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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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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는 일 없는 청년에 대한 세밀한 리포터로그로 말미암은 일본 사회의 병폐를 '빙산의 일각'으로서 충실히 담아낸다동시에 그 아래 잠겨 있는 일본의 연금 체계복지 발전과 소위 '일본형 사회시스템'에서 보이는 문제를 드러내 입체적으로 일본의 '청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청년문제로 드러난 문제의 빙산 아래는 경제 성장의 '논리'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마련된 복지 체계가 있었으며경제 성장과 함께 고령화저출산이 미리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처하지 못했던 일본 정부의 과오가 차곡히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이것은 그동안 마치 '새로운 종'의 출현인 듯 여겨졌던 일본 청년에 대한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미싱 링크'처럼 여겨진다프리터니트히키코모리 등으로 묶이거나 불리며 그 세대가 아니고서는 공유할 수도 이해할 수 없었던 원인을 본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 청년의 '감정'에 대해 정치적으로 접근한 보고서였다면 <무업 사회>는 청년들이 취재와 연도와 숫자로 기록되는 일본의 역사 위에 지금을 살아가는 청년과 NPO가 찾는 좁은 출구다.

 

무업 사회는 무업 사회에 대해 개관한 1부와 일한다는 의미를 여섯 청년의 인터뷰를 통해 개념화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나야말로 청년의 한 가운데이기 때문에 이들의 인터뷰가 무척이나 잘 와 닿았다일본의 사례를 가져온 것이지만 마치 내가 말한 듯 '동어반복'으로 느껴졌다가령 '하고 싶은 일만 하기 위해 이을 고르고 있다?'거나, '돈은 없지만 매일 자유롭게 노는 건 아닌가하는 의미심장한 오해나아가 '혹시 부모가 도와주니까 일하지 않는 건가?' 등 일하지 않는 청년을 바라보는 다른 세대가 충분히 궁금해 할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여러 가지 종류의 '아니오'라는 대답에 청년의 심정과 현재를 일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그러나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는이미 만연한 청년의 담론이 아니다. <'무업 사회'는 어떻게 등장하였는가?> 부분이 바로 빙산의 아래다일본이 현대 국가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던 약 1세기 전부터의 복지관 언급을 시작으로 주요하게 2000년대 이후 청년 무업자의 역사를 살핀다논문으로 보자면 청년이 무업사회에 이르게 된 간략한 연구사 정도가 될 것 같다.


일본형 시스템에는 '일본적 경영', '일본형 복지사회', '중앙집권적 재분재 시스템'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148. 책에서는 앞의 두 가지를 중심으로 알아보는데일본적 경영에서 종신 고용과 연공서열형 임금으로 대표되는 기업의 인사는 '한 번 배제되면 재진입이 불가능'하다는 위험을 이야기 한다그 다음으로 살펴보는 일본의 연금제도는 다소 길게 인용해야 할 것 같다.


일본의 연금제도는 '전 국민 연금'제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청년 무업자처럼 기존 기업 사회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못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국민연금 가입을 강요하지만반면에 국민연금만으로는 충분한 급부를 제공하지 않는자기 책임의 비중이 큰 제도이기도 하다기업에서 근무하고 있거나 공무원인 경우에는 이러한 점을 제대로 인식하기가 쉽지 않은데이것이 일본 사회 안전망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55

일본의 현대 사회복지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의 혼란 속에 사회와 경제가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 나가면서도 특히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구상되었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구상을 가질 수 가 없었다.

 

일본의 연금제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한국의 국민연금을 설명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가 없다다음은 복지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인데좀 더 읽어보자.


