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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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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감. 이 명백함을 지울 수가 없다

 

 

빛을 다 흡수해 버린 듯 검은 사람이 보도블록을 걸어간다. 활달한 걸음과 한 손에 들린 책. 상반신은 보이지 않고 대신 뒤편으로 그림자가 완전하게 서있다. 그림자의 건장한 체격으로 말미암아 걷는 사람을 ‘그'라고 불러본다. 그는 왼편으로, 왼편 상단으로 곧 사라질 참이다. 이 프레임에서 너덧 발자국만 더 걷는다면 보이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림자. 한가운데서 사선으로 시선을 가르는 그것은 발뒤꿈치에 붙어 물끄러미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보도블록 위에는 그림자만 길게 남겨질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낮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가 걸어 나가고 그를 바라보는 그림자만 남는다. 당신과 나의 어제를 그만두어도 오래 남는 저릿함처럼. 불멸은 불노가 아니라 끈질긴 기억인 것처럼. 그러나 그림자와 기억은 실체는 아니다. 그들은 왜곡을 일삼아 부풀리는 것은 일도 아니며 조롱하는 것도 순식간이다. 표지의 인물처럼. '그'보다 훨씬 키가 큰 그림자를 보라. 이미 그가 아니다. 그런데 그림자가 자신을 만들어낸 사람을 바라본다. 김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기억’을 주인으로 놓는데 이르렀다. 그렇다면 나와 그림자는 같은가? 나는 기억과 같은 질량을 갖는가? 기억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가끔, 낯선 곳에서 섬뜩한 느낌에 뒤를 돌때 아무도 없었던 것은 그림자가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일까. 기선제압이다. 가까스로 기억의 주인이 되어 말해본다.

 

이 뒤돌아 섬을 반성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여간해서 하지 않는 것. 제대로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 나 대신 기억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기억에 머리 수그리고 있을까. 나에게서 파생된 온전치 못한 것으로부터 잠식되어가는 나'를 바라볼 때 참혹함. 어떤 단어가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뒤돌아서다 못해 뒤돌아서 걷는 사람. 그는 돌아버린 사람이다. 김병수는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 그렇다면 읽는 나 또한 불확실한 시간을 쳐내고 남는 말도 의심하기로 한다.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1년의 시차는 대수롭지 않다. 이보다 더 휘청일 시간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다. ‘하여튼’ 오래전에 살인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니다. 이것도 쳐내기로 한다.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말만 가져간다. 구름이 뜨면 반쯤 먹힌 그림자가 남기도 한다. 실체가 확실하더라도 그 뒤편의 그림자까지 확신할 순 없다. 아직 첫 페이지를 넘겼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 아빠의 딸이에요?

은희는 스물여덟이다. 김병수의 기억에 자신은 칠십 줄에 들어섰고, 기억이 망가지고 있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김병수는 25년 전, 26년 전 살인을 그만두었다. 은희가 두 살 이나 세 살 무렵의 일이다. 그래서 은희는 은희 어렸을 적부터의 기억이 나온다. 자신의 가정家庭에 대한 ‘가정假定’. 혈액형에 대해 물어볼 경우 이렇게 말해줘야지, 부모를 찾을 때는 입양했다고 해야지, 나는 동물을 치료하는 사람이니 은희는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는 가정과 바람이 만들어낸 김병수의 조촐한 가정. 그러므로 은희의 실재는 믿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내가 어떻게 아빠의 딸이에요? 입양했다고 대답한 다음 장면에서 김병수는 두부를 굽는다. 매일 두부를 구워 먹는다. 조촐한 반성. 대숲에서 울리는 소리는 말이 없다. 불현듯 오금이 차다.

 

만약 젊었을 때의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감정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유머에는 반응한다는 김병수의 기억답게 위트를 부려놓았다. 이것은 흡사 기시감이다. 기시감은 있었던 것 같았던 일을 마주하게 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김병수는 기시감이 아니라 기시감처럼 느끼고 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이야. 어쩐지 그의 상황이 익숙해 그는 사냥을 하고 있어. 만약 젊었을 때의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박주태와 첫 대면 후 이어지는 부분이다. 박주태는 30대 초반의 남자, 지프를 사냥용으로 개조한, 뱀의 눈을 한 사내. 나는 확신한다. 그때 우리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짚고 가자. 나의 기억이 나를 알아보고 나 또한 기억이 나를 보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김병수의 독백에서 알아보았다는 층위는 얕다. ‘살인을 아는 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젊었을 때 나를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위트로 작동하는 것이다. 김병수의 기억은 ‘혹시’ 하고 있다. 분리된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은희와 박주태는 서로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아이러니. 이 참상. 은희는 아이인 동시에 은희 엄마의 아우라를 지닌다. 은희가 컸더라면 닮았을 나이의 여자와 젊었을 적 자신이 마음 내었던 은희의 엄마를 덧씌운다. 게다가 자신의 젊었을 적 모습을 불러내 그들을 만나게 하고 질투한다. 일흔 살의 김병수는 자신이 실제로 죽이고 기억으로 살려냈던 은희와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 젊은 날의 나를 불러와 기억으로 죽이기 위해서 상체를 단련한다. 그러므로 말된다. 자신의 인생에 있을 마지막 살인을 준비한다는 의미심장함. 그러나 이 목표, 자세하고 구체적일수록 김병수는 알지 못한다.

