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별로 구분하고 수상을 한다고 해서 베니스 비엔날레국가관이 단지 국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라는정체성이 품고자 하는 진짜 이슈를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델 아비딘Adel Abidin 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공부하고 핀란드 헬싱키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2007년 제5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북유럽관에 참여했고, 2015년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이라크 국가관에 참여했습니다. 작품을 통해 정치·문화가 개인과 어떻게 부딪히고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색합니다. 그는 이라크와 핀란드라는 전혀 다른 환경과 문화에 영향을 받은 자전적 이야기를 살려냈지요.
l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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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식탁 - 양장, 영혼의 허기를 달래는 알랭 드 보통의 132가지 레시피 오렌지디 인생학교
알랭 드 보통.인생학교 지음, 이용재 옮김 / 오렌지디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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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목적은 가능한 자주 우리가 최선의 확신을 계속 품도록 돕는 데 있다. 문화를 우리 정신의 최전선에 둠으로써, 산만하고 부도덕한 기질에 영향을 끼치도록 말이다. -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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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건강함(able-bodiedness)’은 존재의 자연적인 상태가 아니라 ‘건강한 몸(able-bodies)‘을 ‘장애가 있는 몸(disabled)‘으로부터 구별하는 경계-만들기 실천을 통해 함께-구성되는 육체화의 특정한 형태라고 정의한다. 바라드는 개별 객체/주체가 아닌 현상으로서의 건강상 몸의 물질성에 집중하면서 건강한 몸과 장애 있는 몸의 구성적인 얽힘을 논술한다. 신체 건강한사람이 된다는 것의 본질 자체가 그것이 배제하는 것, 즉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포함하는 현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일부로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바라드는 신체 건강한 사람들이 자신들 존재 자체를 위해 장애인들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육체화 자체가 본질적으로 타자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타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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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우리의 기대치를 낮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재발견할 수 있다. "한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책임감을 놓아주면 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다시생명력이 샘솟는 기분을 느끼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순수한호기심을 품으며 만물을 향해 과도한 고민 없이 일상적인 사랑을 나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이 정도 원동력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에는 삶에 대한 흥미를 살아 있게 만들어주는 깊은 원동력이 존재한다. "설령 사랑하고 탄복하고자 하는 충동이 죽어버리더라도, 미워하고 싸우고자 하는 충동이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의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려면 반드시 세상이 좋은 곳이어야 한다고 추정한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좋은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삶에 절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세상은 꼭 좋은 곳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굉장히 많은 경우 우리를 계속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일부 악의 존재다. 적어도 악은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물론 우리가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악 자체는 악하지만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악하지 않다. 오히려 악의 존재는 삶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며 어떤 면에서는 계속 살아갈 이유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삶을 더욱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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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낙천적인 기분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건강한 정신이라는 기질 역시 보편적인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우리 대부분은 이따금 "세계의 궁극적인 잔혹함"을 인식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럴 때면 우리는 온갖 고난을 지금 여기서 끝내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빠질지도 모른다. 제임스가 지적하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사실은 삶이 실제로는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지지하는 것 같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자살을 저지른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주체하기 힘든 충동"이 "갑작스럽게" 이는 바람에 자살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충분히 제정신인 상태에서 특정한 상황이나 환경과는 관련 없이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은 특정한 종류의 삶의 권태tedium vitae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들이다. 삶의 권태는 오직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성찰적인 삶에 몰두하는" 사람들과 "악착같이 사물의 추상적인 뿌리를 찾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만 닥치는 것 같다.
이는 보통 "의문만 지나치게 많이 제기할 뿐 적극적인 책임을 거의 지지 않은" 결과이다." 삶의 권태에 압도당한 사람들은 특히 어두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제임스는 이런 렌즈를 가리켜 "삶을자정midnight처럼 바라보는 관점" 혹은 "삶을 악몽nightmare처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부른다. 이는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을 대낮daylight처럼 바라보는 관점"과 뚜렷이 구분된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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