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개>는 흥미롭고 냉철하다. 개를 비롯한 앵무새, 혹은 거미, 나비, 혹은 나방을 인간이 마주할 때 나오는 감정에 대해 의문한다. 동물들의 의도가 우선이 아니라 인간의 느낀 '감정'에 동물들의 표정과 몸짓이 해석 되는 일을 다시 묻는다. 흔하게 묻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 예컨대 돼지는 먹을 수 있고 개는 먹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같은 것에 대해 말이다. 어떤 것은 비천하고 어떤 것은 귀중하게 되는지에 대해 파고든다. 글쓴이의 질문은 나의 생활과 아주 가까이 있어서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접어놓고 읽고 싶은 철학의 단면 외에도 직접 개를 키우며 생긴 일화들은 어떤 인간사만큼 복잡한 감정을 낳는다. 


집시(저자가 키우는 개)와 산책을 나가는 데, 젊고 강인한 이웃집 개 짓는 소리에 집시가 놀랐고, 자신도 은연중에 움찔했다는 거지. 그런데 집시가 자신을 이렇게 쳐다봤다는 거다. '당신도? 당신도 깜짝 놀란거야?' 달리 해석할 수 없이, 그 개의 얼굴이 그런 물음을 던지고 있더라는 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대답 없이 예정대로 다시 산책을 한다. 개와 주인은 다른 높낮이로 걸으면서 서로의 늙어감을 바라본다. 이런 것까지 들키게 될 줄 몰랐는데. 나에게도 숨기고 싶었던 안쪽을 한참 이쪽을 집시가 알아버렸다. 집시와 살면서 마주한 이런 장면에서부터 플라톤과 아렌트, 상당 분량의 문학을 가져오기도 한다. 편안하게 잡았다가 어라, 하는 생각으로 표지를 다시 살피게 된다.  


플라톤은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필요를 선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그것 없이는 삶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게 된 것을 가치의 원천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그것들, 즉 부, 사회적 지위, 출세 등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이처럼 필요를 선으로 오인하는 행위는 한 사람이 무엇을 절대적인 가치, 즉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보고 있는지를 실질적으로 드러내는데, 그가 정말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이 절대적 가치는 대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이 덮쳐올 때,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재설정한다. 108p


철학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들어온다. 이 밖에도 등산에 대한 생각이 흥미로웠다. 산을 올라가며 목숨을 잃기도 하는 일의 이해할 수 없음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글은 없는 것 같다. 산을 오를 때 장비를 거의 쓰지 않는 점에 대해서. 손쉬운 등반을 등반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의 윤리에 대해서. '산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 자체라는 시간에 직면해 어떤 덕목을 갖고 있음을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었다.'라는 말은 명쾌한 것을 넘어 아름답다. 


<철학자의 개>라는 제목에서 이런 내용을 만나게 되리라고 어떻게 생각이나 했을까?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러나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드러나 괴롭히는 대목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드러난다. 실은 21페이지부터 벌써 난리다. 


내 유년기는 순탄치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버지를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결국엔 다시 떠나버렸다. 아버지는 나를 깊이 사랑해주었고 나도 그 점을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좀처럼 살가운 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어서 나는 올로프에게서 따뜻함과 위안을 찾아야 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성격이 달랐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여성의 손길이 결핍된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서 남자 어른보다는 한 마리의 개가 더 뛰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혹시 유머라고 적어놓았는지? 혹시 가부장제의 아버지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무리 접어도, '여성', '손길', '결핍', '충족'등의 단어에서는 여성을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종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분 나쁜 대목이다. 칭찬이랍시고 남자 어른보다 개가 더 뛰어나다는 말을 붙여놓았는데, 인간이라면 자신의 자식에게 살가운 정을 드러내고 아껴야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특수한 종만이 아이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째서 '살가운 정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깊이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는지 의심스럽다. 사랑은 그 정을 드러낼 때에만 사랑이다. 


