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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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레 G '검은 주머니'

그 때를 '과학시간'이라고 불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유년의 어느 수업에검은 상자(주머니)에 손을 넣어 물건을 꺼내는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때의 두근거림을 기억한다. 두려움, 궁금함, 놀라움. 여러가지 촉각을 잘 느끼게 하는 것으로 두려움 속에서도 마침내 재미있는 활동으로 남아있다. 소설은 그 검은색 주머니같다. 오감을 문장에 맞긴 채 읽어가야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소설엔 손에 들리는 거라곤 축축하고, 무겁고, 냄새가 나며, 보고 싶지 않은 것들 뿐이라는 점. 거센 숨결, 욕지거리, 음울하게 지껄이다가도 고음의 목청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쇼가 시작되었다.


 

욕망의 잔치에 잘 오셨습니다

도빌레 G의 스탠드 업 코미디의 드러난 주제는 '사드'의 그것과 같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해 보지 않은 욕망을 대신 까발린다그의 이야기는 금지된 것들을 욕망하도록 도와주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세련된 말장난같아 저속함이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쇼에는 두 가지 장치가 있다.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에 스스로를 찬탄하게 만들기그러나 그 정도의 지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육욕의 쾌락을 발견하고 즐기게 하기



고통스러운 쾌락 끝에 만난 지독한 광경

두 개의 트랩에 관객의 즐거움은 배가 되며, 관객은 '' 버리고 스포트라이트 주변의 어둠으로 숨어들어 가책없이 그를 지켜보게 된다. 그러나 도발레 G의 쇼는 그게 다는 아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느끼게 될 이야기를 함께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원하지 않았으나 잊어버릴 수도 없도록. 바로 도빌레 G의 이야기이다



이 고통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영원히 이야기해도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될 수 없는 그의 인생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시작한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 '테이블과 벽 사이에 갇힌 채 아버지의 허리띠 채찍질을 받아내는 조그만 아이', '하루종일 땅바닥만 바라보고 넝마를 뒤집어쓰고 고무장화를 신고 걸어다닐 수 있는' 엄마, 그런 엄마에게 들리는 수군거림을 멈추기 위해 엄마 뒤를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가는 아이.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시대에 휩쓸려 '다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말하는 대신 자신의 삶과 부모의 생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코미디의 소재로 써내린다.  


아버지의 눈에서 '검은 공깃돌'을 발견하고 짐승 한 마리의 진화를 기억하는 아이,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 다녔던 아이에게 '일상'이 존재했을까. '사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까. 동화 속 괴물이 은유가 아니라 일상에 존재한다고 어떻게 믿지 않을 수가 있을까이 아이의 성장을 어떻게 두렵게 지켜보지 않을 수 있을까. 마침내 한 무대에서 찾게 된다.  



그로스만의 주제: 자랄 수 없는 유년, 오직 한 명의 타인

도빌레 G는 원한 적도 없이 환멸에 찬 생을 살아 마침내 57살이 되었다이 나이는 작가가 작품을 쓴 나이와 비슷하다. 그의 전작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 <나의 칼이 되어줘>에서의 주제가 마침내 이 작품으로 모였다는 점을 눈여겨 볼만하다. 30대에 쓴 소설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에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 그리고 작가가 된 후의 이야기가 녹여져 있다. 치유될 수 없는 것을 글 속에서 치유하기 위해 나치를 동물에 가두는 주술을 하고, 사람이 연어가 되고, 바다와 사랑을 하고가해자와 피해자가 당시의 시공에서 만나게 하는 등 그의 동화같은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나의 칼이 되어줘>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 믿을 수 있도록 세상에 단 한 사람, 하나의 타인을 갈구하는 병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우는 것이 맞습니까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은 압축적으로 이 모두를 담아낸다부모의 이야기부터 자신의 유년에 대한 무자비한 조롱이 이끌어가는 목적지는 자신에게 '슬퍼하는 방법' 알려주지 않았던 인생의 첫 번째 장례식이다. 도발레가 살았던 공동체에는 슬픔에 대해서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 우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는 어른이 아이를 위로하고자 전해 준 이야기가 '유머'였고,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우는 시간을 포용할 수 없는 사람들, 슬픈 일을 슬퍼할 수 없게 버려두는 방치하는 사람들, 마땅한 감정을 사용하지 못하고 어른이 된 이가 있다. 전작<나의 칼이 되어줘>에서 사랑을 빙자해 폭력으로 사용한 타인의 갈구를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다듬었다. '나를 봐주면 좋겠어. 나를 봐주면, 정말로 봐주면, 그런 다음에 말해주면 좋겠어.'라고. 자신의 유년을 함께 보낸 친구, 아비샤이에게 부탁한다.  



