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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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황정은의 소설은 여전히 매혹적이었고, 한층 더 가까운 현실을 담아내고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2014년 이후, 작가는 자신의 단편 소설<디디의 우산>을 파괴해 <d>를 쓰고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썼다고 한다(작가의 말 中). 이렇게 쓰인 두 중편을 모아 이번 소설집 《디디의 우산》이 출간되었다. 두 소설의 전신이 되었던 작품에서 동창이자 연인이었던 디디와 도도는 dd와 d가 되었고, <d>에서는 이제 혼자 남은 d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d>

​d는 dd를 잃고 조금 차가워진 자신 때문에 미적지근한 온도를 띠고 있는 사물들에 진저리를 친다. 이런 묘한 증상과 더불어 누군가를 잃은 한 사람이 겪을 법한 모든 일을 겪어내는 d의 모습에 순간순간 함께 울컥하고 울적해지기도 했다. 단호하고 시니컬한 d의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고 공감하며 읽었다. 내동댕이쳐졌다고 표현한 dd의 죽음처럼 2014년 세월호 사건으로 우리는 그 누구도 도와주지 못한 커다란 죽음을 목격했다. 이 소설에서 이 사건은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관련되거나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장면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d와 박조배가 명동에서 만나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1주기 추모와 시위로 인해 시위대와 경찰들에 길이 막혀 서울 일대를 빙빙 돌게 된다. dd의 죽음과 세월호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dd의 짐에서 나온 REVOLUTION이라 적힌 책과 시위 행렬 같은  단서들이 보이지 않는 점선으로 이어진 것 같았다.

디디와 살던 방의 세를 받던 김귀자, 디의 부모님인 이승근과 고경자, 디디의 형제 곽정은, 세운상가에서 스피커와 램프를 수리하는 여소녀, 디디에게 책을 빌려주었던 동창 박조배처럼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이름을 갖는다.(다만 이름보단 마치 이니셜 같은 d와 dd만이 예외다.) dd의 죽음을 겪고 한 사람의 생명과 죽음이 하찮다고 읊조리는 d지만, 그렇다 해도 개인과 개인이 가진 생명은 그들이 각자 가진 이름과 삶처럼 하나하나가 특별하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여소녀와 d의 대화 중 너의 오디오가 이제는좀 특별해졌느냐는 여소녀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하찮은 생이라도 서로의 시간과 애정을 겹치면서 특별해질 수 있기에.

잘 가.

어두컴컴한 목공소 앞에서 d는 말했다.

dd는 d의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갔다.    - <d>, 본문 중 10p

잘 가.

배웅하는 dd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d는 dd의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갔다.     -<d>, 본문 중 16p

책의 절반, 이 한 편의 중편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잠시 다른 책들을 꺼내 읽었다. 《웃는 남자》(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아무도 아닌》,《파씨의 입문》을 꺼내 디디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과 작품들을 소소히 비교해 보는 것이 꽤 재미있었다. dd를 잃은 d의 마음에 쭉 빠져있었기 때문인지, 《파씨의 입문》에 수록된 <디디의 우산>에서 아직 무사했던 디디의 시점을 읽을 땐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해야 할지, 조금 행복해졌다. 《아무도 아닌》에 수록된 <웃는 남자>에서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임으로 스스로 나가야 할 것을 생각'만' 하고 있던 도도가 d가 되어 드디어 발을 떼었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조금 다행이라 여겨졌다.   ​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은 어떻게 기억될까. -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 본문 중 310P

주인공은 서수경, 김소리, 정진원과 함께 '오늘' 한 집에 모여있다.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 서로 다른 성을 가진, 관계를 알 수 없는 이들이 각각 어떤 인물들인지 궁금했다. 그들이 모인 그 하루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과 끝을 맺지만, 주인공의 회상으로 '오늘'에 다다르기까지 과거의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사건들을 굵직하게 다루고 있다. 서로에게 분명 좋은 화자이며, 성실한 수신자이자 답신자였을 주인공과 서수경의 많은 대화와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도입 부분을 읽으면서 앞에 실린 소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 느꼈고, 다양한 문학작품과 문인들을 언급하는 주인공의 성격이 낯설었다. 그런데다가 주인공이 살았던 배경이자 현실에서도 실제 있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이야기할 때는 중간중간 직접 삽입된 글(주로 기사의 직접인용)의 존재가 그 내용은 물론 글의 형식까지 더 파격적으로 만들었다. 

