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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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국경은 수평으로 된 수직
 전혀- 라는 표현은 어떤 대상을 완전히 부정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것이 '이해'의 문제에 쓰여 무엇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때, 말 그대로 화자는 이해의 바깥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해 속에 (갇혀)있어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이해인지, 이해가 아닌지 스스로 살피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팽 선생을 읽고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1 무슨 소리일까, 이해를 전혀 못하겠어. 2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이해의 한 가운데이기 때문에 이해의 여부를 살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니까 나는 이해를 하고 있는지, 하지 못하고 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다. 4 수평으로 된 수직*을 걷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수평으로 된 수직'이 불가능한 것은 한 개의 차원에 한정지어 그것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개 이상의 시공간을 한 번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물질적으로는 언제나 수평의 상태만 갖는다. 

다만 그곳에 있을 것
꿈과 현실도 그렇다. 물질적으로는 언제나 현실만 존재한다. 그러나 둘 사이 차분하게 유지되던 기울기가 어느날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어떨까. 꿈과 현실이 뒤섞인 팽 선생, 그곳은 구분 가능하지도, 가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곳에 섞여서 의식을 따라가는 것이 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 어떤 사건이나 물체는 그 바깥에서야 형태가 파악 가능하지만 그것은 대상이 온전해서 시공간과 분리될 수 있을 때만 그렇다. 구분 불가능하게 섞여 있다면, 바깥으로 나오는 것 조차 가능하지 않다. 그럴때는 다만 그곳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이해일 것이다. 그러니 갸우뚱한 고개를 아둔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현실을 기울여 꾼 꿈
도통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책을 덮는 손 안쪽에 어제의 꿈과 엊그제 꿈이 지나가고 있다. 가능하기를 바랐던 사건 몇 개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을 차분하게 지워나간다. 어제 나는 무척이나 키득거리는 꿈을 꾸었고, 깨어나서도 웃고 있었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녹고 있는 강이나, 뒷모습을 감추며 돌아선 고양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 일 정도가 큰 웃음인 까닭이다. 그곳에 아무 상관도 없이 서늘한 뉴스가 내린다. 눈쌓인 지붕이 무너져 갓 성인이 된 아이들이 죽고, 간첩을 증명하기 위해 국가기관이 서류를 날조하는 신문을 가로질러 간다. 나는 아직 온전하다. 과연... 

볼라뇨 식의 표현을 따르자면 내가 이것을 이해해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바예호는 팽선생이 필요하지 않았다. 팽 선생이 필요 했던 것은 팽 선생 뿐이다. 꿈 속의 한 사람을 갈라 현실에게 한 사람을 내주는 일. 그렇게 해서 이해는 고통을 피할 수 있었고 고통은 이해를 피할 수 있었다. 지난 밤에서 넘친 웃음이 나를 깨운다.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처음 입을 떼는 것처럼 입가가 건조하다. 현실을 기울여 꾼 꿈이다.



*나희덕의 시「국경의 기울기」에서

**나는 <딸꾹질의 본성>이라는 말을 했다. 아마 딸꾹질의 특성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있는 그대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들 딸꾹질은 근육의 수축일 뿐이며, 독특한 소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면서 간헐적이고 격렬한 호흡을 유발하는 횡경막의 돌발적인 움직임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바예호 씨의 딸꾹질은 환자의 육체와는 완전히 별도로 전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가 딸꾹질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딸꾹질이 환자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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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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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풀릴 가망 없는 미스터리-겨울일


