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장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5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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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1.K의 장례-천희란

 

이별이라는 행위는 우리가 이별이라고 외친다고 이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외칠뿐, 내 몸과 삶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건 진정한 이별이 아닙니다. 진정한 이별은 몸과 삶이 이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람이 떠나간 흔적, 자리가 내 몸에 스며들고, 그것이 삶이 되어 더 이상 그 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제대로 된 이별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왜 이별 이야기를 하냐고요? 그건 <K의 장례>가 이별에 관한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소설가 K라는 인물을 떠나보낸 두 여인의 삶의 방식을 그리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 이별을 하는 두 가지 방식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나의 이별 방식이 있습니다. ‘는 직업 없이 부모와 함께 지내며 아픈 어머니를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연히 기차에서 마주친 소설가 K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고 놀라죠.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K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그와의 기묘한 동거를 시작합니다. 사회적으로 없는 사람인 K는 자신이 쓴 소설을 나를 통해 세상에 내보냅니다. 나는 K의 소설을 자신이 쓴 것처럼 하며 소설가로 살아갑니다. 전희정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있어 전희정으로서의 삶은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닙니다. K가 쓴 소설의 대리인이자 자살해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소설가 K의 새로운 삶의 보조원 정도 되죠. 그런데 15년 만에 K가 방에서 죽음으로 인해서 나는 홀로서기에 나서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전희정으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희정으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갑니다, 가서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으로 삽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름입니다. 나는 K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면서 이름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소설 내내 나의 본명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소설 마지막 줄에 나의 본명이 등장합니다. K를 완벽하게 떠나보내고 자기 자신으로 살기 시작했다는 의미겠죠.

 

두 번째는 강재인이라는 인물의 이별 방식입니다. 강재인은 K의 딸입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헌신 속에 문학에만 집중하며 가정에 무관심했던 아버지가 싫습니다. 아버지의 자살도 아버지 스스로가 문학적 한계에 부딪쳐서 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녀는 소설가로 데뷔하며 자신의 본명이 아닌 손승미라는 이름을 씁니다. 마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다고 아버지의 그림자가 없어지지는 않죠. 손승미라는 필명을 쓰는 강재인은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영향력 속에서 평가받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아버지의 흔적을 어떻게든 떨쳐내려고 하죠. 그런데 아버지 사후 15년만에 아버지의 숨겨둔 원고를 전희정을 통해서 받게 됩니다. 거기서 아버지가 자신을 생각하고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후 15년을 맞아 쓰게 된 원고에서 그녀는 문단에 데뷔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적습니다. 글을 통해 아버지의 영향력과 빈자리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거부만 하던 강박적인 이별 방식에서, 직접적으로 아버지의 영향력과 빈자리를 인정한 채 떠나보내는 방식으로의 변화. 이게 강재인만의 진정한 이별 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은 끝났죠. 하지만 이별 방식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 아닙니다. 세 번재 이별 방식이 있습니다. 이건 소설가 천희란의 이별 방식입니다. 소설가 천희란은 <K의 장례>라는 작품상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오랜 기간 머리 속에 두었다가 드디어 책으로 펴냅니다. 그리고 작품을 마치는 순간 천희란의 머릿속에 넣어두었던 <K의 장례>라는 작품상과 이별하는 것이 됩니다. 소설을 씀으로서 머리 속의 작품상이 사라졌으니까요, 이제 공은 독자에게 넘어왔습니다.

 

아직 이별 방식에 관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의 이별방식이 있으니까요. 독자는 소설가가 써낸 작품을 읽습니다. 읽어나가는 동안은 소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하지만 책과의 동행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책을 덮는 순간 소설은 끝나니까요. 여기서 독자는 다양한 이별의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저만의 서평을 쓰는 걸로서 이 소설과 이별하려 합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소설과의 이별 방식이라고 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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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간빙기 - 서윤후의 제4 간빙기 다시 쓰기 FoP Classic
아베 코보 지음, 이홍이 옮김 / 알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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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0.4간빙기-아베 고보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 바람.

