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남성, 남성성, 그리고 사랑
벨 훅스 지음, 이순영 옮김, 김고연주 / 책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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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아이들과 여성들-그리고 남자아이들도-모두 공통적으로 이 비밀을 지니고 있다. 

아무도 남자들에 관한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111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몸에는 생물학적으로 섹스에 대한 갈망이 내장되어 있다고 믿지만 

사랑에 대한 갈망이 내장되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141




어떤 책은 경험의 밑바닥을 들어올린다. 썪고 부유해서 형체가 온전하지 못한 부분을 이렇게 들어 올려 보인다.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을 읽으면서 그랬다. 내가 느꼈던 무력함과 이해할 수 없던 부분들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감정을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볼 수 있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나는 마땅히 분노해야 할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갖게 되었다.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무엇을 더 할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더 큰 분노와 더 큰 화를 낼 수 있게 되었지만 힘이 들었다. 내가 아는 이들을 '미워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앞이 '막혔다'는 느낌이었다. 그 후에 남는 것은 허탈함과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는 기쁘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kai_rev님 트위터 캡쳐.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라면서 가장 많이 배우는 것 하나는 가부장제 시스템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단어를 전혀 모른다 해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가부장적 성역할을 떠맡으며 이를 가장 잘 수행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끊임없이 지도받기 때문이다. 52

 

 

'어릴 때부터 가부장적 성역할을 떠맡으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위 트윗은 '라면'이라는 한 요리가 가족의 구성원 중 어떤 이를 통해 나오느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읽히는지 잘 보여준다. (중요: 라면이라는 요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르게 읽히는 정도가 바로 성역할을 의미한다. 최근에 추석도 있었으니 긴 말없이 자신의 추석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드러나 있는 나의 성에 따라 '앉는 자리''하는 일'이 달라진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인간을 같은 범주에 놓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풍경이다. 추석 풍경이나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누가 앉아서 술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가, 누가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원래' 그것을 더 잘하는 사람은 없다. 누가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놓는가 만 있을 뿐이다. 위계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어떤 성이 다른 성을 억압하는지도 사족처럼 따라 읽힌다.

 

벨 훅스는 '가부장제'는 정신질환의 하나라며 강력한 훅을 날리는데 이보다 정확한 말은 없어 보인다. 이 단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가부장제'를 이해할 만한 열쇠가 없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어떤 종교보다 강한 믿음으로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 역시 그렇다. 내가 찾지 못했던, 그러나 찾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이 나가야 할 길은 바로 이 가부장제를 알고, 이 아래서 억압받는 남성과 여성이 바로 '우리'임을 알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가부장제 아래 체화된 이들을 공격하고, 잘못되었다고 분리하고 격리하는 건 우리가 건강해지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성들 대부분은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을 친한 친구에게든 치료사에게든 혹은 비행기나 버스에서 옆에 앉은 낯선 이에게든 말할 수 있다. 남성들은 가부장적 관습에 따라 일종의 감정적 금욕을 배운다. 이 가부장적 관습에서는, 아무 느낌도 갖지 않는다면 더 남자다운 것이겠지만 혹여 무엇을 느끼고 그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해도 그 느낌을 틀어막고 그 느낌을 잊고 그 느낌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남자다운 태도라고 가르친다. 30

 

누가, 그렇게 가르치냐고 물을 수 있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이끈다. '남자답게'라는 말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점을 포함한다. 아버지의 분노와 체벌로 크지 않은 이들이라도 창피를 주거나 눈치를 주는 식으로 성역할에 맞는 행동을 하며 자라왔다.

 

조지 와인버그는 <왜 남자들은 자신을 던지려 하지 않는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미 완벽한 상태에 있는 여성을 찾는데,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기본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 문제에 대해 말하기보다 빗장을 지르는 편이 더 쉬워보인다" 남자다운 척한다는 것이 말하는 바는 진짜 남자라면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33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이 표현해도 된다고 인정해주는 딱 한 가지 감정이 있다. 바로 분노라는 감정이다. ...어떤 사람이 고통이나 영혼의 괴로움을 감추려 할 때, 분노는 그것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34

 

