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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보이스 키싱
데이비드 리바이선 지음, 김태령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와 '너희'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화자가 있다. 등장인물과는 다르지만 언젠가 있었던 존재들, '나'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와 감정, 시선으로 지금의 '너희'를 본다. 명확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우리'는 '너희'와의 차이를 말하지만 그 누구보다 '너희'를 잘 알고 이해하는 존재들이다. 마치 떠도는 영혼처럼 과거의 모습을 알고 무엇이든 볼 수 있으며, 말을 건네고 만질 수는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에 절절히 공감해주는 서술자는 책의 초반 약간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잡아주고 여러 사건들이 전개되기 전에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준다.
이 책의 주요 사건은 실제 있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실제 인물의 사연이나 성격 등은 다를지라도 두 남자의 키스 최장시간(기네스북 기록)도전과 그 도전이 있던 동네에서 30분 거리의 어느 다리에서 미성년의 한 남자아이가 스스로 투신한 일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키스 최장시간 기록은 해마다 갱신되고 있어서 과거에 갱신되었던 별개의 기록들을 찾는 게 오히려 쉽지 않다. 반면 기록은 별개로 어느 커플의 도전과 대회 등을 통한 기록 경신 뉴스와 사진들은 꽤 쉽게 검색된다. 책 속에서 크레이그와 해리의 32시간은 생리작용과 탈수, 배고픔, 근육통, 수면욕 등등 현실적인 괴로움이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현재 기록이라는 일주일을 버텨낸 두 사람은 과연 그것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견뎌낸 걸지 상상도 쉬이 되지 않는다. 책에서 꽤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입을 맞대고 있는 동안 견뎌낸 어려움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도전을 하기까지의 이유와 그 도전을 하는 동안 겪은 감정과 관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날 타리크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패거리에게 폭행을 당한다. 헤어진 커플이자 여전한 친구 사이인 해리와 크레이그는 함께 타리크의 병문안을 간다. 크레이그는 평소 친하다기 보다 오히려 약간의 거리가 있던 타리크였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 크게 슬퍼한다. 부당한 폭력과 그로 인한 피해자인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 그는 막연한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인간이며 평등한 인간존재라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줄 방법"(본문 중 78)을 찾고 실행하기 위한 결심을 하게 된다. 이 책은 각 인물 간의 관계나 감정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때 크레이그의 슬픔과 분노에 대한 문장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크레이그는 타리크의 집에 갔던 날 보았던 멍 자국과 통증에 일그러지던 미소를 떠올린다. 크레이그는 엉엉 울었다. 타리크네 거실에서 너무 울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타리크가 말했다.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다행이도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고, 갈비뼈는 아문다고, 멍자국도 흐려진다고. 하지만 크레이그는 타리크가 다쳐서가 아니라 무의미한 폭력이 너무 부당해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해리가 그를 진정시키려고, 타리크가 달래보려고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크레이그는 '분노하고' 싶었다. 나오는 대로 분노하고 싶었지만 분노 대신에 주체하기 어려운 슬픔만 차올랐다. (본문 중 76p)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눈코입없이 실루엣으로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소개가 인상적이었다. 글로 읽을 때는 딱히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이 커플들의 특수성을 눈으로 보여준달까. 연결된 듯 각기 떨어져 있는 등장인물들의 연관성과 옴니버스 스타일로 각 커플이나 한 인물이 각기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것도 신선했다. 주가 되는 것은 크레이그와 해리 커플의 이야기지만 다른 이야기들도 흥미진진하다. 각기 다양한 스타일의 커플이 등장하는 가운데 쿠퍼의 이야기도 굉장히 눈에 띄었다.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굉장히 자립적이고 긍정적인(다양한 사건 사고가 있음에도) 반면에 쿠퍼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자괴적인 생각에 빠지는 그의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어려운 10대의 불안정함, 어느 정보나 채팅에도 접근하기 쉬운 인터넷 환경이나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쉬운 아이들, 버거운 현실에서 고민하기 보다 한결 손쉬워 보이는 다른 환경으로 회피하는 일은 굉장히 흔한 경우라고 본다. 자신의 일을 그 누구에게도 상담하지 않고 스스로도 고민하기 보다 인터넷에서의 가짜 신상을 만들어내고 의미 없고 야한 채팅에 빠져버린 쿠퍼의 경우가 그렇지 않을까. 쿠퍼의 이야기는 그런 상태를 갑작스럽게 부모님에게 들통나면서 시작된다.
등장인물 전원이 게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특수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장르이기도 하고, 요즘 웹을 중심으로 점점 많이 접할 수 있는 비엘이라는 장르와도 조금 다른 것 같다. 성소수자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다수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점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며 심하게는 혐오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차이가 결코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커플들의 시작과 로맨스에 함께 두근거렸고, 타리크가 당한 부당한 폭력에 같이 분노했다. 작가가 언급한 이전 세대의 게이와 지금 세대의 게이는 분명 변화가 있었다. 물론 그들이 겪는 어려움과 소외감, 소수라는 특수성 등 변하지 않은 점이 더 많겠지만 약간은 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에 작가는 앞으로의 기대를 걸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