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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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몸'에서부터 시작하고

나는 저만치 '목소리'로 물러나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으로 '내'이야기의 입을 뗀다. 아버지 얘기는 '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건 몸이 그를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다리를 절었단다' 그는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 유공자가 된다. 유공자란, 국가가 몸을 뺏아간 대신 주는 증표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는 뭔가 불리한 일이 있을 때, (그건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유공자증을 내밀며 선처를 요구하거나, 혹은 존경을 요구하거나, 그래서 자신의 일을 '정당'한 것으로 혹은 모른척 넘어가 주길 바라는 사람이 된다. 아버지가 그런것을 극복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실패한 인간이 될 확률은 적었겠지만, 그걸 차치하고 나더라도 '내'가 선택한 노선은 암담하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굴절한다. '나'는 아버지의 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젊은 날 몸을 빼앗겨버린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아버지가 중년이 되어 보이는 어정쩡한 우격다짐만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몸'에 대한, 사람이 갖는 형체에 대한 이해가 생략되어 있다. 사람을 이토록 비굴하게 만드는, 이토록 약한 '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몸에 빚어진 상처를, 뚝뚝 떨어지는 유일무이한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다.


너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네가 듣지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이야기로


그런 '나'는 이야기를 매우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나 '진짜'에 대한 곡진한 이해 없이 머릿속으로만 시뮬레이션 하는 문답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그럴싸하게 넘어간다. 거의 재주다. 얼핏보면 문장에는 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 깊은 곳에 있는 내면, 개인적인 굴곡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략과 생략이 만난 궤변을 만들고, 그 궤변을 기반으로 다시 논리를 얹어 뻗어가는 이야기는 갈 수 없을때까지 가버린다.


'몸'은 사람이 갖는 첫 번째 '것'이다. 이 몸에 대한 '상처'의 반대편에는 어떻게 해도 상처받을 수 없는 '독백'이 있다. 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돌아오는 말도 없는 메아리. 때문에 '나'는 단편 소설분량만큼 내 이야기를, 나의 어쩔 수 없었음을 떠들어대지만, 그가 받을 피드백은 아무것도 없다. 이 소설에서 '나'는 오직 목소리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설명은 이렇게 피상적이다. '당시의 나는 젊고 의욕적인 교사였지만 노련하지 못했단다' 당신은 혹시 이런 사람을 아는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은 거의 '모든' 젊은 교사의 모습아닌가. 자신을 집단의 평균치에 앉혀 '안정'혹은 '인정'을 획득하고야 마는 장면이 지루할 정도로 이어진다.


사랑. 섹스 아니라 사랑


이렇게 목소리 뿐인 '내'가 할 수 있는게 뭐였겠니. 부른 배를 하고 교무실에 나타난 연주가 무릎을 꿇으며 '사랑'했다고 비는, 그녀 몸을 통째로 들고와서 바치는 전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속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되뇌이는 것 뿐이다. 하. 나의 사랑으로 연주의 배가 부르고, 부른 배 앞에서 나는 '존나 무서웠다' 이것이 '몸'없이 객체화된 인간이 오늘날 하고 다니는 사랑의 풍경이다. '내'가 믿는대로의 '내'가 사람들의 '평균'처럼 되는 것. 생각속에서 진정성을 얻는 것. 만질 수 없는 곳에서 말로서 안전해 지는 것. 그런 '내'가 진짜로 할 수 있는게 뭐였을까? 고귀해서 사랑이라는 말만으로 배가 불러오는 사랑? '나'는 사랑으로 섹스를 지우더니 '책임'까지 지워버린다. 


'뻣뻣해진 발목이 욱신댔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이것은 그런 내가 '너'의 집에 앞에가서 오랫동안 서 있으면서 겨우 얻게 된 '고통'이다. '나'는 거의 첫 번째로 내 몸이 겪는 고통에 대해 서술한다. 발목이 욱신거린다거나 무릎이 시큰거린다는 역시 보편적인 고통이지만, 내게도 있는 고유한 '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보통의 보통이 목소리를 꿰하며 안전한 곳에 있던 내가 드디어 나 하나의 고통으로만 이야기 될 수 있는 몸에 대해 쓰게 된 것이다. 고통의 연대는 그런 고유한 개인의 이야기의 고백과 대답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해없이 피상적으로 몰려다니는 무리를 수도 없이 본다. 웹상에서의 우리의 얼굴이 아닌가.