 

A: 저는 아베 고보만 생각하면 항상 일본의 카프카라는 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무엇보다도 카프카라는 단어에 꽂혀요. 저에게 카프카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작가거든요. 그러면 카프카가 저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느냐? 카프카의 작품을 읽다보면 출구 없는 미로에 빠진 느낌이 들어요. 미로에 갇힌 것은 아는데 출구가 없어서 빠져나올 수 없는 느낌. <변신>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에요. 어느날 갑자기 벌레가 된 주인공이 어떻게 자신이 처한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나요? 거기에 출구는 없습니다. 소설은 벌레가 된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죠. 저는 카프카의 작품들을 거의 이런 느낌으로 읽어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조리의 느낌을 많이 받아요, 말도 안되고 빠져나올 수 없는 어떤 사건에 처한 이들이 겪는 부조리의 사건을 다룬 소설로서.

 

B: 아베 고보가 카프카와 비슷한가요?

 

A: 물론 카프카와 아베 고보가 똑같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차이점이 있거든요. 하지만 유사점도 많아요. 아베 고보도 카프카처럼 부조리한 상황들을 잘 그립니다. 아베 고보의 대표작인 <모래의 여자>를 볼까요. 소설의 주인공은 곤충채집을 하러 어느 해안의 사구 마을에 갔다 모래에 갇혀 버립니다.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상황인데, 주인공은 몸부림치지만 모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위에서 말한 카프카와 비슷하죠?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히 느낌의 부조리한 상황. 아마도 그래서 아베 고보를 일본의 카프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B: <4간빙기>는 어떤가요?

 

A: 일본 최초의 SF라고 불리는 아베 고보의 <4간빙기>도 카프카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스포일러 느낌이라서 조금 꺼려지지만 이것에 대해서 말해볼께요, 일단 여기서는 이 작품을 저만의 방식으로 간략화하겠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를 죽이는 작품으로 봅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이 작품은 미래의 흐름을 따라가는 프로그램화된 가 미래의 흐름을 거부하는 현재의 를 죽이는 작품입니다. 나가 나를 죽이는 상황 자체가 말도 안되는 부조리한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도 카프카적인 부조리가 살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B: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A: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제4간빙기(빙하기와 빙하기의 사이에 얼지 않는 기온이 따뜻한 시기를 간빙기라고 합니다. 소설은 우리가 네 번째 간빙기인 제4간빙기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의 기후가 바뀌면서 해수면이 상승한다고 말합니다. 해수면이 상승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땅이 바닷물에 뒤덮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면적이 줄어들죠. 소설에서는 일군의 사람들이 그 변화에 맞추어서 수중인간과 수중동물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 기계를 통해서 미래를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예언 기계를 만든 프로그래머 . 그들이 파악하기에 는 예언 기계의 예언도 믿지 않고 미래의 변화의 흐름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의 정신적 데이터를 통해 프로그램화된 나를 만들어내죠. 이 미래의 흐름을 받아들인 미래적인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나가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미래의 흐름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위협이 되기에 없애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움직이죠. 나를 죽이는 방향으로. 그래서 이 작품은 나가 나를 죽이는 작품이 되는 겁니다.

 

B: 부조리한 상황이 맞군요.

 

A: , 부조리한 상황이 맞습니다. 미래의 나가 현재의 나를 너무나 잘 알기에 반드시 죽이려 하고, 거기서 벋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부조리가 아니라면 무엇을 부조리라고 해야할까요? 이건 미래가 현재를 죽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와는 단절된 미래의 출현 속에서, 미래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유지하려는 성향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미래의 흐름에 탄 는 현재를 유지하려는 를 죽여야만 미래라는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부조리하고 잔혹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 하지만 이 부조리는 카프카적인 부조리와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카프카의 부조리는 부조리한 상황 설정만 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4간빙기>의 부조리는 부조리한 상황 설정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줍니다. 죽기 전에 나는 기계가 전해주는 미래의 영상을 봅니다. 해수면이 상승하고 대지가 물에 잠기면서 수중인간들이 점점 더 미래의 대세가 되어가는 영상. 거기서 지상의 인간들은 설자리를 잃어가다 과거의 화석이 되어버립니다. 미래의 주역이 된 수중인간들은 과거의 환상으로서 지상의 인간들을 바라보죠. 그 영상을 보고 나면 부조리는 단순한 부조리가 아니라 설득력 있는 부조리가 됩니다.