 

자신을 연료로 태워 살아가는 사람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무라카미 하루키, 『어둠의 저편』

 

이곳에서 하루키의 글을 인용하는 것은 위트니 실소를 바란다. 언젠가 하루키는 기억에 대해 인상 깊은 말을 써 놓았다. 기억은 연료라는 말. 그래서 기억의 질에 상관없이 어떻게든 그것은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는 응원의 말이었다. 괴로운 일, 안 좋았던 옛날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마저 없는 이들은 어떻해야 할까 묻는다. 기억 자체가 사라져 태울 연료가 없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물어본다. 기억의 끝은 내가 '있다'는 감각이다. 하루키식을 따를 때 기억의 끝에 다다른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나를 지각한다는 마지막 기억을 태우는 것이다. 자신을 연료로 만들어 나를 소진해 내일로 가려는 사람은 현실을 완전하게 부술 수밖에 없다. 김영하는 그 어떤 기억이라도 남지 않았을 때, 필연적으로 비틀거릴 수밖에 없으나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지는 사람에 대해 썼다. 그것을 살아가는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혹시 죽어가는 모습은 아닐까, 조용히 묻는 질문에 한마디를 더 얹는다. 살아가며 죽어가고 있다. 분해되지 않는 가치. 당신의 입술엔 어떤 표정이 걸릴까.

 

그가 사라지고 남은 보도블럭 위에 저 긴 그림자도 사라진다. 그것이 해가 어두워져서인지 그가 사라져서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라진다는 것만은 자명하다. 그림자가 사라진 거리는 그 위에 무엇이 있었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찰 것이다. 그러나 이 빈 풍경을 읽어야 한다며 소설을 써낸 사람이 있다. 먼지조차 그려지지 않는 거리라고 해서 기억의-자세한-혼동을 없었던 일이라고 할 것인가. 김병수는 박주태와 은희를 만났다. 우리는 김병수의 걸음을, 정처 없었으나 걸었던 것을 기억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실은 기억의 살인법을 말하는 것이었고 이 완벽한 살인에서 우리는 모두 잠재적이다. 어떤 침묵이 어울릴까 저마다 입매를 매만지는 저녁. 기억의 살인자- 되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차근히 되어가고 있다는 기. 시. 감. 에 피 도는 손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이 놀라운 명백함, 지울 수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어둠의 저편』을 제외한 모든 이탤릭체 본문 인용. 




+사진 출처 : 알라딘

작성 : 2013/09/09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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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해부도감 - 집짓기의 철학을 담고 생각의 각도를 바꾸어주는 따뜻한 건축책 해부도감 시리즈
마스다 스스무 지음, 김준균 옮김 / 더숲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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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게 솟아난

집을 짓는다고 하면 먼저 숨을 크게 마십니다. 집은 크고, 비싸고, 이렇게나 많지만 정작 내 집은 없고. 그렇다면 마음으로 집을 짓는다라고 해볼까요? 무슨 동화 같은 생각이니, 하는 타박이 올 것 같아 역시 편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마음으로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만큼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돈입니다. 치솟는 월세, 전세 대란, 은행 대출, 부동산 등등. 자신이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온힘을 다해 돈을 모으는 소수의 어른과 나이가 어린 아이들 말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그림으로라도 집을 짓지만, 다 큰 성인은 대부분 그림도 그리지 않지요. 모양과 크기가 어떻든 대부분 집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집은 현실에서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게 솟아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으로 부르기가 어려워서 오히려 나를 집의 것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파트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나의 집은 동과 호수로 표시되는 숫자만 내 것 같습니다. 아파트를 올린 거대한 회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아파트 단면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더욱 들지요. 거대하다 못해 으리으리한 입구를 볼 때도 그렇구요. 내가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해도, 거대한 단지를 바라보면 내가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까, 궁금해집니다. 내 집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집 앞에 감나무와 밤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으면 했거든요.

 

집은 말하자면 도시락 통 같은 거지

마스다 스스무가 지은 주거해부도감은 마음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줍니다. 집을 짓는 일이란 너무도 크고 어려운 일이라 꿈조차 꾸게 되지 않았던 제게 이 책은 소곤소곤 말합니다. ‘집은 별거 아니야. 이렇게 너의 성격과, 너의 움직임을 공간으로 옮기는 것뿐이야하며 말을 건넵니다. ‘말하자면 집은 도시락 통 같은 거지.’ 하며 책 첫 장에 도시락 통을 줄줄이 그려놓습니다. 이것을 보는 순간 중학생 때 썼던 바닥이 따뜻한 2단짜리 도시락 통이 생각났어요. 짱짱한 밴드를 채워 흔들림이 없었던 노란색 도시락 통, 주거를 해부한 그림책을 보고 떠올랐던 것이지요.

