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독 꿈꾸는돌 15
다케우치 마코토 지음, 윤수정 옮김 / 돌베개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우연한 만남을 관계로 키우는 장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떤 순간이 들어있다.

 

나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우연에 그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감동스러운 장면이지만, 이 순간은 벼락처럼 오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 흔하게는 내가 이렇게 걷고, 먹고, 사람과 만나고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사건까지 필요하다. 겐타로는 고등학교 입학식 날 사고를 당한다. 사고야 가벼웠지만 당장에 자전거를 타고 가지 못하게 되었다. 늘 가던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걸어야 했고, 걸었기 때문에 상자에 담긴 강아지를 발견하게 된다. '잘 키워달라'는 쪽지를 알 도리가 없는, 아주 작은 강아지였다.

 

책은 이 작은 강아지의 귀여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뛰었다거나 잘 잤다거나 먹는다는 이야기 뿐. 이 강아지의 이름은 '원더'. <원더독>은 그가 구심인 것 같지만 천만에. 원더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나의 유년에도 원더같은 개가 있었더라면,‘ 마음으로 책을 든다면 접는 것이 좋다. 이유는 원더가 특별한 개가 아니라, ’특별한 만남이 있는 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 특별한 만남이 있던가. 모든 것은 우연이다. 그중에 특히 기억하는 만남이 있을 뿐. 그러므로 알아채고 싶지 않겠지만, 우리는 이미 원더 같은 강아지를 수백 번이나 만났었다. 원더는 고등학생인 겐타로가 안고 오고 싶을 정도로 작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한 것이었다. 이런 설명은 어떨까. ‘원더는 어떤 마음을 먹지 않아도, 어떤 길에 굳이 들지 않아도 마주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라는 설명이.

 

문제는 그 사회적 약자를 '우연'히 만나서 '관계' 할 수 있겠냐는 점이다. 겐타로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 강아지는 누군가가 다시 발견할 때까지 그 앞날을 가늠할 수 없다. 이것이 본다는 것의 뜻이다. 자신이 어쩌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일단은 그대로 두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 판단을 더한다. 학교에 가고 있고, 학교에는 친구들과 선생님이 있다. 겐타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도움에서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이 있는 '사회'의 도움을 예상했던 것 같다. 오해가 쉽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는 나태한 낙관이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도 정말 '어떻게'는 될 수 있겠다는 나를 둘러싼 '사회적 안전망'을 암시한다.


<원더독>은 그러나 개인이 어떤 우연을 받아들여 관계로 만들어 가는 흔한 미담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있는 사회를 설득시켜 이 우연을 하나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다. 학생이 교칙을 만들고, 투표를 한다. 한 개의 고등학교가 한 마리의 개를 기르기 위해 의견을 수립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뿐인가. 내가 있는 사회(고등학교)와 나를 둘러싼 더 크고 다른 사회(고등학교 선생님)와의 갈등도 있다. 당연한 이유로 개 키우는 것을 반대하는 교무실은 마냥 반감으로 학생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의 성장과, 원더의 실제적인 성장을 위해 대립하며 대화한다. 여기에 반더포겔부라는 희한안 이름의 동아리는, 원더를 같이 기르면서 이런 말로 겐타로를, 아니 독자를 감동시킨다.

 

피셔맨스 노트라는 거야.” “절벽에서 자일이 풀리면 저승행이잖아. 쉽게 풀리지 않는 매듭법이 여러 가지 있어.” 41


이는 매듭이 아니라 연대를 설명하는 문장아닌가. 쉽게 풀리지 않는 매듭법을 가르쳐주는 동아리 선배의 말에서 신입생과의 연대가 끈끈하게 시작된다. 절벽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자일로 묶는 사람들의 손. 그것은 삶을 기록으로 매기는 험난한 과정이 아니라 기록 따위 별거 아니야. 천천히 간다고 산이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89 그저 함께, 도망갈 리 없는 산을 오르는 것 뿐이라는 점을 잔잔하게 알려준다. 이 산을 어떻게 함께 오르느냐의 문제를 진정 고민하게 하는 지점에 '원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더'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wander’방랑하다혹은 헤매다라는 뜻이고 ‘wonder’놀라움이나 신기해하다같은 뜻이 되는 모양이다. 단어 두 개를 비교하면서 겐타로는 그렇구나.”하고 중얼거렸다. 39