나는 '아버지'라는 대명사가 슬픔 대신에 분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만큼 슬픈 사람도 없게 된다. 하지만 슬픔은 울거나 무너지는 슬픔의 방법으로만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의 감정으로 순화될 수 있다. 분노는 진짜 감정을 멀어지게 하고 주위의 공분과 두려움만을 살 뿐이다. 슬픔이 약함이라는 증거인 양 받아들인다. 그리고 또 약하다면 왜 안되는지 대답하지 못하면서 슬픔을 가린다. 어떤 문제에 정답과 오답은 있으면서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정답과 오답을 내릴 수 없었다. 감정에 대해서 왜 배울 수 없었는지, 배우려고 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가진 감정은 거의 ''. 그게 아니고서는 나일 수 없다. 내가 느끼는 것, 감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 이것은 '언어'를 배우고 어떤 ''을 배우는 것만큼 소중하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야 하며 강한 남자들은 자신보다 약한 남자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배운다.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남성들은 가부장적 사고와 실천을 순순히 따를 때 자신들이 받게 되는 주요 보상들 중 하나가 성적으로 여성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라고 일찌감치 배운다. 그리고 여성이 주위에 없다면, 그들은 자신보다 약한 남성을 '여성'의 자리에 놓을 권리를 갖는다. 143

 

성교를 뜻하는 남성 중심의 속어인 'fuck'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성을 fuck한다는 것은 그녀와 섹스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상황에서 누군가 fuck하는 것은 (...)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를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대개 폭력에 대한 암시이거나 폭력을 가하겠다는 위협이다. 사람들은 섹스와 폭력을 여전히 같은 단어로 사용한다. 섹스가 폭력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생각과 섹스가 명백히 폭력적이라면 강간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가부장제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153

 

남성은 섹스를 하면서 사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감정적 만족을 얻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섹스를 통해 살아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얻을거라고, 가깝고 친밀하다는 느낌과 기쁨을 얻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섹스는 그런 좋은 것들을 주지 않는다.

 

성에 관한 이야기는 내 이야기를 덧대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완벽하게 이 책을 읽을 이들을 격려하고 이해할 수없었던 것들을 설명하는데, 벨 훅스의 글은 어떤 심리학, 의학서보다 남성을 더 잘 설명하는 것 같다.

 

 

비어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비롯한 모든 남성들의 미래 모습은 우리가 부정하도록 훈련받아온 인간성의 모든 부분을 되찾는 것이다. 섹스에 대한 집착이 치유될 수 있으려면, 굳이 없어도 어떻게든 지낼 수 있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인간 경험의 본질적인 면을 되찾아야 한다. 서로에 대한 친밀감, 나이와 배경과 성을 막론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그들에게 연결되는 것,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즐거움, 열정적인 자기표현, 마음을 들뜨게 하는 갈망, 자신과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다정한 사랑, 나약함, 어려울 때 받는 도움, 편안한 휴식, 많은 사람들과 많은 종류의 관계를 맺고 가까이 지내는 것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303

 

이건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페미니스트 아동문학이나 페미니즘에 대해서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감정의 본질적인 모습을 알 수있는 것, 비어만이 한 말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능하다면 이들이 어른이 된 시점에서는 굉장히 많은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돼 있을 것이다. 나와 나의 세대가 7살 때 이것을 알았더라면, 13살에, 17살에 그리고 21살 때 알았더라면. 내 삶은, 내가 사는 사회는 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표현했을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배우고, 소통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을 '희망'을 갖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마음이 아파서 읽은 기록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했다. 내가 읽어본 최고의 치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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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단어들이 층층으로 들어가 있는 이 주소는 무슨 연도나 기도문 같은 느낌을 주지 않소?

 

[프라하, 1920년 8월 31]

화요일

 

프란츠 카프카, <밀레나에게 쓴 편지>

 

 




비둘기의 집을 본 적 없다비둘기가 자는 일도 본 적 없다그러나 비둘기는 출퇴근길을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었으며보도블럭이 끝나고 다리가 시작되는 곡률을 함께 돌아서 또 걸었으며내 발목치에서 머리와 발을 분주히 놀리는 그들을 지난 적은 많다내가 기억하는 바비둘기는 걷는 존재였다나 역시 비둘기에게 그럴 것이다비둘기가 나의 잠을 모르듯 나 또한 그들의 잠을 알지 못했다저 많은 비둘기들은 어디서 잠을 자나.