 첫 번째 이사는 월세 15만원이었다. 가끔씩 그 건물을 지나갈 때면 지금도 놀란다. 누군가 살고 있을까봐. 바닥은 따뜻할까? 라는 걱정이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당시 그곳은 누군가 '살았다는 것'이 의심스러운 집이었다. 곰팡이가 주인이었다면 모를까. 그러나 군대에 간다는 세입자가 1년 하고도 6개월 살았다는 주인의 말에 쉽게 의심을 거두던 스무살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위안을 받았다. 서늘하다 못해 축축한 북향. 빛이 아스라하게 들어왔다. 해질무렵이 아침보다 환했다. 무엇을 보고 따졌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언가를 살폈고 근엄하게 계약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른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네 벽을 타고 물이 기어 올라왔다. 보일러 배관이 터져서 불이 돌지 않았던 것. 그것은 내가 점검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아니 점검하기 이전에 당연하게 배치되어야 했을 것이었지만 그랬다. 그래도 그때 마련했던 살림기구들이 여전히 쓰이는 걸 보면 선택이 모두 잘못될 수는 없다고 위로하고 싶다. 키티 밥그릇, 키티 접시, 키티..가 말갛게 마르고 있다. 그 후로 십년, 노련해졌을까? 살핀다고 살피고 들어왔지만 이웃까지 알 수는 없었다. 아랫층에 혼자 사는 95년생 돼지같은 꼬마가 새벽 다섯시까지 소리를 지르며 롤을 한다. 인터넷을 끊어놓고 싶다는 충동을 삼키며 귀마개를 다짐했다. 






폴 오스터의 겨울일기는 몸-기억과 집-기억으로 이뤄졌다. 그는 '당신'이라고 자신을 부르면서 자신과 친밀하면서도 적정한 거리를 둔다. 몸-기억은 아주 사소한 감각에 시작해서 자신의 가족사를 살피고 예상 할 수 없는 풍경으로 성큼 나간다. 지나왔던 자신을 쓰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자신은 모두 알고 있었겠지만, 이것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되었던 예전의 감각 또한 많을 것 같다. 길고 가난했던 성적 충동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이렇게 자세하게...당시에 지배적이었을 분노·흥분 등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자신이 어떻게 들볶였는지, 어떻게 굴복했는지 부풀리거나 은폐하지 않고 서술한다. 위트마져 적는다. [당신은 끝날 줄 모르는 성적 흥분의 고통과 좌절 속에 살면서 1961년과 1962년 내내 매달 북미의 자위 기록을 갱신한다. 52] 그럴리 없겠지만 그랬다는 고백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발달하기 전에 폭발해 버린 본능에 대한 안타까움일까. 이제 할아버지에 가까운 그는 그것에 시달렸던 청소년기를 짖궃게, 그러나 아련한 시선으로 되돌아본다. 


몸-기억은 집-기억으로 변한다. 무려 55페이지에 이르는 21번의 이사 기록은 단순히 집을 옮겼던 기록으로 볼 수 없다. 소라게처럼 집을 쓰다가 벗는 것은 자신의 변화를 분명히 수반하기 때문이다. 집이 있던 지역, 당시의 상황, 같이 있던 사람이, 나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이 달라진다. 모두 자신이 살아왔지만 그것은 모두 다른 자신이기 때문에 한 번도 만날 수 없던 타인의 삶 21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집마다 창의 크기가 다르고 들어오는 햇빛의 각이 다르듯 절망의 조도 또한 다르다. 그가 살았던 16 번째 집을 보자. 예감하겠지만, 가장 절망스러운 집이었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그 진입이 아무렇지 않다.

  

[이웃들 전부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만, 더치스 카운티의 이웃들에 대해 제일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그 집에서 일어난 비극들이었다. 예를 들면 다발성 경화증으로 쓰러진 스물여덟 살 여인, 스물다섯 살 딸이 지난해 암으로 죽어서 슬픔에 잠긴 중년 부부, 술로만 연명하다가 뼈와 가죽만 남은 부인과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다정한 남편, 그 집들의 잠긴 문과 내려진 커튼 뒤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들이 있었고 물론 당신의 집도 그중 하나였다.99] 

 