 

손에 넣을 수 있는 도시락은 오직 하나입니다. 다양한 종류가 있으면 아무래도 이것저것에 눈길이 가게 되지만, 도시락도 주택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만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택 설계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주택의 완성을 목표로 합니다. 최고의 하나를 얻기(GET)위해서 그 외의 모든 것을 잘라내는(CUT)결단도 필요합니다. 19

 

그는 주택 설계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주택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고 씁니다. 도시락통의 생김새가 다양하고, 그 안에 넣을 음식도 다양하니 나에게 알맞고 내가 원하는 것으로 골라야 한다면서요. 생각해보세요, 모든 걸 먹고 싶다고 중학생아이가 아침마다 5단짜리 찬합에 점심을 싸갈 수는 없잖아요! 이것은 맛과 영양에도 좋지 않지요. 제게는 2단짜리 도시락 통, 모서리가 둥글어서 밥의 가장자리가 둥글러 지던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이상한 가치로부터 집을 자유롭게, 나를 자유롭게

도시락 통을 고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주택해부도감은 포치와 현관부터 시작해서 집안을 세세하게 들여다봅니다. 현관을 설명하는 장에는 신발을 벗는 선이 곧 마음을 놓는 선이라고 하며 당신이 생각하는 현관은 어때요? 하며 물어옵니다. 현관은 신발을 벗는 것이지 마음을 놓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균일하고 규격화된 현관이 아니라, 나의 습관과 몸에 맞는 현관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누군가 집을 물으면 집이 있는 지역과 평수를 말하는 것으로 대답합니다. 그것이 집의 이력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텐데 언제부턴가 그런 대답이 집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으로 되었어요. 똑같은 평수의 집에서 똑같은 동선과 똑같은 삶의 방식을 강요받았다는 것은 모르고서요. 이 책은 그러한 이상한 가치로부터 집을 자유롭게 해줍니다. 내가 생각하는 삶과 내가 좋아하는 곳을 떠올리게 하지요. 물을 이용하는 곳으로 카드게임을 하자며 옵니다. 세탁실을 조커로 끼고서 말이에요. 이것을 어떻게 연결해야 좋을지 궁리하자는 말에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수납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물건은 살아 있고, 또 야행성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탄성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의 성격을 잘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현명하게 수납을 할 수 있는 거지요. 물건은 쓰는 사람마다 성격이 달라지니까요. 결국은 나를 잘 아는 일이 정리를 잘 할 수도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다는 거대한 일이 이렇게 소소하고 즐거운 게임으로 치환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 책은 전문가의 시선도 놓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설계의 노하우도 함께 싣고 있기 때문이지요. 차양이 나온 정도에 따라 해가 남중할 때 태양 고도를 그림으로 싣고 있는 장이 있습니다. 차양의 크기가 300mm일 경우, 바로 밑에 위치한 창문을 커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요, 30cm밖에 되지 않는 차양이 밑에 있는 창문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그림으로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창문을 열지 않아도 실내에서 기류의 순환이 일어나는 동선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데요, 어떤 긴 설명보다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목적이라는 목적도 있다

주택 안에 있는 동안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시간보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훨씬 길다며 저자는 입을 뗍니다. 주택에 반드시 목적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 무목적성만 있으면 된다고 편하게 말하지요. ‘인정합시다.’ 우리 집에서 뭐 하려고 하진 않잖아요. 라며 집을 잘 이해해보자고 말이에요. 집은 우리가 쉬는 곳이지 무엇을 하는 곳은 아니니까요. 어떻게 하면 잘 쉴 수 있을 까를 생각하면 되니까요. 우리, 집에서조차 무엇을 위해 준비하고, 경쟁한다면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어요?

나는 도시락에 어떤 메뉴를 넣어야 좋을지 베게에 턱을 괴고 이것저것 그려봅니다. 내일 메뉴로는 멸치볶음이 먹고 싶어요. 여전히 2단정도의 도시락통이 딱 좋고요. 다만 계란말이를 넣었던 칸에는 서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마아아안큼. 그래서 내가 잘 알지 못했던, 마음의 집짓기를 보여주는<주거해부도감>같은 다양한 분야의 책도 넣을 수 있도록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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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시인선 28
박연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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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처제하고 불렀다』- 멍을 멍으로 두기.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는 상흔의 기록

 