46년생의 저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인양 생각된다(저자의 이력을 살피고 '어쩔 수 없다'고 쓰는 이해라니, 다정도 병이다) 마지막 장에서 여과없이 드러나고야마는 이 문제는 암컷 고양이 세 마리가 하나만 남은 새끼 고양이를 지키기 위해 포악스러워졌다는 설명에서부터 "아이들에게 소홀한 어머니는 새끼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고양이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의 구절까지 총체적인 문제다. 양육을 여성의 일로 정해버리는 이 반쪽 밖에 남지 않은 시선. 그러나 그는 이 반쪽의 시선을 자신이 가진 최대의 값으로 가져간다. 냉철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제법 중용을 지키며 이 장을 빠져나오는 듯 하지만 아마 자신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반쯤 가려진 카메라가 무엇을 제대로 찍을 수 있겠나. 여성에 대한 철학없이 쓸 수 없는 것을 써 놓았다. 볼썽사나운 컷이다. 


추천한다면, 동물과 함께 살아낸 장면들 때문이다. 그럴듯한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놀라울 정도로 눈앞에서 그려낸다. 여기에 더해지는 철학자의 어깨.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또 그런 이들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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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취미처럼 인근 초중고 학생들이 이용하는 문구점에 들른다. 청소년들이 자주 사가는 물건을 구경할 수있다. 방탄이나 트와이스의 뱃지, 각종 스타들의 사진을 활용한 아이템까지. 다종한 요새의 문구를 본다. 나는 삼각자 세트라든가, 원고지 사이에서 내가 보지 못했던 물건들을 본다. 이 물건들은 아주 이상하게 어울려있고 그 속에서 나는 가끔 편지지를 사온다. 

그 중에 슬라임이라는 걸 찾았다. 실물이 궁금해서. 가보니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무슨 펄이 들어있는 것부터 진주알이 섞인 것까지. 원형의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있다. 십대들이 시험 끝나고 하고싶은걸 공유한 댓글에서 '슬라임 만들기'를 발견했는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슨 게임인 줄 알았다. 

설명하자면 예쁜 찰흙이다. 만지고 노는데 의미가 있는데 무언갈 만들자고 작정하는 물건은 아니다. 촉감과 소리를 즐기는 놀이를 한다. 초중고를 다니는 학생들과 이야기할 수있는 기회가 거의 없고,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서 단순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마음이. 박물관의 유물만큼이나 닿을 수 없는 세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심정을 확대하다보니 가끔은 '도티'님의 영상을 찾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보는 것일뿐. 끝까지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임으로 상황극을 하는데 이것부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직업도 생소하지만 더 생소한건 그걸 이루는 콘텐츠다. 그리고 이걸 재밌어하는 사람들의 마음.

세계인의 심정을 알기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종종 <사마의>라는 중드를 본다. 조조가 다른 이를 염탐해 사진처럼 그려온 죽간을 화롯불에 태우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뜨끔하면서 이것이 종이책의 미래 같은게 아닐까 했다. 잘 타더라. 하지만 그 죽간에 그려진 그림은 지금 내 핸드폰에도 들어 있다. 좋은 죽간을 갖고 있는 셈이지. 이 글도 핸드폰으로 쓰고있다. 추워서 피씨 앞으로 갈수가 없다.

좋은 콘텐츠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연결'이 중요하다고 설득하는 글은 꽤 믿음직스러웠다. 물론 좋은 콘텐츠가 대체로 성공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으니까. 제일 대표적인 예가 책 아닌가. 책만한 콘텐츠가 세상에 어디에 있다고. 논문은 또 어떻고. 하지만 책은 시대의 죽간같은게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상하게 너무 오래 살아왔다는 느낌도 들고. 그런 책을 들고 핸드폰을 보는 조화는 말할 수 없이 이질적이다. 

이와 대비를 이루는 유튜브의 영상이 있다다. 유튜브 구독자 1위~10순위를 살펴보면 이 콘텐츠들에서 가치, 기능, 효용 등을 알아내고 수치화 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영상의 가치는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 말은 인간 하나 하나가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연결을 하는건 사람의 몫이니까. 결국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야하는 일이니까. '최고'를 만드는 이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처럼도 들렸고.

