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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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하면 아버지
술은 예전 아버지들이 마셨다. 물론 아직도 마시고 계시고. 바깥의 일이 힘들어서 집에 와 술을 드신다. 1. 골병 드시는 아버지. 2. 분노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집안의 것을 부시고... 비극으로. 3. 아침이 밝으면 잘못했다고 빌고는 아버지, 4. 혹은 뻔뻔하게 집을 다시 나서는 아버지. 5. 집 밖으로도 나가지 않는 아버지.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술은 왜 아버지만 드시나. 아버지만 힘들었나. 다른 이들은 아버지의 힘듦으로 과연 살만했나. 아니 아니 아니,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 뿐이었던 것은 아닐까. 


'여자'라는 개인이 마시는 술
이곳은 2010년도 이미 중반, <봄밤>에서 요양원을 며칠씩 탈주해 술을 마시는 영경의 알콜 중독 증상은 자해에 가깝다. 자해는 잘 보이지 않는 폭력이지만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게 되면 주위 사람이 감지 할 수 있고 곧 문제를 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영경에게는 그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그러니까 영경 자신 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그마저도 사라지고 있다)... 그녀는 국어교사였다. 남편과 이혼하고 뒤이어 양육권을 빼앗겼다. 그리고 이 사이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어, 큰 언니 영선이 '차라리 잘된 일이니 내버려두라'고 말했고 둘째 언니 영미가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던 일이다. 영경이 사라진 아이에 대해 경찰에 납치 신고를 하고 소송을 준비하려고 했던 때였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은 
비극으로 포장되는 예정된 사건이 아니라 
단 두 줄로 서술된 사건에서 영경의 절망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이를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서 두 배의 절망이다. 함께 나고 자랐을 자매가 그녀를 위하는 마음으로 건넸을 이야기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무감각하게 영경의 사태를 지나가는 일이야 말로 언제고 당신의 인생에 나타날 '비극'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큰 언니는 이 싸움에서 영경이 곧 깨질 계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말할 수 있는 일이며, 인간의 일을 하늘에 맡기는 둘째 언니의 말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 언니들의 말이 또한 뜻하는 것은 영경의 행동을 이해하거나 응원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란 거다. 이렇게 두 개의 문제가 있다. 가부장제의 폭압과, 그 압력에 대응할 생각도 못하고 수그러져버리고 마는 언니들의 모습. 언니들의 발언은 이혼과 양육권으로 말미암은 발화가 아니라 그들이 삶에 대해 갖는, 그것도 영경보다 더 오랜 시간 축적해 놓은 '태도'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영경의 삶에서 틀렸다) 이것이 진정으로 내가 어쩔 수 없으며, 미연에 방지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언니들과 연락을 끊고 지내지만, 영경은 이렇게 비롯되는 고통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형편없이 기억할게
그런 영경이 수환을 만난다. 그때 만남을 일러 영경은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기억한다. 이런 놀람은 다시 말해 영경에서 얼마나 행운이 형편없었던가, 를 생각해볼 수 있다. 수환은 의료보험 발급도 되지 않는 취약계층이다. 15년간 쇠를 만지고 한때 돈도 많이 벌었었지만 위장 결혼등으로 모두 날리고 남은 것은 류마티즘으로 손쓸 수 없는 몸과 제대로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가난뿐이다. 이들은 십 몇년을 함께 살다가 요양원에 함께 입원한다. 독한 약으로도 병세를 멈출 수 없는 수환과 겹쳐지는 나날이 병세를 악화 시키는 영경. 죽음으로 병과 가난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들이 선택한 길이라면 길인데, 삶에서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1보다 큰지 작은지'를 병원 침대에서 가늠해 볼 뿐이다. 이 지경에, 영경이 발음도 어려운 '도스토예프스키'의 구절을 읽어주며 대화를 하는 게 좀 이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직업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고 그나마 '생각'을 좀 하는 것 뿐이다. 수환은 그런 영경의 말을 듣고, '당신은 너무 똑똑해서 섹시하다'고 이야기한다. 영경을 존중하며 영경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응원한다. 그게 알콜중독을 더 심화시키는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사랑을 하지만 이것이 삶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떻게 이 일들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건가