사회복지령은 1950년까지 생활보호법아동복지법신체장애인 복지법이라는 '복지 3'으로 이루어졌다. ...패전 후의 혼란 속에서 구상된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구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복지 3법은 그 후인 1960년 정신박약자복지법, 1963년 노인복지법, 1964년 모자복지법을 추가하여 '복지 6'으로 발전되었다그렇지만 현실적인 개호 제도 설계는 1997년 개호보험법 성립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고령화 사회의 도래 자체는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시기부터 이미 인식하고 있었지만주체적인 사회 안전망과 개호보험 구상은 나중으로 미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개호: Care의 일본식 표기주로 노인 용양을 위한 각종 복지 서비스를 말함) 156

 

이 부분은 아주 흥미로운데일본이 어떤 기조로 복지를 운용했는가를 한 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이를 알아보기 전에 '복지국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는 배려도 있다. '베버리지 보고서', '복지 국가의 위기'와 '새로운 사회민주주의'등를 언급하면서 미국과 영국 정부의 정책을 훑어 보는 것그래서 한국의 복지는 어디쯤에 있을까몇 년전 비극적이었던 '세모녀'사건언급한 적 없다는 '증세 없는 복지'라는 초유의 말이 떠오를 뿐 한국의 복지는 어떤 구조로 지탱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게 되었다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내가 처한 출구 없는 문제를 두드려 볼 수 있는 방법 아닌가청년 문제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고용에서 멈추지 않는다그것을 평생으로 가져갈 수 있는 이들은 그중에서도 아주 소수이기 때문. '안다는 것'이 무력할 때가 참 많지만복지와국가의 운영의 문제에서 무력함을 바라 본다면 적어도 ''의 문제라는 오명을 벗고 이 문제를 공유하려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일본형 시스템'에 참가하지 못하거나 그 시스템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면 치열한 경쟁 환경이나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상황과 구조를 엿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또한 만일 '일본형 시스템'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유로 인해 실패해서 시스템 밖으로 밀려 나가게 되면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일본의 사회 시스템에서는 노동시장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과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거의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163

 

그래서 이 책은 어떤 희망을 붙들까이러한 문제를 함께 공유하는 것을 우선으로 말한다. 그러나 해법처럼 청년에게 일을 '배당'혹은 '참여'시키는 것이 최선의 문제해결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충분히 진심일 것이나 다소 교조적으로 느껴지는 인터뷰는 그 때문 같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 변한 것은 나 자신을 긍정하게 된 거예요예전에는 제 존재를 부정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고 느끼게 되었어요현장 책임자로 손이 부르터 있던 가쓰다 씨의 말이다나는 그렇게까지 ''을 긍정하고 신화화하고 싶지 않다그렇다고 일이 아니라면 사회에서 배제되는 실태에 일만이 사회적인 인간으로 그를 부를 수 있는 고리임을 부정할 순 없다일보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다른 형태의 매개가 생겨날 것을 믿지만먼 훗날의 그림이라는 것도지금 필요한 것은 사회적 약자로서 '청년'을 받아들이고 '문제'로 골몰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일테다그 후에 수립할 정책이 실질적인 도움할 수 있을 것이다성남시의 청년 배당이 이와 닿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변화'다. 사회적인 지원은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그것은 한 생애를 걸쳐 모두에게 필요하다서로를 가여워 하지 않아도 충분한 세상에 있고 싶다감상적인가그렇다그래서 나는 이 책이 한 시절만 살아가길 바란다누군가는 세태를 적절히 담아낸 책이라고그것에 어떤 깊이가하고 지나칠지 모르겠다그러나 이것은 관심이다어떤 사람의 한창 때와 그 이후에 대한 염려다그것은 언제나 ''로 치환 가능하기에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다.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에 대해 관심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이 내가 살아갈, 혹은 살아왔던 시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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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을 열심히 봤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왕좌의 게임을 기다리며 겨울을 나고 있다. 그냥 볼 뿐의 의미는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의 이유를 알고 싶다. 그건 나를 아는 일이기도 하고, 

또 이런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한 시대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왜 그런것을 사회가 욕망할까?
















전 3권. 1권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모네와 클림트로 대표되는 20세기 초 인상주의와 상징주의까지 담았다. 

