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데드라인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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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새벽의 데드라인-윌리엄 아이리시

그녀에게 그는 분홍색 댄스 티켓이었다. 그것도 써버려서 반동강이 난 티켓에 불과했다. 십 센트당 이 센트씩 떨어지는 수고비였다. 그녀에게 딱 붙어 밤새도록 온 사방을, 온 플로어를 누비는 한 쌍의 발이었다.(9)
추억의 강물이 둘 사이에 줄기를 이루어 흐르기까지, 서로 박자를 맞춰가며 점점이 흩뿌려진 기억들을 번갈아 길어 모았다.(58)
이 도시는 악질이에요. 사람을 잡아먹어요. 지금 이 도시가 내 목을 조르고 있어요. 그래서 도망치지 못하고 붙잡혀 있는 거예요.(63)
가방이 무겁지는 않았다. 들어 있는 물건이라고 해봐야 산산이 부서진 희망뿐이었다.(92)
도시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거든요. 도시는 눈이 천 개에요.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우리한테 안 보이는 위치에 깊숙이 숨겨진 눈이 끔뻑끔뻑 우리를 예의 주시하고 있어요.(98)
이 도시, 여기가 문제야. 본때를 보여주자고요. 아직은 한 방 먹은 거 아니에요. 데드라인까지 시간이 남았잖아요. 날이 밝을 때까지 시간 있어요.(110)
앞이 막힌 구멍들이 줄줄이 늘어선 거대한 벌집과 다를 바 없는 게 도시였다. 인간은 이런 문을 드나들면 안 된다. 이런 데서 살면 안 된다. 이런 방에는 달빛도, 별빛도, 아무것도 싀지 않았다. 차라리 무덤이 나았다.(303~304)
가면 갈수록 스카이라인에 잠식당해 하늘은 점점 더 면적이 줄었고, 가끔 뚜껑 열린 맨홀들이 들쭉날쭉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저 파란 하늘. 그리고 어두침침한, 탈출구 없이 영원히 어두침침한 콘크리트 미로.(356)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는, 도시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저의 삶의 보금자리로서 존재하는 곳이 도시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다보니 빌딩숲이 우거진 곳이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간다고 해도 크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도시가 아닌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도시에 와서 느끼는 감정을 저는 느끼지는 못하겠죠.

<새벽의 데드라인>은 제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댄서로서 성공하리라는 부푼 꿈을 안고 뉴욕에 왔다 성공하지 못하고 싸구려 댄스홀의 댄서로 혹사당하며 죽은 삶을 살고 있지만 고향의 부모님에게 계속해서 말한 거짓말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여인 브리키. 역시 고향을 떠나 뉴욕에 와서 일을 얻었지만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일자리를 잃고 몰락한 청년 퀸. 우연히 댄스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고향이 같다는 사실을 알고 대화를 나누다 도시의 삶에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도시는, 도시에서 그들이 겪은 삶은, 그들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탐욕이 버무려진 냉정한 도시의 삶은 그들을 얽어매어 '범죄'의 혼란 속으로 그들을 밀어넣습니다. 다음 날 새벽까지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연관된 범죄를 새벽까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소설을 읽으면 알 게 될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작가입니다. 윌리엄 아이리시. 미국 추리소설의 역사에 누아르와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로 꼽히는 코넬 울리치의 다른 필명인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이름은 이 소설을 읽는데 신뢰감을 더합니다. 시리즈물이나 연속해서 등장하는 인물이나 탐정, 경찰을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거나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나가는지를 생동감 있고 긴박감넘치게 특유의 흡입력 있는 문제로 그려나가는 작가인 것을 알기에 저는 <새벽의 데드라인>을 읽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비록 이야기 구성이 과거의 느낌이 나고 지나치게 영화적 구성 같은 부분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읽을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관심있게 본 것은 도시인이 아닌 인물이 도시에 와서 살면서 가지게 된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자신만의 큰 꿈을 품고 '뉴욕'이라는 세계 제일의 도시이자 세계의 중심에 와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다 실패한 여인 브리키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서 도시를 바라봅니다. 도시가 자신을 잡고 있다고, 도시가 자신을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도시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이건 자신의 원망을 도시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원망을 반영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시 특유의 삶이 가진 어떤 특정한 패턴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업 중심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그물망처럼 지역 곳곳을 얽매고 있는 고장에서, 농업이 중심이 아닌, 끈끈한 인간관계가 아닌, 스쳐지나가는 관계 중심의 대도시가 가지고 있는 서늘함과 차가움이 도시가 아닌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무섭게' 여겨질수도 있습니다. 도시의 그 서늘함과 차가움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무서울 수도 있는거죠. 저라는 인간는 도시의 삶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 서늘함과 차가움을 무섭게 여기지 않는겁니다. 생각해보니 저같은 도시인은 그 서늘함과 차가움을 받아들인 무서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도시가 아닌 곳의 사람이 본다면. 어쩌면 <새벽의 데드라인>은 도시의 차가움과 서늘함이 만든 무서움을 벗어나려는 도시가 아닌 사람들의 몸부림이 그려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인 코넬 울리치가 도시인이 아닌 사람들의 삶을 통해 도시의 무서움을 그려내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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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곁에서 - 주말엔 숲으로, 두번째 이야기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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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너의 곁에서-마스다 미리