 잠긴 문과 내려진 커튼 뒤에 너무나 많은 고통, 그리고 그것에 도착하는 곳이 마침내 폴 오스터 자신이라는 서술은 절망이 귀하고 유별난 것이 아니라 흔하고 별스럽지 않은 것임의 증명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껏 겪어 본 세월 중에서 의문의 여지없이 가장 절망적인 세월이었다. 99]라고 절망의 크기를 열심히 그려내면서(그의 첫 번째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는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겪은 절망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를 또 열심히 적는다. 절망스러운 집을 관리했던 사람을 설명하는 구절을 보라. [이웃은 쿠바 태생의 명란한 여자로, 조용한 미국인 정비공과 결혼했고 유리로 된 코끼리(!?) 상을 수집했다. 100] 자기도 이런 자세한 설명이 겸연쩍었는지 코끼리 뒤에 (?!)부호를 적어 놓았다. 나는 코끼리(더욱이 유리로 된) 상을 수집했다는 이야기를 왜 적었을가 생각하다가 코끼리상으로 꾸며진 집을 생각하며 실풋 웃고 말았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절망 속에 적는 것은, 절망의 결에 한가롭게 흐르는 보통을 잊지 말라는 뜻일까. 어쩔 수 없이 절망하면서도 또 어쩔 수 없이 웃게 되는 일을 기억하라는 것인지도. 주어 빈 자리에 굳이 '인생'이라고 쓰기엔 촌스러우니 그냥 비워놓기로 한다. 그렇게 21 번째 이사를 끝으로 작가는 현재에 도착한다. 내가 월세 15만원을 떠올리고 7 번째 이사에 도착한 것처럼, 누구나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이야기를 오십페이지쯤은 갖고 있다는 귀띔인 것 같다. 


 <겨울일기>는 여러모로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떠오르게 한다. 필립 로스의 그것은 짧고 강렬하고, 손 쓸 틈이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지만 겨울일기는 작고 작은 이야기가 남겨둔 여백에 푹푹 빠져 나의 그때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보다 더 반성적이고, 보다 더 감상적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의 문장은 문득 마법이라서 책을 덮기까지 당신은 그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의식적으로 모든 사람이 되기로, 가장 완전하고 자유롭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안의 모든 이를 포용하기로 했다. 당신이 누구인가는 미스터리고 그 미스터리는 영영 풀릴 가망이 없으니까. 128] 내가 풀릴 가망이 없는 미스터리였다니.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지만...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지? 큰 비밀은 대체로 허탈한 것일까. 귀마개를 고르면서 아랫집 돼지꼬마가 학교에 갈 날을 생각한다. 그 꼬마는 조금도 기다리지 않을 개학날을 내가 대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관도 없었던 아랫집 고등학생의 방학을 셈하게 될 줄이야. 앞으로는 또 얼마나 동떨어진 일들을 마주하게 될까. 


이쯤에서 폴 오스터의 말을 살짝 고쳐도 좋을 것 같다. '당신, 풀린다면 이상한 미스터리.' 그래서 우리가 일기장에 삶의 비밀 같은 것을 아무리 풀어 놓아도, <겨울일기>처럼 대대적으로 들킨대도 걱정할 일 없다. 결코 당신이 누구인가는 밝혀 지지 않으니까. 당신의 내일은 분명히 오늘보다 더 미스터리 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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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열린책들 세계문학 176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소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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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그말리온과 말(言)

 제목으로 알 수 있듯 이 희곡은 '피그말리온 이야기'의 뼈대를 빌려왔다. 알다시피 "피그말리온 이야기"의 핵심은 아름다운 조각상이 '피그말리온이 원하는 여자가 되었다'는데 있다. 우리의 주인공 히긴스는 자신이 가르친 대로 리자가 성공적인 말씨를 갖게 되는 것을 본다. 신화 속에서라면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야 하지만, 버나드 쇼는 사람이 된 조각상, 즉 갈라테이야가 자아를 가졌을 경우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했던 것이다. 피그말리온이 갈리테이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기도와 사랑이었다면, 히긴스의 경우 리자를 완성하게 한 것은 그의 말-그 가운데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의 마법을 풀 열쇠로 '말-소리'에 대하여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이것은 피그말리온과 말에 관한 희곡이라고 할 수 있다.  