미술에서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새롭게 쓰이는 미술사. 고루했던 교재를 넘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보도자료의 수식이 너무 번잡해서 (모험과 호기심으로 점철된 중단 없는 삶의 열정)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천착했는지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가령 '존재의 연약함에서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라는 말 등은 너무 화려지만



다만 

'진짜 문제'를 지닌 '진짜 사람'을 만나 그려졌다는데서 멈추고, 그의 일대기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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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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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스피리추얼리티라니. 푸코는 어떻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푸코의 명석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우리의 이로에서 보면 푸코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706p 

이것은 부분 나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말을 수시로 털어낸다. 



라캉, 르장드르, 푸코를 이야기 하는 이 책은 과연 한 권인가. 이 뒤로 얼마나 많은 책이 그림자로 겹겹인가. 그러나 그 그림자가 얼마나 두껍간건에, 또한 이 세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대도 이 책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읽어볼만 하다고 추천한다. 일본의 혈기 왕성한 철학자가 '나를 따르라, 저 어둔 개념속으로 같이 가자' 는 투의 비장하지만 즐거운 말투로 논의를 진행한다. 문장은 꽤나 문학적이고, 비유라서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몇몇 개념어나(아니 제목부터 야전과 영원이 도대체 무슨뜻인가) 한자어로 이해하면 그럴듯하지만 단어 자체가 낯설기 때문에 읽기가 아주 매끄럽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일본인)저자와 좀더 가까운 말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책을 재미있게 읽는 것과 그것을 무엇으로 남기는 일에는 아주 먼 거리가 있고, 그것은 한달이나 한달에서 이틀 정도 더해진 시간으로는 어림없었다. 또한 기억에 남는 페이지를 접는 일은 책에 대한 인상을 적을 때 아주 유용하지만 이번의 경우 하등의 쓸모도 없다는 것도 말해둔다. 접어놓은 페이지가 너무 많기 때문. 그러므로 이것을 따로 적는 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신 라캉과 르장드르 푸코를 이야기 하며 넘어졌던 부분을 옮겨본다. 


그녀들이 새롭게 낳으려고 하는 텍스트=말씀=개념은 "그리스도의 신체"이고, 그것은 "정신적이고도 정치적인 공동체"와 동의어니까. 신에게 안겨, 신과 "함께" 연애편지를. 212


저자는 라캉이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을 세 군데로 꼽는다. <거울>과 <팔루스>그리고 '여성의 향락'이 그렇다. 또한 라캉의 정신분석이 서양의 인식과 종교(기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사적인 한계를 갖는다는 르장드르의 비판을 적극 옹호한다. 그러나 라캉이 정신분석으로 멀리 가고 싶었던 부분과 최대한 싸운 결과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라캉의 언어는 정신분석은 하나의 경향으로서 역사의 것이라는 수긍이 이 문장으로 들었다.


신은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비치지 않으므로 분할할 수 없고, 트레 위네르도 새겨지는 일이 없다. 따라서 자신을 '하나'로 셀 수가 없다. 따라서 덧셈도 할 줄 모른다. "만능" "전능"이 몇 개나 있어서는 난감한 것이다.  고로 어떠한 신학상의 주석에서도 신의 <거울>에 관한 논의는 "미쳐 있는"것이 될 수밖에 없다.  280


라캉이 말했던 <거울>을 <사회적 거울>로 가져온 르장드르가 문제제기하는 부분이다. 신을 거울에 비추면, 보일까? 이런 물음이 깜짝 놀라서 그 이후로 연쇄하는 생각이 즐거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다. 이는 거짓이다. 누군가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의 주체는 자신을 "출산한 두 사람"의 모습을 까맣게 잊고 있다. 우리는 안트로포스다. 태어나 낳고 말하고 쓰고 춤추는 자다. 후마니타스도, 초근대인도, 포스트모더니스트도, 동물도, 벌거벗은 삶도 아니다. 그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 "전혀 새로운 시대"따위는 오지 않았다. 426


통쾌한 르장드르의 부분. 데카르트의 논의를 통쾌하게 부수며 현실로 발딛는 이야기를 전한다. 


