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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공부 비타민 - 보기만 해도 공부하고 싶어지는
한재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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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야흐로 평생학습의 시대다.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 명문대학의 명강의를 쉽게 들을 수 있고, 작은 도시의 평생학습원에도 다양한 분야의 강좌가 마련돼 있다. 그런데 나처럼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접근성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동기부여가 어렵기 때문이다. 누가 공부하라고 강요할 일도, 그렇다고 어떤 공부를 가지고 당장 생계에 이용해먹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절박함이 없다. 이 책 뒤표지에는 “공부할 마음만 있고 정작 하지 않는 당신을 위한 책!”이라는 말이 보인다. 그렇다.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다. 반갑고 또 반갑다.

 

책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하루에 한 꼭지씩 읽을 수 있도록 삼백예순다섯 가지 지침이 수록돼 있다. 그렇지만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쭉 읽어나가도 무방하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명쾌한 정리와 전달이다. 저자는 자신이 읽은 일화들, 공부하는 과정에서 느낀 것들을 최대한 압축해서 잘 전달해 준다. 그동안 좋은 일화를 모아놓은 책들은 많았지만, 공부에 자극이 되는 일화들을 이렇게 잘 전달해 주었던 책은 없었던 것 같다. 글이 잘 나오지 않아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자는 규칙을 만들었다는 하루키, 부두 노동자로 살면서도 도서관에서 독서와 사색을 계속한 끝에 사상가의 반열에 오른 에릭 호퍼의 일화 등은 내 각오를 새롭게 한다.

 

학습방법에 관한 구체적 지침도 유용하다. 그런 지침들이 인상 깊은 문장으로 전달되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마치 의미 없는 암기의 비효율성을 경계하며 “장기 기억의 문지기는 대단히 바빠서 의미 있는 기억부터 입장을 허락한다”는 대목만 보아도 그렇다. 거기다 이러한 학습방법에 명확한 출처를 밝히고 있어 더 미덥다. 세바스티안 라이트너라는 독일 작가가 했다는 “‘집중’은 지금 기억하고 싶은 바로 ‘이것’을 외울 때까지 생각한다는 의미다.”는 말을 통해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에 관해 말하는 부분도 뜻 깊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인용하며 잠을 줄이는 방법을 소개하는 대목처럼 당장 실험해 보고 싶은 것들도 많다. A4 용지 한 장을 16등분한 카드를 이용한 암기법도 당장 실천해 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마음가짐에 관해 말하는 대목들이 가슴에 와 박힌다. “모든 공부는 기본적으로 독학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혼자서 파악해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대목을 읽으며 남이 쉽게 가공해준 지식을 탐하려는 내 자신을 반성한다.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하는 대목, “창을 들고 사자와 마주 선 마사이 족처럼 전련을 다해 집중하”라는 대목에서도 한참을 생각했다. 우리는 늘 ‘열심히’ 하고 ‘집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냥’ 열심히 집중해서 공부하는 사람과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로’ ‘전력을 다해’ 집중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의 결과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공부를 ‘모르는 부분을 알아가는 게임’이라고 생각해보라고 권하는 대목도 신선하다. 정말이지 공부를 내가 모르는 부분을 하나라도 더 알아가는 게임이라고 여긴다면 공부가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책에 아쉬움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365’라는 숫자에 책의 구성을 맞추다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옆에 두고 읽으려는 사람에게는 저자의 반복이 오히려 유익할 것이다. 나도 이 책을 통해 끊임없이 수그러드는 공부 의욕을 북돋울 작정이다. 이 책에는 학습 동기를 자극하는 말이 거의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고도 당장 공부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영영 공부와는 이별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이 책의 귀한 지침들을 실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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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도시에서 장사를 배우다
김영호 지음 / 부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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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그렇지 않겠느냐 만은 나도 은퇴를 앞두고 이런저런 고민이 많다. 은퇴를 하면 무엇을 할까 하고 늘 생각해 오긴 했어도 막상 코앞에 닥치니 어쩔 수 없이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사실 은퇴를 하고 장사를 꿈꾸고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비관적인 것들이 대다수다. 누구는 겁 없이 장사 시작했다가 퇴직금을 몇 달만에 다 까먹었다더라 하는 말이 수시로 들린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다.

 

“천오백팔십만 원” 이 책의 저자가 ‘자율적 후불제’를 소개하면서 자신도 자기 강의료에 자율적 후불제 방식을 도입했다고 말하기에 나 나름대로 이 책의 가격을 매겨본 것이다. 물론 이런 책이 출간됐으니 그런 돈을 지불할 기회는 다행히 없다. 그러나 만약 이런 책이 출간될 가능성이 전무한 상황에서 장사를 하기 전에 이런 노하우를 얻기 위해 돈을 내야 한다면,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금액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지불한 비행기 삯만 해도 상당한 액수가 될 것이며, 이 책에 소개된 노하우를 수집하는 데 바친 시간도 엄청날 터이다. 만오천팔백 원에 이런 노하우를 얻는다는 것은 나 같이 은퇴를 앞두고 장사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감사한 일이다.

