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zygy 문학과지성 시인선 446
신해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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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 슨 이야기에 소리를 불어넣고

뜻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녹취록부분

 

 

 

 

기다림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제 '기다리는'

 

무능하게도 기다림은 기다리는 '행동'을 하는 ''만을 동그랗게 놓는다. 나의 기다림이 그 장소에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약속한다고 해서 기다림이 그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녀의 기다림이 할 일이다. 기다림은 마치 약속 모두를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 같지만, 이건 나의 기다림과 다른 이의 기다림을 같은 것으로 놓는 오류다. 그러므로 기다린다는 행위는 상대가 아니라 ''를 약속한다.

 

이 시집에서 화자는 기다리고 있다. 흔히 기다리는 '대상'을 기다림의 최후에 놓고 말하지만, 화자는 기다리는 '대상'에 대해 쓰지 않는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대상의 높고도 중요한 존재 때문이 아니라, 이 기다림이라는 사건에서 만날 나의 어떤 순간을 비로소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지도 모르고 기다리는 중에 탄생한 말들, 화자의 이지러짐을 따라가야 한다.

 

syzygy, 인간에게 없던 말을 인간의 세계로 가져오다

 

제목부터 보자. 'syzygy'라는 단어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있다. 해와 달과 지구가 일직선에 있는 순간이라는 뜻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상상할 수 있을까. 이들이 한 날 한 시 일직선상에 만나자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순간은 저마다의 지금을 오랫동안 움직여 이뤄낸 결과다. 그런데 해의 뒤에 달이, 달의 뒤에 놓인 지구를 따라가다보면 이 만남의 끝에는 지구에서 아주 작은 그림자로 하늘을 올려다 본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얼굴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그 얼굴은 달과 지구와 태양의 움직임을 알았을 이다. 그리고 그걸 알았기 때문에 외로웠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저지라는 때가 언젠가가 오리라는 것을 알았을 인간이기 때문이다. 'syzygy'를 탄생시킨 것은, 지구 밖의 움직임을 알리고 받아들이게 한 외로운 인간들이 만든 신화의 조각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syzygy'는 무엇일까. 오도커니 앉아서 테이블의 모서리를 만진다. 실물을 만지고 있는 사이, 테이블은 투명해지고 ''는 생각에 잠긴다. 실제의 자리가 생각의 모서리로 바뀌고 ''는 이 가까운 거리를 두고도 혼자있는 순간을 만들어 들어간다. '내가 만지작거린 건 생각의 모서리였을까./ 미물의 더듬이였을까.// 아니면 그저 이불 바깥으로 삐져나온 나의 발을/ 가만히 잡고 있었던 것일까.' 터치부분. 이렇게 ''가 다른 장소로 떠나는 건 그 장소가 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안이 이빨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입안이 이빨로 가득해서

나는 지금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구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면

배가 고파질 텐데.

우유가 마시고 싶어질 텐데.

 

뮤트부분

 

''가 기다리는 세계는 시저지와 같아서

 

<뮤트>는 시끄러운 소리를 죽일 때 나온다. 그렇다면 그 소리는 왜 시끄러울까. 주변의 소리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주변의 소리에 비해 시끄럽다는 말이지, 뮤트 된 소리 자체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고 할수 는 없다. 뮤트와 뮤트 아닌 음을 누가 어떻게 판단하는가. ''는 입안이 이빨로 가득할 만큼 독기가 어려있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독기는 이 장소에서 뱉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아주 이상한 분갈이를 보여준다. '영양사의 하얀 가운을 빌려 입고/ 하필 나는/ 뿌리가 살아 있는 머리카락을 화분에 심었다.// 거름도 주었다.'분갈이부분. ''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식물의 자리로 옮겨가고 싶다. 탁자의 모서리를 두드려 생각의 모서리로 이동한다. ''는 뮤트되지 않는 말과, 식물의 몸이 아니어도 되는 얼굴을 갖고 싶다. 화자는 그것을 기다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건 마치 시저지와도 같아서, 마치 지구의 바깥에 존재하는 곳인 것 같아서 고작 이만한 그림자를 안고 있는 ''의 힘으로는 가져올 수 없는 일 같다.