18세기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이 지배하는 시장에서는 국가가 풍요로워지고 증대한다. 즉, 이는 힘을 갖기 위한 원리가 된다"고 논한다. "더 적은 통치로, 더 국가로 향한다." "이것이 말하자면 18세기가 내놓은 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답은 항상 똑같았다. 시장에 대한 "개입의 기술"로, "국가적 관리의 기술화"로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 구자유주의자들은 "영원한 생시몽주의"라고 부르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673


푸코의 논의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시장이 국가의 감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시장의감시를 받는 것입니다." 674 라고 설명한 것이 반가웠던 이유는 <거울> 이나 '신을 거울에 비추면 보일까?' 등의 이야기에서 건너와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세계가 이렇게 밖에 흘러갈 수 없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 같았고, 그래서 푸코가 나중에 대안으로서 말하는 것이 궁금했다. 그게 바로 처음 인용한 '영생'이다. 자기에의 배려다.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성장하고 자신을 개선하는 일을 당부했다. 이것이 "진정한 사회적 실천"과 연결된다고 말했는데, 다소 맥이 빠지는 이야기 였음에도 한 가지 대안으로, 방법이 있긴 있겠구나 하는 위로였다. 


나는 가끔 물어본다. 미국의 금리 동결과 유가의 하락과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를. 말해줘도 알지 못하고, 안들 어쩔 수 없는 판임에도 궁금해 한다. 그러나 또한 나는 요새의 소설을 찾아보며 이를테면 김엄지나, 오랜만의 김경욱이나, 새로운 금희등을 찾아 보며 이들의 왜를 궁금해 한다. 그것은 이렇게 거대한 세계를 '나'라고 불리는 한 장면이 감지할 수 있는 최대치를 더듬는 과정이다. 이 책을 읽는 것 역시 그렇다. 말하자면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것이다. 이것이 나를 하나의 숫자로 충분히 셀 수 있는 일이라고 믿으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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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맥주를 먹다가 반쯤 쏟았습니다. 자는 곳 경계를 짓는 책담 일부가 젖었고, 아끼는 것을 곁에 두었기 때문에 순서 없이 읽는 책들이 공평하게 젖었습니다. 그 중에는 성경도 있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가장 밑에 층에 놓았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일까, 두 손으로 펼쳐 놓았고 지금은 가장 윗층으로 피해 있습니다. 펼쳐 들었던 곳은 시편이었습니다. '행복하여라!' 무릎으로 맥주를 닦느라 휴지를 많이 썼고, 늦게 들어온 동생은 수북한 휴지를 보며 혹시 감기가 걸린 것 아니냐 걱정했습니다. 제가 옮긴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겠죠.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만들어 한 시간쯤 허둥거렸습니다. 


그 와중에 노트북을 신경쓰지 못했던 것은 맥주가 다행히(?) 책쪽으로 기울었던 까닭이고, 노트북에서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책상이 쓰러졌는데, 그래서 책상에서 떨어졌는데도(!) 노트북은 그 잔잔한 노래를 계속 트는 겁니다.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책상이 아니라 마음이 무너진듯 애지중이 받을었을텐데요. 지켜보고만 있는 마음의 책감에 아랑곳없이 노트북은 침착하게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좌식 책상을 바로하고 노트북을 올려놓았습니다. 맥주는 책이 먹었는데, 이미 취한 기분입니다. 


그런데, 왜 맥주는 쓰러졌던 걸까요? 겨울은 춥고, 내일은 월요일이고, 우울한 손가락으로 밀쳤던 것은 아닐겁니다. 나는 좌식 책상을 잠깐 들어서 옮기려고 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거든요. 읽고 있는 책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라캉과 푸코를 읽는 책인데, 900페이지가 넘는다는 말로는 그 부피가 와닿지 않는것 같았거든요. 그것을 담으려다보니 프레임에 나의 생활이 끼지 않겠어요. 나는 치우고 싶었습니다. 다 먹은 물병과 이제 다 먹어가는 물병이 이 책의 두께 너머로 보였습니다. 사진을 찍으려는 포즈와 함께 책상이 무너졌고, 책상 아래 있던 맥주가 쓰러졌고, 주위에 책이 젖었습니다. 