원더는 온통 wander만 있는 듯한 세상에서, 나 역시 방랑하거나 헤매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이유로 정말 '원더'를 보지 못하고 누군가와의 매듭 없이 산을 힘겹게 오르는 것은 아닐까. 아니, 나는 아직 젊고, 몸이 성해 그런대로 올라갈 수 있으나, 저기 산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야 하는 이들을 외면했던 것은 아닌가. 아니, 이런 감상에 그치지 않고 <원더독>은 고등학교 학생들이 어떻게 그들의 연대를 꾸렸는지, 이 막연한 한숨에  10년치의 시간을 꼼꼼히 펼처 보여준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원더'같은 강아지가 있기를 바라기보다 학생들의 문고에 이 책을 놓아주는 것이 더 실천적일 것이다. 언젠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원더독>을 읽을 것을 떠올리며, 나는 아주 간신히 오랜만에 발음해 본다. '미래', '희망'같은 말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사이언스 클래식 25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세계관의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변화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아주 드물게만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기독교의 출현이 바로 그런 변화에 해당된다. *

 

저녁나절 몸을 약간 기대는 것만으로도 일주일간의 실패와 기적을 확인할 수 있다. 620회차 당첨은 24번을 선택하고 그 옆의 25번을 찍는 어떤 용기. 이어서 33번을 찍고 34번을 또 찍어야 하는 엄혹을 견딘 15명에게 돌아갔다1등 당첨자가 가지게 될 11억의 돈보다 더 가늠하기 어려운 15명의 기쁨을 상상한다. 이건 이들만 알 수 있는 것이겠다. 숫자 두개를 맞춘 종이를 옆으로 치우면 다크하기 짝이 없는 경제 뉴스가 가득한데이것은 이제 모두가 아는 것이다국가 채무는 600조원을 돌파(돌파라니목표였던 것인가)했고 가계 빚은 1130조로 천문학적인 수준이다(명백한 말의 오남용이다천문학계의 성과는 이 말의 유행밖에는 없는 것 같다어마어마한 지경에 시간만 남았을 뿐이다잠시 동안 내가 가진 빚을 생각했다어두워졌고본질적인 문제를 떠올리지만 더 어두워질 뿐이다. 생각나는 것은 '기도'정도 뿐이 것 같다. 


이 막심한 어둠에도 오늘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 가까스로 '인간'적인 일로 느껴진다나는 거의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삽을 들어 환희에 찬 제목과 표지의 1장을 원수 보듯 읽는다. '내가 물리학 연구를 선택한 것은 영원한 영향력을 가진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어떤 일에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고 헌신을 한다면그 일은 오랜 시간을 견뎌 내는 진실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1장의 제목은 '당신에게는 아주 작은 것내게는 아주 큰 것'이다

 

숭고한 언어로 자신의 직업윤리를 영원처럼 새긴 사람은 저자 리사 랜들이론 물리학자다나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 세계에서는 최전선을 달리는 인물이라고 한다책을 반쯤 읽었을 때 로런스 서머스(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원장)의 추천사가 얼마나 적절한 것이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리사 랜들은 말 그래도 희귀한 존재이다천재 물리학자이면서 그렇지 못한 우리도 이해 할 수 있도록 책을 쓰고 강연을 한다이 책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여태껏 접근조차 못했던 우주의 내부 구조 속으로 안내할 것이다.' 정확하다리사 랜들이 시간을 '내서' 이런 책을 쓴 것이 감사하다그의 시간은 그 하나의 생에만 달려있는 문제가 아니다대중적인 책을 쓰기보다 그 시간에 다른 것을 연구하는 것이 그의 미래를 위해나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더 중요할 수 있다그러나 그는 글을 썼다. 무슨 바보 같은 친절인가, 싶었던 내 생각은 범인의 것이었고, 이것이야 말로 미래를 위한 일이었다. '과학자'가 국민학교의 장래희망에나 쓰이는 단어로 남는 세태를 알아 챈 것이라고 믿는다그가 쓴 이 대중적인 과학서는 그 이후태어나야 할 과학자를 위해서 그리고 과학으로 말미암을 새로운 세계관을 가질 미래인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그녀는 팔을 걷고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600페이지가 넘는 긴 초대장을 보냈다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는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 한다스케일, LHC, 그리고 과학과 종교에 대해서스케일은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개념이다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크기와 시간거리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가늠 할 수 없이 아주 큰 것이런 스케일에 대해서 각 장을 넘나들며 개념을 강조한다.