 

저자는 이 책의 두 번째 장을 일본에 할애하고 있는 데, 이는 단순히 일본이 이웃나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본 사회의 인구 변화가 한국에 20~30년 앞서서 진행되고 있기에 일본을 보면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먼저 일본의 편의점을 소개한다. 일본의 편의점은 증가한 고령층 수요에 부응하여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중대형 주택 수요는 감소하고 소용 주택 수요가 늘어나면서 변화될 시장에 전망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미니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고 소형 주택 수요 증가에 따라 주택 관리 업종의 성장이 기대된다는 전망에는 고개가 끄덕여 진다.

 

원가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다이소의 판매 전략은 파격적이다. ‘원가 절감’이라는 구호에 익숙해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이야기다. 이 전략은 매장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 주문량이 늘어나고, 주문량이 늘어나면 매입 원가를 낮출 수 있다는 다이소 창업주 야노 히로다케의 단순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그는 “고객이 일단 다이소 매장을 찾았다면 자신이 원하는 제품이 없어 발길을 돌리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153쪽)을 지킨다고 한다.

 

이 책이 여러 기막힌 사례들을 잘 전달해주고 있지만, 해외 현장에 대해 무조건적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모조품으로 가득한 중국 베이징 류리창 거리를 보며 저자는 인사동을 떠올린다. 인사동에서 파는 한국 전통 공예품에 ‘메이드 인 차이나’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을 외국 사람들이 볼 때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고 저자는 묻는다. 그나마 류리창 거리는 청나라의 분위기를 간직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인사동은 그마저도 없다는 것이다.

 

책 전체가 알짜배기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다. 백화점에서 다 둘러볼 시간이 없을 때는 주방용품 코너를 가보라는 팁도 메모해 두었다. 소비 트렌드 변화를 파악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 바로 주방용품 코너라는 것이다. 관련 법규가 한국에서는 어떻게 정비되어 있는지를 소개해 두고 있기 때문에 바로 사업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다. 향후 시장 전망도 저자 나름의 시각으로 전해주고 있다. 중간중간 ‘비즈니스 방랑객의 시선’이란 코너에서는 해외여행 중 유익한 팁도 얻을 수 있다. 저자는 친절하게 모디슈머(midisumer), 몰링(malling) 등 최근 떠오르는 키워드들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통계청 자료를 먼저 체크하라는 조언도 굉장히 유용하다. 부록에는 ‘세계의 도시에서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한 8가지 준비’라고 해서, 직접 시장 조사를 하기 위해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지침을 주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어떤 장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밑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준비자금이나 건물보다 중요한 건 시장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관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관점을 바꿔 한국에서 잘 나가는 아이템을 해외에서 팔수는 없는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큰 공감이 갔다. 작년 학부모들 사이에 불었던 ‘스칸디맘’ 열풍의 경우 평소 소비자들을 잘 관찰만 했어도 미리 조짐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은퇴하기 전 남은 시간을 알차게 활용해서 내가 지금 읽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또 살펴야겠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이 교과서 역할을 할 것임은 당연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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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문학을 둘러싼 대논쟁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6
김경연.김용규 엮음 / 현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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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소설이다. 일단 판매부수부터가 이전에 영어로 번역된 한국소설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데다, 맨 아시아 문학상까지 최초로 수상했으니 말이다.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에 발맞추어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주제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출되었다. [엄마를 부탁해]처럼 세계인들의 보편적 공감을 얻을 만한 작품을 지원해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이 특히 지지를 받았던 것 같다.

 

사실 [엄마를 부탁해]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문학적 성과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던 작품이다. 한국문단의 거목 백낙청 교수의 극찬이 있기는 했지만, “작가의 문학적 행보에서는 가장 성취도가 낮은 작품”이라는 김형중 교수의 비판도 있었다. 지금 내가 독후감을 늘어놓으려는 책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의 필자로 참여한 조영일 선생도 글의 주석에서 “신경숙의 통속소설”(313쪽)이라고 언급하여 [엄마를 부탁해]의 문학적 성취를 낮추어 보는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문학적 성취도가 낮다고 여겨지는 [엄마를 부탁해]를 미국 시장에서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세계문학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문학적 성취도 높다고 여겨지는 [외딴방]이 번역되어 세계 시장에서 실패한다면 덜 좋은 세계문학이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이런 문제의식을 지니고 이번에 만난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를 읽었다.