 

이곳을 만든 가장 오래된 신화를 부수고

 

그날의 도래를 화자는 어떻게 기다릴까. 우선 이곳을 만든 시간을 부순다. 제일 오래된 신화 하나를 망가트린다. 사악학 뱀이 이브와 아담을 부끄러움에 눈 뜨게 했다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쓴다. 뱀이 말한다. '아담의 갈비뼈를 모두 부러뜨려 종이봉투에 담'는다. 뱀은 '기합을 불어넣고', '심호흡'을 한다. '태권도 같은 것'을 한다. '-나라면 오래오래 기다릴 수 있었을 거야.' 뱀이 말한다. 뱀이 기다릴 수 있다고 한 건 무엇이었을까. 갈비뼈가 모두 부러진 아담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담이 없는 세상에 이브는 어떻게 있었을까. 이브로 말미암아 아담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이 시의 제목은 로맨스이다.

 

''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

 

그러나 시저지의 전말은 무엇보다 이 시에 있다. '기다림'을 설명하기에 이만한 문장은 없을 것이다. '마음이 탄다. 그러나 나의 맥박이/ 너의 심장에 맞춰 빨라질 수는 없다.// 면목이 없다. 그러나 너의 얼굴 위에/나의 이목구비를 그려 넣을 수는 없다.//우리는 성분이 다르니까//멋대로 바꿔치기를 할 수 없으니까//' exchange부분. 기다림 끝에 우리가 만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보다 더 나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에게 네가 가려지고, 동시에 내가 너에게 가려지는 부분의 어둠을, 이제껏 보지 못한 색의 깊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모르는 것 같다. 이 곳의 역사는 이 말의 뜻을 모른다. 다음 시에서는 이 역사를 아는 화자가 대답한다. '알아? 나는 여자인간이니까/ 생리를 한다.// 그렇지만 손에는/ 다른 종/다른 류의 피가 묻어 있기도 한다.' 여자인간부분. ''는 기다린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다시 쓰고, 생리를 하는 여자인간에 대해서 쓰고, 이 공기에 제대로 있을 수 없는 인간을 그리면서, 태양과, 달과, 지구가 한 선에 서 있는 날을 기다린다. 태양에 달이 귀속되지 않고, 태양에 지구가 매달리지 않고, 태양은 이들을 거느리지 않고, 셋은 이 지구에서 저마다의 질량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무엇으로 바꿔지거나 속해질 수 없는 '하나'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린다.

 

마지막으로 이 시집을 덮기 위해서는 개의 자리를 지나가야 한다.

 

검은 개가 똥을 먹었다.

 

검은 개의 혓바닥이 나의 영혼을 핥았다.

 

검은 개의 눈이 나를 피했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어서

 

나는 슬프고 더러웠다.

 

추문이 깊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비밀을

개와 나눌 수는 없었다.

 

개의 자리전문

 

 

눈을 가리고 만든 물건들 속에는

내 손이 섞여 있을거야

 

개의 눈을 생각한다. 존재의 다름으로 생겨나는 수치를 내가 가진 힘으로, 그래서 '억압'의 도구로 두지 않는 것이 '''개의 자리'를 지켜줄 수 있는 작은 방법임을 슬프게 고백한다. 개가 될수는 없다. 오해하지 말기를. 당신에게 개가 되라는 말은 아니었다. 개의 눈을 슬프게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 시에서 다 나가기 위해 다른 시를 불러 온다. '그러니 내 옆의 의자에 앉아/ 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으면 좋겠다.// 밤을 새워주었으면 좋겠다.// 눈을 가리고 만든 물건들 속에는// 내 손이 섞여 있을거야.// 눈을 가리고 그린 그림 속에서/ 나는 너를 더듬고 있을 거야. ' 이렇게 앉은 자세부분.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위해서 ''는 너무 많은 일을 했다. '베껴 슨 이야기에 소리를 불어넣고/ 뜻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녹취록부분. 남은 일은 이제 이것 뿐인 것 같다. 기다림의 자리에 수많은 ''가 남아서 만드는 날들을 '기다린다'. 시저지를 발견했던 사람의 얼굴을 내가 만날 수는 없지만, 그 얼굴이 되어볼 수는 있을테다. 또 하나의 'syzygy'가 탄생하게 되면 서로 이름 몰랐던 얼굴들이 자신으로 모여 ''를 이야기 하게 된다. 어떤 말도 뮤트되지 않는 진짜 '소리'를 들을 것이다. 내가 아직 지구에서 작게 서 있다. 다행스럽게도, 기다림은 기다리는 '행동'을 하는 ''만은 동그랗게 그곳에 분명히 놓을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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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1-1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밤 님의 시 읽기를 늘상 기대하는 1인입니다.

syo 2017-11-12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인입니다.
 