그래서 유튜브의 세계는 신기하다. 진실로 잉여롭게 노는 것이 최고인 것 같으니. 가늠 할 수없는 기술의 발전이 노는 인간임을 잊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곳에 총동원한다. 

그날 슬라임이 무엇인지 몰라 검색하다가 아이유가 별일 없이 그걸 갖고 노는 영상을 봤다. 참 별것 없게도 위안을 줬었다. (심지어 아이유가 나오거나 아이유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는다. 그냥 아이유의 손과 슬라임만 나온다) 세상의 아이유도 이런 놀이를 하는구나, 라는. 평범한 인간의 동질성 같은게 느껴졌기 때문인가.

정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 기업이 여기 한정되고 정해져있는것 같지만 기회가 '있다'라는 말처럼도 들린다. 만나지 않지만 연결되어있고, 그 연결들이 바꾸는 셀러의 순위와 뉴스의 순위, 생활의 변화가 있다. 직업을 탄생시킨다. 10년 전에 누가 알았겠나! 유튜브크리에이터가 티비를 대체하게 될 줄. 티비 프로그램과 영화는 도티님같은 이들과 싸워야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탄생하고 있는 셀 수없이 많은 도티님들과. 

무지막지한 제목을 이고 있는 이 책은 아마도 기업의 임원들,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 창업한 이들만 위한 것처럼 생겼다. 심지어 추천사의 제목은 '구글러가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선물하는 책'이다. 이렇게 각 잡은 것과 달리 수다스럽고 재미있다. 이 책은 소설과도 경쟁할 수 있다. 그러니 위에 거론된 이들이 아니라, 당신이 생활인이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겠다. 이 책이 주는 인사이트에 당신은 어떤 영감을 낳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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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zygy 문학과지성 시인선 446
신해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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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 슨 이야기에 소리를 불어넣고

뜻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녹취록부분

 

 

 

 

기다림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제 '기다리는'

 

무능하게도 기다림은 기다리는 '행동'을 하는 ''만을 동그랗게 놓는다. 나의 기다림이 그 장소에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약속한다고 해서 기다림이 그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녀의 기다림이 할 일이다. 기다림은 마치 약속 모두를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 같지만, 이건 나의 기다림과 다른 이의 기다림을 같은 것으로 놓는 오류다. 그러므로 기다린다는 행위는 상대가 아니라 ''를 약속한다.

 

이 시집에서 화자는 기다리고 있다. 흔히 기다리는 '대상'을 기다림의 최후에 놓고 말하지만, 화자는 기다리는 '대상'에 대해 쓰지 않는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대상의 높고도 중요한 존재 때문이 아니라, 이 기다림이라는 사건에서 만날 나의 어떤 순간을 비로소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지도 모르고 기다리는 중에 탄생한 말들, 화자의 이지러짐을 따라가야 한다.

 

syzygy, 인간에게 없던 말을 인간의 세계로 가져오다

 

제목부터 보자. 'syzygy'라는 단어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있다. 해와 달과 지구가 일직선에 있는 순간이라는 뜻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상상할 수 있을까. 이들이 한 날 한 시 일직선상에 만나자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순간은 저마다의 지금을 오랫동안 움직여 이뤄낸 결과다. 그런데 해의 뒤에 달이, 달의 뒤에 놓인 지구를 따라가다보면 이 만남의 끝에는 지구에서 아주 작은 그림자로 하늘을 올려다 본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얼굴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그 얼굴은 달과 지구와 태양의 움직임을 알았을 이다. 그리고 그걸 알았기 때문에 외로웠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저지라는 때가 언젠가가 오리라는 것을 알았을 인간이기 때문이다. 'syzygy'를 탄생시킨 것은, 지구 밖의 움직임을 알리고 받아들이게 한 외로운 인간들이 만든 신화의 조각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syzygy'는 무엇일까. 오도커니 앉아서 테이블의 모서리를 만진다. 실물을 만지고 있는 사이, 테이블은 투명해지고 ''는 생각에 잠긴다. 실제의 자리가 생각의 모서리로 바뀌고 ''는 이 가까운 거리를 두고도 혼자있는 순간을 만들어 들어간다. '내가 만지작거린 건 생각의 모서리였을까./ 미물의 더듬이였을까.// 아니면 그저 이불 바깥으로 삐져나온 나의 발을/ 가만히 잡고 있었던 것일까.' 터치부분. 이렇게 ''가 다른 장소로 떠나는 건 그 장소가 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안이 이빨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입안이 이빨로 가득해서

