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월급쟁이들이여. 끝내 아무도 그대를 탈출시켜 주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그대의 죄가 아니다. 다만 그대는 흰개미들이하는 모양으로 광명을 향하여 빠져나갈 구멍을 무턱대고 시멘트로 막고 또 막은 나머지, 그대의 평화를 이룩한 것이다. 그대는 자유 시민적 안전 속에, 천편일률적인 일 속에, 시골 생활의 그 숨막히는 예절 속에 공같이 뭉쳐 그 속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람과 조수와 별들을 막기 위한 이 초라한 성벽을 쌓아 올렸다. 그대는 인생의 큰 문제를 아랑곳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대는 유성의 주민이 아니며, 대답 없는 질문을 아예 품지도 않는다. 그대는 툴루즈의 한 소시민이다. 아직 그럴 여 유가 있을 적에는 아무도 그대의 어깨를 붙잡지 않았다. 지금은 그대를 이루고 있는 진흙이 말라 굳어 버려서, 이제부터는 아무도, 애초에 그대 안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잠든 음악가, 시인, 혹은 철학가를 그대 안에 다시 깨워 일으키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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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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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디 그림의 추상성은 그림 한 점만 놓고 봤을 때도 드러나지만 여러 점울 연속해서 볼 때 더 확실해진다. 비슷한 상자와 병의 배열을 조금씩 끊임없이 바꾸며 전경과 배경을 스미듯 넘나들고 면과 면, 형태와 형태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조심스레 탐구한다. 모란디가 일찍이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사실에서도 유추가 가능하지만 입체파처럼 모란디에게 있어 커다란 주제는 부분과 부분, 면과 면, 부분과 전체의 서틀한 관계˝ 였다. 이렇게 커다란 주제 아래 같은 소재를 반복하는 것은 현대미술의 특징을 이루기도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모란디를 향한 애정을 담뿍 담은 짧은 글에서 ˝무엇이 혁신과 발전을 위한 기본 메커니즘인가?애 대한 답을 ‘변주’라 했다.
- 201p

모란디는 그 혁신의 세월을 살았다. 촌동네에서 그 세월을 살았고 여행은 의도적으로 자제했지만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고 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무슨무슨 파에 가담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추상을 누구보다 이해한 사람이었지만 보란듯이 추상의 물결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구상과 추상이 충돌해 낳는 미세하고도 끝없는 균열 같은 시정을 완성했다. 사물과 사물 사이 속삭이듯 가늘게 흔들리는 골, 병에서 벽으로 벽에서 다시 병으로 진행되는 그 은근한 넘나듦, 겹치고 떨어지고 드러내는 이런 양상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그가 가진 구상성과 추상성 사이의 긴장이 사람을 숨죽이게 하는 정적감과 또 끝없는 변주를 낳은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이 말에서 모란디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반복적 기억은 같은 종류의 움직임이다. 다만 그 방향이 반대일 뿐이다. 기억 속의 대상은 뒤로 가는 방향으로 반복되는 반면, 반복은 말하자면 앞으로 나아는 방향으로 그 대상을 기억한다. 모란디에게 있어 반복은 혁신을 위한 방법이었고 그 방법은 먼지로 덮인 사물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2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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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개념 틀 안에서 논의해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헤겔은 모순, 대립, 차이라는 개념을 구별하지요. 마르크스가 든 예이지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모순이 있어도 협동조합을 만듦으로써 자본가와 노동자의 전환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모순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대립은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완전히 절멸시킬 때 해소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차이는 해소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논쟁하는 상대가 당신이 뭐라하든 이것은 내 취향이라고 해 버리면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될 수 없습니다. 취향은 차이니까요. 차이는 해소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느 쪽 입장에 서는가에 따라 세계는 다르게 보입니다.
-2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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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 그 끝에 있는 종점이 어떤 모습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곳엔 무덤이 있다. 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거기까지 가는 데 길 안내는 필요 없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다. 여러 가지 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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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한 것으로 생각되는 힘에 전적으로 헌신했으며, 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느끼는 힘, 그에게 고귀함과 명예를 약속하는 힘, 무의식적이고 말없는 삶 위에 미소를 머금고 군림하는 정신과 언어의 힘에 완전히 몸을 바쳤다. 젊은 정열을 다하여 그는 그 힘에 헌신했는데, 또한 그 힘은 자신이 선사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써 그에게 보상했으며, 자신이 그 대가로서 가져가곤 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서 가차없이 빼앗아갔다.
그 힘은 그의 눈초리를 날카롭게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사람들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위대한 단어들의 실체를 꿰뚫어보도록 만들었으며, 그에게 사람들의 영혼과 자기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 힘은 그에게 혜안을 주어 그에게 세계의 내부를 보여주었으며 말과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모든 궁극적인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결국 우스꽝스러움과 비참함에 다름아니었다. 그랬다 —— 바로 우스꽝스러움과 비참함이었다.
-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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