소설 속 '오늘'이 가장 큰 사건들이 이어졌던 2014년부터 2017년을 배경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d>와 같은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주인공이 각 사건을 직접 겪었거나 가까이서 보았고 시위에 직접 참여하는 등 정치, 사회적인 이슈에 더 적극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언급과 의견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커다란 사건뿐 아니라 개인이 겪었던, 사회가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불쾌하고 불편한 단면들도 보여주는 터라 읽으면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론 이 정도까지 이야기해주니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 <디디의 우산>( 《파씨의 입문》, 2012 )

 

 

두 작품 모두 주인공 커플이 참 사랑스러웠고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참 무거웠다. 황정은의 소설이 늘 내게 그랬듯이 잘 설명하지 못했지만 어떤 대사나 문장에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기도 했고 여러 번 읽으면서 부분 혹은 전체가 주는 여러 가지 해석에 공감하고 골치 아파하기도 하며 이 책을 읽었다. 기대했던 만큼 그저 좋았고, 지난 책들을 들쳐보며 그녀의 문체나 이야기가 점점 더 능숙하게 다듬어졌다는 것도 느꼈다. 작가의 솜씨도, 이야기도, 이야기 속 인물들의 매력도 농도가 진해졌다고 해야 하나, 정말 헤어 나오질 못하겠다. 서평을 쓰면서 부러 여러 번 책을 읽었는데도, 아직도 황정은의 소설이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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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 지구와 우주를 기록하다 NASA, 기록하다
빌 나이.Nirmala Nataraj 지음, 박성래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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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하늘 위의 우주를 궁금해하고, 밤하늘만 봐도 두근두근하며 꿈을 꾸는 걸까. 눈에는 분명 보이는데 우리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 거리감이 주는 신비함 때문일까. 그저 맨눈으로 관찰하는 것으로도 아름답다 표현하기에 충분한 밤하늘을 한 걸음, 아니 몇 걸음 더 가까이서 관찰하고 사진으로 남긴 사람들과 기관이 있다. 우주에 관련해서는 아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커다란 존재, NASA. NASA에서 그들이 기록한 지구와 우주의 모습을 이제는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NASA에서 공식 인증한 유일한 책이라고 하니 사진의 출처는 확실히 믿고 볼만한 것 같다.

 

 

이 뒤에 나오는 페이지부터는 가장 화려한 SF 영화보다 더 화려한 천문학적 현상을 보게 될 것이다. 사진은 지구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정렬되어 있다. 우리에게 친근한 지구와 태양계에서 시작하여 우주 본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특별한 시간을 제공하는 은하계 이미지로 이동한다. 이 사진 컬렉션을 통해 우리은하와 태양계, 과거의 태양 플레어와 별을 만드는 성운 그리고 별이 죽는 극적인 순간과 지구로부터 수십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암흑물질의 신비한 고리가 있는 숨 막힐 듯한 풍경을 볼 수 있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Nirmala Nataraj의 서문 중 13p)