나는 지금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구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면

배가 고파질 텐데.

우유가 마시고 싶어질 텐데.

 

뮤트부분

 

''가 기다리는 세계는 시저지와 같아서

 

<뮤트>는 시끄러운 소리를 죽일 때 나온다. 그렇다면 그 소리는 왜 시끄러울까. 주변의 소리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주변의 소리에 비해 시끄럽다는 말이지, 뮤트 된 소리 자체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고 할수 는 없다. 뮤트와 뮤트 아닌 음을 누가 어떻게 판단하는가. ''는 입안이 이빨로 가득할 만큼 독기가 어려있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독기는 이 장소에서 뱉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아주 이상한 분갈이를 보여준다. '영양사의 하얀 가운을 빌려 입고/ 하필 나는/ 뿌리가 살아 있는 머리카락을 화분에 심었다.// 거름도 주었다.'분갈이부분. ''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식물의 자리로 옮겨가고 싶다. 탁자의 모서리를 두드려 생각의 모서리로 이동한다. ''는 뮤트되지 않는 말과, 식물의 몸이 아니어도 되는 얼굴을 갖고 싶다. 화자는 그것을 기다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건 마치 시저지와도 같아서, 마치 지구의 바깥에 존재하는 곳인 것 같아서 고작 이만한 그림자를 안고 있는 ''의 힘으로는 가져올 수 없는 일 같다.

 

이곳을 만든 가장 오래된 신화를 부수고

 

그날의 도래를 화자는 어떻게 기다릴까. 우선 이곳을 만든 시간을 부순다. 제일 오래된 신화 하나를 망가트린다. 사악학 뱀이 이브와 아담을 부끄러움에 눈 뜨게 했다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쓴다. 뱀이 말한다. '아담의 갈비뼈를 모두 부러뜨려 종이봉투에 담'는다. 뱀은 '기합을 불어넣고', '심호흡'을 한다. '태권도 같은 것'을 한다. '-나라면 오래오래 기다릴 수 있었을 거야.' 뱀이 말한다. 뱀이 기다릴 수 있다고 한 건 무엇이었을까. 갈비뼈가 모두 부러진 아담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담이 없는 세상에 이브는 어떻게 있었을까. 이브로 말미암아 아담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이 시의 제목은 로맨스이다.

 

''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

 

그러나 시저지의 전말은 무엇보다 이 시에 있다. '기다림'을 설명하기에 이만한 문장은 없을 것이다. '마음이 탄다. 그러나 나의 맥박이/ 너의 심장에 맞춰 빨라질 수는 없다.// 면목이 없다. 그러나 너의 얼굴 위에/나의 이목구비를 그려 넣을 수는 없다.//우리는 성분이 다르니까//멋대로 바꿔치기를 할 수 없으니까//' exchange부분. 기다림 끝에 우리가 만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보다 더 나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에게 네가 가려지고, 동시에 내가 너에게 가려지는 부분의 어둠을, 이제껏 보지 못한 색의 깊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모르는 것 같다. 이 곳의 역사는 이 말의 뜻을 모른다. 다음 시에서는 이 역사를 아는 화자가 대답한다. '알아? 나는 여자인간이니까/ 생리를 한다.// 그렇지만 손에는/ 다른 종/다른 류의 피가 묻어 있기도 한다.' 여자인간부분. ''는 기다린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다시 쓰고, 생리를 하는 여자인간에 대해서 쓰고, 이 공기에 제대로 있을 수 없는 인간을 그리면서, 태양과, 달과, 지구가 한 선에 서 있는 날을 기다린다. 태양에 달이 귀속되지 않고, 태양에 지구가 매달리지 않고, 태양은 이들을 거느리지 않고, 셋은 이 지구에서 저마다의 질량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무엇으로 바꿔지거나 속해질 수 없는 '하나'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린다.