 존재하는 순간부터 사람은 라는 이름과 부모가 부르는 자식으로서의 이름을 갖는다이름 두 개로 시작관계에서 비롯된 이름의 증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아버지는 나를 처제하고 불렀다에서 시인은 주로 세 개의 이름을 산다. 그 이름은 과 애인과 그리고 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약간의 변주만 가한다면 누구나 오래 지지고 있을 이름이기도 하다그래서 시인의 이야기에서-나의 이야기로 오는 길이 무척이나 가까워 보인다그러나 온전한 음악일리 없다는 예감무너진 호칭으로 시작되는 제목을 읽고 고개가 무겁다활인지 톱인지아니면 줄을 다 끊어버리고 스스로 악기가 되어 속을 파내 두드리는 공명일지톤 다운된 보랏빛아마 밝은 색은 아닐 것이라는 친절한 귀띔을 조심스럽게 펴 본다.

 

1. 기우는 관계밀어 올리며 가라앉는 딸

 

호칭은 사람 사이의 추와 같아서 가볍고 무거운 상황을 잡아 소통을 이룬다사람들은 그것으로 관계를 살아간다이러한 호칭이 빠지거나 대체되는 것은 관계의 소멸일 것이다그렇다면 온전한 관계에서 호칭이 엉뚱하게 튀어 오르는 것끝을 벗어나려는 발버둥이라고 한다면 가혹한 그림일까.

 

불현듯 나를 처제라고 부른 아버지에게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불렀다’ 발화의 이후 한쪽에서 무너져 버린 관계를 어떻게 추스릴 수 있을까「뱀이 된 아버지에서 그녀는 말없이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처제가 아닌 것을 들키지 않는다팥죽색 얼굴을 잊고 젊은 나이로 돌아간 아버지, 뱀이 된 말씀을 잠자코 듣는다. ‘눈을 감으렴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나이를 잊어버린 자신을 눈감아 달라는 말씀일까딸의 존재도 잊고 오래 전 비슷한 나이었을 처제를 부른다그렇게 병이 든 몸도 잊고 죽음마저 잊어버리고 싶다시간을 뒤섞어서라도 온전해 질 수 있는 곳을 찾는다아버지 행방이 요원해지는 곳에서 아버지가 아닌 당신으로라도 나아 질 수 있다면나를 알지 못하는 아버지라도 길게 기다리고 싶다.

 

나이를 깎아도 허공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아버지, 나는 그 반대편에서 관계의 시소를 밀어 올린다그러나 호칭이 붕괴된 관계는 내가 서 있는 바닥을 가라앉히는데좀처럼 아버지 내려오지 못하시고 바닥이 둥글게 패인다이 둘레를 기억하기 위하여 시인은 시 곳곳에 아버지를 적는다온몸을 다 흔들어 놓는 절망함이 아버지라는 이름이었다고 고백한다.

 

2. 그늘과 어둠과 애인

 

아버지와 나의 관계보다 나와 애인의 관계는 파괴력의 크기는 몰라도 자주요동할 것 같다서른이라는 나이에는 이 추측에 불과한 이야기를 믿게 하는 혐의가 있다.

어둠 속에서 그의 고환이 시계추처럼 흔들려요/그 흔들림에서 침묵의 율동을 보죠/살랑살랑나를 사랑해줄 것만 같아요’ 노골적이고 대담한 담화로 시작해 우리의 그림자에 상처가 나면싱싱하게 빛이 까져요다시는 아물지 않겠다고 빛이 벗겨져요’ 그러다 고인 빛-그림자으로 나가는 마지막은 그림자에 상처 나는 연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곳은 이미 끝난 미래’ 사랑을 나누는 어두운 장소에서 불이 켜지면서 그림자가 사라진다그림자는 어두운 곳에서 깜깜하게 실루엣만 드러나는 나와 애인의 실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밝아지면서 드러나는 몸은 어두운 모습을 뚫고 나와 색을 가진다안락하고 평화로웠던 어둔 세상을 찢고 실체로 행동해야 할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 갖는 연인과의 유리를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이러한 그림자-그늘의 이미지는 연애의 그늘」 에서도 볼 수 있다. ‘포옹이 오래 고이면몸은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연애가 포옹을 하나의 덩어리로 불과하게 만드는가. ‘백 년을 씹어도 삼킬 수 없는 질길, /가죽 같은 시간이 있을 뿐열렬한 잠 속엔 환영이 없다’ 지나도 지나지 않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권태겠다연애의 지리멸렬이라면 더 무엇을 말할 수 있겠나 싶지만  깡마른 유령 둘이 사다리 위에 앉아/,/ 손톱을 깎고 있는 풍경에 입을 다문다죽어버린 관계, ‘어둠을 늙게 하는 연애의 그늘이 서늘타 못해 차다.