몬스터 콜스 - 영화 [몬스터콜] 원작소설
패트릭 네스 지음, 홍한별 옮김, 짐 케이 그림 / 웅진주니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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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는 이름 그대로 궁지에 몰려 있다. 


모든 걸 망쳐버리고 소리지르고 싶지만, 일상을 조금만 잃어도 어긋날 모든것이 어떻게 엉켜버릴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묵묵히 작은 빛이 금방 닫혀버리는 단추구멍 같은 일상을 꿰멘다. 토스트를 하고 쨈을 발라 먹고, 세탁기를 돌리고 학교가는 턱 끝에서 배꼽아래까지. 코너가 삐끗할 수 있는 것은 늘 꿈 속이다. 집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고, 엄마가 그 안에서 바닥을 잃지만 코너는 엄마의 팔을 잡아 당겨 올리지 못한다. 엄마가 암흑 속에 빠지며 꿈이 깬다. 엄마는 투병중이고, 아빠는 이혼했고, 학교에서는 왕따다. 코너에게는 주목나무를 바라보고 상상하는 일과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그려내는 일만이 위로다. 


코너는 믿을 수 없는 일을 진실로 믿는 것이 잘 되지 않는다. 엄마가 다시 건강해질 거라는 기대가 헛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걸 발설하거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다. 왜냐면 나는 아직 12살이고, 그러니까 아직 어리고, 그러니까 순진무구하게 믿어준다면 엄마가 다시 건강해질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착하게 빌고 또 빌게 되면, 엄마의 병이 낫게 되는 게 지금껏 읽어왔던 동화의 이야기니까. 그렇게 나아지지 않는 희망을 애써 삼키고 있을 때, 저 언덕 위의 주목나무가 일어나 저벅버적 걸어서는 코너가 있는 2층집 창문으로 고개를 드민다. 다짜고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 가지 이야기가 끝나면, 네 번째 이야기는 네가 해야 한다'고 겁을 주면서. 주목나무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가릴 수도 없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마무리도 없고, 그래서 무엇을 배우면 좋을지도 알 수 없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주목나무는 무너져가는 세계에 머물며 착한 아이로 남고자 하는 코너를 울린다. 기어코 울려 버리고, 스스로 모퉁이가 되어 코너가 잡고 돌아야 할 무거운 순간이 되어준다. 나를 잡고 있지만, 이제 곧 손을 놓게 되겠지만, 여기를 가볍게 돌고나면 다른 세계가 있다고 말해준다. 그 모퉁이는 누구나 돌아야 하는 인생의 어떤 점이다. 언젠가 너에게 전해준 종이가 반으로 접힐 때가 온다. 


나의 마음이었던, 나의 살이었던, 나의 미소였던 그곳은 더 이상 드넓지 않아서 너는 다른 면으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 누구나의 이야기는 반에서 반으로, 다시 반으로 접혀 들어간다. 더이상 접어올릴 수 없을 때 하늘의 별이 된다. 그 때가 누군에게나 온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맞아야 하는 죽음의 순간이다. 아직 나의 이야기가 남아 있기에 그 손을 놓을 때가 온다. '보내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야. '떠날 수 없음'이 '착한 것'은 아니야. 너는 용기 있게 너에게 주어진 삶을 맞아야 해. 주목나무가 들썽인다. 코너는 엄마와 깊게 헤어진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헤어짐을 헤어짐으로 맞아준다. 


한 개의 이야기가 끝나가고 있다. 너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네가 행복해질 거라는 약속은 없다. 교훈도 물론 없을 것. 너는 이 헤어짐을 만나서 무엇이 되었니? 더욱 네가 되었니? 진실로, 너만이 부딪혀 느낄 수 있었던 너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니. 코너가 할머니와 엄마가 꾸려준 방에 남아 엄마가 남겨준 그림을 한 장 한 장 들출 때, 네가 꾸었던 꿈이 실은 나의 것이기도 했다는 고백을 듣는다. 코너가 꿈에서 보났던, 주목나무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엄마의 그림으로 남겨있다. 네가 울면서 준비했을 헤어짐의 마음을 나 역시 잡는 것이 쉽지 않았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그림으로 살아나 한 장 한 장 넘겨지고 있다. 성장이라는 '코너'를 준비하기 위해서, 인생의 한 켠을 마련해두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어리다거나, 슬픈 이야기만으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크고 오래된 나무가 내 안락한 집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야 했다. 