 

신호가 제법 길었다평소처럼 다니는 길이었으나 그날은 유독 횡단보도 건너편을 꽤 오래 바라보았다별 관심없던 낡은, 4층짜리 건물이다. 1층에야 작은 가게들이 제법 활기를 띄며 있지마는 역 출구에 가까운 2층을 제외하고는 조용한 3층 사무실로, 4층의 중국 식료품점으로 사용되는 건물이었다가로등이 죽죽 건물 앞을 무슨 문양처럼 긋고 있었고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빛이 조금씩 접히고 있다오래된 건물은 간판에서 엿볼 수 있다가로의 문늬로 빛나는 네온은 연식이 있다그 빛나는 간판 아래는 바깥으로 돌출된 구옥의 창문이다그때 눈에 띈 것은 뭐였을까이제까지 보지 못했던그러나 틀림없이 간판 위를 걸어다니는 동그란 것들비둘기였다십수마리의 비둘기가 간판의 어깨를 밟으며 종종거렸다바깥으로 내 천장이 있는 창문에서 비둘기는 둥글게 앉아있었다그것이비둘이의 집이었다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비둘기의 잠도시의 비둘기는 후미진 건물의 모퉁이에서 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마다 새소리가 들렸다내가 사는 집 역시 구옥으로베란다를 닮은 창문이 바깥을 향해 있고 안쪽으로 얼마간의 공간을 확보한다. 새소리라 함은, 혹시 청량한 아침을 생각하는지. 아니라 한 번 가다듬기 시작하면 구우-구우-구우 하는 것을 15회에서 20회까지 지속하는 굉장히 퉁명스러운 소리였다한 번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30초 이상 지속되고그 구우-구우-구우하는 소리는 사람으로 치자면 불만스러우며 불편하고누가 뭐라고 중간에 제지해도 그만둘 생각이 없는 톤이었다그것은 습관으로 만들어졌다오래도록 그 소리에만 단련된 성대였다그게 뭐라고 성대라는 말에서 잠깐 슬퍼졌고아니 습관이라는 말에서도 잠시 그랬고방충망에 걸린 십수개의 깃털을 바라보았다아침 저녁 비둘기와 같이 걸었던 나는 어느덧 한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후미진 건물의 모퉁이.

 

불평하려고 적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비둘기의 구구스러움과 이 책의 주절거림이 대체로 닮았다이 책은 갈증이 난다짜증을 완곡히 표현하려고 했는데 틀켰나그런 목소리로 단련된 문장이다습관으로 만들어진 톤카프카는 밀레나에게 편지를 엄청나게 보냈다거의 매일, 거의 똑같은 도입부오늘은 편지가 안왔소무슨 일이오편지를 제 때 보내주시오..제에발...혹은 편지가 잘 도착했소. 그리고는 이 두꺼운 편지집에서 오십 몇장에 하나씩 접어둘만한 문장이 나온다이따금씩 나오는 저런 문장을 보며 내가 책을 읽는구나한다비둘기의 이 구구구 소리는 짝을 찾기 위해 내는 거라고 한다그렇다면 더욱 닮았다. 구구하는 비둘기 소리가 퉁명스러운 소리인 건 그 소리만 연습한 성대가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 역시 자신만의 구구절절을 이렇게 많이 썼다. 그런 근육을 키우는 가운데, 잘 단련된 울대에서 이따금씩 적어둘 만한 말이 나온다. 주소를 보고 연도나 기도문을 생각한다니. 이 단순하고 천진한 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일인가. 이걸 받아본 이는 역시, 하고 빙긋 웃었겠지. 도시의 비둘기는 어디에서 자나. 비둘기는 우리집 창문 구석에 와 잔다. 산다. 퉁명스럽게 우는 비둘기. 날개와 다리와 눈은 비둘기를 이루는, 다른 습성으로 맺음했다. 그리고 부리는 비둘기의 그런 소리를 내도록 셀 수 없는 시간동안 내어졌다. 비둘기 소리의 문법. 내 손가락은 쉼표와 마침표를 어떻게 맺나. 나는 얼마나 한 자리에 앉아서 타자를 두드리나. 이제 그걸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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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과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쉽지만 죽어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랬더라면에 붙들리는 나약함은 수많은 만약들을 현재에도, 미래에도 가져와 흘려보내고, 무너지기 좋은 이유가 된다. 그건 흡사, 아파해야 하는 것을 아파하는 사람으로 보이게도 한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과거에 돌아가 현재를 바꾸는 이야기들이 불가능한 염원을 보여주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지나간 것을 후회하거나 자책하는 것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의 최선인 모습인걸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바꾸자는 이야기는 영화에서나 가능하다는 아이러니에 <언노운 걸>은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말이다. , 내가 했던 후회의 지점을 비껴가지 않고, 고통스럽게 통과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그런다고 과거가 바뀔까?' 갸우뚱한 얼굴은 어쩌면 당연하다. 적당히 죄책감에 멀어져 지난 일로 버리고 그때와 다른 사람으로 살거나, 과거에 걸려 미끄러지는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영화는 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제니는 진료마감 1시간 지나서 울린 벨소리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문을 두드린 소녀는 다음 날 죽어서 발견된다. 소녀가 죽지 않을 수 있던 수 많은 가지 수 중에 하나가 제니였으나, 제니가 소녀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제니는 자신이 미쳐 도와주지 못했던 그 한가지만 나눠갖고 조용히 아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그 병원에는 불빛이 있었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 건물에 깃든 불빛은 사람의 기척이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아닌지 제니는 몰랐지만, 그것을 알기도 전에 상황 자체를 저버린 데서 오는 죄책감이 제니의 삶을 흔든다. 제니는 커리어를 인정받아 곧 큰 병원으로의 이직을 앞두고 있었다.