 

B: 분명히 차이점이 있군요.

 

A: <4간빙기>에 그려진 부조리는 카프카적인 부조리와는 다릅니다. 그건 아베 고보식 부조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4간빙기>SF라는 형식을 통해서 아베 고보식 부조리를 펼쳐낸 소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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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내일 - 듀나의 아득한 내일 다시 쓰기 FoP Classic
리 브래킷 지음, 이수현 옮김 / 알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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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9.아득한 내일-리 브래킷

 

N에게 보내는 편지

 

N, 오랜만이야, 잘 지내고 있지?^^;; 오랜만에 예전처럼 책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너에게 보내려고 해. <아득한 내일>을 읽고 나니까 너에게 편지를 다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이 이렇게 하라고 하네. 내 마음이 시키니까 나도 따라야지 어쩌겠어. 어쨌든 이제 시작해볼게.

 

<아득한 내일>은 핵 전쟁 이후의 몰락한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야. 인류 명말 이후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답게 아주아주 암울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야. 사람들이 평범하게 삶을 이어가기는 해.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없지.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겠지만 정도를 따지자면 아주 약한 정도의 몰락한 세상을 그리고 있어. 대규모 도시가 없고, 고도의 문명이 없고,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과 도시의 성장을 두려워하고, 두려움 때문에 기술을 발전시키고 도시를 성장시키려는 이들은 사람들을 쫓아내거나 없애려 하지.

 

큰 틀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두 개의 대립되는 믿음이 양 축을 형성하고 있어. 하나의 축은 세상 사람들의 믿음이야. 이 믿음은 핵 전쟁을 문명과 기술과 대규모 도시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 이 믿음을 가진 세상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과 문명의 성장, 대규모 도시의 형성을 두려워하고 그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들에게는 문명,기술,대규모 도시=핵전쟁=멸망이지.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성경과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하고, 그에 반대되는 이들은 악으로 몰아 죽이지. 초반 부분에 한 남자를 광신도들이 돌로 쳐 죽이는 장면이 그것을 증명해. 그들은 영원히 문명 없이, 기술의 발달 없이, 자신들의 안락함 속에서 살아가고 싶어해. 발전없는 퇴보만의 자신의 삶이라고 여기며.

 

반대편에는 이들과 대립되는 바토스타운의 믿음이 있지. 핵 전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기술자들이 만든 이 도시는 과거의 발달된 기술 문명을 간직하고 있어. 이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 단지 이들은 자신들이 간직한 기술을 안전하게 만들고 싶어해.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원자력 기술을 최대한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연구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가며 계속해서 해나가지. 바토스타운의 믿음은 기술의 안전에 대한 믿음이자 기술을 안전하게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

 