2. 말(言)과 사회 


 버나드 쇼는 계층에 따른 언어의 차이에 대해 작정하고 주목한다. 당시 영국의 사회계층을 언어-그 중에서도 말의 차이에 대해 파고드는 것이다. 비보호대상 빈민층이 사는 거리의 말, 신분상승을 이룬 중산층의 말, 일라이자가 헝가리 왕족으로 오해 받는 장면 등 다수의 계층을 넘나드는 장면의 조영은 '말'이 갖고 있는 힘, 계층을 대표하는 언어의 쓰임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기다. 그러나 이 정도로 그의 말에 대한 추적을 다 표현 할 수는 없다.


 문자가 아니라 '소리'에 대한 천착은, '대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것은 단순히 의사소통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신체적인 행동에 가깝다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어떤 공동체에서 이뤄지기 쉽다. 공동체는 단순히 지역과 나이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공간(지역)과 시간(나이)외에도 외부의 요인-사회적인 지위에서 오는 관습과 경제적인 차이로 구분될 수 있다. 다양한 빗금으로 나눠지는 공동체는 서로의 관심사와 대상이 다르며, 호불호가 다르고, 크게는 삶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투가 다르다고 해서, 그 속에 깃들었을 영혼의 그것까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일까. 히긴스는, 말씨에 가려져 영혼까지 그늘져 보이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발음을 교정하려고 했던 것이겠지. 영국에 필요한 혁명가는 다름아닌 음성학자라는 그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궤변으로 들리지 않는다. 


3. (言)과 영혼


그러니 '말도 섞지 말라.' 속담은 이야기는 단순히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전해지는 정신의 교류 또한 단절하라는 암시인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벌어진다기 보다 계층과 계층 사이에서 벌어지기 쉽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이해의 단절이다. 자신들이 지켜야 할 유리한 지점-배타성을 위해서 끊임없이 둘레를 막는다. 책 <울지 않는 늑대>에서는 주인공은 늑대의 울음소리를 알아듣는 에스키모 친구를 가리켜 '영혼은 거의 늑대'라고 말한다. 에스키모인들이 늑대의 소리를 알아듣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음가가 아닌, 그 속에 있는 영혼을 만난다는 뜻이며, 어느 공동체와 통하는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된다.


그래서 나는 어떤 장면보다 일라이자가 아직 꽃 파는 소녀 일 때, 히긴스의 독설을 맞고 완전히 압도된 장면이 오래 남는다. 


그런 우울하고 역겨운 소리나 하는 여자는 어디에도 있을 권리가 없어. 살 자격도 없다고. 너는 영혼을 가진 인간임을 기억해. 신이 주신 똑똑하게 발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네 모국어는 셰익스피어와 밀턴 그리고 성서의 언어야. 그러니까 거기 앉아서 성질난 비둘기처럼 구구대지좀 말라고. 35


그녀는 자신의 가난과, 권리에 대해서 발끈하며 자신의 소리를 낼 줄은 알았지만 자신이 갖고 있을 영혼의 고고함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깨우치게 돕거나 비난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그녀가 사용하는 공동체-빈민층의 말이 영혼을 생각하는데 까지 이르러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루를 사는 것에만 대화를-생각을 써야 했다. 리자는 난로를 키기 위해 돈을 넣을 때 웃었다. 실제로는 그녀의 몸이 웃었던 것이지만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영혼이 웃는 일이었다. 버나드 쇼의 비판에서 "기본소득"을 읽어낸다면 어떨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신의 생물학적인 삶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일을 포기하게 된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 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최소한의 생각만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층을 공고히 하는 기반이 된다. 말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4. 히긴스와 일라이자