권여선의 소설에는 지적-계급이 나뉘는 이들이 만나게 되었을 때 벌어지는 장면이 자주 보인다. 특히, 주로 소위 '엘리트 여성'이 주인공으로, 그녀를 둘러싸고 엘리트가 아닌 여성 혹은 남성과 만났을 경우 어떤 충돌이 있는지를,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적는다. 배운 그녀들이 술에 몹시 취하는 삶을 보여준다. 그녀들은 왜 그렇게 술을 마시게 되었는가. '생의 비극을 견디는 주정뱅이들에게 건네는 쓸쓸한 인사'라는 말은 더 없이 매혹적인 카피이지만 '비극'은 비극적인 일을 당하는 이에게만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극은 대체로 최선을 다함, 어떻게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치기 쉬운 '계층'의 이들에 한한다.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고통'이라는 것은 없다는 거다. 영경의 비극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인가, 수환의 비극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나. 몰리고서야 만난 이들의 만남을 비극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벌어진 상처는 얼마든지 아름답게 쓸 수 있다. 아파하고 우는 일을 아름답게 쓰는 일도 쉽다. 그 상처, 왜 벌어졌는지를 이야기 해야 한다. 


'꼬추의 발광'만큼 우스운 '초추의 양광'

사랑을 해도 그것이 삶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봄밤>. (엘리트)여성은 스스로 해방되지 못하며 다른 이를 구원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봄밤>에서 폭력적인 가부장제의 억압에 영경이 제정신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일 수 있고, 자신의 앎 따위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불법체류자)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건만을 축소해 놓고 보았을 때 '무지'(불법체류자의 주거구역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관주)를 막을 수 없어 벌어진 일에 여전히 '무지'로 대응할 수 밖에 없는(약자를 미워하는 약자로 남는 관희) 까닭일 수 있다<카메라>. 최고조는 <층>에서 나타난다. 박사과정을 마친 여자는 '초추의 양광'니 같은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이것을 들은 인태초밥의 남자는 '꼬추의 발광'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처럼 이들은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봉쇄된 것 같다. 그는 그저 '모든 게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가 무릅쓰고 '초추의 양광'이라는 말이 평소 쓰이는 말인가요' 내지는 '제게는 그저 꼬추의 발광으로 들립니다'라고 가름했다면 여자는 픽하고 웃거나, 같잖은 한자어의 조탁을 부끄럽게 여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연은 지들만 웃긴 농담의 '배운(남)자들의 세계'에서 가장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들과의 대화는 한 시도 참을 수 없는데, 조금이나 다른 미래를 생각하게 했던 남자에게, 예연과의 만남으로 작은 미래를 상상하는 남자에게 우습게도 이 하찮은 '꼬추의 발광'이 넘을 수 없는 산이다. 러지 못한 이들의 말로에는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라는 여자의 독백뿐이다<층>. 

대화의 가능성
권여선이 주로 그리는 여성 화자들이 소통 가능한 사람으로 꼽은 남성 화자들은 이혼하고, 돈 없고, 의료보험증도 없는 취약계층이거나<봄밤>, 바보 누나가 있고, 그런 누나가 너무 싫고, 헬스장과 일식집의 일을 병행하는 이<층>거나 눈이 다 멀어가 보르헤스 비슷하게 생각을 수놓아가는 중년의 소설가거나<역광>, 조교가 된 것(이 작은 과정을)무슨 성공의 교두보인 것처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카메라>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류 남성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이라는 것. 때문에 역으로 억압된 가치에서 보다 자유롭고, 여성 화자들과 소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적인 지는 소설에서 점칠 수 없지만)

이 소설은 2010년도 중반의 것이다. 이 책 이전 실제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여성은 자신을 구속하는 삶을 탈출하기 위해 앎을 구축해왔다. 소설의 여성들을 삶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 되돌아온 것은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 없음을 확인하거나, 대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경우 이미 삶의 끝간데 와 있는 수순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보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남성화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들을 소설에서 굳이 크게 그리는 대신 소설 바깥을 보면 선명해질 일이기 때문에. 다시 소설로 들어오면 그를 피해 달아났을, 달아나 다른 가능성을 찾는 여성화자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안녕! 주정뱅이!
여기서 잠깐 그려지는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남성들의 모습이 궁금한가. '몇 번을 말해, 김선생? 내가 지금 상태가 심히 안 좋다고.' <층>. 자신의 상태가 안좋으면 옆에서 계속 술을 마셔줘야 하는 것인가. 술자리를 피해 달아는 여자 선생에게 욕을 지껄이는 것으로 화면은 바뀐다. 이런 사태에 권여선의 일단의 대답은, '커피잔에 술을 따라' 마시고, 이들이 아닌 다른 대화의 가능성을 찾는 여성의 출현이다. 몸에 술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파괴할 방법 외에는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고, 한 밤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김수영의 시 '봄밤'을 읊는 여성의 탄생. 다수의 사람들은(수적으로는 아니나 질적으로)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나 듣지 않고, 이 소수(수적으로는 아니나 질적으로)의 사람들은 이들은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들어보려고 노력한다. 이 사이에 갇힌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녀들이 주체적으로 술을 마시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면 이 글을 접고 술을 마셔야겠다. 그녀들은 언젠가 술을 적당히 마시게 될 것이다. <안녕 주정뱅이>가 그런 의미였으면 좋겠다. 