 

3. 무엇보다 그냥’ 

 

절망함 둘레를 퍼내다가 가라앉는 관계에서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는 연애의 일말을 내리다가 잠든 호리병바지를 벗다가등의 시에서 혼자 있는 시인을 발견한다요동치는 상황을 벗어나 시인만의 목소리를 듣는다그곳 참 맑아서 쓰여 있지 않은 것처럼 종이 있어도 투명하게 비치는 것처럼 들여다보인다.

당신과 내가 나란히 누워/곤히 잠든 시간들만 따로 모아목이 긴 호리병에 담아놓고 싶다따가운 볕 아래 펼쳐놓고증발할 때까지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맨송맨송한 민낯으로 바라보고 싶다’ 잠든 호리병」 부분

무엇이 더 필요할까그런 시간이 나도 있었다고그것을 다 모아놓고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고백한다행복한 시간을 모아 놓고 그것을 다 흘려보내는 모습 빨간 입술로순정했을까’ 자신에게 물으며 여전히 순정 아니라는 대답을 스스로 메운다그러나 웃다가 그늘을 잃어버린 여자목이 긴 호리병에 넣고 싶은 잠이 참 많아서 언제고 외롭다고 마음 놓고 토했으면 좋겠다당신의 애인은 순정의 색을 물을 닮은 촉촉함이었다고’ 촉감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괜찮지만나 이외의 것들은 괜찮을까걱정하는 밤’ 바지를 벗다가에서 홀로 있는 서른 살 그냥’ 여자를 바라본다누구나가 볼 수 있는 색이라면 순정이 아닐 것이다바지가 갖고 있는 흔적당신이 있었던 자리가 투명해서 순정한 것이다. 다시, 붉은 입술이 전했을 순정을 바라본다당신의 투명을 바라본다어깨가 안으로 다 기울도록 속을 비워내 빈 곳을 울리는 공명줄이 없어도 화음을 맞춘다. 어딘가 비뚤어졌으나 눈감고 듣고 싶은 노래를 덮는다휘청이고 싶은절룩이며 걷는 나의 리듬과 맞는다. 

 

세 개의 이름으로 '누구나'를 살기. 내게도 세 개의 이름이 있어 대체로 번갈아 하루를 산다. 노트 한 구석, 이름을 하나를 적고 기억 하나를 적는다. 무슨 색이냐 묻다가 보라색은 멍이 멍으로 남는 색이라고 다른 대답을 한다. 내 속에 깊게 들어가 피가 고인 것 아니고, 다 빠져서 무슨 자국인지 알아 볼수 있는 것 아니다. 온전하게 부딪힌 순간을 적었더니 온몸이 고른 색이다. 멍을 멍으로 둔다.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는 상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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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가우초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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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살아있을 준비가 되어있다 : <문학+=>

 


제목이 문제였다이렇게 수식으로 '맞춰 보시오'하며 문제 내는 작가는 없었다수식을 보자오른쪽 변에 있어야 할 문학은 어디로 간 것이며 문학은 병과 더하면 사라지는 이름인 것인가아니면 혹시 문학은 0과 치환될 수 있는 것일까이 수식의 참과 거짓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이것을 읽는 독자일 뿐일 것이다볼라뇨그가 낸 문제에 골몰해 보기로 했다어떤 계산도 필요 없이 그저 종횡무진한 입담을 따라갈 뿐이다.

 

이야기는 볼라뇨가 병원에서 진찰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그러다가 순식간에 프랑스 문학이야기로 넘어가는데프랑스 문학의 시인들에 대해 읊더니 말라르메를 꼽는다말라르메 시를 같이 읽자고 하더니 보들레르로 넘어간다다시 좋지 않은 자신의 병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카프카를 불러서 끝나는 식이다순식간에 읽을 수 있으나 어리둥절하다말이 끊어지는 곳이 적고 위아래가 모두 한 입으로 엮어 있기 때문에 발췌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원서의 어조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 통통 튀는 입담이 병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임에도 유쾌했다.


거세된 인간이 욕망하는 단 한가지그건 섹스죠. p.133

이 작품에서는 섹스가 활기차게(?)쓰인다그 행위를 쓴 것 아니고그저 명사로써 섹스가 자주 나오는 것뿐인데 그것은 아주 쉽고늘 해야 하고곁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즐거운 것처럼 여겨진다섹스란 무엇일까삶에 대한 열정삶 자체여러 가지로 치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경쾌하고 발랄한 이름, 이것을 자꾸 부르는 것만으로도 금기를 깨는 일이 될 것같다그런데 이 '섹스'를 볼라뇨는 난처하게도 ''과 같은 것이라 말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책도 섹스도 유한합니다하지만 독서와 섹스에 대한 욕망은 무한하여 우리의 죽음과 두려움과 평화에 대한 열망조차 추월합니다그가 말하듯독서에 대한 열망도 섹스에 대한 욕망도 없는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이 훌륭한 시에서 말라르메에게 남은 건 뭘까요그건 바로 여행이고 여행에 대한 열망입니다. p.139

그는 말라르메의 시를 읽으며 말한다우리에게 독서에 대한 열망도섹스에 대한 욕망도 남지 않을 때 여행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그렇다면 독자는 되물을 수 있다그렇다면 여행은 좋은 것인가열망과 욕구가 남지 않은 권태의 구렁텅이에서 구출할 수 있는 것일까?

