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수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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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 근원적인 방식으로 물어지는 것은, 실지로 여기에서 생활하는 구체적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다. 윤리는 추상적 차원에서 애매함이 없는 일의적 어법으로 다 말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때그때 이미 어떤 역사적 상황 속에 던져져 있으며, 이미 무언가를 ‘양식‘으로서 향유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그때 이미 ‘원조를 간구하는 호소에 귀를 막을 수도 있으며, 자신의 에고이즘이 끌어안은 모든 자산을 던져 무한의 얼굴을 확대할 수도 있는‘ (TI, p.191) 그런 간단 없는 결단의 장에 내몰려 있다. 내가 있는 장소는 그때그때 이미 원리적으로 비대칭적인 것이다. 거절할지 환대할지를 나는 강요받고 있으며, 어느 쪽을 취하는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어버려 상칭성이나 평등성은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다. 인간이 ‘가정적 실존‘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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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무의 본질은 아무것도 파악하지 않는 데 있다. 끊임없이 지금의 형태로부터 어떤 미래를 향해-결코 도달하지 않을 미래를 향해-떠나가는 것,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듯이 달아나버리는 것을 만류하고자 하는soliciter 데 있다. 애무는 희구한다. 애무는 더듬는다. 그것은 폭력의 지향성이 아니라, 탐구, 즉 볼 수 없는 것을 지향하는 발걸음인 것이다.(TI, p.235.)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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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미지성-그 ‘나‘에게로의 환원 불가능성, 즉, 나의 사고, 나의 소유에로의 환원 불가능성-은, 바로 나의 자발성의 심문으로서, 즉 윤리로서 성취된다.(TI, p.13.)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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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소환에 응하는 것‘, ‘신을 두려워하는 것‘, ‘신의 품으로 향하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표상하는 힘의 한계를 인식하고 파악하는 능력의 부족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자신의 불능을 절감케 하고, 무력감 속에 빠트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 수동성이야말로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기초지우는 것이다. 나만이 담당할 수 있고 나 이외의 누구도 나를 대신해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책무를 담당한다는 방식으로, 나의 유일무이성, 나의 자기동일성은 기초지워진다.
나의 주체성은 ‘내가 나라는 것의 자명성‘도, ‘내가 존재하는 것을 충전적이고 명증적으로 경험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에 대한, 대체 불능한 책무의 인수’ 에 의해 기초지워진다. 그때 비로소 ‘죽음보다도 정의가 행해지지 않음을 두려워하고, 부정의를 범하기보다는 부정의의 희생자가 되기를 선택하고, 존재를 확실히 하기보다도 존재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를 선택하는 사람의 가능성(QLT p.265)이 우리들 앞에 열리는 것이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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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빛은 고독하다. 이들 사물은 주어져 있다. 이들 차려입은 존재자들은 나 자신과는 다른 것이지만, 나의 소유물인 것이다. 빛에 비추어져서, 그것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것들은 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이해된 우주 안에서, 나는 고독하다. 나는 결정적으로 하나인 실존 안에 유폐되어 있다. (EE, p.144.)
오디세우스적 주체는 자신이 미리 사물에 수여해둔 의미를 발견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밖에 의미를 만날 수가 없다. 이 ‘빛의 고독‘이 전체성 안에 살기를 선택한 자의 숙명이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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