*<역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기는 정확히 그렇게 한 줄 알겠지만 달은 결코 자기 감정을 격조 있게 표현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질투나 원한을 품을 수 있고 그에게 닥친 불행에 쾌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그토록 천하게 표현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예술가로서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무력하게 다짐했다.' 역광 151


권여선은 소설에 계급 혹은 여성-남성의 구도를 의도하고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실내화 한 켤레>의 수학 선생의 대사로 보아 '수학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세상 천지에 그냥이 어딨냐 말이야, 그냥이?' 권여선이 천착하려고 했던 것은 좀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비극에 대한 것일 수도 있었을 것같다. 그러나 이런 물음은 예술의 세계에서나 고혹적이다. 작중의 인간을 비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후 사정이 필요한데, 이 사정들은 아무리 짧게 서술되어도 맥락이 여간 현실에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것이 없다. 이건 작가의 천의무봉할 실력 때문이 아니라, 그저 어디서도 부조를 뜰 수 있는 현실에 만연한 비극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이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인간의 비극에 대해 소설의 의문이 든다면 '고통받는 인간과 고통하는 인간'을 설명한 소설의 말미 신형철의 해설을 보면 도움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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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황지우, 「길」중에서








비자림에 왔다. 비자나무 숲이라는 뜻이다. 숲을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비자나무는 아주 커서 그들이 일군 숲에는 해가 들어오지 않았다. 버스로 오기가 불편한 곳이라서 차를 가져온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중년의 부부가 많았다. 어떤 부부는 키가 꽤 컸다. 얼굴을 다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썼고, 손을 꽉 잡고 걷는 걸 보며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그 뒤였다. 천천히 걷는 것을 애썼던 것은 아니었지만 더할 수 없을만큼 천천히 걸었던 것은 나무를 설명하는 표지판이 나오면 그때마다 쪼르르 가서는 그걸 다 읽고, 이게 그 나무라는 것을 한 번 보고 다시 길가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까 내 앞에서 걸었던 사람들이 벌써 사라져 없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내 앞에 있었다. 그들은 걷기는 했지만 자꾸 뒤쳐지고 있던거였다. 가만보니 남자의 오른팔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지지하지 않는 지팡이였다. 여자와 남자가 잡은 손에는 힘이 깊게 들어갔는데 그것은 남자의 왼쪽 다리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왼쪽 다리는 춤을 추듯이 움직였다. 남자의 원함과 상관없이 비틀거렸는데, 그걸 붙잡는다는 듯 여자는 미묘하지만 그가 통제하기 어려운 보폭에 꼭 맞추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잡은 손은 남자의 조금 불편한 다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사라질 위험에 처한 것처럼 사람들은 사진을 찍었다. 몰린 까닭인지, 휴가지에서는 더했다. 비자림에도 소리가 가득했다. 남길 수 있다면 더 좋은 모습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진을 찍기에 더할 나위 없는 사람들이었다. 젊거나, 같이 왔거나, 지금이 행복하거나, 혹은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 남자는 다리를 절었는데, 그 저는 모습이 완벽했다. 원래부터 다리를 절었던 사람처럼.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을것이다. 두 다리는 힘껏 뛰어본 적이 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 언젠가 축구를 했을 것이고 한 시간이 걸리는 비자림을 이십분이면 다 돌고 남았을 시절이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보통의 예상이라면 그 여자는 두 다리가 건장한 시절의 남자를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뛰어오는 남자를 만났던 누군가가 그녀라는 가정도 이상하진 않다. 다리가 불편하든 불편하지 않든, 그 남자가 '그 남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으로 여자의 마음이 뚝 떨어졌던 일은 있었겠지만 그게 마음의 변함을 의미하지는 않았을거라는 것도. 