'피해자'라는 가면: 연약하고 착해서 우는 사람들

도발레 G는 우리가 생각해 온 일반적인 '피해자'상을 뒤집는다. 연약하며 착해서 불쌍해지며 우는 사람들. 피해자는 도와야하는 사람들이라는 등식을 파괴한다. 사회에서 '피해자'는 보호하고 무엇보다 다룰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도발레 G는 그렇지 않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영혼을 갉아먹히는 느낌이 든다. 때문에 이런 명명이란 그저 또 다른 가해자의 탄생을 막기 위한 억압의 장치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야말로 악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까. 거의 악마가 된 도발레 G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매우 빠르게 도발레의 삶 자체가 '피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삶이 위험하며, 그가 있는 사회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해서 든다. 복구 불가능한 삶. 같은 인간이라고 놓을 수 없는 선을 발견하게 된다



한 번도 말해진 적이 없는 피해자의 증오

'나를 봐달라'는 그의 부탁은 동시에 독자들에게 건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검은 주머니를 뒤집어 쓰고 그는 아직도 희망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다. 증오가 다 말해지고 나면 끝내 나오게 될 희망 같은 것을.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언어를 말이다. 연민이나 사랑을 원하지 않고, 죄책감과 반성을 원하는 바 없이 역사가 기억할 수 없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으로 탄생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준다전쟁이 보여주는 끔찍한 결과는 바로 이런 인간의 탄생이라고.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피해자들의 파괴되 영혼 자체라고 말이다


도발레 G는 무대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몸을 몇 차례 보여준다. '수평으로 흉터가 있는 쑥 들어간 배, 좁은 가슴, 무시무시하게 두드러진 갈비뼈, 궤양 때문에 군데군데 쪼그라들고 반점이 있는 팽팽한 피부.' 이것은 홀로코스트로 죽어 간 이들의 몸이며, 동시에 그곳에서 살아남은 부모의 몸이다.  몸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생생한 목소리가 내리꽂는 무대의 기이함. 우리는 어둠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어둠이 된 인간에게서 오는 공포를 읽고 있다


몸과 목소리의 부조화는 결국 하나의 진실을 향한다. '그는 병이 들었다.' 아비샤이는 마침내 깨닫는다그러나 그렇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가 쇼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의 조건에 이렇게 눈을 감고, 이렇게 나 자신에게만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어떻게 나는 계속 내부로만, 나 자신의 삶으로만 고개를 돌렸던 것일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일이 옳은가에 대해서까지 묻는다



아직도 절규가 들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인간됨을 돌아볼 것

이를 말하기 위해 도발레 G는 병든 몸을 이끌고 자신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었다정신을 바짝 타들어게 할 언어도 몹시 익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도발레의 쇼에 사람들은 내내 웃는다. 술 한잔과 머리가 띵해질 이야기를 얻기 위해 앉은 자리에서 홀로코스트 이후의 삶을 엿보게 되었다


그러나 도발레는 검은 주머니에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서 쇼를 한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 밖의 인간이, 그러니까 다른 종류의 인간이, 이 검은 주머니 안쪽을 잡고 입구로 나가 뒤집어주기를 바랐다자신이 도저히 끌고 나올 수 없는 고통받는 영혼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마침내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나오기를 말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내가 겪지 않은 슬픔을 생각만으로 아파하게 되는 거라고. 내가 겪은 슬픔도 아니면서 점점 더 아파하게 되는 내 모습을 보는 거라고. 그런데 피해자들이 코미디 쇼에 가야지만 귀에 이 환난이 들리는 세계가 얼마나 잘못된 거냐고, ? 어떻게 웃지 않을수가 있느냐고 말이다. 이 소설을 덮고 돌아봐야 할 것은 당신의 주위이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의 인간됨을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인간적으로 안내한 순서이나 뒤집어 살피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읽기 굉장히 고통스러운 소설이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중에 대 다수가 아직 들을만 한 것은 당사자에게서 비롯된 언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울만한 이야기들은 아직도 이 이야기가 얼마나 피해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가늠하게 도와줄 뿐이다. 정말로 고통에서 비롯된 언어는 울 수도 없게 만든다.  