서사를 생략하고 이해를 궤변으로 수렴하는 중에 쌓아 올리는 논리는 어디서부터 부숴야 할까. 몸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말들이 너무나 많다. '○녀', '충'등의 말들. 세상에 없던 신종 인류를 만들고 코너로 몰아가는 이들의 얼굴은 무엇인가. 그들의 몸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 '두고두고' 건네지 못하는 말은 이 소설의 '내'가 하지 못하는 사과처럼 숨겨져 있는데, 진짜를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은 되려 분노가 된다. (이 맥락마저도 이해하는 이가 바로 약자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되버리는 끝간데. 이 소설이 비추는 것은 무엇일까.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파'하는' 것이다. 발목이 욱신댔고 무릎이 시큰거리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한 개인의 '몸'이 작동하지 않은체 저 사람의 밑바닥을 가보는 용기 없이, 내가 닥친 상황만 크게 떠들어 대는 통에 '목소리'가 몸보다 두 배, 세 배로 살아 있는 방식을 입만 살아서, 비죽이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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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처럼, 우리는 1+1이 무엇인지 안다고 대답하지만, 안다는 지점을 좀 더 넓혀 1+1이 그 대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염두하지 않는다. 우리는 1+1의 값이 2와 같다고 말하지만, 이건 1+1과 2도 과연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안다는 것은, '바라보는 이들'의 기호이며 약속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1+1과 2같은 것 대신 유영과 주혁을 보내 '안다'는 것을 얇게 쪼갠다.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 일방적인 발화라는 점을 부디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이야기 한다. 

 

아는 것에 익숙하며 그것을 말하는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 여러명 나와 유영을 안다며 말을 건다. 그들에겐 유영이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는 상관없다. 왜냐면 내가 당신을 아주 잘 알고, 당신은 이렇게 예쁘고, 그때 나와 술을 재밌게 마셨고, 지금도 그렇게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자들은 유영과 아주 가까운 자리를 선점하려고 하지만, 유영은 자신을 안다고 하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더 나아가 그가 안다고 말하는 그 여자가 아니다. 유영은 그가 아는 자신으로부터 분리된다. 남자들이 무엇보다 크게 당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되기'의 유영의 전략은 효과적이다. 


그러나 당신을 잘 안다는 사람이 이렇게 오랜만에, 그것도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만남이 건강한 관계일까를 생각해 본다면, 유영이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보내는 시간에 불쑥 들어와 수 년전의 자신을 호명하며 리듬을 깨는 일의 무례함을 생각할 수 있다. 유영을 알은채 하는 남자들은 유영을 만나서 너무 다행스럽지만 유영에게는 하나도 다행스럽지 않다. 무례하게 들어오는 자들에게는 무안을. 이런 유영과 대화가 가능할 때는, 바로 상대가 나를 모르는 사람으로 둘 때 뿐이다. 해서 남자는 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믿는 것으로 미루고, 그마져도 이내 '똑같은' 사람이지만 아주 '닮은' 다른 사람으로 밀어내고야 만다. 