 

제니는 소녀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소녀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A가 아니라고 B를 비껴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닌데, 흔히 혼동한다. 두 가지는 다른 무게로 사람의 윤리를 묻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제니가 소녀를 위해 묘지를 사도 끝나지 않는다. 소녀의 이름을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죽음은 가족에게 알릴 수도 제대로 애도할 수도 없다. CCTV에 잡힌 얼굴이 있고, 문을 두드렸던 손과 목소리가 있었는데 소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니. 그녀는 이직하지 않고 병원이자 사건의 현장중 하나인 그곳에 남아 소녀의 이름을 추적해간다. 제니가 불타는 정의감이 있어서, 이름 모를 소녀의 죽음에 분노해 그 죄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소녀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고, 이 미완의 양식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았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다. 그저, 소녀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 이것이 제니가 가져가려고 한, 자신이 마주한 책임이었다.

 

제니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도 과거로 돌아가 진료마감 1시간이 지난 벨소리에 문을 열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은 소녀의 '이름'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지금과 미래에 둘 수는 있다. 그리고 제니는 소녀의 이름을 간절히 찾는다. 간절하다는 뜻은 마음 속에서만 애가 타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침식당하며 소녀의 구명을 위해 사는 일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소녀의 사진을 핸드폰에 갖고 다니며, 이 병원에 들리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보여주고 물어본다. 소녀의 일화를 들려준다. 소녀의 고향이 외지임을 염두해 외국으로 전화할 수 있는 센터에도 찾아가 물어본다. 제니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소녀를 '물어본다'.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은 물음은 죽은 소녀가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이렇게 제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목격자도 없고, 가해자도 알 수도 없고, 신원도 알 수 없는 미상의 죽음은 이 간단한 '물음'을 통해 조금씩 밝혀진다.

 

제니가 의사라서, 똑똑해서 수사를 한다거나 추리를 했던 것은 아니다. 제니의 '물음'은 그 소녀를 멀리서, 가까이서 알았던 이들에게 우연히 가닿아 그들의 양심을 묻는다. 그녀는 소녀의 이름을 물어가는 행동을 통해 과연, 한 명의 유일무이한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마침내 소녀를 죽게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죄책감에 덜덜거리며 조아리는 얼굴이지만, 제니는 죄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당신의 잘못은 내가 분노하고 내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니의 다문 입이 말한다. 자신의 죄에 우는 고통을 역시 인간의 것이다. 무엇이 인간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인가. 자살을 시도한 이를 구하며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죄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스스로 이야기 할 것'을 말한다.