<NASA 기록하다>라는 시리즈 <행성을 기록하다>, <지구와 우주를 기록하다> 이렇게 두 권의 책이 동시에 나왔는데 내가 읽게 된 책은 후자이다. 내가 직접 가보지는 못할 공간의 모습을 사진과 글로 간접경험하게 해주는 책이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고마워졌다. <지구와 우주를 기록하다>는 서문의 내용을 따르면 지구로부터의 거리 순으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지구를 '푸른 구슬'이라 말하게 된 상징적인 사진부터 지구와 태양계 행성이나 성운 등을 거쳐 더 멀고 커다란 다른 은하의 모습들까지 정말 여행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지구를 먼저 바라보고 뒤돌아 그 뒤에 펼쳐져 있는 더 넓고 커다란 공간에 있는 아름다운 존재들을 바라보는 여정은 몇 번을 반복해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책에 함께 따라온 대형 엽서는 책에 실린 몇몇 사진들을 담고 있는데, 사이즈가 큰 만큼 그대로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싶은 욕구를 들게 만든다. 나처럼 욕심 많은 사람은 이 엽서를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내지는 못할 것 같다. 언제까지 진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이 발간된 지 얼마 안 된 지금은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매 시 우주 엽서 세트를 증정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어릴 때 흔히 배우는 '작은 별'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반짝반짝 작은 별~'로 시작하는 노래 가사처럼 우주의 사진들은 정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커다란 사진 위주의 책이라 책 한 권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사진 옆에 작게 붙은 낯선 우주의 이름과 해설보다 그저 사진에 시선을 빼앗겨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감탄하고를 반복한 것 같다. 우주과학, 천문학 분야의 사진집인 이 책은 서문에서의 우주 사진의 역사 같은 해설을 제외하곤 그리 말이 많지 않은 책이었다. 그저 사진 속에 포착된 우주의 이름이나 현상을 가볍게 알려주고 어디에서 어떤 장비로 촬영, 기록했는지를 말할 뿐이다. 어렵고 자세한 해설이 없는 책의 구성은 낯선 이름들을 한 번씩 인지하고 그저 사진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을 고르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마 '사진'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의외로 남녀노소 누구나 보기에 좋은 책이었다. 나는 거실에 이 책을 가지고 나왔다가 부모님이 합세해서 셋이 함께 책을 봤는데(아주 어릴 때를 빼고 함께 책을 본 게 얼마만인지ㅋㅋ) 어떤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 이 사진은 무얼 찍은 건지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며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린아이들과 이 책을 함께 봐도 반짝반짝 현란하고 아름다운 사진에 눈이 가서 우주와 과학에 쉽게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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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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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었는데 대여섯 권짜리 만화책을 완결까지 한 번에 읽어낸 것 같다. 라이트노블이라는 장르 탓일까. 미소녀와 어딘지 평범한 남학생이 주인공이며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외모에 대한 묘사가 그리 자세한 것도 아닌데, 인물들의 외모나 소설 속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만화 속 페이지로 변환되는 기분이다. '사자'를 구원하는 사신의 이야기를 담은 SF 적인 소설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빠르고 주인공들의 대사량이 많아(주로 말장난하거나 까부는 내용)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도 절로 빨라진다. 367페이지의 두께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읽어내린 책이다. 하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라이트노블이라고 그 내용마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이생에 미련을 갖고 떠도는 존재가 '사자'다. 그리고 그런 사자의 미련을 해소해주어 그들을 구원하는 존재는 사신이다. 어제까지도 평범한 남학생에 불과했던 사쿠라 신지는 까불거리지만 미인 동급생인 하나모리 유키에게 '사신' 아르바이트를 제의받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급 300엔의 열악한 조건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6개월간 지속하게 된 사쿠라는 하나모리의 파트너가 되어 함께 여러 명의 사자를 만나게 된다. 각 사자는 가족 때문에 고민한다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제각기 그 사연이 다르고 사신을 대하는 태도 또한 제각기다.

 

행복은 뭘까. 먼 기억 속 누군가가 물었다.

이제는 안다. 지금이 행복함을 아는 게 행복임을.

잃기 전에 깨닫는 것. / 잃었더라도 행복했음을 기억하는 것.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기억해낼 수 있기를 바라는 것.

분명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추구해야 할 진실이다.     - 본문 중 334, 5p

 

내가 초등학생일 때 설문지를 집에 가져왔다고 한다. 내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가를 부모님에게 묻는 설문지였다. 엄마는 그 종이에 내가 행복하고, 스스로 행복하다는 걸 알고, 행복하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썼다고 했다. 그 설문지는 엄마의 마음에도 꽤 깊이 남았는지 종종 둘이 산책을 나가면 그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이 책에서 엄마가 설문지에 적었다는 그 내용과 매우 비슷한 부분을 찾아내고 기분이 참 묘해졌다.