 

우선 현재의 세계문학 시장은 소비가능성과 번역가능성이라는 두 잣대가 존재한다. 확실히 [엄마를 부탁해]는 두 기준에 모두 부합한다. 판매도 잘 되었고, 김지영이라는 탁월한 번역자의 공이 크겠지만, 번역에 대한 찬사도 넘쳐났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소비가능성과 번역가능성의 측면에서만 좋은 세계문학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박상진 교수는 <세계문학 문제의 지형>에서 “진정한 보편적 문학 가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지금까지 생산된 모든 문학 텍스트들에 대한 전면적 재조명과 재평가를 수행해야”(199-200쪽) 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외딴방]과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를 수행한다면 어떨까.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외국 독자들의 반응을 언급하는 게 좋을 듯하다. 아마존닷컴에 게시된 리뷰를 보면 가족 관계에 큰 방점을 두고 감명 깊게 읽었다는 글이 많다. 특이한 점은 영어권 독자들이 이런 가족 서사는 이제껏 읽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를 부탁해]의 가족 서사는 한국 소설에서는 흔하디흔하게 관찰된다. 그렇기에 “통속소설”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일 테다. 그러면 한국의 가족 서사가 잘 녹아있는 한국의 걸작 소설들을 번역하기만 하면 세계문학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잘 안될 거라는 데 걸겠다. 그런 성공이 쉽지 않기에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은 놀랍다. 만약 ‘보편’이란 개념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본다면, [엄마를 부탁해]가 [외딴방]보다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면 한국 비평가들이 [외딴방]을 [엄마를 부탁해]보다 높이 평가하는 그 이면에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가 있지는 않았는지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시선에 주목한 것이다. 오길영 교수는 “세계적인 한국문학을 논하기 전에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식민주의의 실체를 먼저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세계가 한국문학을 어떻게 보아줄 것인가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정작 한국에 소개된 여러 나라의 문학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비평가들의 역할을 강조하며 외국문학 번역 작품과의 생산적 대화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지 가늠해야 한다는 주목할 만하다. 한국 문학비평가들의 관심은 여전히 한국문학에만 머물러 있다. 유력 출판사들에서 세계문학전집이 수년 째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는 만큼 한국문학의 문학적 성취가 외국문학과 견주어 어떠한지, 한국의 비평가들이 심도 있게 논의를 전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오길영 교수는 조심스러운 판단이라고 전제하면서도, “토머스 핀천, 코맥 맥카시, 필립 로스, 돈 드릴로 등에 견줄 만한 한국 소설의 거장은 누가 있는가”(241쪽)라고 묻는데, 이 질문을 읽는 내 마음은 씁쓸하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내가 높이 평가하는 한국의 뛰어난 작가들의 이름 몇몇을 대며 반박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길영 교수의 의견에 동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오길영 교수의 저 질문이 그가 앞에서 말한 “문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 활동에 등수를 매길 수는 없다.”(237쪽)는 진술과 모순되지는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차동호 선생이 카자노바의 세계문학론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근대적 시각주의를 넘어서>라는 글은 의미가 있다. 파스칼 카자노바는 [세계문학공화국]이란 책으로 명망을 떨친 프랑스의 비교문학자다. 차동호 선생은 영미문학 헤게모니,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내놓은 카자노바의 세계문학론이 오히려 중심부와 주변부의 이분법적 구분을 심화한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한국이라는 주변부가 서구라는 중심부에 대항하여 자신을 민족 주체로 구성하고 나서는, 또다시 자기 안의 소수집단을 주변화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국격을 자꾸 연관시키려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시각주의는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다.

 