 

근본적인 구조와 구성 요소가 아무리 근본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모든 문제에 직접적인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그래서 공이 지구의 중력장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할 때 우리는 양자 역학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의 역학을 쓰는 것이다공의 운동을 원자 수준에서 유도하기는 너무 어렵기 떄문이라고 한다공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원자가 존재해야 하지만원자 수준에서 생각하는 것은 공의 궤적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물론 원자의 존재가 공의 존재나 중력장 속 운동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93

 

LHC는 책의 제목과 저자의 의도가 애써 가려놓지만 어쩔 수 없이 보이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이 원자 단위 이하의 세계를 관측하는 기구인데그 둘레가 27km나 된다. (지하에 시설하는 대규모 공사이기 때문에 로마 시대 유적을 발굴했다는 일화도 있다. 사족이지만 둘레 27km나 되는 공사를 하면서 인간이 살았던 흔적을 만나게 될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일화라고 할 수있다) 사실 책을 읽고도 LHC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려웠는데다행히 이종필 교수가 쉽게 쓴 글이 있다. ‘신의 입자를 때려라.’ 양성자와 양성자를 충돌시킨 후 우주의 과거를 살피는 미시 세계 관측소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서술되어 있다여기서 신의 입자는 힉스 입자를 말한다물질에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 입자는 2013년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제목이 위험하고 용감하게 건네는 것종교와 과학의 문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본질을 짚는다.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야말로 종교-과학 논쟁의 핵심을 이루는 진짜 쟁점일 것이다.’ 111

 

종교는 과학의 영역 바깥에 있는 질문들을 포함한다종교는 궁극적 목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라고 질문하는 반면과학은 "어떻게?"라고 묻는다과학은 어떤 의미로든 자연의 배후에 어떤 궁극적인 목적 따위가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그것은 과학자들이 종교인이나 철학자를 위해 남겨놓았거나 아니면 아예 단념한 탐구의 방향이다. 83


케플러는 튀빙겐 대학교의 스승이었던 미하엘 매스틀린에게 쓴 편지에서 "저는 신학자가 되고 싶었으므로 오랫동안 마음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이제 제가 한 일을 통해 신께서 천문학에서 찬양받는 것을 보십시오."107

 

종교와 과학의 지진부진한 논쟁을 현명하게 가르는 저자의 말더 붙일 것 없이 인용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다언제고 다시 읽어도 좋을 만큼 우주의 비밀에 다가서고 싶은 열망과분야를 막론하고 오가며 영감이 가득한 책이다나가기 전에 로또의 수학으로 LHC를 설명하는 것을 인용하려고 한다. '로또 당첨 확률( 840만 분의 1)은 매우 낮지만매주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오는 것은 시행횟수가 충분히 크기 때문이다.'** 결국 힉스 입자가 발견되었고, 올해 중력파도 발견되었다. 기다림을 위해서 충분한 실패가 있었다. 아니, 이것은 이렇게 담담하게 마무리할 일이 아니다.  두 가지 충격적인 발견은 충분히 세계관의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변화를 꾀하는 일이었으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같다.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위 두 개의 발견과 얼마나 연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가시화 되어서야. 다른 세기를 살게 될까 하는 의문이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이 책보다 더 쉽고 마음을 움직일 과학을 상상한다. '기도'하는 인간과 동시에 수준으로 발돋움 하게 될 '인식'의 인간도 함께 말이다.