 

지금 여기 살아 있다면, 살아있는 만큼의 아픈 몫을 가져가라는 것. '제니'는 한 사람이 가져야 할, (다른 이가 보기에 너무나 큰)죄책감과 책임을 묵묵히 가져가며, 다른이의 몫이 무엇인지도 알려준다. 양심과 죄책감의 질량은 정량으로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혼자만 알고 숨죽여 우는 일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소녀가 죽은 이유가 아니라, 죽은 소녀를 알려고 했던 제니의 태도는 소녀의 죽음에 연결되어 있던 몇 사람의 태도를 바꿨다. 그날, 제니가 문을 열어주었다면 어린 한 사람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소녀의 죽음에 걸린 제니의 죄책감은 몇 사람을 비로소 '살게'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던 소녀가 실은 제니가 물어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소녀가 하는 일을 알았고, 어떤 이는 얼굴을, 어떤 이는 이름을 알았지만 자신이 소녀를 '인간적인 관계'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녀의 죽음에 침묵했다. 그 때문에 소녀는 이름없이 임시 매장되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관계'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이 아주 좁고 뜻깊은 관계에서만 이뤄지는 것 같지만,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되어 각자의 일을 하는 타인들과의 관계가 더해져 진행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당신은 어떤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높은 확률로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신이 아니라, 그때 당신 주위에 있는 '어떤' 사람이다. 제니가 소녀의 이름을 드디어 알게 되었을 때, 제니는 자신이 계속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닿고 영화의 마지막, 제니의 소녀의 이름 찾는 일과 자신이 환자 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두 가지 모두 삶에 필요한 자세며, 어느 한 쪽을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담담히 보여준다.

 

소녀의 이름을 물어본 오늘은 제니가 가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마땅히 갖고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있는 믿음이 나에게, 그리고 지금 이곳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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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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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몸'에서부터 시작하고

나는 저만치 '목소리'로 물러나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으로 '내'이야기의 입을 뗀다. 아버지 얘기는 '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건 몸이 그를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다리를 절었단다' 그는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 유공자가 된다. 유공자란, 국가가 몸을 뺏아간 대신 주는 증표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는 뭔가 불리한 일이 있을 때, (그건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유공자증을 내밀며 선처를 요구하거나, 혹은 존경을 요구하거나, 그래서 자신의 일을 '정당'한 것으로 혹은 모른척 넘어가 주길 바라는 사람이 된다. 아버지가 그런것을 극복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실패한 인간이 될 확률은 적었겠지만, 그걸 차치하고 나더라도 '내'가 선택한 노선은 암담하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굴절한다. '나'는 아버지의 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젊은 날 몸을 빼앗겨버린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아버지가 중년이 되어 보이는 어정쩡한 우격다짐만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몸'에 대한, 사람이 갖는 형체에 대한 이해가 생략되어 있다. 사람을 이토록 비굴하게 만드는, 이토록 약한 '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몸에 빚어진 상처를, 뚝뚝 떨어지는 유일무이한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다.


너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네가 듣지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이야기로


그런 '나'는 이야기를 매우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나 '진짜'에 대한 곡진한 이해 없이 머릿속으로만 시뮬레이션 하는 문답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그럴싸하게 넘어간다. 거의 재주다. 얼핏보면 문장에는 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 깊은 곳에 있는 내면, 개인적인 굴곡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략과 생략이 만난 궤변을 만들고, 그 궤변을 기반으로 다시 논리를 얹어 뻗어가는 이야기는 갈 수 없을때까지 가버린다.


'몸'은 사람이 갖는 첫 번째 '것'이다. 이 몸에 대한 '상처'의 반대편에는 어떻게 해도 상처받을 수 없는 '독백'이 있다. 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돌아오는 말도 없는 메아리. 때문에 '나'는 단편 소설분량만큼 내 이야기를, 나의 어쩔 수 없었음을 떠들어대지만, 그가 받을 피드백은 아무것도 없다. 이 소설에서 '나'는 오직 목소리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설명은 이렇게 피상적이다. '당시의 나는 젊고 의욕적인 교사였지만 노련하지 못했단다' 당신은 혹시 이런 사람을 아는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은 거의 '모든' 젊은 교사의 모습아닌가. 자신을 집단의 평균치에 앉혀 '안정'혹은 '인정'을 획득하고야 마는 장면이 지루할 정도로 이어진다.