 일라이자는 빈민층의'말'을 탈피하고 상류층의 '말'을 얻음으로써 자유롭게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히긴스 밑에서 (씻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먹는 것을 얻기 위해 온힘을 다해 집중했던 날들이 지났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슬리퍼를 히긴스에게 집어 던짐으로써 자신의 영혼의 정당한 위치를 얻어내려 한다. 
 갈라테이야 현대판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희곡에서는 귀여운 앙탈정도로도 볼 수 있지만 계급 투쟁의 하나로도 읽을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히긴스에게 왜 우리는 자유롭고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없는지, 대등하게 이야기 할 수 없는지, 더불어 자신의 존재가치는 무엇인지 묻는다. 그녀가 바란 것은 교정된 발음으로 똑똑한 목소리와 기품으로 오가는 대화가 아니라, 사랑이 충족된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긴스는 그녀를 동등한 대상으로 인정할 수는 있었으나 [일라이자. 내가 너를 여자로 만들었구나. 그랬어. 난 이런 네가 좋아. 199] 라고 말하면서도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 둘의 어긋남을 암시하는 마지막과, 그런 마지막에 못을 박는 후일담은 구태연연한 신데렐라 이야기의 외피를 쓰고서도 독보적인 신선함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결말이 바람직하지만 한편으로 아쉬움을 남기 것은 아마 남녀 모두에게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자라면 한 여자를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한 모델의 동일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겠고, 여자라면 신데렐라 증후군이 갖고 있는 나약하고 아름다운 구원의 완성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후 발표된 연극과 영화가 그 둘이 명백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원작의 '후일담'을 알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결말로 각도를 정정했던 것이다.  


5. 현대판 피그말리온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의 꽃 파는 소녀가 히긴스를 처음 만나러 왔을 때, 최대한 꾸미고자 차렸던 옷과 모자를 기억해보자. 상류층의 그것을 따라 허세를 갖게 했던 타조 깃털 달린 모자를 말이다. 그녀는 그것을 슬리퍼와 마찬가지로 던져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리자는 자신이 있었던 세계와, 자신이 새롭게 탄생했던 세계 모두에게로부터 나갈 수 있다. 


(완벽하게 우아한 말투로)걷는다고요! 좆나게 걸을 필요가 있나요. (좌중이 동요한다) 택시 타고 갈거예요. (나간다) 117


그녀가 도착한 곳은 사랑으로 채워진 말이 있는 -프레디가 있는 곳이었다. 버나드 쇼는 신랄하고 못되쳐먹은 히긴스를 내세워 이 모든 것을 말한 후에 결국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최상의 발음교정은 그녀를 왕족으로 보이게 해 계층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상류층의 말씨 속에서도 결코 알 수 없는 말이 있으니 '사랑의 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가르치거나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그말리온, 내가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모양으로 있어준다. 오래 전의 꿈이다. 오늘날의 갈라테이야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다. 공작 부인(상류층)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라이자처럼. 히긴스가 만들었으나, 만든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이다. 길게 돌아왔으나 이것이, 버나드 쇼가 들려주고 싶었던 현대판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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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03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소설을 안 읽어봐서 잘은 모르겠으나
혹시 이 소설 뮤지컬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나요. 지지' 던가요 ? 하여튼.. 내용이 비슷해서리...

봄밤 2014-02-03 23:11   좋아요 0 | URL
네, 뮤지컬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입니다. '지지'는 콜레트의 단편을 뮤지컬 영화한 것이라고 하네요. 마이 페어 레이디와 비슷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_+

곰곰생각하는발 2014-02-04 06:37   좋아요 0 | URL
아, 맞다 ! 마이 페어 레이디 !!!! 마자요. 저 이 뮤지컬 좋아하거든요. 참... 재미있게 보았었는데...
아, 이 원작이 바로 피그말리온이군요....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구본준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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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건물이 되었고, 건물은 기쁨이 되었다. 27

 감정의 순환이 살아있는 것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살아있는 것만이 감정이 있다고 믿겨지니 말이다. 그러나 딱딱하고 차가운 것으로 만든 건물을 보면 그곳에 머무는 사람의 마음을 닮아서 마침내 감정을 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쉽게 집이라는 공간이 그렇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과 지내는 곳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웃음이 번지는 곳이 되니 말이다. 그곳에 혼자 있는 시간이라도 그 기운은 쉽게 변치 않는다. 공간이, 둘이 있던 시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건물이 감정을 전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다'라는 긍정과 함께 건물을 처음 지었을 사연에 대해서 들여다 본다. 그리고 직접 만든이의 마음도 읽는다. 나중에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대개 우리는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그치기 쉽다. 저자는 모두를 아울러 소리를 전한다. 건물을 짓게 된 사연과, 짓는 이의 이야기와, 짓고 나서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말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책의 한 장을 만들었다. 없던 곳에 세워진 건물로 인해 내일을 피워나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딸의 죽음을 기억하고 싶은 아버지가 만든 도서관이었다. 