 

마지막으로 이 시집을 덮기 위해서는 개의 자리를 지나가야 한다.

 

검은 개가 똥을 먹었다.

 

검은 개의 혓바닥이 나의 영혼을 핥았다.

 

검은 개의 눈이 나를 피했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어서

 

나는 슬프고 더러웠다.

 

추문이 깊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비밀을

개와 나눌 수는 없었다.

 

개의 자리전문

 

 

눈을 가리고 만든 물건들 속에는

내 손이 섞여 있을거야

 

개의 눈을 생각한다. 존재의 다름으로 생겨나는 수치를 내가 가진 힘으로, 그래서 '억압'의 도구로 두지 않는 것이 '''개의 자리'를 지켜줄 수 있는 작은 방법임을 슬프게 고백한다. 개가 될수는 없다. 오해하지 말기를. 당신에게 개가 되라는 말은 아니었다. 개의 눈을 슬프게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 시에서 다 나가기 위해 다른 시를 불러 온다. '그러니 내 옆의 의자에 앉아/ 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으면 좋겠다.// 밤을 새워주었으면 좋겠다.// 눈을 가리고 만든 물건들 속에는// 내 손이 섞여 있을거야.// 눈을 가리고 그린 그림 속에서/ 나는 너를 더듬고 있을 거야. ' 이렇게 앉은 자세부분.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위해서 ''는 너무 많은 일을 했다. '베껴 슨 이야기에 소리를 불어넣고/ 뜻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녹취록부분. 남은 일은 이제 이것 뿐인 것 같다. 기다림의 자리에 수많은 ''가 남아서 만드는 날들을 '기다린다'. 시저지를 발견했던 사람의 얼굴을 내가 만날 수는 없지만, 그 얼굴이 되어볼 수는 있을테다. 또 하나의 'syzygy'가 탄생하게 되면 서로 이름 몰랐던 얼굴들이 자신으로 모여 ''를 이야기 하게 된다. 어떤 말도 뮤트되지 않는 진짜 '소리'를 들을 것이다. 내가 아직 지구에서 작게 서 있다. 다행스럽게도, 기다림은 기다리는 '행동'을 하는 ''만은 동그랗게 그곳에 분명히 놓을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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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1-1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밤 님의 시 읽기를 늘상 기대하는 1인입니다.

syo 2017-11-12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인입니다.
 
몬스터 콜스 - 영화 [몬스터콜] 원작소설
패트릭 네스 지음, 홍한별 옮김, 짐 케이 그림 / 웅진주니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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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는 이름 그대로 궁지에 몰려 있다. 


모든 걸 망쳐버리고 소리지르고 싶지만, 일상을 조금만 잃어도 어긋날 모든것이 어떻게 엉켜버릴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묵묵히 작은 빛이 금방 닫혀버리는 단추구멍 같은 일상을 꿰멘다. 토스트를 하고 쨈을 발라 먹고, 세탁기를 돌리고 학교가는 턱 끝에서 배꼽아래까지. 코너가 삐끗할 수 있는 것은 늘 꿈 속이다. 집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고, 엄마가 그 안에서 바닥을 잃지만 코너는 엄마의 팔을 잡아 당겨 올리지 못한다. 엄마가 암흑 속에 빠지며 꿈이 깬다. 엄마는 투병중이고, 아빠는 이혼했고, 학교에서는 왕따다. 코너에게는 주목나무를 바라보고 상상하는 일과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그려내는 일만이 위로다. 