주인공인 렌 콜터는 이 두 믿음 사이를 왔다갔다해. 처음에 렌은 과거의 화려한 문명을 경험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사촌인 에서의 자극까지 받아서 기술 없이 멈춰 있고 퇴보를 유지하려는 마을에서 벗어나게 돼. 그는 에서와 함께 전설의 바토스타운을 찾아 떠나지. 상인인 호스테터의 도움으로 바토스타운에 간 그는 그곳의 삶이 자신의 이상과 다르자 실망을 하게 되지. 같이 이곳에 온 에서는 기술의 힘을 보고 동화되어 살아가는 데 반해서. 그래서 그는 바토스타운을 떠나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하지만 그 길에서 그는 깨닫게 되지. 고향도, 바토스타운도, 자신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없으며, 그 누구의 고정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나는 렌을 이해해. 자신이 사는 곳의 삶에 만족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곳에 가서도 실망하게 되지. 그곳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니까. 그는 광신도가 될 수 없는 사람인거야. 완벽하게 한 쪽의 편을 들 수 없는 사람인거지. 그는 불확실한 믿음의 사람인거야.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렇기 때문이야. 예를 들어볼게. 나는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야. 내 삶의 방식과 살아온 나날들이 유신론과 친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유신론자가 되기 힘들어. 반대로 생각하면 무신론자가 가까울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어. 그런데 나는 리처드 도킨스나 대니얼 데닛 같은 서양의 무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 강렬한 신의 그림자를 느껴. 그들에게서 나는 일신교적 믿음의 문화권에서 태어나 마치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종의 반발심이 보여. 사실 그들과 달리 나는 반박할 필요가 없어. 왜냐고? 내 삶에 기독교의 유일신이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그림자를 느낄 필요도 없고, 그림자를 느끼지 않으니까 반발심을 가질 필요도 없어. 존재한 적이 없는데 왜 반발해야 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신이 있다는 믿음과 신이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성립하는 건데, 나는 아예 그런 믿음 자체가 없다보니까 둘 사이의 불확실한 영역에 서서 둘의 믿음을 어렴풋하게 추축하고 있다는 말이야.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두 축 사이에 서 있는 나는 이 소설 속의 렌처럼 불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일 수밖에 없지. 대신에 나는 나 자신의 믿음을 끊임없이 바꾸어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지. 과거에 유신론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어. 물론 이해한다고 그들의 말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왔다갔다하며 내 삶의 믿음을 조금씩 바꾸어나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어. 완벽한 믿음을 가질 수 없으니까. N, 그래도 내가 안심하는 건, 내가 믿음 때문에 누군가를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직은 안 된다는 거야. 그것만은 믿고 있어. 나는 앞으로도 렌처럼 불확실한 믿음의 삶을 이어나갈 거 같아.

 

N,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기회 되면 또 이런 식의 책 편지를 너에게 쓰도록 할게.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있어.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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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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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8.인생의 역사-신형철

 

다시 읽은 신형철의 책은 역시 신형철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문학과 글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특유의 독특한 감성으로 책을 써내려가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책은 읽을 때마다 저에게 깊은 감성을 남겼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에 관한 신형철 평론가의 책을 읽으며 생각해봅니다. 나라면 저 시들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신형철 평론가의 시에 관한 글마다 저의 또다른 생각들이 더해집니다. 각 글마다 작은 서평들이 쌓일 정도로. 그걸 다 적을수는 없고 여기에 한 가지만 적어보겠습니다.

 

공무도하가

 

그대 강을 건너지 마오

그대 끝내 건너 강을 건넜구려

물에 빠져 돌아가셨으니

그대여 어찌해야 하리오.

 

백수광부의 아내는 백수광부가 강에 몸을 던지지 못하게 하고 싶었으리라. 강에 몸을 던지지 못하게 하려는 백수광부 아내의 의지는 시의 첫 연에 절절히 담겨 있다. ‘그대 강을 건너지 마오라면서. 하지만 백수광부는 강에 몸을 던지고 아내는 예상치 못한 일에 절망하여 부르짖는다. ‘어찌해야 하리오라면서. 참사를 막으려는 자의 욕망과 그것이 벌어지고 나서의 당황스러움의 간극. 이 간극이 빚어내는 격차가 이 시의 특징이다, 문제는 이 시에는 백수광부와 백수광부 아내의 입장만 담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참사를 목격한 곽리자고와 곽리자고의 이야기를 듣고 이 노래를 지어부르는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의 입장도 이 시에 담겨 있다. 곽리자고는 참사를 눈앞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백수광부가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첫 연의 백수광부 아내의 입장은 곽리자고의 입장과 따라서 등치된다. 그리고 참사가 벌어지고 나서의 당황스러움도 곽리자고와 백수광부 아내의 입장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다른 게 있다면 감정의 강도. 백수광부 아내의 입장에서 삶을 함께 보낸 남편의 죽음은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곽리자고는 제3자의 입장에 있을 뿐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은 어떠한가. 여옥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여옥도 자신의 남편이 죽은 건 아니다. 하지만 여옥은 곽리자고의 이야기를 듣고 백수광부 아내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서 노래를 지어 부른다. 자기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겪은 것처럼. 여기서 여옥은 제3자가 아닌, 당사자의 경험으로 향하는 발길을 내딛는다. 타인으로서 타인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건, 어쩌면 기적을 향한 발걸음과 다를 게 아닐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공무도하가>를 보고 문학은 타인이 되려는 기적을 이루려는 인간의 염원이 담긴 장르라고 할 수도 있다. 여옥의 발걸음이 놀라운 건, 자기 자신의 삶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옥의 발걸음은 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도 전해진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뛰어 나에게도 전해진 여옥의 발걸음. 2023년을 사는 나도 여옥의 발걸음을 따라 백수광부와 백수광부 아내의 이야기로 가닿는다. 나도 곽리자고처럼 그들을 바라보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한다. 여기서 시간은 사라진다.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공무도하가>는 내게 시간을 넘는 기적을 선사하는 시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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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흑역사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톰 필립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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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7.인간의 흑역사-톰 필립스