남자는 지금 다리를 절게 된 자신을 얼마나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어디까지 나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적은 없었을까. 내가 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에 맞딱들이게 된다면, 나를 혼동하지 않고, 나라는 몸에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징후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손바닥을 들여다 보았다. 갈라진 손금. 다소 젊었을 적 비자림에 왔었고, 혼자였고, 어떤 부부의 뒤를 걸었다.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 '당신의 다리만을 사랑한 것은 아니에요,' 라는 여자의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게 내 다리에요.' 라고 말해야만 했을 남자의 심정은 너무 아파서, 따라할 수 없었다.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어디까지 당신에게 보여야 할까. 보일 수 있을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중년의 부부였던 것처럼 비자림을 걸었다. 원래부터 비자림을 천천히 걷고 있는 중년의 부부처럼 지금도 비자림을 천천히 돌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얼굴을 각각 가린 챙 넓은 모자의 테두리가 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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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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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중요한 것은 제목에 다 나와 있습니다.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이 실은 계급투쟁이라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결과이며 이제 시작된 문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적습니다. 과연 지젝은 실제, 지금 사회에서 가장 밀접한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고민하는 이일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 어디에도 북쪽 따위는 없다는 것을 진즉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책을 만나면 북쪽을 만난 양 마음 한 켠이 나아지는 기분이 듭니다. 아주 얇은 책이고 삼십 분이면 다 읽을 수 있지만, 생각은 한 달 보다 더 멀리 갈 것입니다. 


유럽 난민 사태는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하는 군사 분쟁등의 위기로 2014년 말까지 6천만 명이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로 발생한 실향민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습니다.(위키백과) 난민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지만, 당도하고 나서도 유럽 사회가 난민을 얼마나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우려로 더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실향해서 다른 땅을 찾아 나선 사람들. 난민에게 우선 쏟는 독설은 이런 것입니다.  


난민들이 배우게 될 뼈아픈 교훈은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 심지어 노르웨이 안에서도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이리라. 난민은 자신의 꿈을 스스로 검열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 속에서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 66


비단 '난민'에게만 이르는 말일까요? 제게도 참 아픈 말이었습니다. 저는 난민이 아닌데도 늘상 불안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현실속에서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일침합니다. 게으르게, 외부의 탓으로 끊임없이 이 괴리의 탓을 돌리며 지냈던 것은 아닌지 말이지요. 난민이 유럽사회에 도달하면서, 유럽사회가 난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다른 생활방식, 종교, 다른 위치, 그 밖에 여러가지 문제들 앞에서 지젝이 사회에 제안하는 것은 두 가집니다. 첫째,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제한 내에서 다른 생활방식에 관용하는 것. 이 두 가지 약속 위에 우리가 해야할 것은 사적이고 감정적인 연대가 아닌, 계급 투쟁이라며 우리가 비로소 싸워야 할 본질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서는 '가난'을 이해하려는 자의 텍스트르 가져와 통렬히 비판합니다. 


주인님, 가난은 어떤 것의 결여가 아니라, 진짜 페스트입니다. 그 자체로 독성이 강하고, 콜레라처럼 전염되고, 더럽고, 죄악이고 악덕이며 절망입니다. 그저 몇 가지 증상만 꼽아본 겁니다 가난은 어떤 경우에도 멀리해야 하는 것이지 연구 목적의 대상이 아닙니다...


가난은 독자적 지위를 가지는 존재론적 실체다. 가난은 단지 돈이 거의 없다거나 아예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가난은 어떤 사람의 불운한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단히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 선량한 부자가 부유함을 누리면서 자기는 가난한 사람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틀렸다. 우리가 사회적 위상(계급)을 만들었다고 해도 모두 동등한 인간이라는 휴머니티의 영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99


그렇습니다. 사적이고 감성적인 연대 부분에서 세월호가 생각났습니다. 느슨한 연대를 비판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테지만, 연대 이후를 바라야 진짜 변화가 시작됨을 알아야 한다는 그답습니다. 기억하고 마음으로 아파하는 일은 쉽지만, 그래서 어디 꿈쩍이라고 하던가요. 세월호 참사는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다는 것만으로 해결이 멀고 멉니다. 그래서 마지막, 회심의 일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이다"(이 속담은 간디의 좌우명과 흡사하다. "너 자신이 네가 세상에서 보기 원했던 변화가 되어라") 그럼 사람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노력을 방기하는 것은 게으름의 합리화일 뿐이다. ...우리가 의지할 위인은 없다는 뜻이다. 113