* 미셸 우엘백, 『소립자』, 열린책들. 10쪽

** 이종필, 「신의 입자를 때려라」, 네이버 캐스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업사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업 사회>는 일 없는 청년에 대한 세밀한 리포터로그로 말미암은 일본 사회의 병폐를 '빙산의 일각'으로서 충실히 담아낸다동시에 그 아래 잠겨 있는 일본의 연금 체계복지 발전과 소위 '일본형 사회시스템'에서 보이는 문제를 드러내 입체적으로 일본의 '청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청년문제로 드러난 문제의 빙산 아래는 경제 성장의 '논리'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마련된 복지 체계가 있었으며경제 성장과 함께 고령화저출산이 미리 예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처하지 못했던 일본 정부의 과오가 차곡히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이것은 그동안 마치 '새로운 종'의 출현인 듯 여겨졌던 일본 청년에 대한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미싱 링크'처럼 여겨진다프리터니트히키코모리 등으로 묶이거나 불리며 그 세대가 아니고서는 공유할 수도 이해할 수 없었던 원인을 본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 청년의 '감정'에 대해 정치적으로 접근한 보고서였다면 <무업 사회>는 청년들이 취재와 연도와 숫자로 기록되는 일본의 역사 위에 지금을 살아가는 청년과 NPO가 찾는 좁은 출구다.

 

무업 사회는 무업 사회에 대해 개관한 1부와 일한다는 의미를 여섯 청년의 인터뷰를 통해 개념화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나야말로 청년의 한 가운데이기 때문에 이들의 인터뷰가 무척이나 잘 와 닿았다일본의 사례를 가져온 것이지만 마치 내가 말한 듯 '동어반복'으로 느껴졌다가령 '하고 싶은 일만 하기 위해 이을 고르고 있다?'거나, '돈은 없지만 매일 자유롭게 노는 건 아닌가하는 의미심장한 오해나아가 '혹시 부모가 도와주니까 일하지 않는 건가?' 등 일하지 않는 청년을 바라보는 다른 세대가 충분히 궁금해 할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여러 가지 종류의 '아니오'라는 대답에 청년의 심정과 현재를 일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그러나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는이미 만연한 청년의 담론이 아니다. <'무업 사회'는 어떻게 등장하였는가?> 부분이 바로 빙산의 아래다일본이 현대 국가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던 약 1세기 전부터의 복지관 언급을 시작으로 주요하게 2000년대 이후 청년 무업자의 역사를 살핀다논문으로 보자면 청년이 무업사회에 이르게 된 간략한 연구사 정도가 될 것 같다.


일본형 시스템에는 '일본적 경영', '일본형 복지사회', '중앙집권적 재분재 시스템'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148. 책에서는 앞의 두 가지를 중심으로 알아보는데일본적 경영에서 종신 고용과 연공서열형 임금으로 대표되는 기업의 인사는 '한 번 배제되면 재진입이 불가능'하다는 위험을 이야기 한다그 다음으로 살펴보는 일본의 연금제도는 다소 길게 인용해야 할 것 같다.


일본의 연금제도는 '전 국민 연금'제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청년 무업자처럼 기존 기업 사회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못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국민연금 가입을 강요하지만반면에 국민연금만으로는 충분한 급부를 제공하지 않는자기 책임의 비중이 큰 제도이기도 하다기업에서 근무하고 있거나 공무원인 경우에는 이러한 점을 제대로 인식하기가 쉽지 않은데이것이 일본 사회 안전망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55

일본의 현대 사회복지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의 혼란 속에 사회와 경제가 시대적 변화에 대응해 나가면서도 특히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구상되었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구상을 가질 수 가 없었다.

 

일본의 연금제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한국의 국민연금을 설명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가 없다다음은 복지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인데좀 더 읽어보자.


