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 강의 1 : 주남·소남 고전완독 시리즈 1
우응순 강의, 김영죽 정리 / 북튜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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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경 강의1-우응순

 


멍하니 앉아 있다 시계룰 들여다본다. 1110. 순간 깜짝 놀란다. 아 어제부터 하루에 하나씩 책 리뷰를 쓰기로 했지. 허겁지겁 컴퓨터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떤 책 리뷰를 써야 하나. 맞다. 이틀 전에 읽은 책이 있지. 그 책 리뷰를 쓰면 되겠다. 조급함에 일단 키보드의 글자부터 누르기 시작한다. , 쓰다보면 글이 나오겠지 생각하며.

 

<시경>은 사서삼경에 속하는 책이다. 성리학의 국가였던 조선에서 주자가 정립한 사서삼경은 너무나도 중요한 책이었다. 하지만 성리학이 아닌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핵심으로 내세운 한국에서, 더군다나 SNS와 디지털 경제가 급속히 퍼진 2022년의 한국에서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을 강의한 <시경 강의>라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가 뭐라고 해도 거기에는 보편성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오래전에 쓰인 책이고, 오래전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다고 해도,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에는 서로 이어지는 보편성이 있다는 것. 그들도 사랑하고 슬퍼하고 행복해하고 괴로워하고 일하고 노래하고 기뻐한 사람이었다는 점. 2022년을 살아가는 우리도 그들처럼 사랑하고 슬퍼하고 일하고 노래하고 기뻐하고 있다. 고대인과 2022년의 현대인이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그들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경>에 나오는 고대 노래를 읽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술적으로 봤을 때 우리보다 확실히 열악한 상황에서 살았을 그들의 삶에게서, 우리가 배울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먼저 삶을 살다간 선인들에게서, 삶의 선배로서 무언가 배운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삶에서 무언가 배우기 위해서 <시경>을 읽는다는 것에 있어서 우리가 넘어야할 것이 있다. 바로 독해력. 누가 뭐라고 해도 사서삼경은 고전이고, 과거의 가치와 삶을 반영하여 과거의 언어로 기록된 책이다. 말을 줄여쓰고, 책도 거의 읽지 않고, 유튜브 같은 이미지 매체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2000년 전의 삶과 가치관을 전하는 사서삼경은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이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공유한다고 해도, 과거의 방식대로 기록된 과거의 텍스트를 읽는 건 지난한 일이다. 그나마 <시경>은 사서삼경 중에서 노래를 다룬다는 점에서 가장 딱딱하지 않고, 공감의 가능성이 가장 큰 텍스트라는 점에서, 내 개인적으로 사서삼경 중에서 가장 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쉽다는 말은 사서삼경 중에서 쉽다는 말이지, 책의 난이도를 따지면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결국 <시경>을 읽는다는 건, 그 어려움을 넘어서서 고대에 가닿는 것이다.

 

다행인 건, 우응순의 <시경 강의>라는 책이 나와있다는 점이다. <시경 강의>는 내가 지금까지 읽은 <시경> 해석서 중에서 가장 친절하고 꼼꼼한 책이다. 저자인 우응순의 강의를 실제로 꼼꼼하게 기록하여 풀어낸 <시경 강의>, <시경>에 나오는 고대 노래의 한자한자를 친절하고 세밀하면서도 꼼꼼하게 풀어내며, 고대 노래를 터럭 한 올이라도 빠뜨리지 않고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노래의 맥락과 배경설명도 충실히 하고 있다. 해석에 있어서도 주자의 교화주의적인 해석을 알려주고, 그러면서도 그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현실에 맞는 해석도 알려준다. 주자를 넘어서면서도 존중하는 올바른 거리두기의 느낌으로. 동시에 저자인 우응순은 우리 스스로 한자를 해석할 수 있다면서 열린 해석의 가능성도 알려준다. 여러모로 <시경> 초심자에게 유용하게 도움이 될 수밖에 없는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시경> 초심자로서, 저자의 실제로 들려오는 듯한 강의 목소리를 책에서 읽어내며 <시경> 구절구절들을 넘나들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맘먹고 <시경>이라는 텍스트를 저자의 도움을 받아 정복하고 싶다.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기에, <시경 강의>의 도움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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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무타납비 시 선집 소명출판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288
김능우 옮김 / 소명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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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알무타납비 시선집-알무타납비

 

책을 읽으면서 생겨난 취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대중적이지 않은 시대나 사건들에 대한 책을 읽는 것. <알무타납비 시선집>은 저 취향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취향은 저로 하여금 <알무타납비 시선집>을 붙잡아 읽게 했습니다. 이게 중세 이슬람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인의 시라면서 속삭이며.