코너는 믿을 수 없는 일을 진실로 믿는 것이 잘 되지 않는다. 엄마가 다시 건강해질 거라는 기대가 헛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걸 발설하거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다. 왜냐면 나는 아직 12살이고, 그러니까 아직 어리고, 그러니까 순진무구하게 믿어준다면 엄마가 다시 건강해질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착하게 빌고 또 빌게 되면, 엄마의 병이 낫게 되는 게 지금껏 읽어왔던 동화의 이야기니까. 그렇게 나아지지 않는 희망을 애써 삼키고 있을 때, 저 언덕 위의 주목나무가 일어나 저벅버적 걸어서는 코너가 있는 2층집 창문으로 고개를 드민다. 다짜고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 가지 이야기가 끝나면, 네 번째 이야기는 네가 해야 한다'고 겁을 주면서. 주목나무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가릴 수도 없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마무리도 없고, 그래서 무엇을 배우면 좋을지도 알 수 없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주목나무는 무너져가는 세계에 머물며 착한 아이로 남고자 하는 코너를 울린다. 기어코 울려 버리고, 스스로 모퉁이가 되어 코너가 잡고 돌아야 할 무거운 순간이 되어준다. 나를 잡고 있지만, 이제 곧 손을 놓게 되겠지만, 여기를 가볍게 돌고나면 다른 세계가 있다고 말해준다. 그 모퉁이는 누구나 돌아야 하는 인생의 어떤 점이다. 언젠가 너에게 전해준 종이가 반으로 접힐 때가 온다. 


나의 마음이었던, 나의 살이었던, 나의 미소였던 그곳은 더 이상 드넓지 않아서 너는 다른 면으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 누구나의 이야기는 반에서 반으로, 다시 반으로 접혀 들어간다. 더이상 접어올릴 수 없을 때 하늘의 별이 된다. 그 때가 누군에게나 온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맞아야 하는 죽음의 순간이다. 아직 나의 이야기가 남아 있기에 그 손을 놓을 때가 온다. '보내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야. '떠날 수 없음'이 '착한 것'은 아니야. 너는 용기 있게 너에게 주어진 삶을 맞아야 해. 주목나무가 들썽인다. 코너는 엄마와 깊게 헤어진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헤어짐을 헤어짐으로 맞아준다. 


한 개의 이야기가 끝나가고 있다. 너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네가 행복해질 거라는 약속은 없다. 교훈도 물론 없을 것. 너는 이 헤어짐을 만나서 무엇이 되었니? 더욱 네가 되었니? 진실로, 너만이 부딪혀 느낄 수 있었던 너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니. 코너가 할머니와 엄마가 꾸려준 방에 남아 엄마가 남겨준 그림을 한 장 한 장 들출 때, 네가 꾸었던 꿈이 실은 나의 것이기도 했다는 고백을 듣는다. 코너가 꿈에서 보났던, 주목나무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엄마의 그림으로 남겨있다. 네가 울면서 준비했을 헤어짐의 마음을 나 역시 잡는 것이 쉽지 않았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그림으로 살아나 한 장 한 장 넘겨지고 있다. 성장이라는 '코너'를 준비하기 위해서, 인생의 한 켠을 마련해두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어리다거나, 슬픈 이야기만으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크고 오래된 나무가 내 안락한 집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야 했다. 



*메리 올리버, 「기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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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문학과지성 시인선 473
송재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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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애하는 것을 거리두는 일에 대해




무엇이 되기 전에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음가'로 수 놓는 시가 있다. 때문에 의미가 나중에야 오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 사방에서 보고 되뇌인 후에야 쓰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아끼는 것을 대할 때 간신히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안감힘이 있는지. 다행히 둘 수 있는 그 짧은 곳을 '거리'라고 하자. '거리' 두고 싶은 시. 이 의미를 안다는 듯 저자는 초엽에 「햇빛은 어딘가 통과하는 게 아름답다」를 놓았다. 햇빛을 길게 읽는다. 그것이 어딘가를 통과하는 '긴 장소'는 어떤 것일까.  