*이 소설에는 여성 혐오가 끝없이 나온다. 정확히 9쪽부터 나온다. (책은 7쪽부터 시작한다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언제나 여성으로 희화화되며 동성애, 병을 조롱하는 놀라운 표현이 끝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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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 진실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2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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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현실이 꿈이 될 때가 있다.



마주쳤던 상황 하나, 지나온 거리 몇 개, 아는 사람 몇 명만으로도 꿈은 이야기를 만든다. 그 속에서 나는 제법 마음대로 있을 것 같지만 오직 나만이 현실의 나를 벗어나지 않아서, 어렵게 마련된 꿈을 깨뜨린다. 이런 꿈이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꿈조차 현실적으로 깨지는 슬픔'이랄까. 작게 행복하려고 했던 꿈이 끝나고 나면 현실로 편입되어 더 큰 불행의 자리로 오는 상황에 마주한다.



정호만 돌아온다면

<꿈의 제인>에서 소현의 몇 개의 현실과 몇 개의 꿈을 반복해 보여준다.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사이 주변의 인물은 상황에 맞게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단, 소현만 변하지 않는다. 소현은 어떤 사람인가. '저를 받아주는 곳이 이곳 뿐이어서 왔어요.' 병욱의 팸에 들어온 이유를 지수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다. 관계 맺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비단 소현뿐만이 아닌데 그녀는 유독 두드러진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이는 모두 가출 청소년이다. 집을 나왔다는 것은 그곳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 그 속에서의 나를 견딜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또래들로 이뤄진 공동체에서도 사는 건 쉽지 않다. 팸의 대장을 아빠 혹은 엄마로 불러야 하거나, 말도 안되는 신고식을 치러야 하거나, 술과 담배의 날들, 바에가서 돈을 벌거나, 사회의 법칙에 부스러지는 아이들은 이 얄팍한 법칙에 살아남느라 비참하다. 이곳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어디에 가야할지 모른다... 하나의 세상을 택했다면 그 안에 소급되는 규칙도 하나. 이 안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이 안의 법칙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있다. 이중고를 치르고 중에 소현은 내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 정호가 떠난 탓이다. 생각한다.

정호만 돌아온다면.



자신과 똑같이 닮은 다른 사람 찾기

그러나 소현은 자신이 찾는 이가 정호가 아니라 소현 자신임을 모른다. 헤어짐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나쁨이 끼어들겠으나, 나의 질량과 부피를 다시 확인하고 채우거나 덜어내는 과정이 있다. 기꺼이 나의 자리를 소중한 이에게 내어주었다. 아니면 저기까지, 나의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아니었다. 내것이 아니므로 버려야 한다. 다시 나만의 어떤 것으로 채워가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관계가 서서히 닫히고 열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현은 거의 없어지고 희미해진 자신의 자리를 오로지 정호의 부재로만 생각한다. 얼마나 힘이들까. 소현은 자신과 똑같이 닮은 정호를 찾느라 힘들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을 찾습니다

그래서 소현이 갈구하는 공동체를 만나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소현은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의 질량이 거의 없다. 그곳에 들어갈 '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을 수도 없다. 완벽하게 죽어버리는 지수처럼, 소현은 죽어지지도 않는다. 그런 소현이 다른 사람을 찾을 때, 나와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을 찾을 때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영혼이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자 할 때, 영혼은 다른 영혼을 필요로 하며, 그 또 다른 영혼은 파레시아를 갖춰야만 합니다. 43


<파레시아>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솔직히 말하기', '진실 말하기', '진실의 용기', '발언의 자유'등으로 번역된다. (파레시아는 푸코의 후기 사유의 핵심이 되는 말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성찰을 위한 전략적 도구인데) 작게는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중요할 것 같았다. 소현을 넣어 위의 문장을 다시 쓸 수있다. '소현이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자 할 때, 소현의 영혼은 다른 영혼을 필요로 하며, 그 또 다른 영혼은 파레시아를 갖춰야만 한다.' 여기서 읽어야 할 것은 다음 구절까지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과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자, 그래서 파레시아를 가진 타인, 즉 파레시아스트를 필요로 하는 자는 파레시아스트를 찾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 역시 파레시아스트가 자기에게 말하게 될 진실을 받아들일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파레시아스트에게 보내야 합니다. 64