사회복지령은 1950년까지 생활보호법아동복지법신체장애인 복지법이라는 '복지 3'으로 이루어졌다. ...패전 후의 혼란 속에서 구상된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구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복지 3법은 그 후인 1960년 정신박약자복지법, 1963년 노인복지법, 1964년 모자복지법을 추가하여 '복지 6'으로 발전되었다그렇지만 현실적인 개호 제도 설계는 1997년 개호보험법 성립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고령화 사회의 도래 자체는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시기부터 이미 인식하고 있었지만주체적인 사회 안전망과 개호보험 구상은 나중으로 미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개호: Care의 일본식 표기주로 노인 용양을 위한 각종 복지 서비스를 말함) 156

 

이 부분은 아주 흥미로운데일본이 어떤 기조로 복지를 운용했는가를 한 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이를 알아보기 전에 '복지국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는 배려도 있다. '베버리지 보고서', '복지 국가의 위기'와 '새로운 사회민주주의'등를 언급하면서 미국과 영국 정부의 정책을 훑어 보는 것그래서 한국의 복지는 어디쯤에 있을까몇 년전 비극적이었던 '세모녀'사건언급한 적 없다는 '증세 없는 복지'라는 초유의 말이 떠오를 뿐 한국의 복지는 어떤 구조로 지탱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을 ''게 되었다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내가 처한 출구 없는 문제를 두드려 볼 수 있는 방법 아닌가청년 문제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고용에서 멈추지 않는다그것을 평생으로 가져갈 수 있는 이들은 그중에서도 아주 소수이기 때문. '안다는 것'이 무력할 때가 참 많지만복지와국가의 운영의 문제에서 무력함을 바라 본다면 적어도 ''의 문제라는 오명을 벗고 이 문제를 공유하려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일본형 시스템'에 참가하지 못하거나 그 시스템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면 치열한 경쟁 환경이나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상황과 구조를 엿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또한 만일 '일본형 시스템'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유로 인해 실패해서 시스템 밖으로 밀려 나가게 되면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일본의 사회 시스템에서는 노동시장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과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거의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163

 

그래서 이 책은 어떤 희망을 붙들까이러한 문제를 함께 공유하는 것을 우선으로 말한다. 그러나 해법처럼 청년에게 일을 '배당'혹은 '참여'시키는 것이 최선의 문제해결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충분히 진심일 것이나 다소 교조적으로 느껴지는 인터뷰는 그 때문 같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 변한 것은 나 자신을 긍정하게 된 거예요예전에는 제 존재를 부정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고 느끼게 되었어요현장 책임자로 손이 부르터 있던 가쓰다 씨의 말이다나는 그렇게까지 ''을 긍정하고 신화화하고 싶지 않다그렇다고 일이 아니라면 사회에서 배제되는 실태에 일만이 사회적인 인간으로 그를 부를 수 있는 고리임을 부정할 순 없다일보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다른 형태의 매개가 생겨날 것을 믿지만먼 훗날의 그림이라는 것도지금 필요한 것은 사회적 약자로서 '청년'을 받아들이고 '문제'로 골몰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일테다그 후에 수립할 정책이 실질적인 도움할 수 있을 것이다성남시의 청년 배당이 이와 닿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변화'다. 사회적인 지원은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그것은 한 생애를 걸쳐 모두에게 필요하다서로를 가여워 하지 않아도 충분한 세상에 있고 싶다감상적인가그렇다그래서 나는 이 책이 한 시절만 살아가길 바란다누군가는 세태를 적절히 담아낸 책이라고그것에 어떤 깊이가하고 지나칠지 모르겠다그러나 이것은 관심이다어떤 사람의 한창 때와 그 이후에 대한 염려다그것은 언제나 ''로 치환 가능하기에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다.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에 대해 관심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이 내가 살아갈, 혹은 살아왔던 시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전과 영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성, 스피리추얼리티라니. 푸코는 어떻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푸코의 명석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우리의 이로에서 보면 푸코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706p 

이것은 부분 나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말을 수시로 털어낸다. 