 

이슬람 시인들의 시를 읽지 않은 건 아닙니다.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나 잘랄루딘 루미의 시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시들은 저에게 이슬람 특유의 시라기 보다는, 어떤 특성을 가지면서도 보편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철학적이거나 사색적이거나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느낌으로. 이슬람 시인이라는 특색을 지우더라도 이들의 시는 누구에게나 읽힐 수 있는 보편적인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알무타납비의 시는 조금 느낌이 다릅니다. 중세 이슬람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인 중에 최상의 자리에 위치한 알무타납비의 시는, 중세 이슬람 황금기의 현실로 시를 읽는 독자를 데려갑니다. 알무타납비의 시에서는 그 당시 이슬람의 자신감과 당당함, 용감함과 자기긍정의 힘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제국주의와 분쟁, 내전 등으로 얼룩진 중동의 근대 이후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 강렬한 자신감이 가득한 시들 속에서, 저는 시대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낍니다. 동로마 제국을 가뿐하게 물리치고, 다시 쳐들어와도 너희들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표출하는 이슬람의 군주를 묘사하는 시들 속에서.

 

누구에게나 찬란한 시절이 있습니다. 한 국가나 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이슬람이 황금기가 있었다는 걸 들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체감하지 못했을 뿐. <알무타납비 시선집>을 읽으며 말로 듣는 거랑 다수의 시를 통해 그 강렬한 자신감을 체험하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자신감은 군주를 훌륭하게 묘사하는 시에서만 있는 건 아닙니다. 알무타납비는 자신의 기대를 배반한 군주들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조롱하는 시들도 남깁니다. 여기에서도 저는 알무타납비의 기개를 느끼는 걸 넘어서서, 동시대 이슬람에 가득했을 수도 있을 자신감을 느낍니다. 저의 지독한 오독이겠지만, 알무타납비의 오만함은 그 시대 이슬람의 강렬한 자신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요?(^^;;) 오독이 여기까지 진행되니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되었든 중세 이슬람의 넘치는 자신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시들을 읽으며 그 자신감에 감염된 저 자신을 꿈꾸어봅니다. 아직 오지 않을 저만의 황금기를 꿈꾸며. 그러면서 저는 다른 책으로 넘어가보려 합니다. <알무타납비 시선집>처럼 예상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만나기를 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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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루에 한 번 글 올리는 거 도전 예정...

이번에는 1일 1리뷰로 갈 생각입니다...

과연 어떻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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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essa 2022-12-03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이팅입니다. ~^^

짜라투스트라 2022-12-04 13: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근데 최근에는 이걸 포기해서 다시 게으름으로 돌아갔습니다. ^^;;
 
제2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수상작품집 (특별보급판)
이신주 외 지음 / 아작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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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2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수상작품집-이신주 외

 


1.

부끄럽다. 이 글을 쓴다고 해도 10월에 쓴 서평이 고작 세 편이라니. 받아들이는 입력에 비해서 나오는 출력은 비할 바가 못된다는 것이. 읽은 책을 꾸준히 서평으로 써내는 네이버 블로그 이웃이나 알라딘 서재 이웃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게으름은 고칠 수 없는 수준인가라는 한탄을 할 수밖에 없다. 한탄을 하면서도 글을 쓸 수밖에 없으니 써본다.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2.

나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후로 한국 장르문학의 풍향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처음에 내가 한국소설을 읽을 때는 SF 같은 장르문학은 문학계의 변방으로서, 문단에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런 문학계의 현실을 여러차례 개탄해왔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평가에서나 나오는 양에 있어서나 한국 장르문학은 그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무엇이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다. 쌓이고 쌓인 것들이 어느 순간 특이점을 불러 일으켜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장르문학을 꾸준히 좋아해 온 내 입장에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좋다. 부담없이 다양한 작품들을 읽을 수 있으니. 더 이상 박한 평가를 의식할 필요도 없고.

*다시 또 강조해보면, 내 개인적으로는 그 변화를 확연히 느낀 건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후였다.

 

3.