여기에 나오는 남자들은 모두 유영을 잘안다 생각한다. 잘 알기 때문에 유영이 조용히 책을 보는 테이블, 건너편에 허락도 없이 거침없이 앉아서는 말을 걸고 수년 전 출판사에서 다 함께 회식을 한 번한 것을 인생의 기억인것처럼 알은채 하며 인사를 해 온다. 이 뿐인가, 자신이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유영에게 왜 술을 먹고 다니냐며 화를 내고, 급기야 욕을 하고, 사과를(?) 받아내려 한다. 마지막은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이다. 이런 레파토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횡횡했다. 이에 가느다랗고 유약해 보이는 여자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말을 하는데. '저를 아세요?' 이건 다시 말해 당신들이 말하는 그게 사랑이라면, 나는 내가 아니어서 너를 모르겠고 말겠다는 선언이다. 이제까지 없던 '언어', 이것은 남자들이 '알아왔던' 여자의 말이 아니다. 유영은 다르다. 유영은 얼마든지 자신을 버리고도 나를 세울 수 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은유가 아름답고 상냥한, 아주 교훈적인 영화다. 이 교훈은 아주 값지지만, 내가 알고 있는 너를 버릴 수 있을 때 만 비로소 보인다. '사랑'이 그걸 가능하게 하지만 그건 거의 기적같은 일. 우리가 흔하게 착각하는 것은 '사랑'자체가 기적같다는 소문이다. 사랑은 정말 아름다워, 소중해, 이렇게 하늘만한 크기의 언어로 빚어내는 사랑은 결국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홍상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해 구질구질해 보이지만, 구절구절 잘 설명하고 있다. 사랑이란, 어제도 봤고, 엊그제도 봤고, 그렇게 몇년을 함께 해온 사람을 매일 새롭게 '알아가야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늘 겸손하게 두는 일이다. 이것은 사랑에 결코 익숙해 지지 않는 일이다. 너의 다정이 당연하지 않으며, 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일은 죽는 날까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없던 언어로 되받아오는 '여자'에 깜짝 놀라는 남자들과, 그 여자를 모르는 사람으로 받아들여 다시 알아가고자 존댓말을 쓰는 남자가 있다. 영화는 뜬구름 잡는 사랑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비록 술취한 김주혁의 구부러진 발음이지만. 곡진하고, 잘 이해된다.  


유영이 술자리에서 나와 낮은 담벼락 아래서 우는 장면이 있다. 유영이 구부러져서 울때, 영화 내내 유영을 찾아 헤맨 주혁이 드디어 유영을 만난다. 유영이 술을 먹을 때 기억을 잃는지, 잃어버린 척 하는지, 자신도 안다는 것을 모른다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유영은 그저 자신보다 더 자신을 알은채하며 떠드는 이들에게 '당신이 안다고 말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영이 우는 것은 중요하다. 술먹고 우는 일은 자신도 알기 어렵고 우는 일이 몸에 다녀가는 일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가지의 이유가 한데 모여 울음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는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없다. 언어가 불가능한 사태에 처하게 된 것이다. 주혁은 유영에게 왜 우냐고 묻지만 대답을 얻을 수 없다. 사실 그건 이유를 알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주혁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그저 둔다. 우는 일은 우는 일. 당신이 우는 일에 내가 있어 다행인 것이 그 장면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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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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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하면 아버지
술은 예전 아버지들이 마셨다. 물론 아직도 마시고 계시고. 바깥의 일이 힘들어서 집에 와 술을 드신다. 1. 골병 드시는 아버지. 2. 분노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집안의 것을 부시고... 비극으로. 3. 아침이 밝으면 잘못했다고 빌고는 아버지, 4. 혹은 뻔뻔하게 집을 다시 나서는 아버지. 5. 집 밖으로도 나가지 않는 아버지.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술은 왜 아버지만 드시나. 아버지만 힘들었나. 다른 이들은 아버지의 힘듦으로 과연 살만했나. 아니 아니 아니,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 뿐이었던 것은 아닐까. 