사랑. 섹스 아니라 사랑


이렇게 목소리 뿐인 '내'가 할 수 있는게 뭐였겠니. 부른 배를 하고 교무실에 나타난 연주가 무릎을 꿇으며 '사랑'했다고 비는, 그녀 몸을 통째로 들고와서 바치는 전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속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되뇌이는 것 뿐이다. 하. 나의 사랑으로 연주의 배가 부르고, 부른 배 앞에서 나는 '존나 무서웠다' 이것이 '몸'없이 객체화된 인간이 오늘날 하고 다니는 사랑의 풍경이다. '내'가 믿는대로의 '내'가 사람들의 '평균'처럼 되는 것. 생각속에서 진정성을 얻는 것. 만질 수 없는 곳에서 말로서 안전해 지는 것. 그런 '내'가 진짜로 할 수 있는게 뭐였을까? 고귀해서 사랑이라는 말만으로 배가 불러오는 사랑? '나'는 사랑으로 섹스를 지우더니 '책임'까지 지워버린다. 


'뻣뻣해진 발목이 욱신댔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이것은 그런 내가 '너'의 집에 앞에가서 오랫동안 서 있으면서 겨우 얻게 된 '고통'이다. '나'는 거의 첫 번째로 내 몸이 겪는 고통에 대해 서술한다. 발목이 욱신거린다거나 무릎이 시큰거린다는 역시 보편적인 고통이지만, 내게도 있는 고유한 '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보통의 보통이 목소리를 꿰하며 안전한 곳에 있던 내가 드디어 나 하나의 고통으로만 이야기 될 수 있는 몸에 대해 쓰게 된 것이다. 고통의 연대는 그런 고유한 개인의 이야기의 고백과 대답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해없이 피상적으로 몰려다니는 무리를 수도 없이 본다. 웹상에서의 우리의 얼굴이 아닌가.


서사를 생략하고 이해를 궤변으로 수렴하는 중에 쌓아 올리는 논리는 어디서부터 부숴야 할까. 몸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말들이 너무나 많다. '○녀', '충'등의 말들. 세상에 없던 신종 인류를 만들고 코너로 몰아가는 이들의 얼굴은 무엇인가. 그들의 몸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 '두고두고' 건네지 못하는 말은 이 소설의 '내'가 하지 못하는 사과처럼 숨겨져 있는데, 진짜를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은 되려 분노가 된다. (이 맥락마저도 이해하는 이가 바로 약자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되버리는 끝간데. 이 소설이 비추는 것은 무엇일까.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파'하는' 것이다. 발목이 욱신댔고 무릎이 시큰거리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한 개인의 '몸'이 작동하지 않은체 저 사람의 밑바닥을 가보는 용기 없이, 내가 닥친 상황만 크게 떠들어 대는 통에 '목소리'가 몸보다 두 배, 세 배로 살아 있는 방식을 입만 살아서, 비죽이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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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처럼, 우리는 1+1이 무엇인지 안다고 대답하지만, 안다는 지점을 좀 더 넓혀 1+1이 그 대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염두하지 않는다. 우리는 1+1의 값이 2와 같다고 말하지만, 이건 1+1과 2도 과연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안다는 것은, '바라보는 이들'의 기호이며 약속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1+1과 2같은 것 대신 유영과 주혁을 보내 '안다'는 것을 얇게 쪼갠다.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 일방적인 발화라는 점을 부디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이야기 한다. 

 

아는 것에 익숙하며 그것을 말하는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 여러명 나와 유영을 안다며 말을 건다. 그들에겐 유영이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는 상관없다. 왜냐면 내가 당신을 아주 잘 알고, 당신은 이렇게 예쁘고, 그때 나와 술을 재밌게 마셨고, 지금도 그렇게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자들은 유영과 아주 가까운 자리를 선점하려고 하지만, 유영은 자신을 안다고 하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더 나아가 그가 안다고 말하는 그 여자가 아니다. 유영은 그가 아는 자신으로부터 분리된다. 남자들이 무엇보다 크게 당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되기'의 유영의 전략은 효과적이다. 