건축가는 이 훌륭한 장소와 이진아 씨의 슬픈 사연을 모두 담아낼 건물을 고민했다. 그리고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고인을 기리는 것에 너무 무게를 두어 도서관을 찾는 이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기 보다는 "이진아를 기념하되 오히려 이진아를 잊는"도서관, 시민들이 다시 찾아오고 싶어하는 밝은 도서관, 그래서 고인을 기리는 뜻이 조용히 살아나는 도서관으로 구상을 한 것이다. 20

건축가의 속내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건물을 짓기 위해서 터를 방문하고, 주변의 건물과 역사를 살피고, 이것을 의뢰한 이의 마음과 이용하게 될 사람들을 잇는 도서관. 그런가 하면 마음을 전하는 말은 이렇게 단순하고 싱겁게 쓰였다. 둥글레 이야기가 그랬다. 

한형우 씨는 고인에게 건축가로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도서관 창 밖 화단에 둥굴레를 심기로 한다. 둥굴레는 예쁜 하얀 꽃이 유월에 핀다. 고 이진아 씨의 기일이 있는 달이다. 24

딸을 잃어서 시작된 도서관, 유월에 피는 꽃을 지나면 세진 엄마의 쪽지를 보게 된다. 누구라도 울게된다. 세진 엄마는 이렇게 간단한 메모를 남겼지만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무엇에 데인 것 처럼 이 구절만 지나가면 울컥 올라온다.  

우리 동네에 도서관이 생겨 너무 좋지만 
그래도 진아 양이 살고 
도서관이 없는 것이 더 좋았을 것
세진 엄마의 메모에서. 27

이 책은 희, 노, 애, 락 각각의 마음으로 시작해서 사회와 역사까지 훑는 방대한 시선을 갖고 있다. 어떤 건축관련 도서보다 더 친근하게, 그러나 깊게, 그리고 따뜻하게 건물과 사회와 사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가는 말을 책의 구절로 대신한다.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다. 그래서 그 속에는 이야기가 담긴다. 이진아기념도서관은 누군가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건축에는 이야기가 담기며,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람에게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또 다른 행위를 하도록 한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책 만듦새가 무척 좋다. 책 내용에 쳐지지 않는 표지의 신선함은 물론이거니와 본문 편집도 세련되었다. 
서해문집은 그럴듯한 책은 만들지 않는다. 문질빈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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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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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군'이 '시'가 되기 위한 노력은 수십 년간 이어졌다. '시'가 된 기념으로 펄럭였던 플랜카드에는 백 년만의 쾌거! 라는 문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맙소사. 물론 그럴수도 있었다. 읍이 두 개가 되었다. 새로 생긴 읍이 내가 사는 동네였다. 염전이 있던 자리는 어디였는지 알 수도 없게 되었고, 그 자리 멀리,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큰 우유곽을 여러개 세워 놓았구나 생각했다. 어렸고, 봄이었다.

이주단지라고 불렀다. 그 이름은 우리네만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을 이주단지에 사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주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공단이 먼저 지어졌고, 달방이 성행하더니 원룸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리 건너' 사람들에게는 희한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파트를 위시한 그야말로 여느 '동'에 버금가는 동네가 형성되었다. 은행, 병원, 미용실, 술집, 빵집, 없는 것이 없었다.  

어쨌든, 옛것과 새것은 쉽게 섞이지 않는다. 스리랑카에 있는 콜롬보 '데사코다' 외곽의 경우, "지역사회는 외지인과 토박이가 분리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고 결속력 있는 지역사회를 구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류학자 막달리나 녹이 멕시코의 사례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다. "전 지구화로 인해 사람, 물자, 용역, 정보, 뉴스, 공산품, 돈의 이동이 늘어났고, 이로써 시골에서 도시의 특징이 나타나고 도심에서 농촌의 특색이 나타나는 일이 많아졌다. " 25

다리 안쪽에 사는 사람들을 옛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여가구가 되지 않는, 청년들이 살지 않는, 가장 젊은 층이 이장일을 보는. 작년에 이장이 된 분은 예순에 가까운 쉰살이었다.  