책 속의 사자들은 죽기 이전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행복한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물론 그 행복했던 기억 한 조각을 붙들고 살기에 삶이란 게 그리 녹록지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힘든 시기에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뜨리고 다시금 힘을 낼 수 있는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행복과 희망이란 조각은 아주 작아도 그 영향력을 크게 떨치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는 죽음과 행복, 그리고 기억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 사자가 미련을 해소하기 위해 갖게 되는 능력과 사후 시간이라는 특수한 요소들은 그들이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면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 시간 동안 사자와 관련되어 벌어진 일 자체가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사신 아르바이트는 6개월로 한정되며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그동안의 기억과 모든 흔적들이 사라진다.

 

 

아무튼 우리는 하루하루를 최대한 만끽했다.

이제 곧 끝이 오겠지만 그게 뭐 어쨌느냐고 외치듯이. - 본문 중 ​296p

 

사람들은 사라지는 걸 두려워한다. 사실 영원한 것은 거의 없는데도. 그래서 하나모리가 이야기한 '투명한 책' 이야기가 참 흥미로웠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보지 못하는 특별한 공간에 잠시 봉인해두는 것이라는 것. 이렇게 진실은 알 수 없는 사소한 이야기에 잠시 위안 받고 그저 즐겁게 현재를 만끽하는 것. 그게 이번 인생을 즐기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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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단의 스캔들
홍지화 지음 / 작가와비평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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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학이 시작되고 역사가 현대사로 접어드는 1900년대 이후 문인들은 그저 단순한 작가들이 아니었다. 사라진 양반층을 대신하는 지식인층이었고(실제로 양반의 후손인 경우도 꽤 있었다.), 민중들의 삶과 온갖 사건들을 제일 먼저 파헤치는 언론 및 기자 일을 겸업했으며, 모던 걸 보던 보이를 자처하며 유행을 이끌어가는 예술가 겸 유명인들이었다. 우리가 지금 연예인들의 온갖 사소한 TMI를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은 몇몇 문인들에게 꽤나 관심을 쏟았던 것 같다. 그 덕에 무성한 소문과 다양하게 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그 시대의 문인들에 대한 소식을 아직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총 4명의 문인들을 다룬다. 이상, 김우진, 나혜석, 모윤숙이 그 주인공으로 스캔들이라 이름 붙인 만큼 그들의 인생을 되짚어가면서 다사다난했던 그들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혹자는 이혼과 그 후의 이야기까지)에 집중한다. 사랑이란 상대가 있어야 이루어지는 이야기이므로 네 사람의 주인공을 내세우지만 그들의 연애 대상을 포함하면 조선의 남녀 십여 명 이상이 등장한다.

 

책에서는 인물별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하나의 사건 사건을 조명한다기보다 그 인물의 인생을 반추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편이었다. 문인들의 사상이나 태도 등을 알기 쉽게 본인의 자전적 작품이나 주변인들이 남긴 그들의 모습을 쓴 에세이 등에서 발췌하여 본문 곳곳에 실어 두기도 했다. 일제 치하의 예술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있고, 그들 자체가 스스로를 드러내기에 주저함이 없는 것도 있었으며, 다양한 예술에 종사했지만 동시에 문인이라는 특성상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인 글을 참 많이 남겼다는 걸 알게 됐다. 대표적으로 <봉별기>, <날개> 등을 쓴 이상이 그러했고, 나혜석은 당시 떠들썩한 이혼 이후에 <이혼 고백장>이라는 글을 연재하며 자신의 이야기는 물론 자신을 물 먹인 두 남자, 최린과 김우영의 모습까지 파격적으로 드러냈다.