그러나 당신을 잘 안다는 사람이 이렇게 오랜만에, 그것도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만남이 건강한 관계일까를 생각해 본다면, 유영이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보내는 시간에 불쑥 들어와 수 년전의 자신을 호명하며 리듬을 깨는 일의 무례함을 생각할 수 있다. 유영을 알은채 하는 남자들은 유영을 만나서 너무 다행스럽지만 유영에게는 하나도 다행스럽지 않다. 무례하게 들어오는 자들에게는 무안을. 이런 유영과 대화가 가능할 때는, 바로 상대가 나를 모르는 사람으로 둘 때 뿐이다. 해서 남자는 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믿는 것으로 미루고, 그마져도 이내 '똑같은' 사람이지만 아주 '닮은' 다른 사람으로 밀어내고야 만다. 


여기에 나오는 남자들은 모두 유영을 잘안다 생각한다. 잘 알기 때문에 유영이 조용히 책을 보는 테이블, 건너편에 허락도 없이 거침없이 앉아서는 말을 걸고 수년 전 출판사에서 다 함께 회식을 한 번한 것을 인생의 기억인것처럼 알은채 하며 인사를 해 온다. 이 뿐인가, 자신이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유영에게 왜 술을 먹고 다니냐며 화를 내고, 급기야 욕을 하고, 사과를(?) 받아내려 한다. 마지막은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이다. 이런 레파토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횡횡했다. 이에 가느다랗고 유약해 보이는 여자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말을 하는데. '저를 아세요?' 이건 다시 말해 당신들이 말하는 그게 사랑이라면, 나는 내가 아니어서 너를 모르겠고 말겠다는 선언이다. 이제까지 없던 '언어', 이것은 남자들이 '알아왔던' 여자의 말이 아니다. 유영은 다르다. 유영은 얼마든지 자신을 버리고도 나를 세울 수 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은유가 아름답고 상냥한, 아주 교훈적인 영화다. 이 교훈은 아주 값지지만, 내가 알고 있는 너를 버릴 수 있을 때 만 비로소 보인다. '사랑'이 그걸 가능하게 하지만 그건 거의 기적같은 일. 우리가 흔하게 착각하는 것은 '사랑'자체가 기적같다는 소문이다. 사랑은 정말 아름다워, 소중해, 이렇게 하늘만한 크기의 언어로 빚어내는 사랑은 결국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홍상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해 구질구질해 보이지만, 구절구절 잘 설명하고 있다. 사랑이란, 어제도 봤고, 엊그제도 봤고, 그렇게 몇년을 함께 해온 사람을 매일 새롭게 '알아가야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늘 겸손하게 두는 일이다. 이것은 사랑에 결코 익숙해 지지 않는 일이다. 너의 다정이 당연하지 않으며, 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일은 죽는 날까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없던 언어로 되받아오는 '여자'에 깜짝 놀라는 남자들과, 그 여자를 모르는 사람으로 받아들여 다시 알아가고자 존댓말을 쓰는 남자가 있다. 영화는 뜬구름 잡는 사랑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비록 술취한 김주혁의 구부러진 발음이지만. 곡진하고, 잘 이해된다.  


유영이 술자리에서 나와 낮은 담벼락 아래서 우는 장면이 있다. 유영이 구부러져서 울때, 영화 내내 유영을 찾아 헤맨 주혁이 드디어 유영을 만난다. 유영이 술을 먹을 때 기억을 잃는지, 잃어버린 척 하는지, 자신도 안다는 것을 모른다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유영은 그저 자신보다 더 자신을 알은채하며 떠드는 이들에게 '당신이 안다고 말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영이 우는 것은 중요하다. 술먹고 우는 일은 자신도 알기 어렵고 우는 일이 몸에 다녀가는 일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가지의 이유가 한데 모여 울음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는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없다. 언어가 불가능한 사태에 처하게 된 것이다. 주혁은 유영에게 왜 우냐고 묻지만 대답을 얻을 수 없다. 사실 그건 이유를 알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주혁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그저 둔다. 우는 일은 우는 일. 당신이 우는 일에 내가 있어 다행인 것이 그 장면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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