무거운 채로는 많이 날 수 없어.                        
각자 운명의 만남 '공존'이라는 거지.                        
숲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지만 힘도 주는 느낌이랄까.                        
다양하게 있다는 건 좋은거야.                        
기대는 기대일 뿐. 씨앗 본인과는 상관이 없죠. 떨어져 나가는 것 외에는 자신의 세상이 넓어질 방법이 없으니까요.

사람들 많고 바쁘기 그지없는 도시에서 삶을 살다보면 피곤하고 힘빠지고 해서 종종 숲이나 산이나 바다 같은 도시가 아닌 곳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저만 해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사실 예전만 해도 저는 제가 사는 곳 근처의 산을 시간나면 자주 갔었지요. 공기도 너무 좋은 것 같고, 자연 속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서 좋았죠. 그런데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책을 봅니다. 마스다 미리의 <주말엔 숲으로> 같은 책을.

<주말엔 숲으로>를 읽었을 때 정말 좋았습니다. 도시의 생활에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숲 근처에 사는 친구의 집으로 가서 같이 숲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고 살아갈 힘을 얻는 내용을 보고, 저는 숲을 가지 않았는데 마치 숲에 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저만의 착각이겠지만 책에서 숲의 냄새가 나고(생각해보니 책의 종이는 나무로 만든 것이군요.ㅎㅎ), 새소리가 들리고, 숲의 생명체들이 살아 있는 것 같았거든요.

<너의 곁으로>는 <주말엔 숲으로>의 후속편 격인 만화입니다. 전작에서 숲 근처에 살면서 친구들이 오면 자연이라는 넉넉한 공간으로 안내하여 친구들을 마음 편하게 쉬게 만들고, 숲의 식물들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삶의 작은 깨달음을 전해주었던 '하야카와'는 <너의 곁으로>에서 자신처럼 선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여 자신과 비슷한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려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하야카와는 여전히 하야카와라는 점. 여전히 여유롭고 엉뚱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존중하며 아내처럼 여유로운 남편,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에게서 배우며 마음 넓게 성장하고 있는 아들 타로, 일상에 지치면 종종 찾아와 여유를 즐기고 삶의 힘을 얻어가는 하야카와의 두 친구인 마유미와 세스코, 어머니의 집착에 시달려 힘들어하다 하야카와의 이야기를 듣고 자립의 힘을 얻는 타로의 담임선생님과 역시 하야카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담임선생님의 어머니까지, 자연을 닮은 하야카와의 영향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게 됩니다. 어쩌면 자연이 하야카와의 몸을 빌려서 그들의 삶에 힘을 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자연이 마스다 미리라는 작가의 몸을 통해서 책 속 등장인물들과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삶의 힘을 주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군요.

이 책의 이야기가 가진 '휴식 같은 따뜻한 온기' 앞에서 이 책의 낭만성을 비판하는 말은 큰 의미가 없겠지요. 마루야마 겐지 식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거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같은 사고방식이나 생존을 위한 생물들의 치열한 경쟁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생물학적인 사고로 이 책을 바라보지는 않겠습니다. 저도 쉬고 싶고, 쉬기 위해 이 책을 읽었으니까요. 그러니 그냥 쉬는 기분으로, 휴식의 힘을 느끼며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글을 쓴다는 제 나름의 노동에서 벗어나 나만의 숲을 찾아 떠나겠다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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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1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나만의 숲‘은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은 죽은 고목 같은 책들이 많은 곳이에요. 애서가들의 발길이 드물어서 쓸쓸한 곳이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싶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7-12-16 05:1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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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소년이 온다-한강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 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17)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95~96)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114)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115~116)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라고.(122)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130)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135)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어.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207)

