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2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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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825.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2-모옌

대담해진 고향 친지들 의연하게 일어나

손과 손을 바꾸어 들면서 관청 앞으로 달려드는구나

종 현장이 결코 천상에서 잠자는 별이 아니듯

백성들도 돼지나 개나 소나 양이 아닐진대(12)

인간과 인간은 목숨을 내놓고 경쟁하고, 물건과 물건도 내던져질 때까지 경쟁하죠. 우리는 거지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비교를 해도 아마 더 가난할 거예요.(73)

사람이 살아가는 데 오로지 돈만 필요할 리는 없을 텐데요?(121)

마음이 시커먼 그놈들은 애초부터 백성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었던 것이다.(137)

애초에 당시들이 심으라고 해놓고 이제와서 필요없다고 하면 그건 우리 보고 죽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오?(142)

들의 공기는 신선했고 마늘 싹의 끝은 은빛으로 반짝였으며 밭고랑 사이를 흐르는 물은 은빛 뱀처럼 꿈틀거렸다.(159)

간부가 되면 뭐 하는데? 간부가 되려면 양심을 팔아야 해. 양심을 팔지 않으면 간부가 될 수 없어.(171)

보건소의 정원이 발그스름해졌으며 담장을 따라 심어 놓은 양귀비의 탐스럽게 활짝 핀 꽃송이들은 마치 하얀 나방이 줄줄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184)

현장 당신의 손이 아무리 커도 하늘을 움켜쥘 수는 없소

서기 당신의 권력이 아무리 무거워도 산보다 무거울 수는 없소

티엔탕 현의 잘못된 일들을 가릴 수는 없소

백성들 모두에게도 눈이 있단 말이오(199)

간부들은 매일같이 실컷 먹고 마시면서 그 비용을 자신들의 호주머니로 채운 것이지요! 그런 간부들이야말로 사회주의하의 기생충입니다 ... 설마 탐관오리를 타도해서는 안 되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관료주의를 반대해서는 안 되는 건 아니겠지요?(218)

하나의 정당이나 하나의 정부가 만약 국민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곧 그 정당이나 정부를 전복시킬 권리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의 당을 책임지고 있는 간부나 한 정부의 관원이 곧 국민의 공복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오히려 국민의 주인 행세를 하고 국민들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사또 영감처럼 행세한다면 국민들은 그 사람을 타도할 권리가 있습니다!(221)

이 책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번거롭지만 위에 적어 놓았던 책의 구절을 다시 한번 옮겨 적어볼께요. 간부들은 매일같이 실컷 먹고 마시면서 그 비용을 자신들의 호주머니로 채운 것이지요! 그런 간부들이야말로 사회주의하의 기생충입니다 ... 설마 탐관오리를 타도해서는 안 되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관료주의를 반대해서는 안 되는 건 아니겠지요?(218) 한 구절을 더 적어볼께요. 하나의 정당이나 하나의 정부가 만약 국민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곧 그 정당이나 정부를 전복시킬 권리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의 당을 책임지고 있는 간부나 한 정부의 관원이 곧 국민의 공복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오히려 국민의 주인 행세를 하고 국민들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사또 영감처럼 행세한다면 국민들은 그 사람을 타도할 권리가 있습니다!(221) 엥? 정부를 전복? 관료주의에 대한 반대? 국민들이 타도할 권리?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저는 읽으면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이 일당 독재의 권위주의 정부라는 정치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통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중국에서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다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뒷 부분을 읽어보면 이 책에 어떻게 출판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옌은 현실을 잘 파악하는 작가답게 저런 구절 뒷부분에 앞부분을 중화시킬 만한 구절들과 내용들을 채워 넣으며 중국에서 문제가 되지 않게 소설을 잘 써내려갑니다.(^^;;) 위화의 소설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저는 중국의 현실이 중국 소설가들의 문학성을 잘 키워준다고 생각합니다.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거나 사회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 소설가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문학적으로 잘 형상회하고 풍자와 해학 속에 잘 녹여내야 합니다. 현실의 토양이 중국 소설가들의 문학성을 키워주는 역설적인 틀이 되는 것이죠.

