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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궁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시공사 / 2023년 10월
평점 :
[사라진 소녀들의 숲]에 이어 허주은 작가님이 우리 역사에 바치는 두 번째 러브레터인 [붉은 궁]은 사도세자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사도세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캐나다에 사는 한국인 이민자로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작가님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역사 속 사건을 바탕으로 허구의 사건을 만들어 내되 최대한 역사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셨다고 한다.
이 말을 증명하듯이, 책을 읽다보면 작가님이 사전조사를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느껴진다. 피맛골, 종로, 돈화문로 등 궁궐 주변부터 광주, 담양을 아우르는 배경이 상세히 묘사되어 나도 함께 그 장면 속 등장인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또한 포도청, 혜민서, 궁궐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다양한 계급과 성별에 따라 빚어지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계급사회에 대한 묘사도 날카롭다.
살해당한 네 명의 여인, 용의자로 의심받는 세자, 범인으로 의심받는 스승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는 의녀와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젊은 종사관...
의녀 현과 종사관 의진이 만나 머리를 맞대고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을 좇으며 '미스터리 소설의 쫄깃함'을, 둘 사이에 오가는 오묘한 달달기류를 나도 모르게 응원하며 '로맨스 소설의 몽글몽글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유혜인 번역가님이 [사라진 소녀들의 숲]에 이어 이번 책도 번역을 맡으셨는데 그래서 허주은 작가님 소설만의 분위기나 톤앤매너가 유지되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기 수월했던 것 같다.
주인공 현이 의진을 나리로 높여불렀다가, 의진아~하며 말을 놓았다가 하는데 영어로는 어떻게 적혀있었는지, 가리마/도롱이/온담탕(화를 가라앉히는 탕약) 같은 고유명사는 영어로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평범한 편지였다. 하지만 평범함은 빼앗겼을 때 비로소 소중한 보물이 되는 법이다."
- 소중한 보물을 빼앗기고 살인자가 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나는 사라질 운명인 꿈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꿈을 떠나보낸다 해서 내 인생을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원한다고 상상했던 삶을 놓아버린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상실감으로 괴로웠지만 그마저 흐릿해졌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새로운 꿈이 싹을 틔웠다."
- 살인사건은 해결되지만, 현이 처한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나아지지는 않는다. 현이 자신의 새로운 꿈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오히려 더욱 현실적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