G의 이야기
(앞부분 생략)
지금까지는 한강 작가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해봤습니다. 뭐 대단한 발표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저만의 '한강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디까지나 저만의 생각에 불과하지만. 이제는 저만의 작가론에 덧붙여서 <소년이 온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한강 작가가 '서사'에 능한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강 작가가 특유의 독특한 언어를 바탕으로 하는 스타일의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예상 밖으로 <소년이 온다>는 생생하게 '서사'가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궁금증이 생긴 저는 혼자서 계속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어떻게 이야기가 생생히 살아 남아 읽는 독자에게도 강력하게 전해지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절대적인 해답은 없겠죠. 고민 끝에 저 나름의 해답은 나오더군요. 저는 <소년이 온다>의 서사가 생생히 살아 있는 건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서사에 작가의 창조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이야기의 흐름 속에 한강 작가가 접속하여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소설을 써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펄떡이며 살아 숨쉬면서 여러 사람들과 우리의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아로새긴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힘이 한강 작가가 써내려간 글속에서 굽이굽이 맺혀 있는거죠. 어쩌면 이 소설은 한강 작가가 쓴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사건이, 그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정신적인 힘이, 한강 작가의 몸을 빌려서 <소년이 온다>라는 글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르죠. 뭐 이것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대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렇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생각한 것은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소년'의 의미입니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질문도 저만의 대답을 가질 수밖에 없겠죠. 역시 고민끝에 저만의 해답이 나왔고, 그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년'은 이 소설에서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마지막 날에 전남도청에 있다 죽은 소년 동호는 살아남은 사람들과 소년의 가족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아무리 큰 사건을 겪은 이들이라도 일상이라는 관성에 매몰되다 보면 생물학적으로 죽어 있지만 정신적으로 죽어 있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데, 이미 생물학적으로 죽은 소년은 그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남아 그들에게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게 만들고 그들의 삶을 살아 있게 만들거든요. 저는 그런 부분들을 보면서 문득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의 '역사의 천사'가 떠올랐다.

"클레(P. Klee)가 그린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라고 불리우는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그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떨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또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쉬임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깨우고, 또 산산히 부서진 것들을 모아서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는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또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반성완 편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중 <역사철학테제>, 민음사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 가능한 '역사의 천사'. 저는 <소년이 온다>의 '소년'에게서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이 된 '역사의 천사'가 보였습니다. 과거를 거쳐 현재,미래로 일직석으로 나아가며 '발전'한다는 근대적 시간관속에서 미래로 떠미는 진보적인 시간의 폭풍을 견디면서 과거로 시선을 돌리고 날개짓을 하는 '역사의 천사'가 흡사 <소년이 온다>의 소년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미래로 가면 발전하기에, 미래에 구원이 있다는 근대의 속삭임에 넘어가 정신적으로 죽어 있는 삶을 살다 과거로 눈을 돌리면 거기에서 날개짓을 하며 과거의 힘을 통해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소년'은 우리에게 미래가 아닌 과거에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현재를 더 낫게 만들고 미래까지 나아가는 방식의 구원으로. 그러니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과거를, 역사를, 죽은 소년 동호로 대변되는 희생자들을, 아직도 고통 받는 생존자들과 연관된 이들을, 이 사건을 일으킨 이들을. 이 사건을, 이 역사를, 이 사람들을 잊지 않아야 우리 사회의 구원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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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12-14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전 책을 읽으면 그저 이야기를 중심으로 느낌만 갖게 되는데
이렇게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나름의 작가론까지 생각해보시는 자세가 대단하세요. 저도 이 책을 읽었지만 5.18이라는 역사적 의미만을 담았었는데 짜라 님께 배우고 갑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2-14 18:01   좋아요 1 | URL
아직 많이 부족한 저이지만 이런 글 써주서셔 감사합니다^^
 
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있을까? 정치의 시대
최강욱 지음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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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있을까-최강욱

결론부터 말하자면 법이 정치를 심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법은 결국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세력의 이해관계와 힘의 우열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며, 정치권력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5~6)
정치를 심판하는 것은 언제나 주권자들이며, 올바른 법을 만들어낼 정치를 강제하는 것도 주권자들이고, 법률가들의 위선을 감시하고 바로잡는 것도 주권자의 몫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7)
민주주의의 역사는 결국 모두가 같은 권리를 지니고 태어난 같은 사람이고, 그 사람들의 뜻이 모여 만들어진 법을 능가해 군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주권자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남용하는 자들은 철저히 응징해야만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온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땅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는 토대가 튼튼해질 때, 정치는 비로소 제 역할을 하며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이고 법은 비로소 제 역할을 하며 주권자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 밝히건대 올바른 정치가 법을 지배하고 심판하게 해야 한다. 법과 법률가에 대한 환상은 단호히 배격해야 하며, 그들에게 거는 과도한 기대는 올바른 정치를 위한 노력으로 치환되어야 한다.
깨어 있는 유권자가 주권자로 굳건히 설 때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고, 그 정치를 통해 만들어진 정의로운 법이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8~9)