내가 의지할 위인은 없고, 내가 사는 지금은 더 무서울 수도 없이 진짜입니다. 거대한 아귀가 입을 벌린 방향으로 밀려들어갑니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더를 외치는 자본주의 팽창 속으로요. 그것은 존재를 초월해 우주라도 된 것일까요? 죽음을 알지 못할까요? 그럼에도 '언젠가 터져버릴 것'이라는 예언은 이미 시작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나의 위치에서 조금도 내려가지 않은 채 마음 좋게 가난을 연민하든가, 나라를 등지고 유토피아인것처럼 다른 나라를 향해 동정을 사거나의 한계 속에서 '너 자신이 네가 세상에서 보기 원했던 변화가 되어라'개인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이 아귀를 우주로 돌려보내는 방법은, 아귀를 만든 사람의 손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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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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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대머리노래에 있는 감정은 춘향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120개가 넘는 판본으로 시대의 얼굴이 부르는 노래정숙을 요구받고 충실히 이행한 기생 춘향은 쑥대머리가 되어 옥에 갇힌다차디찬 감방에서 "생각나는 것은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토하며 무덤근처 선나무가 '상사목'이 될거라며 분노하는 이는 이제 겨우 16살이 된 여자(아이)이 가사에 깔린 '사랑'에 몹시 놀란다열여섯 살은 어떤 나이인가한창 근의 공식을 배울 때는 아닌가. "니들은 근의 공식만 알지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몰라."

 

정정하자근의 공식도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이리 가까이 오너라...안거라보자서거라보자쌍긋 웃어라잇속을 보자아장아장 거닐어서 백만교태 다 부려라." 이몽룡과 첫날 밤을 보내는 이도 열여섯 살의 춘향이다춘향전에는 충만한 사랑과 섹스가 잘 드러난다.

 

성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혹은 생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이다.

음식을 맛있게 먹지 못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125

 


<결혼과 도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성을 대할 때 죄의식을 갖게하는 기독교에 대응하는 방식이다성을 즐기는 것은 단지 맛있게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과 같은데하는 생각은 지금도 먼 것만 같다모 가수가 "섹스는 게임이다라고 말해 곤욕을 치뤘던 때는 놀랍게도 2010년의 일이다. 2010년 전의 일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것 같지만인류가 지구를 대체할 새로운 행성을 탐사하기 위해 독수리호를 파견할 날이 이제 3년 밖에 남지 않은 지금도 섹스는 터부시 되고 있다.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1872년에 태어난 20세기 인물이 전망하는 결혼의 미래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사라지는 것'. 경제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구속했던 기반이 사라지게 되면성윤리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획기적인 주장이다아이를 키우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지만경제적인 부담은 국가가 지니게 된다는 것인데 아이의 양육을 국가가 일부 책임지는 것이 지금의 복지임을 돌아보면 아주 터무니없는 예상은 아닐 것 같다성윤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 아버지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서 미래의 남자들에 대한 어둡고 근심어린 전망을 하지만사랑의 형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과 깊이 나누는 사랑은 육체적으로또 지적으로 깊이 있는 친밀감을 '유지'하는 것 말이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인생을 두려워하고인생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253

 

그러나 왜 굳이 '사랑'을 해야 하는가. 묻는다면 대답하는 것이 인지상정. 사랑의 감정을 알아야 하는가나는 온전하게 살 수 있고사람을 만나며 일을 하며 내 하루를 보낼 수 있는데 말이다라고 의문을 갖는다면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상투적이지만다른 이를 통해서 '성장'하는 기쁨은 인간만이 알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감정의 교류로 인한 나의 확대, 나의 성장은 사랑이 아니고서는그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세계다이것은 마치 왜 굳이 '행복'해야 하는가와 닿아 있는 의문은 아닐까그러므로 열여 섯 살에 생각나는 것은 임뿐이라노래 했던 춘향이 자신의 속을 얼마나 깊이 헤아렸을까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알 수있었을 거라니부러워지는 것이다.

 

 

좋은 말 많지 않나


불금

행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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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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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이야기는 무너지고," *


 

 

 


 

목차는 반원으로 배치돼 있다활대 보이지 않는 시위가 팽팽하고작가의 손은 목차의 중간을 당겼겠다그래서 가장 가운데 솟아난 '매듭'부분을 읽어야 하겠지만첫 번째 실린 '살구'로 이미 마음이 어지럽다여기까지 쓰니, '매듭'을 중심으로 목차가 대구를 이루고 이루는 게 보인다시작은 '살구'끝 역시 '살구'.