제인은 파레시아가 될 수 있을까
<꿈의 제인>은 소현이 자신의 파레시아스트(진실을 말하는 사람)를 찾는 여정이다. 동시에 진실을 들을 용기를 키워 '꿈의' 제인에게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시간이다. 제인은 몇 가지 중요한 진실을 소현에게 말해준다.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이야.' 그건 케익을 먹는 중에 일어났다. 인간은 케익 한 조각에도 시시해질 수 있으니까 언제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인간은 불행이 지속되는 중에 드문 드문 행복하다는 것. 이런 말을 하는 제인은 어떤 사람인가. 태어나면서 거짓말쟁이가 되어 자신을 부정당했던 이다. 내가 나의 진실을 말하려고 애써왔지만 세상은 들어주질 않는다. 제인의 파레시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로 무대에 서는 제인. 제인 역시 소현처럼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헤맸으나. 이제는 자신이 거둘 수 있는 더 약자인 이들에게 파레시아스트가 되어준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된다.

소현은 영화 내내 편지를 쓴다. 천장을 열어 편지를 놓는데, 너무 깊숙히 밀어놓으면 보이지 않을 것 같고, 바깥으로 너무 나오면 누구나 쉽게 볼까봐 적당히 삐져나오도록 편지의 자리를 고심한다. 그러나 받는 이가 없으므로 그 편지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알고 있을까. 그녀가 누군가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던 그 말들은 우선 자신에게 한 번씩 읽혔다는 것을.



밀쳐지는 살의 모양

영화 마지막에 정호와 소현이 함께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정호가 일하는 바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소현. 정호는 사이다 한 캔을 앞에 놓으며 소현에게 그만 가라고 말한다. 일 끝날 때까지 그냥 있을게. 정호는 소현을 밀어내고, 무기력하게 소현은 그곳에 있고 싶다. 소용없이 밀쳐지고 밖으로 나가게 되는 소현. 내가 이 영화에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한 장면은 이쯤이었다. 느리게, 소현이 밀쳐지는 뭉근한 모양의 살을 안다. 나는 이렇게 밀쳐지는 사람이었고, 이렇게 밀어낸 사람이었다. 내가 가장 잘 보이던 거울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그게 없어지고 나면 수만가지로 비치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보이는 거울을 마주해야 한다.



나는 (진실을 들을)용기가 있는가. (진실을 말해 줄)타인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전에, (진실을)말할 용기가 내게 역시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화는 그걸 암울하게도 창문 밖으로 보여준다. 그 자리가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저렇게 채워진 사슬 속에서 자유로 뚫린 구멍이 그 밖에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저것 뿐이라고 할때. 더 이상 시시해질 수 없는 몇몇은 창문 밖의 자리를 택했다.



그는 살아 있기 보다는 진실을 말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입니다. 106





+
한 번 더 봐야 이해할 수 있을텐데 아쉽다. 한 번 더 보기에는 마음의 쓰임이 큰 영화.

<담론과 진실>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인용 출처

미셸 푸코, <담론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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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의 개>는 흥미롭고 냉철하다. 개를 비롯한 앵무새, 혹은 거미, 나비, 혹은 나방을 인간이 마주할 때 나오는 감정에 대해 의문한다. 동물들의 의도가 우선이 아니라 인간의 느낀 '감정'에 동물들의 표정과 몸짓이 해석 되는 일을 다시 묻는다. 흔하게 묻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 예컨대 돼지는 먹을 수 있고 개는 먹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같은 것에 대해 말이다. 어떤 것은 비천하고 어떤 것은 귀중하게 되는지에 대해 파고든다. 글쓴이의 질문은 나의 생활과 아주 가까이 있어서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접어놓고 읽고 싶은 철학의 단면 외에도 직접 개를 키우며 생긴 일화들은 어떤 인간사만큼 복잡한 감정을 낳는다. 