헌법의 정의대로라면 주권자가 인정하지 않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19)
헌법이 제일 우선이고 그다음이 법률이고 마지막으로 자기 양심에 따라서 재판을 해야 되는데 자기 생각을 양심이라고 하면서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 맞는 법률을 갖다붙이고 헌법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게 대한민국 재판의 현실인 것 같다.(97)
정치 현실은 주권자의 각성과 감시와 비판이 있지 않으면 절대 달라지지 않습니다.(102)
법은 건전한 상식의 범위를 뛰어넘을 수도 없고 뛰어넘어도 안 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원칙과 기준이 곧 법에도 통용되고, 상식이 확립된 사회가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절대로 놓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질 때 올바른 정치권력이 만들어지고, 시민의 건전한 상식이 뒷받침된 올바른 법이 만들어집니다. 그 법에 의해서 올바른 법문화가 만들어져야 비로소 주권자인 시민들이 법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법치주의입니다.(106)
법이 정치를 심판하는 도구가 되기보다 정치를 통해 올바른 법이 만들어지고, 법을 집행하거나 법을 통해 판단하는 이들은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주권자의 입장에서 가장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 훨씬 건강한 민주주의의 길입니다. 올바른 정치는 주권자의 뜻이 그대로 구현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법은 당연히 정치의 아래에 놓여야 하지요.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법이 올바로 만들어지고 올바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주권자에겐 일종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128)

과거에 논쟁을 즐기던 시절의 저는 동시에 심판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너는 나쁘다, 당신은 나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쁜 주장을 하는 인간은 나쁘다... 온갖 심판질에 세상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뭔가가 잘못된 것 같더군요. 이렇게 온갖 것에 심판질을 해대는 너는 나쁘지 않은건가? 너의 '심판질'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닌가? 너의 심판질에 무슨 근거가 있는가? 니가 뭔데 세상의 온갖 것에 심판질을 하는가? 저 자신을 비판하는 질문을 던지다 보니 찔려서 더 이상 심판질을 못하게 되더군요. 지금도 가끔씩 제가 심판질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 시간이 과거의 저와 지금의 저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됩니다.

과거의 저와 연관지어서 이런 생각을 한 번 해옵니다. 어린시절부터 공부 잘하는 수재로서 인정받고 그 상태로 계속 성장하여 좋은 대학에 간 이가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시험치는 능력과 등수로서 인정받아 자존감이 비대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도 혼자서 '나는 뛰어난 인간이야,나는 최고야, 내가 못하는 것은 없어'라고 속으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거기서 더 나아가 사법시험에 붙어 검사와 판사가 됐다고 칩시다. 자존감이 비대해지다 못해 만능감에 빠진 인간이 '심판질'을 전문으로 하는 법조계 인사가 되어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힘마저 가지게 된다면 어떤 인간이 될까요? 좋은 인간이 되면 좋겠지만, 지나친 자존감과 자신감이 과연 그 사람을 좋은 인간이 되게 만들까요? 오히려 그 사람은 다른 인간을 자신의 아래로 보는 오만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요? 그 사람이 정치적 권력마저 가지게 된다면 온갖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요? 물론 제가 어떤 특정한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사람은 결코 좋은 인간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큰 해악을 끼치지 않으면 다행일겁니다.

<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있을까>에서 최강욱 변호사는 그 오만방자하고 충분히 나빠질 수 있는 사람들이 현재 한국의 판사나 검사일 수 있다고 얘기하며 정치적 주권자인 우리가 판사나 검사에 대한 신화적인 믿음을 버리고 깨어 있는 유권자가 되어 올바른 정치적 현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 정치적 현실 속에서 올바른 법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진짜 올바른 말인데, 너무 올바른 말이라서 실현되기가 쉽지 않은 말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실현되기 쉽지 않은 올바른 말이기에 지켜진다면 말로 큰 영향력을 발휘할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그 올바른 말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분명히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것이 확실하기에. 자, 이제 시작해봅시다. 올바른 정치와 올바른 현실을 위해서 깨어 있는 유권자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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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법개혁은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우리사회에서의 가장 큰 적폐중의 하나죠.교육개혁 언론개혁 종교개혁. 적폐가 산적해 있는 우리나라.