이 책은 세계문학은 무엇인가에 관해 확실한 해답을 내어주는 책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세계문학에 대한 설왕설래만 가득할 뿐,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는 부족한 한국 사회에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어떻게 세계에 내놓을 것인가의 물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내놓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놓은 ‘무엇’이 무엇인지”(199쪽) 고민해야 한다는 박상진 교수의 주장은 두고두고 숙고해 볼 문제다. 흔히 말하는 ‘보편성’이란 개념이 어디까지나 서구 독자들의 기호가 반영된 것은 아닌지도 계속 되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계문학의 보편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시각주의에 함몰되어 약한 대상을 주변화하지는 않는지 세심한 관찰해보아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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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반양장) 믿음의 글들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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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크리스천도 아닌 내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좋아하는 것은 딜레마에 처한 인물을 성실하면서도 당혹스럽게 다루는 방식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로드리고는 자신의 스승이자 일본에 선교사로 33년간이나 체류한 신부 페레이라가 고문을 받고 배교했다는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신부다. 일본 관헌에 의해 붙들린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지 않으면 자기뿐 아니라, 일본의 신자들도 죽게 되는 상황에 몰린다. “너는 그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너 때문에 저 사람들이 죽어 간단 말이야.”(212쪽)라는 일본인의 말이 드러내듯이 엔도 슈사쿠는 예수가 십자가를 져야만 했던 상황보다 더 어려운 상황으로 로드리고를 몰고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고통의 문제’라는 거창한 신학적 주제에 위축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기독교 소설이기 이전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질문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다. 어떤 인간은 종교에 의지하여 그 약함을 극복하기도 하지만 끝내 그 약함을 안고,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작가는 고통이란 신앙의 힘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경솔하게 말하지 않는다. 신앙만 있으면 세상에서 강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결론 내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장렬히 순교하는 대신에 배교한 로드리고를 비추는 작가의 시선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다. 엔도 슈사쿠는 신부로서 혐오스러운 배교행위를 한 로드리고를 통해 치명적인 약함이 있는 자들도 현실에서 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그와 같은 전개는 독자들, 특히 크리스천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신앙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던 소설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배교행위에 대해 자기합리화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로드리고의 감상으로 끝맺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나면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실제로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배교를 선택한 로드리고의 행동은 냉정하게 보면 신앙적이라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로드리고는 배교하는 순간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267쪽)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지만, 이는 작가가 배교를 종용한 이노우에란 자의 말을 통해서 반문하듯이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그러한 지점까지 건드리지만 로드리고의 배교가 인간을 위한 또 다른 의미의 순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그것은 작가가 로드리고를 지칭하는 주어로서 기능하던 ‘신부’라는 3인칭을 ‘나’라는 1인칭으로 바꾸면서 소설을 끝맺는 방식을 상기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침묵》은 특정한 신학적 메시지에 경도되기를 포기함으로써 독자가 깨달아야 할 지점을 일일이 지시하지 않는 미덕을 지닌 작품이다. 좋은 문학작품이란 독자에게 표지판을 세워 가야할 길을 직접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해석이 가능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이라는 거대한 신학적 주제에 압도되기 쉬운 종교소설들 중에서, 이처럼 인간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면서 치열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소설을 읽는 것은 정말 가슴 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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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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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나를 배반한 역사>에 나오는 ‘국민’ 담론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이다. 사실 메이지 시대의 ‘국민국가’ 개념을 영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국민’을 ‘nation’의 번역어라고 볼 수 있지만 ‘nation’은 근대국가 형성 과정의 역사적 주체로 설명될 수 있으며, 후발 근대국가의 통치 대상인 ‘民’을 지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국민학교’라는 용어가 최근까지도 쓰인 것은 현대 한국어에서 국민이 관습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무’와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국민교육헌장’, ‘국민의례’ 등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은 특권층을 위해 대다수를 전체로 만들 때 동원되는 용어다.

 

구한말 '국민' 담론은 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유길준이 말한 인민은 ‘권리’보다 ‘국법’을 우선에 두어야 했다. 이러한 국가지상주의적 ‘인민’ 담론에 있어서 인민은 개화 행위의 대상에 불과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독립신문』은 하강식 개화를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官은 법률, 규칙을 만드는 주체가 되지만 民은 감시자로서 만족해야 한다는 조건부 ‘인민 참정론’을 제안했다. 이때의 국민참정권 모델은 극소수만이 선거권을 가졌던 일본이었으며, 유럽 선진 국가들의 모델과는 차이가 있었다.

 

1900년대 지식인들의 국가주의는 제국주의적 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국가주의를 부추긴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아니었으며,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에 이론적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들이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당시의 민족제국주의와 같은 사상적 조류에 기인한다. 그들은 자연발생적인 민족을 결속력 있는 국민으로서 동원해야 강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국민정신을 고양할 주체로 자처하면서 국민 국가의 주체로 군림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국가와 황실의 구별과 같은 논의가 민주주의에 일정부분 기여하였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문명화 과정에서 ‘배제’와 ‘억압’이 필수요건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계몽주의적 담론에서 배제의 대상에는 외적(外敵)만이 아니라 내적(內敵)도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외적에 대한 배제는 단순한 일제침략에 대한 반응이 아닌 ‘국민 단결’에 필수적인 구별짓기와 배제하기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내적에 대한 배제의 대상은 개화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무당, 승려 등이었다. 이 같은 구습에 대한 멸시와 배제는 개화나 국민 담론을 생산하고 담지했던 자들의 결속을 도왔다. 심지어 동학교도들도 개화파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친일 지주들에 의해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의 자강에 도움되지 않는 자들은 ‘비국민’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구한말 그 모습을 갖춘 ‘국민’의 담론은 구별짓기 배제의 논리를 강조했다. 이는 망국에 대한 위기의식이라기보다는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근대 민족주의에 의한 배타주의는 다른 나라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배제 논리의 희생자들을 외면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국민의식’에 순치된 우리들 역시 창조성, 개성, 자유를 파괴당한 희생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사회는 '국민적 전체주의'에 대한 대안이다. 그러한 시민사회는 국경을 초월해야 하며, 그때 비로소 국민을 통한 동원과 구별짓기 논리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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