<2회 문윤성 SF문학상 중단편 작품집>도 한국 장르문학의 변화된 흐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수상작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좋은 SF 이전에 좋은 소설로 보이는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과거를 둘러보면, 한국 SF 작품들 중에서 기발한 설정이 있거나 플롯의 흥미는 있었지만 소설로서의 만듦새나 짜임새는 약한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책의 수상작들은 대체로 좋은 SF 이전에 좋은 소설로서 느껴졌다. 아마도 심사위원들이 좋은 SF 이전에 좋은 소설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상작인 <내 뒤편의 북소리>도 그렇지만 우수상 수상작인 <궤적 잇기>, 가상작인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것에 대하여>,<사어들의 세계>,<신의 소스코드>도 마찬가지다. 특히 <궤적 잇기>,<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것에 대하여>,<사어들의 세계>는 인간의 중요한 감정인 사랑, 우정, 고독을 SF의 형식으로 변주한 소설처럼 보였다. SF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감정이 핵심인 소설들. 그건 SF가 소설의 계보에 속한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내 뒤편의 북소리><신의 소스코드>는 내가 좋아하는 SF 특유의 기발한 설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대 서사의 흐름까지 가지고 있었서 좋았다. 특히 <신의 소스코드>는 같이 차원을 넘나드는 작품의 흐름을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기발한 형식에 담아내서 너무나 좋았다.

 

4.

위에 쓴 글을 보면 마치 내가 무슨 심사위원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나는 심사위원이 아니고, 일개 SF를 좋아하는 팬일 뿐이다. 팬심으로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했을 뿐이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한국 SF의 좋은 흐름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적었을 뿐이다. 적고 보니 내가 여전히 심사위원인 줄 착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나는 조금 더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앞으로 조금 더 정신을 차린 채 책 읽고 글을 써보겠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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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마음 - 지치지 않고 세상에 말 걸기
위근우 지음 / 시대의창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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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뾰족한 마음-위근우

*10-210월달에 두번째로 쓰는 서평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위치가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위치는 상황과 자신이 처한 조건에 따라 달라지죠. 누군가는 어떤 이의 아버지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의 자식이 되고, 그들이 같은 직장에서 상사가 되거나 부하직원이 되는 것처럼. 대중문화를 대하는 이들의 위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단순한 대중문화 소비자가 되고, 다른 누군가는 대중문화 생산자가 되고, 또 다른 이는 대중문화를 비평하는 비평가가 되기도 합니다. <뾰족한 마음>의 저자 위근우는 대중문화 비평가입니다. 대중문화 비평가로서 활동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평범한 대중문화 소비자와 위근우의 위치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책 제목을 보면 느껴지는 것처럼, 위근우는 대중문화를 대할 때 뾰족한 마음을 내세우기에, 그의 대중문화를 보는 시선은 날카롭지 그지없습니다. 글을 들여다보는 평범한 대중문화 소비자의 마음을 벨 것처럼.

 

어떻게 보면, 뾰족함 마음을 가지고 대중문화를 들여다보며 날카롭게 파악하는 것을, 평범한 대중문화 소비자가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컨텐츠를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피면서 작품이 가진 이데올로기나 개념, 작품이 생산되어 소비되는 사회적 양태를 파악하면서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작품의 용법을 파악하는 걸, 삶에 찌들어 있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피곤한 현대인들은 대중문화 컨텐츠를 꼼꼼하게 따지는 것보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쉬운 일이죠.

 

현대의 대중문화 소비자들과 비평가들의 차이가 메워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히려 대중문화 비평가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누군가는 해야할 일을, 그들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다수는 지친 심신을 이끌고 쉬기 위해 대중문화 컨텐츠를 소비할 수밖에 없는 게 이 사회의 구조라면, 소수의 누군가는 그들이 소비하는 대중문화 컨텐츠를 꼼꼼하게 살피는 게 필요하다는 말이죠. 쉽게 소비되는 대중문화 컨텐츠의 관성을 비판하고, 그것 속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이나 개념의 폭력성을 성찰하고, 새롭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거나 컨텐츠 창작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식으로. 다수가 할 수 없는 걸 하는 소수, 다수의 삶의 방식을 어떤 식으로든 보완해주는 소수. 제가 보기에 대중문화 비평가의 몫은 거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위근우씨의 몫도 거기에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위근우씨가 <뾰족한 마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분은 크게 공감하지만, 어떤 부분은 비판합니다. 독서모임 같은데서 항상 하는 말이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가치판단으로 보는 건 피곤하고 힘든 일입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하기 때문에 그들의 몫을 인정하지만, 반대로 보면 내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위근우 같은 대중문화 비평가들은 저게 잘못됐다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다른 무엇을 해야 한다고, 저같은 대중문화 소비자들을 채찍질하고 채근합니다. 하지만 평범한 대중문화 소비자인 저는, 학교 선생님 같은 그들의 간섭에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무시하고, 때로는 비판하면서, 저만의 뾰족한 마음을 가다듬어 나갑니다. 그렇게 저같은 이들의 뾰족한 마음과 위근우 같은 비평가들의 뾰족한 마음이 합쳐져서 하나의 사회가 이루어지는 거겠죠. 물론 둘의 뾰족한 마음이 합쳐질 때 나타나는 양사이 긍적적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들이 언젠가는 합쳐지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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