*메리 올리버, 「기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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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문학과지성 시인선 473
송재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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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애하는 것을 거리두는 일에 대해




무엇이 되기 전에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음가'로 수 놓는 시가 있다. 때문에 의미가 나중에야 오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 사방에서 보고 되뇌인 후에야 쓰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아끼는 것을 대할 때 간신히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안감힘이 있는지. 다행히 둘 수 있는 그 짧은 곳을 '거리'라고 하자. '거리' 두고 싶은 시. 이 의미를 안다는 듯 저자는 초엽에 「햇빛은 어딘가 통과하는 게 아름답다」를 놓았다. 햇빛을 길게 읽는다. 그것이 어딘가를 통과하는 '긴 장소'는 어떤 것일까.  



햇빛의 혼잣말을 알아듣는다

불투명한 분홍 창이

내 손 일부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토록 섬세한 공소(空所)의 햇빛이 키우고,

분홍 스테인드글라스가 가꾸는,

인동초 지문이 

손가락뼈의 고딕을 따라간다


「햇빛은 어딘가 통과하는 게 아름답다」 부분.


햇빛이 창에 내리고, 창을 짚는 손가락이 있고, 창 밖에는 창을 올라타는 인동초가있다. 겨울일 것이다. 그러므로 햇빛 아스라한 정도도 알겠다. 바깥의 인동초와 안쪽의 손가락은 지문으로 만난다. '손가락뼈의 고딕을 따라간다' 부분에서는 숨을 죽이게 된다. 창을 스미는 손가락과 인동초는, 어떤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로 화해 아주 오래된 건물 한 채를 올릴 것 같기 때문이다. 햇빛이 어딘가 통과하는 것은 통과가 떠올리는 '장소'뿐만이 아니라 예사 시간을 포함해 '역사'에 이른다. 송재학이 천작하는 '예스러움'의 기미가 바로 이거다. 고어와 고문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스며들어 스스로 발화하는 문장의 유별함. 한 번에 읽어내릴 수 없는 특유의 호흡이 여기서 온다. 해서 이 시는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수평선의 직선은 표정이 좋다 곧장 아침에 일어나

서 지평선 시렁 위에 이불을 반듯이 개어 쌍희[囍]

자가 보이도록 올렸더니 구름처럼 가볍다 그렇다면

수평선 위에 다락의 속셈도 있겠구나 지난여름에 보

아둔 물웅덩이를 그곳에 옮겼다 어김없이 점심 무렵

여우비가 흩날렸다 수평선의 직선이 구불구불해졌

다 수평선 위로 속이 훤히 보이는 남해의 기차가 오

래 정차해서 눈이 부셨다 수평선이 멀어 이별의 모

서리는 생략되었지만 직선이 파르르 떨린다 일몰이

번지기까지 직선은 짐짓 침묵이다


「수평선이라는 직선」 부분.


유쾌한 것은 예스러움의 정서에 천진한 발상이 이렇게 어울린다는 것이다. 전작을 불러보자. '너가 인편으로 부친 보자기에는 늪의 동쪽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물 위에 누웠던 항천 하늘도 한 웅큼, ' 늪의 내간체를 얻다 부분. (언니가 여동생에게 보내는 내간체의 느낌을 살린 시에서 시인은, 아니 화자는 완전히 '언니'에 이른다)보자기에 '늪의 동쪽'을 챙겼다거나 새털 매듭을 풀자 '하늘이 한 웅큼' 나왔다는 천진한 부분은 딱딱한 문체와 극으로 어울린다. 지난여름에 보아둔 '물웅덩이'를 그곳에 '옮겼다'는 구절에는 '~은 ~다'는 단순한 구조에서 생동감이 더한다.


