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우리는 남의 생각과 남의 집 속에서 너무나 ‘편하게‘ 살고 있다. 눈을 씻고 찾아보라. 책의 안팎에, 교실의 안팎에, 대체 우리의 것, 우리 역사의 터를 거쳐서 법고창신과 온고지신의 바람을 맞으면서 키워온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남아 있는가."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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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이른바 고전 교육.ㅡ 우리의 삶이 인식에 바쳐진다는 것, 이렇게 인식에 바쳐진 삶이 삶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러한 삶을 내던질 것이라는 것, 아니! 그것을 내던져버렸을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다음의 시에 감동하며 자주 이 시를 암송하게 된다.

운명이여, 너를 따르리라!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한숨을 지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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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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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의 침묵이 지난 다음에 할말이 완전히 바닥난 나는 아빠가 결국 위암 판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그렇게절망적인 건 아닌데 또다른 데로 전이가 됐다고 말했다. 삼은 한침묵하더니 아버지의 쾌유를 빈다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서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울었다. 하지만 삼은 그 누구보다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런상황에서 쾌유를 빌지 못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이다. 나는 왜 이1 인간인가, 하는 생각으로 다시 울었는데 다 울고 나니 번다생각들이 모두 다 용해된 느낌이었다. 그렇게까지 울기 위해서는엄청난 열의와 압력이 필요했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악감정들을 온몸으로 울면서 모두 죽여버린 기분이었다. 때로울음이 정화인 것은 어떤 살해에 성공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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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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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숫집을 나와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인선의 숱 많은 단발머리에 소슬히 눈이 쌓였다. 아마 내 머리에도 그만큼 쌓였을 것이다.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인적 없는 하얀 거리가 커다란 그림책처럼 펼쳐졌다. 우리 발이 눈을 밟는 소리, 파카에 소매 스치는 소리, 멀리 있는 가게에서 셔터 내리는 소리가 정적 속에 또렷했다. 우리 입과 코에서 흰 김이 흘러나왔다. 눈송이들이 콧잔등과 입술에 내려 앉았다. 우리는 따뜻한 얼굴을 가졌으므로 그 눈송이들은 곧 녹았고, 그 젖은 자리 위로 다시 새로운 눈송이가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기 위해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연인들이 짧은 이별을 미루기 위해 우회로를 택하듯 계속해서 지하철 역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듯 펼쳐지는 고요한 횡단보도를 건너며 나는 기다렸다. 침묵을 깨고 인선이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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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선의 옆얼굴을 나는 보았다.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나는생각해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피투성이 손에 헐렁한 환자복을 걸치고 팔뚝에 주렁주렁 주삿줄을 매달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약하거나 무너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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