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때 다혜는 자신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했다.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는 이제늙어버린 노인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노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었다니.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전히, 지금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다혜는 학과 내에서 주류를 이루는 무리에섞일 수 있기를, 다른 동기들보다 매사에 조금이라도 더 앞설 수 있기를 은밀히 원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부모에게 받았던 기대의 힘이란 놀라운 것이어서, 주변부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조차 다혜의 마음속에는 어쩌면 사실은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었다. 그즈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열등감은 번갈아가며 얼굴을 바꾸고 다혜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딸은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아무것도 덧붙일 필요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천진하게. 투명한 햇살에 조금씩 눈이 녹아내리는 새하얀 산을 향해 달려가는 검은 개를 바라보다 그가 딸쪽으로 시선을 다시 돌리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딸의시선이 그를 맞이했다. 그들은 그렇게 잠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정한 공모자들처럼. 설산 저편의 구름 사이로 곧 사라져버릴 희미한 한 줄기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에게는 집도 차도 아내도 있었고, 경기도권 신도시이사는 아들 내외와 손주들도 있었지만 무언가가 틀림없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구멍은 갈수록 커졌다. 손을 쑥 밀어넣을수록 자꾸자꾸 커지는 어둠, 깊이를 알 수 없는 버려진동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