비를 피하려고 우산을 만들었다고, 아니 비를 응

시하기 위해 우산이 필요한 산족(傘族)도 있었다 고

대 언어 우산은 얼굴의 물기만 슬쩍 가린 셈이다 언

필칭 비와 눈[目]의 고독한 간격을 위해 우산이 필

요했다 물기 머금은 눈동자의 다른 이름인 우산이라

는 여린 글자는 비가 숭숭 새기도 하거니와 경사면

을 집적거리는 빗물을 어쩌지 못한다 아랫도리가 심

하게 젖어버리는 우산은 그야말로 나긋나긋한 물건

이다 왜 비에는 응시가 필요했을까 빗방울을 통해

거미줄을 알게 되었다는 우연도 있지만 대체로 비

에 젖은 것은 번지니까 비의 화석은 먼 우레의 핏방

울처럼 남겨져서 석기시대의 사료(史料)를 대신했다

비의 빗장을 뽑은 후 우산 그늘이 생겼다는 반성처

럼 오늘 비를 대신해서 '우산'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우산에게 들킨 비, 비에 들킨 우산의 말들은 교감 중

이다


「우산」 전문.


손잡이가 있고, 팡 하고 펼쳐지는 우산보다 더 현물일 수 없는 '우산'이 여기 있다. 이 시는 우산의 탄생같다. 나중에 비를 좀 맞게 되더라도 글자가 더 실체가 되는 순간을 믿어야겠다. 비로부터 시작된 물건이었을 우산에 대한 탐사는 '비를 응시하기 위해' 우산이 필요했으리라는 '우'산족의 이야기를 전하며 시작한다. '눈[目]의 고독한 간격을 위해 우산이 필요했다'는, 글자의 뜻을 만든 마음을 올리고 글자의 생김에 침전한 부분은 우산의 어디를 이루는 것일까. 메기고 받는 문장에서 의외로 빛나는 부분은 또 이런 것이다. '대체로 비에 젖은 것은 번지니까' 욕심 없이 평범하게 풀어버리는 순간. 제 힘으로 얼레를 푸는 연처럼, 시는 멀리 날아간다. 


시인은 시간의 눈금을 세기 위해 '석기시대', '구석기'등의 실제 사용되는 연표를 사용한다. 긴 시간을 더듬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얄지만, 셈했던 그 시기가 '진짜'인듯 매기는 부분에서 슬몃 웃음이 가는 것도 사실.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애써 조상한 마음을 더 읽는다. '비'와 '응시' 그리고 '우산'으로 이어지는 회로에서 마지막은 약간 아쉽다. 송재학의 시 대부분에서 오는 감정이다. 아쉬운 마무리. 어쩌면 아름다움이 의미 그 자체인 지경에서 더 이상의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가 되기 때문일지도.


그런가 하면 이렇게 긴 문장에서도 엉키지 않고 '결빙음'이 '청유형 거울'을 끌어오는 힘이란 여간하지 않다. '결빙음은 자문자답, 얼음덩어리 저수지를 통째로 끄/ 집어내어 읽으시라는, 꽝꽝 얼어붙은 갑오년 달성판/ 방각본을 삼동 내내 읽으시라는 청유형 거울이다' 겨울 저수지가 얼면서 울부짖는 소리는 군담소설과 다를 바 없다」부분.


『검은색』은 다른 색을 흡수하고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림자, 다른 것을 통과하고도 남는 색이다. 제목을 이리 단 것은 자신을 어쩌지 말아달라는 SOS요청인가. 검은색을 대하는 마음으로 거리를 지키며 더욱 읽는 대는 것이 이 제목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다. 물러서고 싶은 한 걸음의 거리에는 '빙의'라고 해도 믿을 만큼 지나간 옛 정서를 살려내는 말씨가 있고, 이 시집에서만 생생해 대하기 어려운 살아있으며-동시에 죽은 기이가 있다. 등등을 찾아내지 못한 아쉬운 글은 저수지를 싣고 가는 밤의 트럭」으로 닫는다. '5톤 트럭에 세상의 짐을 다 싣고도 여유롭다고 생각한 건 저녁 식사 때의 반주 탓이겠지'로 입을 떼는 어쩌면 비극의 순간, 혹은 꿈이라고 믿고 싶은 위험한 운행이다. 송재학은 그저 저수지를 지나가는 트럭의 풍경에서도 '생명의 서사'를 발견한다. '틀림없이 모서리가 약간 젖었을 짐 속의 모든 생명도 속도에 의해 순해진다/ 별빛을 기준으로 어딘가 멀어진다는 것의 순수,/ 새벽이면 가장 밝은 별 아래쪽에 저수지의 날것들을 부릴 예정이다' 저수지를 싣고 가는 밤의 트럭」부분. 