 

여행은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p.140

그러나 볼라뇨의 대답은 어처구니가 없다. 독자는 (화가 나서)되물을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왜 여행을 하자고 하는 것인가(이 사람이)?" 그는 예상했다는 듯 이어서 말한다.

 

사실 여행하지 않는 편이 건강에 좋으며 움직이지 않는 편이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편이겨울에는 따듯하게 입고 있다가 여름이 오면 목도리만 풀어 두는 게 건강에 이롭습니다입을 열지도눈을 깜빡이지도숨을 쉬지도 않는 게 건강에 이롭습니다하지만 모두가 숨을 쉬고 여행을 하고 있죠. p.141

한 마디로 줄이면 "병들지 않으려면 죽어버려라!"일까여행을 하지 않으면 일단 안전하고돈을 쓸 일도 없고고생을 할 이유도 없다여행이 무엇을 가져다 준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 모든 것을 감수 할때 일어나는 일이다극단적인 사람. 여행하지 않고 숨은 쉬면서 안전하게 자기 생활 안에서만 있어도 되는 것 아닐까볼라뇨는 왜 병을 감수하면서 여행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


권태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공포의 오아시스근대인의 병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명확한 진단이 있을까요그 권태를 벗어나는 데그 죽음의 상태를 탈출하는 데 우리 손에 주어진 유일한 것그렇다고 그다지 우리가 손에 쥐고 있지도 않은 그것은 바로 공포입니다.

다시 말해악이란 말입니다우리는 좀비처럼밀가루 빵으로 연명하는 노예처럼 살고 있습니다그게 아니라면 노예를 만드는 사람으로악한으로아내와 세 자식을 살해한 후 뻘뻘 땀을 흘리며 미처 알지 못한 뭔가를 지닌 것처럼 스스로를 낯설어하면서도 자유를 느끼고 그 희생자들이 죽을 만했다고 말해 놓고몇 시간이 지나 정신이 들면 누구도 그런 잔인한 죽음을 맞아서는 안 되며 자기가 미쳤었나 보다면서 경찰에게 자기를 내버려 두라고 요구하는 인간처럼 살고 있습니다. p.146

좀비처럼 산다는 말, 노예처럼 산다는 말도 모자라 노예를 만드는 사람으로 산다는 말이 이어진다. 연거푸 충격, 아니야, 나는 나 답게 살고 있어! 라고 말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다 그것이 정말 내가 '생각'해서 나를 사는 것일까? 볼라뇨는 묻는다. 볼라뇨는 과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말하고 싶다. 그것은 여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사람을 병들게 하는 여행을 통해서 제발 '병 들어라'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이미, 우리의 행위와 언어 또한 병들어 있으니, 그것을 모르고 살지 말고, 제발 떠나라. 두려워 하지 말라 이어 말한다.  

 

말라르메는 여행과 여행자의 운명이 어떤지 알면서도 그 여행을 다시 시작하고자 합니다다시 말해이지튀르의 저자는 우리의 행위만 병든게 아니라 언어 또한 병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치료를 위해 해독제나 약을 찾을 때새로운 것오직 미지의 곳에서 발견 되는 그것을 찾으려면 섹스와 책과 여행을 탐험해야 합니다비록 이것들이 우리를 심연으로 이끌지라도 말입니다어쩌면 그 심연이 해독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일지도 모릅니다. p.163

'병들어 있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낫게 하는 것은 심연으로 이끄는 섹스와 책과 여행의 탐험이라며 외치고 소설을 빠져나가려 한다.

 

글쓰기와 떨어질 수 없다는 말로 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아마도 나는 카프카가 여행과 섹스책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이며그럼에도 뭔가를 찾아서 그 길에 들어서고 길을 잃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152

나는 제목으로 돌아가 <문학+=기우뚱한 수식의 참과 거짓을 따지기 위해 읽었던 것을 다시 생각한다


지나왔던 날을 들춰본다이것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었다면 내가 지금껏 해왔던 것은 무엇인가내가 있는 세계는 과연온전한가오아시스는 어디인가썩은 물이 계속 나오는 오아시스를 삶의 원천으로 여겨 빌붙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행의 시작은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병들 수 있다. 이것을 알고 난 후에 시작된 독서와 섹스는 무엇을 가져다줄까그것이 혹 겨우 찾아온 괜찮은 여행지를 의심에 빠뜨린다 하더라도, 그때에는 병을 감수하고 떠날 수 있는 배짱이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찾지 못하거나, 찾을 수 있어도. 그러니 언제든지 병들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든지 살아있을 준비가 되어 있다.  