 

책을 읽는 내내 계속 킥킥 웃음이 흘러나왔습니다. 이것이 영국식 블랙 유머의 힘인가. 책을 다 읽고 덮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유머러스한 책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저는 왜 등골이 서늘해졌을까요?

 

먼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언론인이자 작가인 저자 톰 필립스는 <인간의 흑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인간 실패의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저자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살아가는 한,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한, 실패를 반복하고,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해서 저지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반복적으로 실패를 반복하는가? 저자는 책을 통해 그것이 진화의 결과로서 빚어진 우리 몸의 메커니즘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진화가 단기적인 생존은 이루어내지만, 장기적인 삶의 틀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 살아남은 방식이 반드시 미래에도 생존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거시적인 틀에서의 삶의 틀을 좋게 만든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진화는 우리에게 그때그때 살아남은 것들을 전해주지만, 큰 틀에서 삶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저자는 우리 뇌가 그때그때 살아남은 진화과정이 전해져 합해진 것으로서 얼마나 많은 오류를 저지르는지 알려줍니다. 우선 우리 뇌는 세상 곳곳에서 패턴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익숙한 패턴들을 찾아냅니다. 달에서 인간의 모습을 닮은 형상을 보고, 바위나 산의 모습을 자신이 아는 형상으로 인식하듯이. 뿐만 아니라 인간의 뇌는 제일 처음 얻은 정보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결정을 내리거나 제일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뇌는 우리 자신의 오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 자체를 거부합니다. 확증 편향에 빠져 남들의 올바른 지적이나 눈앞에 있는 명확한 오류 제시에도 자신의 사고 방식을 바꾸지 않구요. 집단으로서 사고할 때는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도 인간의 특성입니다.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담아서 미래를 보기도 하고, 탐욕과 이기심과 편견에 물든 채 행동을 하는 게 또 인간입니다. 이 모든 게 모여서 인간 삶을 형성하기 때문에 인간은 지속적으로 실수를 저지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이제 저의 등골이 서늘한 이유가 나옵니다. 저는 책에 나오는 유머러스한 내용을 웃으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무언가 다른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책에 나오는 인간들의 실수를 재미있다고 웃었죠. 하지만 저들과 저는 얼마나 다른 존재일까요? 저도 인간이고, 책에 나오는 저자의 말대로라면 진화 과정에서 생겨난 뇌의 오류 메커니즘을 저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저라도 실수를 안 하는 게 가능할까요? 책에 나오는 이들처럼 거대한 규모나 역사에 기록된 실수를 하는 건 아닐지라도, 저도 저 나름의 작은 실수들을 반복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는 웃었지만, 저의 웃음은 저 자신에게 행해진 웃음이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책 속 인물들과 저는, 실수를 반복한다는 측면에서 다를 게 없는 존재였던 것이니까요. 이걸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했던 악의 평범성개념에 빗대어 어리석음의 평범성이라는 말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니까요. 그래서 <인간의 흑역사>는 저에게 인간이라면 어리석음의 평범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머러스하고 재밌으면서 가슴 서늘한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가 저 자신을 보고 웃게 만들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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