아침도 겨울이라 작년에 썼던 리뷰를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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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남성, 남성성, 그리고 사랑
벨 훅스 지음, 이순영 옮김, 김고연주 / 책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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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아이들과 여성들-그리고 남자아이들도-모두 공통적으로 이 비밀을 지니고 있다. 

아무도 남자들에 관한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111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몸에는 생물학적으로 섹스에 대한 갈망이 내장되어 있다고 믿지만 

사랑에 대한 갈망이 내장되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141




어떤 책은 경험의 밑바닥을 들어올린다. 썪고 부유해서 형체가 온전하지 못한 부분을 이렇게 들어 올려 보인다.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을 읽으면서 그랬다. 내가 느꼈던 무력함과 이해할 수 없던 부분들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감정을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볼 수 있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나는 마땅히 분노해야 할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갖게 되었다.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무엇을 더 할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더 큰 분노와 더 큰 화를 낼 수 있게 되었지만 힘이 들었다. 내가 아는 이들을 '미워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앞이 '막혔다'는 느낌이었다. 그 후에 남는 것은 허탈함과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는 기쁘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kai_rev님 트위터 캡쳐.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라면서 가장 많이 배우는 것 하나는 가부장제 시스템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단어를 전혀 모른다 해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가부장적 성역할을 떠맡으며 이를 가장 잘 수행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끊임없이 지도받기 때문이다. 52

 

 

'어릴 때부터 가부장적 성역할을 떠맡으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위 트윗은 '라면'이라는 한 요리가 가족의 구성원 중 어떤 이를 통해 나오느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읽히는지 잘 보여준다. (중요: 라면이라는 요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르게 읽히는 정도가 바로 성역할을 의미한다. 최근에 추석도 있었으니 긴 말없이 자신의 추석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드러나 있는 나의 성에 따라 '앉는 자리''하는 일'이 달라진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인간을 같은 범주에 놓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풍경이다. 추석 풍경이나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누가 앉아서 술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가, 누가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원래' 그것을 더 잘하는 사람은 없다. 누가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놓는가 만 있을 뿐이다. 위계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어떤 성이 다른 성을 억압하는지도 사족처럼 따라 읽힌다.

 

벨 훅스는 '가부장제'는 정신질환의 하나라며 강력한 훅을 날리는데 이보다 정확한 말은 없어 보인다. 이 단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가부장제'를 이해할 만한 열쇠가 없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어떤 종교보다 강한 믿음으로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 역시 그렇다. 내가 찾지 못했던, 그러나 찾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이 나가야 할 길은 바로 이 가부장제를 알고, 이 아래서 억압받는 남성과 여성이 바로 '우리'임을 알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가부장제 아래 체화된 이들을 공격하고, 잘못되었다고 분리하고 격리하는 건 우리가 건강해지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성들 대부분은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을 친한 친구에게든 치료사에게든 혹은 비행기나 버스에서 옆에 앉은 낯선 이에게든 말할 수 있다. 남성들은 가부장적 관습에 따라 일종의 감정적 금욕을 배운다. 이 가부장적 관습에서는, 아무 느낌도 갖지 않는다면 더 남자다운 것이겠지만 혹여 무엇을 느끼고 그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해도 그 느낌을 틀어막고 그 느낌을 잊고 그 느낌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남자다운 태도라고 가르친다. 30

 

누가, 그렇게 가르치냐고 물을 수 있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이끈다. '남자답게'라는 말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점을 포함한다. 아버지의 분노와 체벌로 크지 않은 이들이라도 창피를 주거나 눈치를 주는 식으로 성역할에 맞는 행동을 하며 자라왔다.

 

조지 와인버그는 <왜 남자들은 자신을 던지려 하지 않는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미 완벽한 상태에 있는 여성을 찾는데,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기본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 문제에 대해 말하기보다 빗장을 지르는 편이 더 쉬워보인다" 남자다운 척한다는 것이 말하는 바는 진짜 남자라면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33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이 표현해도 된다고 인정해주는 딱 한 가지 감정이 있다. 바로 분노라는 감정이다. ...어떤 사람이 고통이나 영혼의 괴로움을 감추려 할 때, 분노는 그것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34

 