 

볼라뇨가 말한다. "문제가 그럴 듯 했나?"

 

 

 

 

+볼라뇨는 실제로 간부전을 앓고 있었고 그로 인해 죽었다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볼라뇨의 세 번 째 단편집이자 첫 번째 유작이다이 흥미진진한 작가가 일으킨 돌풍을 <볼라뇨 전염병>이라고 부른다는데우리나라에서도 발견 될 것 같다. '볼라뇨라니정말로 병 이름 같잖아!

 

+열린책들 표지는 언제나 멋졌지만, 이 표지는 그중에서도 최고다. <참을 수 없는 가우초>의 한 장면을 이토록 몽환적으로 그려놓았다. 

 표지그림 야후벨. 열린책들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한국어판 컬렉션 표지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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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만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1~3 세트 - 전3권 - 더 깊고 풍부해진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만화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수박 그림 / 별천지(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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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혹은 마야, 마르크스 혹은 핑크 플로이드, 그리고

 

고백하건데 나는 이 책을-학습용 만화시장에-적합한 기획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성공을 다시 한번 부흥시키기 위해 만화로 옮겨 놓은 것일 뿐이라고 폄하했다. 이것은 슬쩍 본 그림에서 비롯된 비호감에서도 기인했다. 인물의 비율이며 인상이며, 그림이 이게 뭔가?(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후 생각이 바뀌었다. 잘 못 그리는 듯한 그림은 [작화는 이야기를 도울 뿐]을 실천하려는 김수박의 고도의 계산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적당히 못 그린 작화는 지문에 집중을 방해하지 않으며, 만화의 구성은 지문을 쉽게 이해하고 진행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오해를 반성하며 쓴다. 언젠가 둘러 앉은 저녁에서 <상상력 사전>에 관한 이야기를 할 가족을 상상하며 적는다. 단언컨데, 이 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원작 이상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원작과 다른 새로운 구성
우선, 이 책은 전작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하 백과사전)과 전혀 다른 구성을 갖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이하 베르나르)수집하고 생각했던 백과사전 형식의 책은 말 그대로 사전식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상상도 하지 못한 것 표제어가 제시되고 그에 대한 이야기가 각각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나르 한 사람의 생각과 관심에서 시작된 책이기 때문에, 단절된 이야기지만 앞 뒤가 이어지거나 확장되는 주제가 많다. 이것을 재구성 하는 것은 책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이해했음을 의미하고 그것을 새롭게 만드는 창작과 다름없는 일을 뜻한다. 전체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그 내용 안에 분절된 마디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베르나르의 방대한 관심과, 들쑥날쑥한 이야기를 고른 호흡과 예상 가능한 주기로 정리해 독자를 이끈다.

이야기 밖의 주인공들
이 새로운 구성은 원작의 백과사전에 없었던 주인공이 등장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주인공은(얼마나 촌스러운 이름인지) 헐렝이, 이쁜이, 멋쟁이이다. 새로운 세 명과, 원작에서도 역시 없었던 베르나르 본인이 친근한 얼굴로 등장하며 그린이 김수박 또한 화자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소소한 유머도 빠지지 않는다. 이것은 만화라는 양식을 채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왜 스무살 인가
원작 <백과사전>은 읽을 대상의 나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쉬운 부분도 있지만 딱딱한 부분이 더 많다. 어렵고 다방면에 흩어져 있는 관심을 쉽게 풀고자 만화로 기획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주인공이 나이가 스무살인가. 대부분 스무살은 더 이상 학습용 만화를 보지 않는다. 나는 이 점이 의문이었다. 예를 들어 학습만화의 신기원 이원복의<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면 주인공은 이름과 나이가 명확하지 않다. 화자가 이원복 자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웃나라에 대한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화자는 화자만의 나이나 고민을 갖을 이유가 없었다. 