집시(저자가 키우는 개)와 산책을 나가는 데, 젊고 강인한 이웃집 개 짓는 소리에 집시가 놀랐고, 자신도 은연중에 움찔했다는 거지. 그런데 집시가 자신을 이렇게 쳐다봤다는 거다. '당신도? 당신도 깜짝 놀란거야?' 달리 해석할 수 없이, 그 개의 얼굴이 그런 물음을 던지고 있더라는 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대답 없이 예정대로 다시 산책을 한다. 개와 주인은 다른 높낮이로 걸으면서 서로의 늙어감을 바라본다. 이런 것까지 들키게 될 줄 몰랐는데. 나에게도 숨기고 싶었던 안쪽을 한참 이쪽을 집시가 알아버렸다. 집시와 살면서 마주한 이런 장면에서부터 플라톤과 아렌트, 상당 분량의 문학을 가져오기도 한다. 편안하게 잡았다가 어라, 하는 생각으로 표지를 다시 살피게 된다.  


플라톤은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필요를 선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그것 없이는 삶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게 된 것을 가치의 원천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그것들, 즉 부, 사회적 지위, 출세 등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이처럼 필요를 선으로 오인하는 행위는 한 사람이 무엇을 절대적인 가치, 즉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보고 있는지를 실질적으로 드러내는데, 그가 정말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이 절대적 가치는 대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이 덮쳐올 때,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재설정한다. 108p


철학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들어온다. 이 밖에도 등산에 대한 생각이 흥미로웠다. 산을 올라가며 목숨을 잃기도 하는 일의 이해할 수 없음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글은 없는 것 같다. 산을 오를 때 장비를 거의 쓰지 않는 점에 대해서. 손쉬운 등반을 등반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의 윤리에 대해서. '산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 자체라는 시간에 직면해 어떤 덕목을 갖고 있음을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었다.'라는 말은 명쾌한 것을 넘어 아름답다. 


<철학자의 개>라는 제목에서 이런 내용을 만나게 되리라고 어떻게 생각이나 했을까?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러나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드러나 괴롭히는 대목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드러난다. 실은 21페이지부터 벌써 난리다. 


내 유년기는 순탄치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버지를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결국엔 다시 떠나버렸다. 아버지는 나를 깊이 사랑해주었고 나도 그 점을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좀처럼 살가운 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어서 나는 올로프에게서 따뜻함과 위안을 찾아야 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성격이 달랐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여성의 손길이 결핍된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서 남자 어른보다는 한 마리의 개가 더 뛰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혹시 유머라고 적어놓았는지? 혹시 가부장제의 아버지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무리 접어도, '여성', '손길', '결핍', '충족'등의 단어에서는 여성을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종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분 나쁜 대목이다. 칭찬이랍시고 남자 어른보다 개가 더 뛰어나다는 말을 붙여놓았는데, 인간이라면 자신의 자식에게 살가운 정을 드러내고 아껴야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특수한 종만이 아이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째서 '살가운 정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깊이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는지 의심스럽다. 사랑은 그 정을 드러낼 때에만 사랑이다. 


46년생의 저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인양 생각된다(저자의 이력을 살피고 '어쩔 수 없다'고 쓰는 이해라니, 다정도 병이다) 마지막 장에서 여과없이 드러나고야마는 이 문제는 암컷 고양이 세 마리가 하나만 남은 새끼 고양이를 지키기 위해 포악스러워졌다는 설명에서부터 "아이들에게 소홀한 어머니는 새끼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고양이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의 구절까지 총체적인 문제다. 양육을 여성의 일로 정해버리는 이 반쪽 밖에 남지 않은 시선. 그러나 그는 이 반쪽의 시선을 자신이 가진 최대의 값으로 가져간다. 냉철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제법 중용을 지키며 이 장을 빠져나오는 듯 하지만 아마 자신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반쯤 가려진 카메라가 무엇을 제대로 찍을 수 있겠나. 여성에 대한 철학없이 쓸 수 없는 것을 써 놓았다. 볼썽사나운 컷이다. 


추천한다면, 동물과 함께 살아낸 장면들 때문이다. 그럴듯한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놀라울 정도로 눈앞에서 그려낸다. 여기에 더해지는 철학자의 어깨.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또 그런 이들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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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취미처럼 인근 초중고 학생들이 이용하는 문구점에 들른다. 청소년들이 자주 사가는 물건을 구경할 수있다. 방탄이나 트와이스의 뱃지, 각종 스타들의 사진을 활용한 아이템까지. 다종한 요새의 문구를 본다. 나는 삼각자 세트라든가, 원고지 사이에서 내가 보지 못했던 물건들을 본다. 이 물건들은 아주 이상하게 어울려있고 그 속에서 나는 가끔 편지지를 사온다. 