라캉, 르장드르, 푸코를 이야기 하는 이 책은 과연 한 권인가. 이 뒤로 얼마나 많은 책이 그림자로 겹겹인가. 그러나 그 그림자가 얼마나 두껍간건에, 또한 이 세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대도 이 책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읽어볼만 하다고 추천한다. 일본의 혈기 왕성한 철학자가 '나를 따르라, 저 어둔 개념속으로 같이 가자' 는 투의 비장하지만 즐거운 말투로 논의를 진행한다. 문장은 꽤나 문학적이고, 비유라서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몇몇 개념어나(아니 제목부터 야전과 영원이 도대체 무슨뜻인가) 한자어로 이해하면 그럴듯하지만 단어 자체가 낯설기 때문에 읽기가 아주 매끄럽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일본인)저자와 좀더 가까운 말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책을 재미있게 읽는 것과 그것을 무엇으로 남기는 일에는 아주 먼 거리가 있고, 그것은 한달이나 한달에서 이틀 정도 더해진 시간으로는 어림없었다. 또한 기억에 남는 페이지를 접는 일은 책에 대한 인상을 적을 때 아주 유용하지만 이번의 경우 하등의 쓸모도 없다는 것도 말해둔다. 접어놓은 페이지가 너무 많기 때문. 그러므로 이것을 따로 적는 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신 라캉과 르장드르 푸코를 이야기 하며 넘어졌던 부분을 옮겨본다. 


그녀들이 새롭게 낳으려고 하는 텍스트=말씀=개념은 "그리스도의 신체"이고, 그것은 "정신적이고도 정치적인 공동체"와 동의어니까. 신에게 안겨, 신과 "함께" 연애편지를. 212


저자는 라캉이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을 세 군데로 꼽는다. <거울>과 <팔루스>그리고 '여성의 향락'이 그렇다. 또한 라캉의 정신분석이 서양의 인식과 종교(기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사적인 한계를 갖는다는 르장드르의 비판을 적극 옹호한다. 그러나 라캉이 정신분석으로 멀리 가고 싶었던 부분과 최대한 싸운 결과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라캉의 언어는 정신분석은 하나의 경향으로서 역사의 것이라는 수긍이 이 문장으로 들었다.


신은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비치지 않으므로 분할할 수 없고, 트레 위네르도 새겨지는 일이 없다. 따라서 자신을 '하나'로 셀 수가 없다. 따라서 덧셈도 할 줄 모른다. "만능" "전능"이 몇 개나 있어서는 난감한 것이다.  고로 어떠한 신학상의 주석에서도 신의 <거울>에 관한 논의는 "미쳐 있는"것이 될 수밖에 없다.  280


라캉이 말했던 <거울>을 <사회적 거울>로 가져온 르장드르가 문제제기하는 부분이다. 신을 거울에 비추면, 보일까? 이런 물음이 깜짝 놀라서 그 이후로 연쇄하는 생각이 즐거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다. 이는 거짓이다. 누군가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의 주체는 자신을 "출산한 두 사람"의 모습을 까맣게 잊고 있다. 우리는 안트로포스다. 태어나 낳고 말하고 쓰고 춤추는 자다. 후마니타스도, 초근대인도, 포스트모더니스트도, 동물도, 벌거벗은 삶도 아니다. 그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 "전혀 새로운 시대"따위는 오지 않았다. 426


통쾌한 르장드르의 부분. 데카르트의 논의를 통쾌하게 부수며 현실로 발딛는 이야기를 전한다. 


18세기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이 지배하는 시장에서는 국가가 풍요로워지고 증대한다. 즉, 이는 힘을 갖기 위한 원리가 된다"고 논한다. "더 적은 통치로, 더 국가로 향한다." "이것이 말하자면 18세기가 내놓은 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답은 항상 똑같았다. 시장에 대한 "개입의 기술"로, "국가적 관리의 기술화"로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 구자유주의자들은 "영원한 생시몽주의"라고 부르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673


푸코의 논의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시장이 국가의 감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시장의감시를 받는 것입니다." 674 라고 설명한 것이 반가웠던 이유는 <거울> 이나 '신을 거울에 비추면 보일까?' 등의 이야기에서 건너와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세계가 이렇게 밖에 흘러갈 수 없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 같았고, 그래서 푸코가 나중에 대안으로서 말하는 것이 궁금했다. 그게 바로 처음 인용한 '영생'이다. 자기에의 배려다.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성장하고 자신을 개선하는 일을 당부했다. 이것이 "진정한 사회적 실천"과 연결된다고 말했는데, 다소 맥이 빠지는 이야기 였음에도 한 가지 대안으로, 방법이 있긴 있겠구나 하는 위로였다. 


