌어지고 있는) 경제문제들을 언급하고 그 심각성과 해결을 위한 노력, 변화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설의 글 중에 '미와 요시코'의 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녀의 글에 찬성하거나 반박하기에 앞서 빈곤문제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역시 아이들이라는 점에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빈곤문제뿐만 아니라 온갖 문제적 상황이나 고난 등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존재는 언제나 아이들과 여성이라는 약자임은 분명하다.) 아래 본문의 말처럼 어떤 아이들은 가난 때문에 노동에 뛰어들고, 교육받지 못하고, 심지어 죽어가고 있다. 가난을 겪은 아이들은 그대로 가난한 어른이 될 가능성이 크고 이런 가난의 대물림을 막기 위해선 그들을 위한 지원과 돈이 필요하다는 건 명확한 사실이다. 한 나라 내에서 돈과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이 필요하고 다수의 동의와 그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주장이 필요하다. 정책에 동의하는 것(투표), 관심을 갖는 것,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한 개인이 실행할 수 있는 사회변혁이라는 그녀의 주장은 옳다.

세계의 아이들을 100명이라고 하면
그들 중 8명이 가족을 부양하거나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합니다.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 100명 중 9명은 다니지 않습니다.
중학교에 다녀야 할 100명 중 34명은 다니지 않습니다.
가난으로 5초에 1명의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본문 중 58-59p)


4년 전 처음 이 시리즈의 책을 읽었을 때도 얕은 두께에 비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란 걸 느꼈고, 지금 역시 크게 느끼고 있다. 우리 눈앞에 맞닥뜨린 여러 문제들은 단순히 한 개인의 또는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 세계 곳곳에서도 벌어지고 있고 그 문제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 또한  많다. 이제 '우리'라는 개념은 한 민족, 한 나라를 벗어나 전 세계의 인류를 통칭하는 의미로 확대해볼 필요가 있다. 전 세계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갖고 한번 더 생각해보는 것, 나아가 그 해결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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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보이스 키싱
데이비드 리바이선 지음, 김태령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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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와 '너희'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화자가 있다. 등장인물과는 다르지만 언젠가 있었던 존재들, '나'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와 감정, 시선으로 지금의 '너희'를 본다. 명확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우리'는 '너희'와의 차이를 말하지만 그 누구보다 '너희'를 잘 알고 이해하는 존재들이다. 마치 떠도는 영혼처럼 과거의 모습을 알고 무엇이든 볼 수 있으며, 말을 건네고 만질 수는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에 절절히 공감해주는 서술자는 책의 초반 약간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잡아주고 여러 사건들이 전개되기 전에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준다.

이 책의 주요 사건은 실제 있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실제 인물의 사연이나 성격 등은 다를지라도 두 남자의 키스 최장시간(기네스북 기록)도전과 그 도전이 있던 동네에서 30분 거리의 어느 다리에서 미성년의 한 남자아이가 스스로 투신한 일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키스 최장시간 기록은 해마다 갱신되고 있어서 과거에 갱신되었던 별개의 기록들을 찾는 게 오히려 쉽지 않다. 반면 기록은 별개로  어느 커플의 도전과 대회 등을 통한 기록 경신 뉴스와 사진들은 꽤 쉽게 검색된다. 책 속에서 크레이그와 해리의 32시간은 생리작용과 탈수, 배고픔, 근육통, 수면욕 등등 현실적인 괴로움이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현재 기록이라는 일주일을 버텨낸 두 사람은 과연 그것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견뎌낸 걸지 상상도 쉬이 되지 않는다. 책에서 꽤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입을 맞대고 있는 동안 견뎌낸 어려움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도전을 하기까지의 이유와 그 도전을 하는 동안 겪은 감정과 관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날 타리크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패거리에게 폭행을 당한다. 헤어진 커플이자 여전한 친구 사이인 해리와 크레이그는 함께 타리크의 병문안을 간다. 크레이그는 평소 친하다기 보다 오히려 약간의 거리가 있던 타리크였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 크게 슬퍼한다. 부당한 폭력과 그로 인한 피해자인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 그는 막연한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인간이며 평등한 인간존재라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줄 방법"(본문 중 78)을 찾고 실행하기 위한 결심을 하게 된다. 이 책은 각 인물 간의 관계나 감정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때 크레이그의 슬픔과 분노에 대한 문장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크레이그는 타리크의 집에 갔던 날 보았던 멍 자국과 통증에 일그러지던 미소를 떠올린다. 크레이그는 엉엉 울었다. 타리크네 거실에서 너무 울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타리크가 말했다.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다행이도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고, 갈비뼈는 아문다고, 멍자국도 흐려진다고. 하지만 크레이그는 타리크가 다쳐서가 아니라 무의미한 폭력이 너무 부당해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해리가 그를 진정시키려고, 타리크가 달래보려고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크레이그는 '분노하고' 싶었다. 나오는 대로 분노하고 싶었지만 분노 대신에 주체하기 어려운 슬픔만 차올랐다. (본문 중 76p)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눈코입없이 실루엣으로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소개가 인상적이었다. 글로 읽을 때는 딱히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이 커플들의 특수성을 눈으로 보여준달까. 연결된 듯 각기 떨어져 있는 등장인물들의 연관성과 옴니버스 스타일로 각 커플이나 한 인물이 각기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것도 신선했다. 주가 되는 것은 크레이그와 해리 커플의 이야기지만 다른 이야기들도 흥미진진하다. 각기 다양한 스타일의 커플이 등장하는 가운데 쿠퍼의 이야기도 굉장히 눈에 띄었다.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자립적이고 긍정적인(다양한 사건 사고가 있음에도) 반면에 쿠퍼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자괴적인 생각에 빠지는 그의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어려운 10대의 불안정함, 어느 정보나 채팅에도 접근하기 쉬운 인터넷 환경이나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쉬운 아이들, 버거운 현실에서 고민하기 보다 한결 손쉬워 보이는 다른 환경으로 회피하는 일은 굉장히 흔한 경우라고 본다. 자신의 일을 그 누구에게도 상담하지 않고 스스로도 고민하기 보다 인터넷에서의 가짜 신상을 만들어내고 의미 없고 야한 채팅에 빠져버린 쿠퍼의 경우가 그렇지 않을까. 쿠퍼의 이야기는 그런 상태를 갑작스럽게 부모님에게 들통나면서 시작된다. 