나는 '아버지'라는 대명사가 슬픔 대신에 분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만큼 슬픈 사람도 없게 된다. 하지만 슬픔은 울거나 무너지는 슬픔의 방법으로만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의 감정으로 순화될 수 있다. 분노는 진짜 감정을 멀어지게 하고 주위의 공분과 두려움만을 살 뿐이다. 슬픔이 약함이라는 증거인 양 받아들인다. 그리고 또 약하다면 왜 안되는지 대답하지 못하면서 슬픔을 가린다. 어떤 문제에 정답과 오답은 있으면서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정답과 오답을 내릴 수 없었다. 감정에 대해서 왜 배울 수 없었는지, 배우려고 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가진 감정은 거의 ''. 그게 아니고서는 나일 수 없다. 내가 느끼는 것, 감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 이것은 '언어'를 배우고 어떤 ''을 배우는 것만큼 소중하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야 하며 강한 남자들은 자신보다 약한 남자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배운다.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남성들은 가부장적 사고와 실천을 순순히 따를 때 자신들이 받게 되는 주요 보상들 중 하나가 성적으로 여성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라고 일찌감치 배운다. 그리고 여성이 주위에 없다면, 그들은 자신보다 약한 남성을 '여성'의 자리에 놓을 권리를 갖는다. 143

 

성교를 뜻하는 남성 중심의 속어인 'fuck'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성을 fuck한다는 것은 그녀와 섹스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상황에서 누군가 fuck하는 것은 (...)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를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대개 폭력에 대한 암시이거나 폭력을 가하겠다는 위협이다. 사람들은 섹스와 폭력을 여전히 같은 단어로 사용한다. 섹스가 폭력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생각과 섹스가 명백히 폭력적이라면 강간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가부장제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153

 

남성은 섹스를 하면서 사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감정적 만족을 얻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섹스를 통해 살아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얻을거라고, 가깝고 친밀하다는 느낌과 기쁨을 얻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섹스는 그런 좋은 것들을 주지 않는다.

 

성에 관한 이야기는 내 이야기를 덧대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완벽하게 이 책을 읽을 이들을 격려하고 이해할 수없었던 것들을 설명하는데, 벨 훅스의 글은 어떤 심리학, 의학서보다 남성을 더 잘 설명하는 것 같다.

 

 

비어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비롯한 모든 남성들의 미래 모습은 우리가 부정하도록 훈련받아온 인간성의 모든 부분을 되찾는 것이다. 섹스에 대한 집착이 치유될 수 있으려면, 굳이 없어도 어떻게든 지낼 수 있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인간 경험의 본질적인 면을 되찾아야 한다. 서로에 대한 친밀감, 나이와 배경과 성을 막론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그들에게 연결되는 것,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즐거움, 열정적인 자기표현, 마음을 들뜨게 하는 갈망, 자신과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다정한 사랑, 나약함, 어려울 때 받는 도움, 편안한 휴식, 많은 사람들과 많은 종류의 관계를 맺고 가까이 지내는 것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303

 

이건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페미니스트 아동문학이나 페미니즘에 대해서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감정의 본질적인 모습을 알 수있는 것, 비어만이 한 말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능하다면 이들이 어른이 된 시점에서는 굉장히 많은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돼 있을 것이다. 나와 나의 세대가 7살 때 이것을 알았더라면, 13살에, 17살에 그리고 21살 때 알았더라면. 내 삶은, 내가 사는 사회는 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표현했을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배우고, 소통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을 '희망'을 갖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마음이 아파서 읽은 기록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했다. 내가 읽어본 최고의 치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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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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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몸'에서부터 시작하고

나는 저만치 '목소리'로 물러나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으로 '내'이야기의 입을 뗀다. 아버지 얘기는 '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건 몸이 그를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다리를 절었단다' 그는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 유공자가 된다. 유공자란, 국가가 몸을 뺏아간 대신 주는 증표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는 뭔가 불리한 일이 있을 때, (그건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유공자증을 내밀며 선처를 요구하거나, 혹은 존경을 요구하거나, 그래서 자신의 일을 '정당'한 것으로 혹은 모른척 넘어가 주길 바라는 사람이 된다. 아버지가 그런것을 극복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실패한 인간이 될 확률은 적었겠지만, 그걸 차치하고 나더라도 '내'가 선택한 노선은 암담하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굴절한다. '나'는 아버지의 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젊은 날 몸을 빼앗겨버린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아버지가 중년이 되어 보이는 어정쩡한 우격다짐만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몸'에 대한, 사람이 갖는 형체에 대한 이해가 생략되어 있다. 사람을 이토록 비굴하게 만드는, 이토록 약한 '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몸에 빚어진 상처를, 뚝뚝 떨어지는 유일무이한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다.