 

솔닛은 '당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묻다가 "종종 이야기가 당신의 무릎 앞에 떨어진다."며 잠깐 상념에 잠기게 한다그런 적이 있던가있지기지그렇지 싶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100파운드의 살구 더미가 도착한 적 있다며 너스레다무슨 얘긴가 살펴보니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살구였다그렇다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살구는 무척 달지만 그 달콤함을 오래 간직하지 않는다무섭도록 쉽게 상해버린다게다가 자기들끼리 거리가 꼭 필요한데만진 곳마다 쉽게 멍들기 때문이다.


살구가 아니라 어머니그러나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것엔 윤리적인 문제가 걸려있다고 생각한다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 진실할 것인가의 문제로서어머니에게 더해진 늙음의 비참을옳은 일일까옳다면 무엇을 위해서 옳을까. 그런데 이런 윤리적인 판단을 뒤로하고 어머니에 대해 쓰는 일이 우선 '용감'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솔닛은 딸과 '어머니', 그것도 늙고 병든 어머니와 대면하며 생긴 '무너진이야기를 적는다나는 저자 소개를 여러 번 뒤지며 솔닛의 나이를 추측하려고 애썼다사진으로 보이는 그는 아마도 어머니에 대해서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원숙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도망하면서 '살구'를 다섯 번 읽는다수번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단어와 어미를 대입하고 변주하기도 했다그러자 솔닛의 이야기는 없고남는 것은 나와 나의 어머니다솔닛이 바라는 것은 내 앞에 도착했을그러나 내가 살피지 못했던 살구 더미 같은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야기에서 삶의 말년은 그 모든 세월이 지혜가 되는 황금빛 시기이지,

엉망진창인 어린 시절로 혹은 그 너머로 퇴행하고정신병처럼 보이는 질병으로 썩어 가는 시기가 아니다. 20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워 간신히 걱정할 수 있는 미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년뿐이다. '늙음'에 대해서 별로 고민할 시간 없이 사람은 늙어버린다대도시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골목마다 쏟아져 나온 쓰레기아니라 그 더미 속에서 재활용할 것을 찾아 헤매는 늙은 손 아니던가. "노년은 전쟁이다아니 노년은 대학살이다."*** 대학살을 지켜보는 자식들솔닛은 자신의 어머니 치매에 걸린 이후를 적는다그는 무척 화가 나 있는데그것은 우선 어머니가 "아들들에게는 당신의 문제를 늘 숨겨 왔"으며 딸인 자신에게는 늘 문제를 던지기 때문이다진창인 삶 뒤에서 마른 면포를 깔아야 하는 딸물러오는 진흙을 치워야 하는 딸딸에게 부여된 노동으로 지켜진 존엄을 아들들에게 보여주는 어머니가부장제를 지키는 것은 여성인 나의 '어머니'절망은 이런 순간에 깊다.

 

솔닛은 어머니를 고향에서 자식들이 가까운 노인 아파트로다시 노인 요양병원으로 옮긴다아니옮기게 된다그는 "무너지는 어머니와 할 대화라는 게 혼란스럽고 위험한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조용히 말하며할 수 있는 것은 집 색깔이나 꽃에 대해서 만이라고 담담해서 더 내려앉는다그러므로 저 '살구'는 어머니 처소를 옮기며 정리한 어머니의 일부다. "그건 구원의 행동이자 불안함관대함의 행동이었다. 25"이라고 술회하는 부분에 100파운드나 쌓여 있는 살구는 역시 '살구'겠으나 그것을 어머니인 듯 살피는 것은 당연하다제각각 익기의 정도가 달라서 썩은 것을 골라내고무르지 않게 종이위에 깔아 놓는 것해서 그 무더기를 보며 솔닛이 끌어안는 생각은 단연 '백미'이 단편에서가 아니라삶의 면면에서 잊지 말아야 할


"그 무더기는 세상의 반대편에 사는 불새의 꼬리 깃털을 가져오는 일이라든가수수께끼나 감당할 수 없는 역경처럼불가능한 임무라는 범주의 변종에 불과했다. 26" 


그동안 솔닛에 대한 오해 하나를 푼다. 멋진 제목의 페미니스트 저서로 일약 스타가 되었던 것인가. 아니다. 그의 삶에서 체화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비로소 빛날 수 있었던 것. 솔닛을 다시 기억하기로 한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한다 가 아니라 멀고도 가까운』의 솔닛으로.  

 






* 14쪽.

**김중혁악기들의 도서관나와 B, 365쪽. 변주.

***필립 로스에브리맨, 162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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