나는 머잖아 쇠락하고야 마는 동네를 떠난 아이들 중 하나다. 돌아가면 다리 건너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 이주해왔다. 그들은 땅을 지어먹지 않는다. 대화는 열리지 않는다. 도시사람들이다. 길가를 걷다가 차 창문을 내려 감자 가격을 묻고 휑 가버리는 사람들이다. 길가에 떨어진 밤을 주워 먹는 사람들이다. 그 길가에 난 밤은 모두 주인이 있는 밤나무인데도 말이다. 다리 안쪽의 시골사람들은 다리 건너 이주단지에 가서 장을 보고는 한다. 그곳에서는 돈이 활발하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를 보았다. 그곳에서 농촌의 도시화, 도시 속에 농촌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살고 있는데, 왜 그곳에 사는 것인지 스스로 설명이 어려울 때가 있다. 왜 그들은 그곳에 사는가, 더 나은 곳은 없는가, 그런 궁금증 말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그들이 아니라,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는 왜 이곳에 살고 있는가. 그것이 내가 선택한 일인가, 선택되어진 일인가,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면 어째서 그런 것일까. 신성아파트 102동 위에 뜨는 달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사는 곳에도 달이 뜬다. 그렇다면 저들은 이곳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조용한 원룸 단지 뒤편에는 더 조용하고 작은 농촌 마을이 있었다. 그곳은 황토색으로 밀어진지 오래고 아스팔트 까는 냄새가 진동 한다. 푸르지오 아파트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밀어진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어디로 갔을까 가끔 궁금하다. 신라면과 참이슬만 팔던 작은 가게는 어디로 갔을까. 달빛에 은은했던 감잎사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 책이 그런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무정부주의 건축가 존 터너의 유명한 말처럼 "하우징은 동사다." 도시 빈민은 주택 비용, 주거 안정, 삶의 질, 출퇴근 상황, 때로는 신변 안전까지 고려하여 최적의 상황을 얻기 위한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house는 주로 주택이라는 명사로 쓰이지만, to house의 어원을 고려하면 산다, 
혹은 살게 한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44

그렇지만 적어도 서로의 위치에 머물기 위해서 복잡한 방정식을 풀었다는 증명은 해주었다. 

도시가 슬럼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도시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유하기 때문인 것 같다. - 지타 베르마

나는 가끔 우리 동네 이야기를 생각한다. 길가에 흐드러졌던 뽕나무, 호두나무 집, 그네, 미상이네, 벽돌집, 좀 모자랐던 부부, 윗가게 아랫가게...해질 저녁, 굴껍질을 붓고 오라던 엄마의 심부름이 생각난다. 길가 패진 땅을 살피고 그곳에 자박자박 쏟고는 발로 콩콩 눌러주었다. 그 길은 이제 아스팔트로 까맣고 탄탄해졌다. 굴껍질이 그 밑에 층층이 쌓여 있다. 길을 메꾸던 굴껍질. 예전을 메우고 있는 굴껍질...나는 그런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뷰를 도시와 농촌에 한해서 썼지만 이 책은 다양한 목차를 갖고 있다. 슬럼, 거대하게 존재하는 변두리가 어떻게 도시의 미래가 되고 있는지 냉철하게 따진다. 자본주의-집의 관계에 대한 고찰. 국가가 외면하는 가난과 가난을 외면하게 하는 국제기구의 암(暗)을 이끌어낸다. 흥미롭다. 잘 풀어썼기 때문에 누구나 읽어도 좋다.  


약속한다, 자꾸자구, 쓰레기로부터, 흩어진 깃털로부터, 잿더미로부터, 망가진 육체로부터, 뭔가 새롭고 아름다운 것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한다. -존 버거 rumor 

하나의 장을 시작하는 말머리가 간결하고 아름답다. 마지막 장을 시작하는 말머리. 존 버거의 책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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