나는 가끔 물어본다. 미국의 금리 동결과 유가의 하락과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를. 말해줘도 알지 못하고, 안들 어쩔 수 없는 판임에도 궁금해 한다. 그러나 또한 나는 요새의 소설을 찾아보며 이를테면 김엄지나, 오랜만의 김경욱이나, 새로운 금희등을 찾아 보며 이들의 왜를 궁금해 한다. 그것은 이렇게 거대한 세계를 '나'라고 불리는 한 장면이 감지할 수 있는 최대치를 더듬는 과정이다. 이 책을 읽는 것 역시 그렇다. 말하자면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것이다. 이것이 나를 하나의 숫자로 충분히 셀 수 있는 일이라고 믿으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덕적 불감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왜 세계는 이 따위일까. 악마라도 있기 때문일까? 아니 악이랄게 별게 아니더라. 당신과 닮은 것이 악이다. 이렇게 만연한, 이런 망할 곳에서 과연 희망은 있을까? 를 두고 


바우만과 돈스키스가 대화를 나눈 것을 엮은 책이다. 그들의 치열한 생각은 프랑스 대혁명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을 횡단하고 이케아와 페이스북에 숨어있는 '악'의 모습을 캐 올린다. 모두가 우려하지만 대책을 궁리하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정말 뜻밖이거나 아주 잔인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 감수성의 말로는 어떤 것일까?" TV로 중계 되던 죽음에서도 밥을 먹었다, 9시에서 6시로 짜여지는 일과가 멈추지는 않았다.


틀에 부으면 변하는 모습처럼 사회는 언제든지 변할 태세를 갖추었다. 물건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해진다. 언제든지 더 나은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의 생태(이케아, DIY)와 인간의 꼴이 닮는다. 줄곧 미덕으로 지켜졌던 언어는 구식의 것으로 취급되는 가운데, 그러니까 요새 누가 '충성'이니 '배반'이니라는 말을 올린단 말인가. 유동적인 세계에서 유연하게 바뀌어야 할 것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미덕으로 불리는 '변화', 언제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개인 아닌가. 그렇다. 근대가 규정했던 지도 위 빗금-국가나 민족, 공간, 그 모든 것을 초월해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나의 '정체성'까지도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체성이라는 것은 사회화, 그러니까 사람과의 교류에 의해서만 유효하게 만들어지며 성장한다. 내가 '이러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이웃의 얼굴처럼 흔하게 존재하는 악의 구렁텅이를 넘어 인간의 불확실성에 기조한 정치 세태를 논하고 시장과 정치의 미래를 점치는 여정을 지나 두 학자가 겨우, 그래서 진실로 말하고 싶은 '희망'은 이것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도  "어쨌든 신은 우리 안에 공동체와 사회성의 힘으로서 존재하며, 사랑과 충실함은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언어" 264p(변주) 라는 것. 더 이상 개인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우엘 백의 예언과도 같은 소설이 얼마간의 사실인 듯한 가운데서도 이들은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것만이 세계에 가리워진 '도덕적 불감증'을 이겨낼 수 있는 대안이라는, 사회 정치 역사를 종횡하며 도착한 두 학자의 믿을만한 처방이다.   



만약 당신이 타자를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신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신의 피조물인 쪽은 우리이다. 당신은 오직 당신 자신의 글이나 당신 자신의 창조물만을 알 수 있다.


타자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옳지 못하고 위험하다.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오직 다른 사람과 함께,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의 관찰과 참여 속에서, 다시 말해 사랑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의미 있다. 364p


아멘을 올리고 싶은 구절, 손을 모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별 하나는 책에 대한 것. 내용에 대해서라면 권하고 싶다. (별 하나에도 불구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