그 중에 슬라임이라는 걸 찾았다. 실물이 궁금해서. 가보니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무슨 펄이 들어있는 것부터 진주알이 섞인 것까지. 원형의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있다. 십대들이 시험 끝나고 하고싶은걸 공유한 댓글에서 '슬라임 만들기'를 발견했는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슨 게임인 줄 알았다. 

설명하자면 예쁜 찰흙이다. 만지고 노는데 의미가 있는데 무언갈 만들자고 작정하는 물건은 아니다. 촉감과 소리를 즐기는 놀이를 한다. 초중고를 다니는 학생들과 이야기할 수있는 기회가 거의 없고,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서 단순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마음이. 박물관의 유물만큼이나 닿을 수 없는 세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심정을 확대하다보니 가끔은 '도티'님의 영상을 찾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보는 것일뿐. 끝까지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임으로 상황극을 하는데 이것부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직업도 생소하지만 더 생소한건 그걸 이루는 콘텐츠다. 그리고 이걸 재밌어하는 사람들의 마음.

세계인의 심정을 알기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종종 <사마의>라는 중드를 본다. 조조가 다른 이를 염탐해 사진처럼 그려온 죽간을 화롯불에 태우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뜨끔하면서 이것이 종이책의 미래 같은게 아닐까 했다. 잘 타더라. 하지만 그 죽간에 그려진 그림은 지금 내 핸드폰에도 들어 있다. 좋은 죽간을 갖고 있는 셈이지. 이 글도 핸드폰으로 쓰고있다. 추워서 피씨 앞으로 갈수가 없다.

좋은 콘텐츠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연결'이 중요하다고 설득하는 글은 꽤 믿음직스러웠다. 물론 좋은 콘텐츠가 대체로 성공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으니까. 제일 대표적인 예가 책 아닌가. 책만한 콘텐츠가 세상에 어디에 있다고. 논문은 또 어떻고. 하지만 책은 시대의 죽간같은게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상하게 너무 오래 살아왔다는 느낌도 들고. 그런 책을 들고 핸드폰을 보는 조화는 말할 수 없이 이질적이다. 

이와 대비를 이루는 유튜브의 영상이 있다다. 유튜브 구독자 1위~10순위를 살펴보면 이 콘텐츠들에서 가치, 기능, 효용 등을 알아내고 수치화 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영상의 가치는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 말은 인간 하나 하나가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연결을 하는건 사람의 몫이니까. 결국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야하는 일이니까. '최고'를 만드는 이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처럼도 들렸고.

그래서 유튜브의 세계는 신기하다. 진실로 잉여롭게 노는 것이 최고인 것 같으니. 가늠 할 수없는 기술의 발전이 노는 인간임을 잊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곳에 총동원한다. 

그날 슬라임이 무엇인지 몰라 검색하다가 아이유가 별일 없이 그걸 갖고 노는 영상을 봤다. 참 별것 없게도 위안을 줬었다. (심지어 아이유가 나오거나 아이유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는다. 그냥 아이유의 손과 슬라임만 나온다) 세상의 아이유도 이런 놀이를 하는구나, 라는. 평범한 인간의 동질성 같은게 느껴졌기 때문인가.

정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 기업이 여기 한정되고 정해져있는것 같지만 기회가 '있다'라는 말처럼도 들린다. 만나지 않지만 연결되어있고, 그 연결들이 바꾸는 셀러의 순위와 뉴스의 순위, 생활의 변화가 있다. 직업을 탄생시킨다. 10년 전에 누가 알았겠나! 유튜브크리에이터가 티비를 대체하게 될 줄. 티비 프로그램과 영화는 도티님같은 이들과 싸워야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탄생하고 있는 셀 수없이 많은 도티님들과. 

무지막지한 제목을 이고 있는 이 책은 아마도 기업의 임원들,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 창업한 이들만 위한 것처럼 생겼다. 심지어 추천사의 제목은 '구글러가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선물하는 책'이다. 이렇게 각 잡은 것과 달리 수다스럽고 재미있다. 이 책은 소설과도 경쟁할 수 있다. 그러니 위에 거론된 이들이 아니라, 당신이 생활인이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겠다. 이 책이 주는 인사이트에 당신은 어떤 영감을 낳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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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zygy 문학과지성 시인선 446
신해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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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 슨 이야기에 소리를 불어넣고

뜻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녹취록부분

 

 

 

 

기다림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제 '기다리는'

 

무능하게도 기다림은 기다리는 '행동'을 하는 ''만을 동그랗게 놓는다. 나의 기다림이 그 장소에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약속한다고 해서 기다림이 그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녀의 기다림이 할 일이다. 기다림은 마치 약속 모두를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 같지만, 이건 나의 기다림과 다른 이의 기다림을 같은 것으로 놓는 오류다. 그러므로 기다린다는 행위는 상대가 아니라 ''를 약속한다.