사진은 없습니다. 아름답게 편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요. 책을 읽고 쓰지 못해 두께를 보임으로써 읽기의 괴로움을 보이며 자랑아닌 자랑으로 지금을 면피하는 얄팍한 마음을, 보여주려고 했겠지요. '행복하여라!' 행복하려고 했을까요? 다행스럽게 책이 젖어 젖은 책들의 페이지를 한 구절씩은 보게 되었고, 그것으로 읽기를 다한 주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02로 시작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제 이름을 확인했고, 저는 그럴 수 밖에 없으므로 그렇다고 했습니다. 알라딘이라고 했습니다. <야전과 영원>도서 리뷰가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전화를 드린다고 입을 뗐습니다. 신간 평가단을 혹시 그만 두실 것인지,,하고 끝을 흐렸습니다. 저는 속이 뜨끔하여 읽었으나, 아직 적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좀 더 주신다면 적을 수 있을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31일까지 괜찮으시겠냐고 상냥하게 물었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가능하다고 했으나 정말로 가능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시간을 달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오늘은 맥주를 쏟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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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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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이 따위일까. 악마라도 있기 때문일까? 아니 악이랄게 별게 아니더라. 당신과 닮은 것이 악이다. 이렇게 만연한, 이런 망할 곳에서 과연 희망은 있을까? 를 두고 


바우만과 돈스키스가 대화를 나눈 것을 엮은 책이다. 그들의 치열한 생각은 프랑스 대혁명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을 횡단하고 이케아와 페이스북에 숨어있는 '악'의 모습을 캐 올린다. 모두가 우려하지만 대책을 궁리하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정말 뜻밖이거나 아주 잔인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 감수성의 말로는 어떤 것일까?" TV로 중계 되던 죽음에서도 밥을 먹었다, 9시에서 6시로 짜여지는 일과가 멈추지는 않았다.


틀에 부으면 변하는 모습처럼 사회는 언제든지 변할 태세를 갖추었다. 물건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해진다. 언제든지 더 나은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의 생태(이케아, DIY)와 인간의 꼴이 닮는다. 줄곧 미덕으로 지켜졌던 언어는 구식의 것으로 취급되는 가운데, 그러니까 요새 누가 '충성'이니 '배반'이니라는 말을 올린단 말인가. 유동적인 세계에서 유연하게 바뀌어야 할 것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미덕으로 불리는 '변화', 언제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개인 아닌가. 그렇다. 근대가 규정했던 지도 위 빗금-국가나 민족, 공간, 그 모든 것을 초월해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나의 '정체성'까지도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체성이라는 것은 사회화, 그러니까 사람과의 교류에 의해서만 유효하게 만들어지며 성장한다. 내가 '이러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이웃의 얼굴처럼 흔하게 존재하는 악의 구렁텅이를 넘어 인간의 불확실성에 기조한 정치 세태를 논하고 시장과 정치의 미래를 점치는 여정을 지나 두 학자가 겨우, 그래서 진실로 말하고 싶은 '희망'은 이것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도  "어쨌든 신은 우리 안에 공동체와 사회성의 힘으로서 존재하며, 사랑과 충실함은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언어" 264p(변주) 라는 것. 더 이상 개인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우엘 백의 예언과도 같은 소설이 얼마간의 사실인 듯한 가운데서도 이들은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것만이 세계에 가리워진 '도덕적 불감증'을 이겨낼 수 있는 대안이라는, 사회 정치 역사를 종횡하며 도착한 두 학자의 믿을만한 처방이다.   



만약 당신이 타자를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신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신의 피조물인 쪽은 우리이다. 당신은 오직 당신 자신의 글이나 당신 자신의 창조물만을 알 수 있다.


타자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옳지 못하고 위험하다.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오직 다른 사람과 함께,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의 관찰과 참여 속에서, 다시 말해 사랑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의미 있다. 364p


아멘을 올리고 싶은 구절, 손을 모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별 하나는 책에 대한 것. 내용에 대해서라면 권하고 싶다. (별 하나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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