짜라투스트라 2017-12-10 21:42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광장, 민주주의를 외치다 정치의 시대
한홍구 지음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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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광장,민주주의를 외치다-한홍구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지만, 늘 꾸준히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긴 역사를 들여다보면 지금과 같은 진보의 시기는 아주 짧은 반면, 정체의 시기는 좀 길고, 퇴보의 시기는 아주 길었다. 역사에서 진보의 기회과 주어졌을 때 성큼성큼 나아가지 못하면 제법 긴 정체와 아주 긴 퇴보의 시기를 견뎌낼 수밖에 없다.(6)
똑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돌아본다. 같은 듯, 반복되는 듯하면서도 늘 새로운 것이 역사다. 역사가 전개되어온 과정을 보면 당장 내일, 다음 달, 내년을 예측하기는 어려워도 역사의 큰 흐름이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믿음은 생기게 마련이다. 그 믿음은 흔들리는 대지에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이요, 험난한 바다를 헤쳐나가는 대한민국호의 복원이다.
오늘 우리가 보낸 하루가 내일의 역사가 된다. 이 험한 역사를 만들어온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과 스스로의 실천이 절실한 때다.(8~9)
역사가 그런 것입니다. 망치는 놈 따로 있고 구한다고 죽어라 길바닥에서 촛불 드는 사람 따로 있는 법이지요. 역사가 망하지 않고 흘러온 건 촛불 드는 사람들이 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28)
광장이라는 공간은 언제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광장이 진짜 의미를 찾는 순간은 우리가 광장을 메웠을 때입니다.(61)
민주주의의 과정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이 그랬습니다. 끈질기게, 이길 때까지 계속해왔기 때문에 역사에서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늘 쥐어터지고 피 흘리고 그대로 말입니다.(77)
 
독서모임을 10년 넘게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나서의 시간이었습니다.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배를 눈앞에 두고도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데다 자기들 책임이 아닌 척하는 정부, 거짓 보도로 일관하는 언론, 세월호 문제를 제기하면 오히려 이상한 인간으로 몰아가는 특정 정치 세력이 설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절망감과 어두움이 독서 모임을 하는 시간에도 영향을 미쳐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함께 좌절감과 절망감과 어두움을 느끼며 저도 힘들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때에는 쉽게 농담도 건네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독서모임을 하면서 가장 즐겁고 힘찬 시기는 지난 연말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촛불을 들고 외치며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경험, 정권을 몰아내고 시민들 자신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체험을 한 이들이 보여주는 즐거움과 기쁨과 긍정의 힘은 특별했습니다. 언제나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미약한 힘밖에 가질 수밖에 없다 여겼던 평범한 이들이 정권을 몰아내고 정치를 변화시키는 거대한 변화를 이루어냈을 때 느꼈던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분이 독서모임 하는 내내 공기를 떠돌고 다니니 그때의 모임이 얼마나 즐겁고 긍정적이었던지요!!
  
<광장,민주주의를 외치다>를 읽으며 대조적인 두 시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을 쓴 한홍구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광장이 폐쇄된 억압의 시간과 광장이 열린 개방적이고 열정적인 시간이 너무나 달랐기에 벌어진 대조였던 셈이죠. 아무 말도 하지말고 절망을 받아들여라와 말하고 외치며 변화를 이끌어내자의 차이랄까. 두 시간을 모두 경험한 저에게 민주주의의 언로로서의 광장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광장 없이는 민주주의의 생명력이 없다고 해야할까요?
 
책에서도 확인했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다행인 것은 광장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민중의 열망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4.19혁명, 부마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2000년대 들어서 특정 시기마다 일어난 촛불시위와 지난해 연말의 촛불집회까지. 한국인들은 살아서 죽은 삶을 살며 지속적으로 절망을 받아들이는 삶 대신에 때가 되면 들고일어나 변화를 이끌어내는 걸 선택했습니다. 언제나 좋은 결말을 이끌어낸 것은 아니지만, 살아서 죽은 삶을 사는 것을 거부하며 생생히 살아 있는 저항의 삶을 선택하는 한국인들이 열정이 언젠가 좋은 결말을 만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항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삶의 질적 변환을 이끌어내는 것이죠. 비록 이것이 제 생각에 불과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그 시간이 오리라는 걸. 제 믿음이 보답받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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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08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역사는 확실히 나선상의 발전과정 밟아가는것 같아요 반동과 퇴보속에서 결국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요.이러한 역사발전과정 속에서 ‘광장‘의 역할이 중요했죠. 하버마스까지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여기 알라딘 북풀공간이 건전한 공론장의 기능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2-08 21:3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북플이 건전한 공론장의 기능을 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