'여자'라는 개인이 마시는 술
이곳은 2010년도 이미 중반, <봄밤>에서 요양원을 며칠씩 탈주해 술을 마시는 영경의 알콜 중독 증상은 자해에 가깝다. 자해는 잘 보이지 않는 폭력이지만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게 되면 주위 사람이 감지 할 수 있고 곧 문제를 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영경에게는 그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그러니까 영경 자신 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그마저도 사라지고 있다)... 그녀는 국어교사였다. 남편과 이혼하고 뒤이어 양육권을 빼앗겼다. 그리고 이 사이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어, 큰 언니 영선이 '차라리 잘된 일이니 내버려두라'고 말했고 둘째 언니 영미가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던 일이다. 영경이 사라진 아이에 대해 경찰에 납치 신고를 하고 소송을 준비하려고 했던 때였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은 
비극으로 포장되는 예정된 사건이 아니라 
단 두 줄로 서술된 사건에서 영경의 절망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이를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서 두 배의 절망이다. 함께 나고 자랐을 자매가 그녀를 위하는 마음으로 건넸을 이야기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무감각하게 영경의 사태를 지나가는 일이야 말로 언제고 당신의 인생에 나타날 '비극'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큰 언니는 이 싸움에서 영경이 곧 깨질 계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말할 수 있는 일이며, 인간의 일을 하늘에 맡기는 둘째 언니의 말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 언니들의 말이 또한 뜻하는 것은 영경의 행동을 이해하거나 응원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란 거다. 이렇게 두 개의 문제가 있다. 가부장제의 폭압과, 그 압력에 대응할 생각도 못하고 수그러져버리고 마는 언니들의 모습. 언니들의 발언은 이혼과 양육권으로 말미암은 발화가 아니라 그들이 삶에 대해 갖는, 그것도 영경보다 더 오랜 시간 축적해 놓은 '태도'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영경의 삶에서 틀렸다) 이것이 진정으로 내가 어쩔 수 없으며, 미연에 방지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언니들과 연락을 끊고 지내지만, 영경은 이렇게 비롯되는 고통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형편없이 기억할게
그런 영경이 수환을 만난다. 그때 만남을 일러 영경은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기억한다. 이런 놀람은 다시 말해 영경에서 얼마나 행운이 형편없었던가, 를 생각해볼 수 있다. 수환은 의료보험 발급도 되지 않는 취약계층이다. 15년간 쇠를 만지고 한때 돈도 많이 벌었었지만 위장 결혼등으로 모두 날리고 남은 것은 류마티즘으로 손쓸 수 없는 몸과 제대로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가난뿐이다. 이들은 십 몇년을 함께 살다가 요양원에 함께 입원한다. 독한 약으로도 병세를 멈출 수 없는 수환과 겹쳐지는 나날이 병세를 악화 시키는 영경. 죽음으로 병과 가난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들이 선택한 길이라면 길인데, 삶에서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1보다 큰지 작은지'를 병원 침대에서 가늠해 볼 뿐이다. 이 지경에, 영경이 발음도 어려운 '도스토예프스키'의 구절을 읽어주며 대화를 하는 게 좀 이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직업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고 그나마 '생각'을 좀 하는 것 뿐이다. 수환은 그런 영경의 말을 듣고, '당신은 너무 똑똑해서 섹시하다'고 이야기한다. 영경을 존중하며 영경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응원한다. 그게 알콜중독을 더 심화시키는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사랑을 하지만 이것이 삶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떻게 이 일들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건가

권여선의 소설에는 지적-계급이 나뉘는 이들이 만나게 되었을 때 벌어지는 장면이 자주 보인다. 특히, 주로 소위 '엘리트 여성'이 주인공으로, 그녀를 둘러싸고 엘리트가 아닌 여성 혹은 남성과 만났을 경우 어떤 충돌이 있는지를,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적는다. 배운 그녀들이 술에 몹시 취하는 삶을 보여준다. 그녀들은 왜 그렇게 술을 마시게 되었는가. '생의 비극을 견디는 주정뱅이들에게 건네는 쓸쓸한 인사'라는 말은 더 없이 매혹적인 카피이지만 '비극'은 비극적인 일을 당하는 이에게만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극은 대체로 최선을 다함, 어떻게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치기 쉬운 '계층'의 이들에 한한다.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고통'이라는 것은 없다는 거다. 영경의 비극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인가, 수환의 비극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나. 몰리고서야 만난 이들의 만남을 비극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벌어진 상처는 얼마든지 아름답게 쓸 수 있다. 아파하고 우는 일을 아름답게 쓰는 일도 쉽다. 그 상처, 왜 벌어졌는지를 이야기 해야 한다. 


'꼬추의 발광'만큼 우스운 '초추의 양광'