 

이 시집에서 화자는 기다리고 있다. 흔히 기다리는 '대상'을 기다림의 최후에 놓고 말하지만, 화자는 기다리는 '대상'에 대해 쓰지 않는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대상의 높고도 중요한 존재 때문이 아니라, 이 기다림이라는 사건에서 만날 나의 어떤 순간을 비로소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지도 모르고 기다리는 중에 탄생한 말들, 화자의 이지러짐을 따라가야 한다.

 

syzygy, 인간에게 없던 말을 인간의 세계로 가져오다

 

제목부터 보자. 'syzygy'라는 단어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있다. 해와 달과 지구가 일직선에 있는 순간이라는 뜻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상상할 수 있을까. 이들이 한 날 한 시 일직선상에 만나자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순간은 저마다의 지금을 오랫동안 움직여 이뤄낸 결과다. 그런데 해의 뒤에 달이, 달의 뒤에 놓인 지구를 따라가다보면 이 만남의 끝에는 지구에서 아주 작은 그림자로 하늘을 올려다 본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얼굴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그 얼굴은 달과 지구와 태양의 움직임을 알았을 이다. 그리고 그걸 알았기 때문에 외로웠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저지라는 때가 언젠가가 오리라는 것을 알았을 인간이기 때문이다. 'syzygy'를 탄생시킨 것은, 지구 밖의 움직임을 알리고 받아들이게 한 외로운 인간들이 만든 신화의 조각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syzygy'는 무엇일까. 오도커니 앉아서 테이블의 모서리를 만진다. 실물을 만지고 있는 사이, 테이블은 투명해지고 ''는 생각에 잠긴다. 실제의 자리가 생각의 모서리로 바뀌고 ''는 이 가까운 거리를 두고도 혼자있는 순간을 만들어 들어간다. '내가 만지작거린 건 생각의 모서리였을까./ 미물의 더듬이였을까.// 아니면 그저 이불 바깥으로 삐져나온 나의 발을/ 가만히 잡고 있었던 것일까.' 터치부분. 이렇게 ''가 다른 장소로 떠나는 건 그 장소가 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안이 이빨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입안이 이빨로 가득해서

나는 지금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구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면

배가 고파질 텐데.

우유가 마시고 싶어질 텐데.

 

뮤트부분

 

''가 기다리는 세계는 시저지와 같아서

 

<뮤트>는 시끄러운 소리를 죽일 때 나온다. 그렇다면 그 소리는 왜 시끄러울까. 주변의 소리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주변의 소리에 비해 시끄럽다는 말이지, 뮤트 된 소리 자체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고 할수 는 없다. 뮤트와 뮤트 아닌 음을 누가 어떻게 판단하는가. ''는 입안이 이빨로 가득할 만큼 독기가 어려있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독기는 이 장소에서 뱉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아주 이상한 분갈이를 보여준다. '영양사의 하얀 가운을 빌려 입고/ 하필 나는/ 뿌리가 살아 있는 머리카락을 화분에 심었다.// 거름도 주었다.'분갈이부분. ''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식물의 자리로 옮겨가고 싶다. 탁자의 모서리를 두드려 생각의 모서리로 이동한다. ''는 뮤트되지 않는 말과, 식물의 몸이 아니어도 되는 얼굴을 갖고 싶다. 화자는 그것을 기다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건 마치 시저지와도 같아서, 마치 지구의 바깥에 존재하는 곳인 것 같아서 고작 이만한 그림자를 안고 있는 ''의 힘으로는 가져올 수 없는 일 같다.