너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네가 듣지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이야기로


그런 '나'는 이야기를 매우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나 '진짜'에 대한 곡진한 이해 없이 머릿속으로만 시뮬레이션 하는 문답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그럴싸하게 넘어간다. 거의 재주다. 얼핏보면 문장에는 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 깊은 곳에 있는 내면, 개인적인 굴곡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략과 생략이 만난 궤변을 만들고, 그 궤변을 기반으로 다시 논리를 얹어 뻗어가는 이야기는 갈 수 없을때까지 가버린다.


'몸'은 사람이 갖는 첫 번째 '것'이다. 이 몸에 대한 '상처'의 반대편에는 어떻게 해도 상처받을 수 없는 '독백'이 있다. 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돌아오는 말도 없는 메아리. 때문에 '나'는 단편 소설분량만큼 내 이야기를, 나의 어쩔 수 없었음을 떠들어대지만, 그가 받을 피드백은 아무것도 없다. 이 소설에서 '나'는 오직 목소리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설명은 이렇게 피상적이다. '당시의 나는 젊고 의욕적인 교사였지만 노련하지 못했단다' 당신은 혹시 이런 사람을 아는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은 거의 '모든' 젊은 교사의 모습아닌가. 자신을 집단의 평균치에 앉혀 '안정'혹은 '인정'을 획득하고야 마는 장면이 지루할 정도로 이어진다.


사랑. 섹스 아니라 사랑


이렇게 목소리 뿐인 '내'가 할 수 있는게 뭐였겠니. 부른 배를 하고 교무실에 나타난 연주가 무릎을 꿇으며 '사랑'했다고 비는, 그녀 몸을 통째로 들고와서 바치는 전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속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되뇌이는 것 뿐이다. 하. 나의 사랑으로 연주의 배가 부르고, 부른 배 앞에서 나는 '존나 무서웠다' 이것이 '몸'없이 객체화된 인간이 오늘날 하고 다니는 사랑의 풍경이다. '내'가 믿는대로의 '내'가 사람들의 '평균'처럼 되는 것. 생각속에서 진정성을 얻는 것. 만질 수 없는 곳에서 말로서 안전해 지는 것. 그런 '내'가 진짜로 할 수 있는게 뭐였을까? 고귀해서 사랑이라는 말만으로 배가 불러오는 사랑? '나'는 사랑으로 섹스를 지우더니 '책임'까지 지워버린다. 


'뻣뻣해진 발목이 욱신댔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이것은 그런 내가 '너'의 집에 앞에가서 오랫동안 서 있으면서 겨우 얻게 된 '고통'이다. '나'는 거의 첫 번째로 내 몸이 겪는 고통에 대해 서술한다. 발목이 욱신거린다거나 무릎이 시큰거린다는 역시 보편적인 고통이지만, 내게도 있는 고유한 '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보통의 보통이 목소리를 꿰하며 안전한 곳에 있던 내가 드디어 나 하나의 고통으로만 이야기 될 수 있는 몸에 대해 쓰게 된 것이다. 고통의 연대는 그런 고유한 개인의 이야기의 고백과 대답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해없이 피상적으로 몰려다니는 무리를 수도 없이 본다. 웹상에서의 우리의 얼굴이 아닌가.


서사를 생략하고 이해를 궤변으로 수렴하는 중에 쌓아 올리는 논리는 어디서부터 부숴야 할까. 몸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말들이 너무나 많다. '○녀', '충'등의 말들. 세상에 없던 신종 인류를 만들고 코너로 몰아가는 이들의 얼굴은 무엇인가. 그들의 몸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 '두고두고' 건네지 못하는 말은 이 소설의 '내'가 하지 못하는 사과처럼 숨겨져 있는데, 진짜를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은 되려 분노가 된다. (이 맥락마저도 이해하는 이가 바로 약자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되버리는 끝간데. 이 소설이 비추는 것은 무엇일까.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파'하는' 것이다. 발목이 욱신댔고 무릎이 시큰거리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한 개인의 '몸'이 작동하지 않은체 저 사람의 밑바닥을 가보는 용기 없이, 내가 닥친 상황만 크게 떠들어 대는 통에 '목소리'가 몸보다 두 배, 세 배로 살아 있는 방식을 입만 살아서, 비죽이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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