본문에 쓰인 여러 글들을 비롯해서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지만, 당시에도 유명한 스캔들이었거나 반대로 공공연히 드러나지 않았던 연애사를 다루고 있어서 내심 그 자료들이 과장되거나 혹은 너무 부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물들의 감정이나 주요장면들에 추측이나 상상이 가미되어있다는 걸 감안하고 가볍게 읽기에 참 재미있었던 책이다. 왜 역사 시간에도 교과서에는 쓰여있지 않지만, 흔히 말하는 '야사(野史)'를 들을 때면 수업내용보다 더 재미있고 더 오래 기억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특히 연애사다 보니 정사에는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도 좋았다. 주인공으로 등장한 ​나혜석, 모윤숙뿐 아니라 김우진과 함께 바다에 뛰어든 윤심덕과 이상의 여인들-금홍, 권순옥, 변동림까지 개인적으로는 여성들의 연애사와 그들이 가진 여성상의 모습이 매우 다양했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하지만 시대 탓을 해야 할까, 그들이 타고난 인생이 그러했던 걸까 무난하고 평탄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이 없어 읽고 나니 조금은 심란한 마음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까지 물론 평온과는 거리가 있는 시대였지만, 떠들썩한 스캔들을 몰고 다니던 주인공들 중에 '두 사람은 결혼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뻔한 해피엔딩을 맞이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특히 나혜석은 당시 최초라는 타이틀은 모두 쓸어갈 만큼 두각을 드러내고 유복한 집안과 오라비의 비호 속에 풍족하고 평탄하던 삶을 살았지만, 최린과의 만남과 편지 사건, 이혼 이후로는 이전까지의 삶과는 정반대의, 최악의 반전을 겪게 된다. 그녀가 남긴 <이혼 고백장>속에 담긴 생각과 주장은 지금 읽어도 파격적이다. 그녀가 지금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연애도, 일도, 예술도 마음껏 즐기며 잘 나가는 셀럽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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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플라워 - ‘젤러바흐 상’을 수상한 티파니 터너의 특별한 선물
티파니 터너 지음, 정민정 옮김 / 도도(도서출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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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꽃향기가 날것 같은 책 속의 아름다운 꽃들이 모두 페이퍼 플라워다. 조금 더 익숙한 말로 종이꽃. 자신은 식물학자가 아니며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다 보니 전문가가 되었다는 그녀의 말이 마냥 부럽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애정이 듬뿍 담긴 (공예가로서의)일이자 취미생활의 기록이자 자랑이며, 페이퍼 플라워를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을 위한 교본이기도 하다.

<챕터 1 주름지, 꽃철사, 접착제>에서는 페이퍼 플라워를 만들기 앞서 기본 준비물부터 자신이 애용하는 기타 도구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한다. 그 후 <챕터 2. 꽃들>에서 자르기, 누르고 늘려주기, 부수기, 꼬아주기 등등 이름만 들어도 왠지 알 것 같은 기본적인 작업들부터 점점 전문적이고 난이도가 올라가는 작업들까지 순차적으로 보여주려 노력한다. 여러 가지 꽃들을 만드는 과정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이 가장 처음 시작했던 꽃이자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은 꽃부터 시작한다. 그녀의 첫 꽃은 '부겐빌레아'다. 부겐빌레아를 시작으로 다양한 꽃을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 단계별로 사진을 포함해 큰 책이 꽉 차도록 알찬 설명들이 쓰여 있어 읽는데 그리 어렵진 않았지만, 실제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글씨로만 읽고 있으려니 왠지 손이 근질거렸다. 각 챕터 뒤엔 본문에 실린 꽃을 만드는데 필요한 도안들도 실려있다.