 

이곳을 만든 가장 오래된 신화를 부수고

 

그날의 도래를 화자는 어떻게 기다릴까. 우선 이곳을 만든 시간을 부순다. 제일 오래된 신화 하나를 망가트린다. 사악학 뱀이 이브와 아담을 부끄러움에 눈 뜨게 했다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쓴다. 뱀이 말한다. '아담의 갈비뼈를 모두 부러뜨려 종이봉투에 담'는다. 뱀은 '기합을 불어넣고', '심호흡'을 한다. '태권도 같은 것'을 한다. '-나라면 오래오래 기다릴 수 있었을 거야.' 뱀이 말한다. 뱀이 기다릴 수 있다고 한 건 무엇이었을까. 갈비뼈가 모두 부러진 아담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담이 없는 세상에 이브는 어떻게 있었을까. 이브로 말미암아 아담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이 시의 제목은 로맨스이다.

 

''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

 

그러나 시저지의 전말은 무엇보다 이 시에 있다. '기다림'을 설명하기에 이만한 문장은 없을 것이다. '마음이 탄다. 그러나 나의 맥박이/ 너의 심장에 맞춰 빨라질 수는 없다.// 면목이 없다. 그러나 너의 얼굴 위에/나의 이목구비를 그려 넣을 수는 없다.//우리는 성분이 다르니까//멋대로 바꿔치기를 할 수 없으니까//' exchange부분. 기다림 끝에 우리가 만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보다 더 나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에게 네가 가려지고, 동시에 내가 너에게 가려지는 부분의 어둠을, 이제껏 보지 못한 색의 깊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모르는 것 같다. 이 곳의 역사는 이 말의 뜻을 모른다. 다음 시에서는 이 역사를 아는 화자가 대답한다. '알아? 나는 여자인간이니까/ 생리를 한다.// 그렇지만 손에는/ 다른 종/다른 류의 피가 묻어 있기도 한다.' 여자인간부분. ''는 기다린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다시 쓰고, 생리를 하는 여자인간에 대해서 쓰고, 이 공기에 제대로 있을 수 없는 인간을 그리면서, 태양과, 달과, 지구가 한 선에 서 있는 날을 기다린다. 태양에 달이 귀속되지 않고, 태양에 지구가 매달리지 않고, 태양은 이들을 거느리지 않고, 셋은 이 지구에서 저마다의 질량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무엇으로 바꿔지거나 속해질 수 없는 '하나'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린다.

 

마지막으로 이 시집을 덮기 위해서는 개의 자리를 지나가야 한다.

 

검은 개가 똥을 먹었다.

 

검은 개의 혓바닥이 나의 영혼을 핥았다.

 

검은 개의 눈이 나를 피했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어서

 

나는 슬프고 더러웠다.

 

추문이 깊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비밀을

개와 나눌 수는 없었다.

 

개의 자리전문

 

 

눈을 가리고 만든 물건들 속에는

내 손이 섞여 있을거야

 

개의 눈을 생각한다. 존재의 다름으로 생겨나는 수치를 내가 가진 힘으로, 그래서 '억압'의 도구로 두지 않는 것이 '''개의 자리'를 지켜줄 수 있는 작은 방법임을 슬프게 고백한다. 개가 될수는 없다. 오해하지 말기를. 당신에게 개가 되라는 말은 아니었다. 개의 눈을 슬프게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 시에서 다 나가기 위해 다른 시를 불러 온다. '그러니 내 옆의 의자에 앉아/ 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으면 좋겠다.// 밤을 새워주었으면 좋겠다.// 눈을 가리고 만든 물건들 속에는// 내 손이 섞여 있을거야.// 눈을 가리고 그린 그림 속에서/ 나는 너를 더듬고 있을 거야. ' 이렇게 앉은 자세부분.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위해서 ''는 너무 많은 일을 했다. '베껴 슨 이야기에 소리를 불어넣고/ 뜻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녹취록부분. 남은 일은 이제 이것 뿐인 것 같다. 기다림의 자리에 수많은 ''가 남아서 만드는 날들을 '기다린다'. 시저지를 발견했던 사람의 얼굴을 내가 만날 수는 없지만, 그 얼굴이 되어볼 수는 있을테다. 또 하나의 'syzygy'가 탄생하게 되면 서로 이름 몰랐던 얼굴들이 자신으로 모여 ''를 이야기 하게 된다. 어떤 말도 뮤트되지 않는 진짜 '소리'를 들을 것이다. 내가 아직 지구에서 작게 서 있다. 다행스럽게도, 기다림은 기다리는 '행동'을 하는 ''만은 동그랗게 그곳에 분명히 놓을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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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1-1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밤 님의 시 읽기를 늘상 기대하는 1인입니다.

syo 2017-11-12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