사랑을 해도 그것이 삶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봄밤>. (엘리트)여성은 스스로 해방되지 못하며 다른 이를 구원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봄밤>에서 폭력적인 가부장제의 억압에 영경이 제정신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일 수 있고, 자신의 앎 따위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불법체류자)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건만을 축소해 놓고 보았을 때 '무지'(불법체류자의 주거구역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관주)를 막을 수 없어 벌어진 일에 여전히 '무지'로 대응할 수 밖에 없는(약자를 미워하는 약자로 남는 관희) 까닭일 수 있다<카메라>. 최고조는 <층>에서 나타난다. 박사과정을 마친 여자는 '초추의 양광'니 같은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이것을 들은 인태초밥의 남자는 '꼬추의 발광'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처럼 이들은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봉쇄된 것 같다. 그는 그저 '모든 게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가 무릅쓰고 '초추의 양광'이라는 말이 평소 쓰이는 말인가요' 내지는 '제게는 그저 꼬추의 발광으로 들립니다'라고 가름했다면 여자는 픽하고 웃거나, 같잖은 한자어의 조탁을 부끄럽게 여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연은 지들만 웃긴 농담의 '배운(남)자들의 세계'에서 가장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들과의 대화는 한 시도 참을 수 없는데, 조금이나 다른 미래를 생각하게 했던 남자에게, 예연과의 만남으로 작은 미래를 상상하는 남자에게 우습게도 이 하찮은 '꼬추의 발광'이 넘을 수 없는 산이다. 러지 못한 이들의 말로에는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라는 여자의 독백뿐이다<층>. 

대화의 가능성
권여선이 주로 그리는 여성 화자들이 소통 가능한 사람으로 꼽은 남성 화자들은 이혼하고, 돈 없고, 의료보험증도 없는 취약계층이거나<봄밤>, 바보 누나가 있고, 그런 누나가 너무 싫고, 헬스장과 일식집의 일을 병행하는 이<층>거나 눈이 다 멀어가 보르헤스 비슷하게 생각을 수놓아가는 중년의 소설가거나<역광>, 조교가 된 것(이 작은 과정을)무슨 성공의 교두보인 것처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카메라>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류 남성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이라는 것. 때문에 역으로 억압된 가치에서 보다 자유롭고, 여성 화자들과 소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적인 지는 소설에서 점칠 수 없지만)

이 소설은 2010년도 중반의 것이다. 이 책 이전 실제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여성은 자신을 구속하는 삶을 탈출하기 위해 앎을 구축해왔다. 소설의 여성들을 삶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 되돌아온 것은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 없음을 확인하거나, 대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경우 이미 삶의 끝간데 와 있는 수순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보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남성화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들을 소설에서 굳이 크게 그리는 대신 소설 바깥을 보면 선명해질 일이기 때문에. 다시 소설로 들어오면 그를 피해 달아났을, 달아나 다른 가능성을 찾는 여성화자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안녕! 주정뱅이!
여기서 잠깐 그려지는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남성들의 모습이 궁금한가. '몇 번을 말해, 김선생? 내가 지금 상태가 심히 안 좋다고.' <층>. 자신의 상태가 안좋으면 옆에서 계속 술을 마셔줘야 하는 것인가. 술자리를 피해 달아는 여자 선생에게 욕을 지껄이는 것으로 화면은 바뀐다. 이런 사태에 권여선의 일단의 대답은, '커피잔에 술을 따라' 마시고, 이들이 아닌 다른 대화의 가능성을 찾는 여성의 출현이다. 몸에 술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파괴할 방법 외에는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고, 한 밤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김수영의 시 '봄밤'을 읊는 여성의 탄생. 다수의 사람들은(수적으로는 아니나 질적으로)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나 듣지 않고, 이 소수(수적으로는 아니나 질적으로)의 사람들은 이들은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들어보려고 노력한다. 이 사이에 갇힌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녀들이 주체적으로 술을 마시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면 이 글을 접고 술을 마셔야겠다. 그녀들은 언젠가 술을 적당히 마시게 될 것이다. <안녕 주정뱅이>가 그런 의미였으면 좋겠다. 




*<역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기는 정확히 그렇게 한 줄 알겠지만 달은 결코 자기 감정을 격조 있게 표현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질투나 원한을 품을 수 있고 그에게 닥친 불행에 쾌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그토록 천하게 표현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예술가로서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무력하게 다짐했다.' 역광 151