 

다소 생소했던 부겐빌레아를 지나 두 번째로 소개하고 있는 꽃은 카네이션이었는데 반가운 마음이 컸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처음으로 만든 종이꽃 하면 대부분 카네이션이지 않을까. 유치원 때 처음 배운 이후로 어버이날이면 꽃잎 끝이 뾰족한 카네이션을 제멋대로 만들어 부모님께 드렸던 기억이 났다. 올해는 그때보단 훨씬 나아진 실력으로 종이꽃 카네이션을 만들어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양한 꽃들을 뒤로하고 <챕터 3. 잎, 줄기, 꽃봉오리>는 꽃 외의 식물의 섬세한 부분들을 만드는 법도 알려준다. 저자는 잎 만들기에 앞서 '나는 여러분이 자연 속에서 식물의 구성을 관찰하며 페이퍼 플라워에 대한 공부를 하길 바란다. 이것이 책으로 배우는 것보다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라고 쓰고 있다.(본문 중 195p)

사실 내게는 꽃보다 더 익숙한 부분들이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나는 다양한 취미를 늘려갔는데, 그중 하나가 꽃이나 잎 등 식물의 부분을 말려 압화 책갈피를 만드는 것이었다. 꽃은 화사하고 색상이 아름다운 맛이 있지만 꽃의 구조상 두꺼워 눌려 말리기가 어려웠고, 색상이 변하는 것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 대신 내가 눈을 돌린 것이 꽃잎 하나, 꽃받침, 어린잎, 작은 꽃의 꽃봉오리 등이었다. 참고로 벚꽃의 꽃받침을 말리면 정말 앙증맞고 예쁘다. 단풍잎 등 잎사귀는 책갈피로 만들 땐 단골손님이었고 제비꽃 같은 작은 식물의 줄기와 잎 역시 통째로 눌러 말리면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나 꽤 멋진 소재가 되었다. 종이꽃을 만들 때 실제 꽃을 많이 관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점에 공감하며 살짝 칭찬받은 기분이 되어 우수한 학생이 되고 싶어졌다.

<챕터 4. 페이퍼 플라워 액세서리>는 말 그대로 종이꽃을 이용한 다양한 액세서리를 소개하고 만드는 법 역시 알려준다. 솜씨가 좋다면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액세서리들이 참 많았다. 마지막 <챕터 5. 대형 페이퍼 플라워>는 말 그대로 커다란 종이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영어를 그대로 읽으면 자이언트 페이퍼 플라워, 뭔가 커다란 건 알겠는데 명칭이 귀엽다. 내겐 그저 장식성이 좋은 커다란 꽃이라는 생각만 들었는데 작가에겐 많은 생각과 추억과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작가의 글을 아래에 붙인다.

꽃은 향기와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리고 그 감흥을 전파하게 만든다. (... 중략...) 특히 대형 페이퍼 플라워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끌어낸다. 나는 페이퍼 플라워 공예가로 활동하는 내내 이런 일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실제보다 큰 꽃들을 보며 사람들은 자신만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꽃과 대화를 나눈다. 이것은 진정 아름다운 경험이 될 것이다.

(본문 중 243p)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림 같다'라는 표현을 한다. 실제 사람의 손으로 탄생한 예술은 자연의 어떤 경지를 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현실인데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아서, 혹은 인간으로서 자신이 아는 최고의 경지를 비유하듯 무심코 그런 표현을 하고 마는 것이다. 또는 그 순간을 예술작품같이 그대로 박제하고픈 갈망을 담아 그리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꽃을 볼 때마다 그와 비슷한 감상을 하곤 한다. 생화가 가진 그 생명력과 아름다움이 좋지만, 그 모습이 유지되지 못하는 게 늘 아쉬웠다. 그래서 프리저브드 플라워나 드라이플라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문적인 수준은 못되지만 실제로 그 작업을 어설프게 따라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남은 꽃의 잔해를 소유할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이 책으로 페이퍼 플라워라는 걸 알아버렸다. 실물은 아니지만 실물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가지고 그 지속성마저 길다. 그리고 저자의 말대로라면 재료 또한 간단하고 실력은 제각각이겠지만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재료도 식물에 한없이 가까운 종이다. 생각할수록 페이퍼 플라워를 좋아할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아 헛웃음이 났다. 나에게 너무나 흥미로운 새로운 취미를 찾아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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