햇빛의 혼잣말을 알아듣는다

불투명한 분홍 창이

내 손 일부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토록 섬세한 공소(空所)의 햇빛이 키우고,

분홍 스테인드글라스가 가꾸는,

인동초 지문이 

손가락뼈의 고딕을 따라간다


「햇빛은 어딘가 통과하는 게 아름답다」 부분.


햇빛이 창에 내리고, 창을 짚는 손가락이 있고, 창 밖에는 창을 올라타는 인동초가있다. 겨울일 것이다. 그러므로 햇빛 아스라한 정도도 알겠다. 바깥의 인동초와 안쪽의 손가락은 지문으로 만난다. '손가락뼈의 고딕을 따라간다' 부분에서는 숨을 죽이게 된다. 창을 스미는 손가락과 인동초는, 어떤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로 화해 아주 오래된 건물 한 채를 올릴 것 같기 때문이다. 햇빛이 어딘가 통과하는 것은 통과가 떠올리는 '장소'뿐만이 아니라 예사 시간을 포함해 '역사'에 이른다. 송재학이 천작하는 '예스러움'의 기미가 바로 이거다. 고어와 고문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스며들어 스스로 발화하는 문장의 유별함. 한 번에 읽어내릴 수 없는 특유의 호흡이 여기서 온다. 해서 이 시는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수평선의 직선은 표정이 좋다 곧장 아침에 일어나

서 지평선 시렁 위에 이불을 반듯이 개어 쌍희[囍]

자가 보이도록 올렸더니 구름처럼 가볍다 그렇다면

수평선 위에 다락의 속셈도 있겠구나 지난여름에 보

아둔 물웅덩이를 그곳에 옮겼다 어김없이 점심 무렵

여우비가 흩날렸다 수평선의 직선이 구불구불해졌

다 수평선 위로 속이 훤히 보이는 남해의 기차가 오

래 정차해서 눈이 부셨다 수평선이 멀어 이별의 모

서리는 생략되었지만 직선이 파르르 떨린다 일몰이

번지기까지 직선은 짐짓 침묵이다


「수평선이라는 직선」 부분.


유쾌한 것은 예스러움의 정서에 천진한 발상이 이렇게 어울린다는 것이다. 전작을 불러보자. '너가 인편으로 부친 보자기에는 늪의 동쪽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물 위에 누웠던 항천 하늘도 한 웅큼, ' 늪의 내간체를 얻다 부분. (언니가 여동생에게 보내는 내간체의 느낌을 살린 시에서 시인은, 아니 화자는 완전히 '언니'에 이른다)보자기에 '늪의 동쪽'을 챙겼다거나 새털 매듭을 풀자 '하늘이 한 웅큼' 나왔다는 천진한 부분은 딱딱한 문체와 극으로 어울린다. 지난여름에 보아둔 '물웅덩이'를 그곳에 '옮겼다'는 구절에는 '~은 ~다'는 단순한 구조에서 생동감이 더한다.


비를 피하려고 우산을 만들었다고, 아니 비를 응

시하기 위해 우산이 필요한 산족(傘族)도 있었다 고

대 언어 우산은 얼굴의 물기만 슬쩍 가린 셈이다 언

필칭 비와 눈[目]의 고독한 간격을 위해 우산이 필

요했다 물기 머금은 눈동자의 다른 이름인 우산이라

는 여린 글자는 비가 숭숭 새기도 하거니와 경사면

을 집적거리는 빗물을 어쩌지 못한다 아랫도리가 심

하게 젖어버리는 우산은 그야말로 나긋나긋한 물건

이다 왜 비에는 응시가 필요했을까 빗방울을 통해

거미줄을 알게 되었다는 우연도 있지만 대체로 비

에 젖은 것은 번지니까 비의 화석은 먼 우레의 핏방

울처럼 남겨져서 석기시대의 사료(史料)를 대신했다

비의 빗장을 뽑은 후 우산 그늘이 생겼다는 반성처

럼 오늘 비를 대신해서 '우산'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우산에게 들킨 비, 비에 들킨 우산의 말들은 교감 중

이다


「우산」 전문.