권여선은 소설에 계급 혹은 여성-남성의 구도를 의도하고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실내화 한 켤레>의 수학 선생의 대사로 보아 '수학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세상 천지에 그냥이 어딨냐 말이야, 그냥이?' 권여선이 천착하려고 했던 것은 좀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비극에 대한 것일 수도 있었을 것같다. 그러나 이런 물음은 예술의 세계에서나 고혹적이다. 작중의 인간을 비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후 사정이 필요한데, 이 사정들은 아무리 짧게 서술되어도 맥락이 여간 현실에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것이 없다. 이건 작가의 천의무봉할 실력 때문이 아니라, 그저 어디서도 부조를 뜰 수 있는 현실에 만연한 비극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이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인간의 비극에 대해 소설의 의문이 든다면 '고통받는 인간과 고통하는 인간'을 설명한 소설의 말미 신형철의 해설을 보면 도움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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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황지우, 「길」중에서








비자림에 왔다. 비자나무 숲이라는 뜻이다. 숲을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비자나무는 아주 커서 그들이 일군 숲에는 해가 들어오지 않았다. 버스로 오기가 불편한 곳이라서 차를 가져온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중년의 부부가 많았다. 어떤 부부는 키가 꽤 컸다. 얼굴을 다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썼고, 손을 꽉 잡고 걷는 걸 보며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그 뒤였다. 천천히 걷는 것을 애썼던 것은 아니었지만 더할 수 없을만큼 천천히 걸었던 것은 나무를 설명하는 표지판이 나오면 그때마다 쪼르르 가서는 그걸 다 읽고, 이게 그 나무라는 것을 한 번 보고 다시 길가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까 내 앞에서 걸었던 사람들이 벌써 사라져 없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내 앞에 있었다. 그들은 걷기는 했지만 자꾸 뒤쳐지고 있던거였다. 가만보니 남자의 오른팔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지지하지 않는 지팡이였다. 여자와 남자가 잡은 손에는 힘이 깊게 들어갔는데 그것은 남자의 왼쪽 다리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왼쪽 다리는 춤을 추듯이 움직였다. 남자의 원함과 상관없이 비틀거렸는데, 그걸 붙잡는다는 듯 여자는 미묘하지만 그가 통제하기 어려운 보폭에 꼭 맞추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잡은 손은 남자의 조금 불편한 다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사라질 위험에 처한 것처럼 사람들은 사진을 찍었다. 몰린 까닭인지, 휴가지에서는 더했다. 비자림에도 소리가 가득했다. 남길 수 있다면 더 좋은 모습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진을 찍기에 더할 나위 없는 사람들이었다. 젊거나, 같이 왔거나, 지금이 행복하거나, 혹은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 남자는 다리를 절었는데, 그 저는 모습이 완벽했다. 원래부터 다리를 절었던 사람처럼.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을것이다. 두 다리는 힘껏 뛰어본 적이 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 언젠가 축구를 했을 것이고 한 시간이 걸리는 비자림을 이십분이면 다 돌고 남았을 시절이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보통의 예상이라면 그 여자는 두 다리가 건장한 시절의 남자를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뛰어오는 남자를 만났던 누군가가 그녀라는 가정도 이상하진 않다. 다리가 불편하든 불편하지 않든, 그 남자가 '그 남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으로 여자의 마음이 뚝 떨어졌던 일은 있었겠지만 그게 마음의 변함을 의미하지는 않았을거라는 것도. 

남자는 지금 다리를 절게 된 자신을 얼마나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어디까지 나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적은 없었을까. 내가 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에 맞딱들이게 된다면, 나를 혼동하지 않고, 나라는 몸에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징후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손바닥을 들여다 보았다. 갈라진 손금. 다소 젊었을 적 비자림에 왔었고, 혼자였고, 어떤 부부의 뒤를 걸었다.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 '당신의 다리만을 사랑한 것은 아니에요,' 라는 여자의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게 내 다리에요.' 라고 말해야만 했을 남자의 심정은 너무 아파서, 따라할 수 없었다.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어디까지 당신에게 보여야 할까. 보일 수 있을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중년의 부부였던 것처럼 비자림을 걸었다. 원래부터 비자림을 천천히 걷고 있는 중년의 부부처럼 지금도 비자림을 천천히 돌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얼굴을 각각 가린 챙 넓은 모자의 테두리가 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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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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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중요한 것은 제목에 다 나와 있습니다.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이 실은 계급투쟁이라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결과이며 이제 시작된 문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적습니다. 과연 지젝은 실제, 지금 사회에서 가장 밀접한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고민하는 이일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 어디에도 북쪽 따위는 없다는 것을 진즉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책을 만나면 북쪽을 만난 양 마음 한 켠이 나아지는 기분이 듭니다. 아주 얇은 책이고 삼십 분이면 다 읽을 수 있지만, 생각은 한 달 보다 더 멀리 갈 것입니다. 