등장인물 전원이 게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특수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장르이기도 하고, 요즘 웹을 중심으로 점점 많이 접할 수 있는 비엘이라는 장르와도 조금 다른 것 같다. 성소수자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다수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점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며 심하게는 혐오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차이가 결코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커플들의 시작과 로맨스에 함께 두근거렸고, 타리크가 당한 부당한 폭력에 같이 분노했다. 작가가 언급한 이전 세대의 게이와 지금 세대의 게이는 분명 변화가 있었다. 물론 그들이 겪는 어려움과 소외감, 소수라는 특수성 등 변하지 않은 점이 더 많겠지만 약간은 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에 작가는 앞으로의 기대를 걸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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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 미드나잇 -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나를 위해 하루 15분 차분한 글쓰기
단디 편집부 지음 / 단디(도서출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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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반해버린 책. 넘기는 페이지마다 시선을 사로잡는 글과 그림이 가득했다. <한글쓰기>, <영문쓰기>, <한문쓰기>로 나누어져 있는 본문은 글자가 어떤 언어로 되어 있든 조화로운 그림과 함께 제시되어 있는데, 글이 담고 있는 메시지와 그림이 하나같이 매력적이고 감명 깊었다. 솔직히 만년필로 필사하지 않고 차분히 읽기만 해도 정말 좋았던 책이다. 중간중간 쉬어가듯 선만 그어진 페이지나 마치 컬러링북처럼 그림만 잔뜩 그려진 페이지도 있어서 마냥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기에도 지루함이 없고 매력적이었다. 책에 실린 글귀는 유명인사들의 명언이나 작품의 일부를 실었는데 그 작가(혹은 화가, 예술가 등등)에 연관된 그림이나 글의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을 섬세하게 고르고 신경 쓴 게 티가 날 정도여서 개인적으로 한 페이지마다의 구성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글의 출처는 페이지 오른쪽 상단에 쓰여있는데 본문 배치를 거스르지 않고 깔끔한 글씨체로 쓰여있어 글을 읽고 바로바로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영문쓰기>나 <한문쓰기>의 경우에는 영어나 한자로 원문이 오른쪽 페이지에 쓰여 있고, 왼쪽 페이지에 우선적으로 한글 해석과 그림을 싣는 경우가 많았다. 한글 해석이 있어 내용을 살피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빈 공간에 한글로도 다시 글씨를 써 볼 수 있다. <영문쓰기>와 <한문쓰기> 모두 분량이 상당히 적었는데  <한문쓰기>의 경우 한문과 그림이 어우러져 분위기가 예뻐서 보기는 좋았지만 만년필로 따라 쓰는 양에는 그다지 아쉬움이 없었다. 반면 <영문쓰기>는 분량이 적어서 좀 아쉬웠달까.  파트가 시작되고 첫 부분에 영어 노트에 필기체 알파벳을 따라 써볼 수 있는 연습 구간이 있었는데, 실제 본문은 전부 필기체라기보단 다양한 폰트로 쓰여있었다. 그래서 필기체 글씨로 본문을 따라 쓸 수 있는 양이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필기체를 따로 배우지 않은 세대라 영어의 인쇄체가 더 익숙하고, 특히 만년필로 쓰는 영어 필기체에 약간의 로망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다른 필사 노트처럼 쓰여있는 글귀를 내 글씨체로 다시 쓰는 것도 좋았지만 마치 펜글씨 교본처럼 회색으로 쓰인 글자 위를 그대로  선을 긋듯 따라 쓰는 재미도 쏠쏠했다. 단점이라면 글과 삽화 외의 공백이 꽤 널찍하게 있음에도, 책의 완성도나 구성이 너무 취향이라 함부로 빈 공간에 글씨를 채우기 아깝다는 점... 그래서 개인적으론 책에 쓰는 글씨는 회색 글씨를 따라 쓴 경우가 많고 그 외에 내 글씨체로 써보고 싶은 글귀는 소심하게 연습장에 필사를 따로 해본다거나 가끔가다 본문의 공간 배치를 잘 살펴서 빈 공간에 써보곤 했다. 


 



만년필의 매력은 뭘까. 이 책은 단순히 필사를 위한 책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제목에서부터 어필하듯 만년필을 사용하길 권하고 있다. 책의 맨 앞엔 '왜 만년필인가'와 '만년필 사용 팁'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먼저 쓰여있다. 직접 만년필로 글씨를 써본 소감을 말하자면 연필의 부드러움과는 달리, 종이에 거칠게 쓸리는 쇳조각의 느낌과 그에 상반되게 부드러운 선으로 그어지는 잉크의 느낌이 오묘했다. 원래 글씨를 좀 흘려쓰는 버릇이 있는데 만년필로 쓰니 보통 펜으로 썼을 때의 글씨체와는 또 다른 분위기가 나는 게 신기했다. 잉크를 갈아주면 평생도 쓸 수 있는 것이 만년필이라고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써온 만년필이 있다면 펜은 물론 그것을 통해 쓴 글씨에도 과연 애착이 생길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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