손잡이가 있고, 팡 하고 펼쳐지는 우산보다 더 현물일 수 없는 '우산'이 여기 있다. 이 시는 우산의 탄생같다. 나중에 비를 좀 맞게 되더라도 글자가 더 실체가 되는 순간을 믿어야겠다. 비로부터 시작된 물건이었을 우산에 대한 탐사는 '비를 응시하기 위해' 우산이 필요했으리라는 '우'산족의 이야기를 전하며 시작한다. '눈[目]의 고독한 간격을 위해 우산이 필요했다'는, 글자의 뜻을 만든 마음을 올리고 글자의 생김에 침전한 부분은 우산의 어디를 이루는 것일까. 메기고 받는 문장에서 의외로 빛나는 부분은 또 이런 것이다. '대체로 비에 젖은 것은 번지니까' 욕심 없이 평범하게 풀어버리는 순간. 제 힘으로 얼레를 푸는 연처럼, 시는 멀리 날아간다. 


시인은 시간의 눈금을 세기 위해 '석기시대', '구석기'등의 실제 사용되는 연표를 사용한다. 긴 시간을 더듬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얄지만, 셈했던 그 시기가 '진짜'인듯 매기는 부분에서 슬몃 웃음이 가는 것도 사실.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애써 조상한 마음을 더 읽는다. '비'와 '응시' 그리고 '우산'으로 이어지는 회로에서 마지막은 약간 아쉽다. 송재학의 시 대부분에서 오는 감정이다. 아쉬운 마무리. 어쩌면 아름다움이 의미 그 자체인 지경에서 더 이상의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가 되기 때문일지도.


그런가 하면 이렇게 긴 문장에서도 엉키지 않고 '결빙음'이 '청유형 거울'을 끌어오는 힘이란 여간하지 않다. '결빙음은 자문자답, 얼음덩어리 저수지를 통째로 끄/ 집어내어 읽으시라는, 꽝꽝 얼어붙은 갑오년 달성판/ 방각본을 삼동 내내 읽으시라는 청유형 거울이다' 겨울 저수지가 얼면서 울부짖는 소리는 군담소설과 다를 바 없다」부분.


『검은색』은 다른 색을 흡수하고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림자, 다른 것을 통과하고도 남는 색이다. 제목을 이리 단 것은 자신을 어쩌지 말아달라는 SOS요청인가. 검은색을 대하는 마음으로 거리를 지키며 더욱 읽는 대는 것이 이 제목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다. 물러서고 싶은 한 걸음의 거리에는 '빙의'라고 해도 믿을 만큼 지나간 옛 정서를 살려내는 말씨가 있고, 이 시집에서만 생생해 대하기 어려운 살아있으며-동시에 죽은 기이가 있다. 등등을 찾아내지 못한 아쉬운 글은 저수지를 싣고 가는 밤의 트럭」으로 닫는다. '5톤 트럭에 세상의 짐을 다 싣고도 여유롭다고 생각한 건 저녁 식사 때의 반주 탓이겠지'로 입을 떼는 어쩌면 비극의 순간, 혹은 꿈이라고 믿고 싶은 위험한 운행이다. 송재학은 그저 저수지를 지나가는 트럭의 풍경에서도 '생명의 서사'를 발견한다. '틀림없이 모서리가 약간 젖었을 짐 속의 모든 생명도 속도에 의해 순해진다/ 별빛을 기준으로 어딘가 멀어진다는 것의 순수,/ 새벽이면 가장 밝은 별 아래쪽에 저수지의 날것들을 부릴 예정이다' 저수지를 싣고 가는 밤의 트럭」부분. 







아침도 겨울이라 작년에 썼던 리뷰를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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