유럽 난민 사태는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하는 군사 분쟁등의 위기로 2014년 말까지 6천만 명이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로 발생한 실향민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습니다.(위키백과) 난민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지만, 당도하고 나서도 유럽 사회가 난민을 얼마나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우려로 더 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실향해서 다른 땅을 찾아 나선 사람들. 난민에게 우선 쏟는 독설은 이런 것입니다.  


난민들이 배우게 될 뼈아픈 교훈은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 심지어 노르웨이 안에서도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이리라. 난민은 자신의 꿈을 스스로 검열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 속에서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 66


비단 '난민'에게만 이르는 말일까요? 제게도 참 아픈 말이었습니다. 저는 난민이 아닌데도 늘상 불안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현실속에서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일침합니다. 게으르게, 외부의 탓으로 끊임없이 이 괴리의 탓을 돌리며 지냈던 것은 아닌지 말이지요. 난민이 유럽사회에 도달하면서, 유럽사회가 난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다른 생활방식, 종교, 다른 위치, 그 밖에 여러가지 문제들 앞에서 지젝이 사회에 제안하는 것은 두 가집니다. 첫째,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제한 내에서 다른 생활방식에 관용하는 것. 이 두 가지 약속 위에 우리가 해야할 것은 사적이고 감정적인 연대가 아닌, 계급 투쟁이라며 우리가 비로소 싸워야 할 본질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서는 '가난'을 이해하려는 자의 텍스트르 가져와 통렬히 비판합니다. 


주인님, 가난은 어떤 것의 결여가 아니라, 진짜 페스트입니다. 그 자체로 독성이 강하고, 콜레라처럼 전염되고, 더럽고, 죄악이고 악덕이며 절망입니다. 그저 몇 가지 증상만 꼽아본 겁니다 가난은 어떤 경우에도 멀리해야 하는 것이지 연구 목적의 대상이 아닙니다...


가난은 독자적 지위를 가지는 존재론적 실체다. 가난은 단지 돈이 거의 없다거나 아예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가난은 어떤 사람의 불운한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단히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 선량한 부자가 부유함을 누리면서 자기는 가난한 사람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틀렸다. 우리가 사회적 위상(계급)을 만들었다고 해도 모두 동등한 인간이라는 휴머니티의 영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99


그렇습니다. 사적이고 감성적인 연대 부분에서 세월호가 생각났습니다. 느슨한 연대를 비판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테지만, 연대 이후를 바라야 진짜 변화가 시작됨을 알아야 한다는 그답습니다. 기억하고 마음으로 아파하는 일은 쉽지만, 그래서 어디 꿈쩍이라고 하던가요. 세월호 참사는 노란 리본을 가방에 다는 것만으로 해결이 멀고 멉니다. 그래서 마지막, 회심의 일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이다"(이 속담은 간디의 좌우명과 흡사하다. "너 자신이 네가 세상에서 보기 원했던 변화가 되어라") 그럼 사람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노력을 방기하는 것은 게으름의 합리화일 뿐이다. ...우리가 의지할 위인은 없다는 뜻이다. 113


내가 의지할 위인은 없고, 내가 사는 지금은 더 무서울 수도 없이 진짜입니다. 거대한 아귀가 입을 벌린 방향으로 밀려들어갑니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더를 외치는 자본주의 팽창 속으로요. 그것은 존재를 초월해 우주라도 된 것일까요? 죽음을 알지 못할까요? 그럼에도 '언젠가 터져버릴 것'이라는 예언은 이미 시작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나의 위치에서 조금도 내려가지 않은 채 마음 좋게 가난을 연민하든가, 나라를 등지고 유토피아인것처럼 다른 나라를 향해 동정을 사거나의 한계 속에서 '너 자신이 네가 세상에서 보기 원했던 변화가 되어라'개인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이 아귀를 우주로 돌려보내는 방법은, 아귀를 만든 사람의 손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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