사랑은 우리 모두의 초점
 이들이 교복을 입은 청소년이었다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도 독자도 더 명확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김수박은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만화는 단지 아이들에게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에게 더 쉽고, 틀을 깨는 방법으로 다가 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세 주인공은 사랑을 하고 술을 먹기도 하며 군대도 간다. 이들은 우선 만화의 주인공이어서 <상상력 사전>을 이야기 하지만 스무살이 갖고 있는 고민을 조금씩 내보인다. 중요한 점은 작가가 이들은 이십대가 아니라 '스무살'에 고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대명사로 하지 않고 어리숙한 것을 가져온다.(헐렝이, 이쁜이, 멋쟁이) 책을 읽을 대상은 우선 고등학생까지이기 쉬운데 이 책은 중고등학생이 바라보는 스무살의 호기심(스무살은 과연 무엇일까) 스무살 이후에서 바라보는 스무살(스무살이 포함된 이십대의 대체적인 고민)을 모두 잡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꽤 성공적으로 보인다. 화자가 스무살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사랑'의 관념적인 이야기가 가능했다. 헐렝이와 이쁜이가 자신과 남에 대해서 이해하고, 사랑을 하고, 맞춰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는 것이 <상상력 사전>의 큰 틀로 움직인다. 이 안에서 다른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조합되며, 독자층을 청소년에게 한정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점은 일반 어른이 읽어도 좋다. 그럴듯 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심리 실용서"보다 더 나를 돌아보는 데 이로울 것이다. 스무살은 <상상력 사전>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물으며 때로는 반박하는 것을 스무살의 멍청함과(어른인가 아이인가) 스무살의 명민함(중2와 비교할 수 없는 날카로움)으로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김수박은 누구인가
 이 책의 최대 수확은 김수박의 시선이나 생각이 곳곳에서 배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념]을 설명하는 장에서, 공산주의 관념을 설명한 후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나온다. 원작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문명은 관념들 간의 투쟁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이었을 테지만 "공산주의라는 관념이 쇠퇴해서 소수의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라는 관념도 변하게 만들었다." 라는 내용이 따라온다. 여기에 "인터넷에서 어떤 관념을 전파하거나 퍼올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내용이 붙는다. "관념이 만든 사람이나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이것은 대상이 명확하다. 일베나 디씨 등등 웹상에서 쉽게 소비되고 회화화 되는 '관념'에 일침을 놓는 것이다. 그곳에 무분별하게 노출된 아이들의 생각에 전환을 가져오지 않을까. 이것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다. 이 설명에는 생각을 재고할 수 있을 것 같은 논리가 있다.   

기억하고 싶은 한 컷
[세 가지 반응]이라는 항목은 생물학자 앙리 라보리의 『도피예찬』의 한 구절로 시작된다. 그는 "인간이 마주칠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가지 뿐"이라고 한다. 첫째는 '시련에 맞서 싸우는 것'이고, 둘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도피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생물학자라니 과연 베르나르의 관심은 개미만큼 많다. 그가 아니었다면 보통사람은 알기 어려웠을 지식을 만화로 첫 번째와 두 번재에 관해 자유롭게 풀어 쓴다. 그리고 세 번째 방법인 도피 중에는 '예술적 도피'도 있다고 설명한다. 자기의 분노와 고통 여러가지 분야로 표출하는 것을 적는다. 여기서 김수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이 책의 곳곳에서 세상의 불합리함을 알리고 있었다. 그것은 먹먹했다. 영화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올리버 스톤의 'JFK'가(존 F.케네디 의 암살 사건에 대한 진실), 음악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We don't need no education(우리는 교육같지 않은 교육은 필요없어)',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노래 가사를 적는다. 책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그린다. 이어지는 다음 칸에 "현실 세계에서는 감히 주장하지 못하는 것을 상상 세계의 자기 주인공으로 대신 말하게 합니다"라며 김수박이 만화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 컷에서는 무엇이 나왔는 줄 아는가. 김수박이 그린 "용산 남일당 건물"이 나온다. 낡은 콘크리드 건물 위, 망가지고 주저앉은 컨테이너가 흑백으로 말이다. 나는 이 페이지를 오래 넘기지 못했다.

상상력 사전에서 용산 남일당 건물로
 <상상력 사전>에서 용산 남일당 건물로 리뷰를 마무리 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것은 김수박이었기 때문에, <상상력 사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이 책으로 베르나르의 <백과사전>이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번역과 또 다른 작업이다. 외국 작품을 우리의 정서로 읽는것이나 만화로 조금 더 쉽게 풀어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는 고민들을 곳곳에 적었다. 이것은 '고민 할 수 있어야'했던 것이었으나 '고민 할 수 없었던(하지 않았던)'것이다. 상상력 사전을 통해서 내가 사는 세상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상상력 사전>의 역할이 아닐까. 이 어리숙해 보이는 책을 학부모들은 고민 없이 사야 한다. 아이들은 읽을 것이다. 공부에 바쁘지만 돌고래나 바퀴벌레, 뇌나 알끈에 대한 탐구를 시작 할 수도 있을 것같다. 때로 자신의 궁금점과 생각을 부모에게 이야기 할 것이다. 일과 생활에 지친 부모들은 가끔은 대답을 궁리할 것이고, 아이들은 스스로 궁금한 이름을 검색하기도 할 것이다. 저녁, 부모와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함께 <상상력 사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상상한다. 개미 혹은 마야인, 마르크스 혹은 핑크 플로이드를. 그리고 정부와 언론, 사회의 무관심에 묻혀 그저 '사건'으로만 기억되는 일들을,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을 말이다.
 





김수박 홈페이지 : http://www.kimsubak.com/
김수박의 책들 : 『빨간 풍선』과 『먼지 없는 방』은 김수박이 그렸고, 그 외 다른 책은 다른 만화가와 함께 참여했다.

이미지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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