어쨌든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2권도 1권의 유지를 이어갑니다. 개혁개방이라는 현실을 겪은 사람들은 돈돈 노래를 부르며 현실을 돈으로 재단합니다. 죽은 아버지를 눈앞에도 두고도 형제들은 돈을 따지고, 유산은 철저하게 분배합니다. 형제들은 돈 때문에 어머니를 돌보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가난한 현실 때문에 자살한 여동생의 영혼을 돈을 받고 여동생과 결혼하지 못해 자살한 남자와의 영혼결혼식에 팔아넘깁니다. 마늘 봉기에 참여했다 감옥에 갇힌 그들의 어미니는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 자살합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부는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고, 가난한 농민들의 현실을 파악못해 수매를 제대로 못해서 농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현정부는 분노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불법은 용서할 수 없다며 봉기에 가담한 아무나 잡아가두고 형을 때려버립니다. 감옥에서는 선배 죄수가 후배 죄수를 마구 구타하고, 얻어맞는 후배 죄수는 살아남기 위해 선배 죄수의 명에 따라 자신의 오줌을 들이마십니다. 구타 당하는 현실이 괴로운 후배 죄수는 자신의 과거로 도피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그는 현실의 부조리 때문에 두 번이나 오줌을 들이마신 경험이 있습니다. 죽은 형제의 아버지는 죽기전에 현정부에 마늘을 팔러 갔다 계속해서 돈을 노리는 관료들의 현실을 마주합니다. 그는 수매를 거부당하고 돌아가다가 현정부 서기의 차에 치여 죽습니다. 현정부는 그의 친척을 내세워 가족의 아우성을 틀어막습니다. 자살한 여동생이 사랑한 남자는 돈만 밝히는 가족에게 그렇지 살지 말라고 따졌다가 오히려 여동생을 죽인 범인으로 몰립니다. 봉기를 주도한 인물 중 한명인 그는 당당하게 잡혀가서 현정부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씨알도 안 먹히죠. 봉기 때문에 잡혀간 이들을 변호하는 젊은 군관은 현정부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큰 호응을 얻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대로 형을 받죠. 그나마 군관의 비판이 알려지며 몇몇의 현정부 관료가 벌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 그들은 더 큰 직위를 얻고 관직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돈 때문에 영혼결혼식에 팔려가고, 여인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남자는 정신이 이상해져 감옥 밖으로 나오려고 하다 총살당합니다. 봉기를 주도한 맹인은 현정부를 비판하는 노래를 계속 부르다 얼어 죽고요..

여기까지 적어놓고보면 이 책의 이야기는 암울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모옌은 이 암울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희극적이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풀어내며 결코 암울하지 않게 표현합니다. 바뀌지 않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정부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는 관료들, 한번 봉기했지만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농민들, 개혁개방의 분위기 속에서 이기적이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사람들 같은 어두운 이야기를 생기 있고 유머러스하며 가독성 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모옌의 이야기의 재능은 정말 뛰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모옌은 중국의 기나긴 역사 앞에서 이어져내려온 농민들의 생명력을 믿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힘겨운 현실 앞에서도 꿋꿋하게 견뎌내고 버텨내면서 현실을 극복해온 농민들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모옌은 중간중간 농민들과 자연의 모습을 생명력 넘치게 그려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옌의 의도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도 같이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해도 견디고 버티면 그 현실은 지나갈 것이기에. 추가한다면 그 현실이 지나가고 새롭게 다가오는 현실이 이전보다는 더 좋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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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설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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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4.작가소설-아리스가와 아리스

다른 삼류 작가나 자칭 소설가들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눈물을 쏟아낼 작품을 쓰는 겁니다. 쓰고, 쓰고, 또 쓰는 겁니다. 미친듯이 써서 기관총처럼 쉴 새 없이 서점에 콱 박아 넣는 거예요. 서점 책장을 당신 저서로 꽉꽉 채우는 겁니다. 할 수 있어요.(26~27)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소설을 쓰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작업일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

마감이 닥쳐오면 고작 한 가지 발상을 얻기 위해 여덟 시간 정도 서재에 틀어박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감이 그리 내 맘대로 쉽게 솟아날 리 없다. 산더미 같은 메모를 뒤지고,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고, 한숨을 쉬고, 헛되이 흘러가는 시간을 걱정하여, 모방의 유혹과 싸우고, 아이디어를 몇 가지 메모해, 그 모든 것에 불만을 느끼고, 커피를 마시고, 재능이 바닥난 것 같다고 절마하여, 자포자기하고, 비누로 손을 씻고, 다시 메모를 읽어본다. 결코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91~92)

소설만 타인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야. 음악이나 미술 작품도 그렇잖아. 작품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지. 그건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가 누구인지 인식할 수 있으니까.(135)

이렇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다, 그런 비결은 없어. 다만 포기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아.(139)

아무리 따뜻한 가정이 있어도 작가란 원고를 마주할 때는 절대적으로 고독한 법이잖아. 누군가 이런 말을 했지. '작가란 집에 있으면서도 가출한 상태다'라고.(216)

"...그런 숭고하고 특권적인 순간이 우리 작가들에게 있어?"

"유감이지만 그건 없어. 비교적 잘 씌었네, 라고 생각하는 정도지."(226)

일단 써야지. 쓰고, 쓰고, 계속 써대는 인간만이 일류라 불리는 작가가 되는 거야.(245)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작가는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글을 쓰는지가 궁금했던 시절이 분명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저는 과거처럼 작가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작가들이 작가와 작가의 삶을 주제로 쓴 소설들을 지속적으로 읽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소설들을 읽으며 작가라는 존재가, 글이라는 삶의 무게를 지고 가는 걸, 직업인으로서 버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실감했기에 작가의 삶에, 작가라는 직업에, 환상을 가질 수 없게 되었죠. 이렇게 작가들이 작가 자신의 삶을 토대로 쓰는 일종의 '작가소설'은, 외부자들이 관찰해서 쓰는 외부자들의 소설과는 달리, 내부자들만이 아는 내부자들의 진실을 알려주는 '내부자 소설'의 묘미를 보여줍니다. 그 묘미 때문에 제가 계속해서 '작가소설'을 읽는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쓴 <작가소설>도 작가들이 쓰는 내부자 소설의 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나카야마 시치리가 쓴 <작가탐정 부스지마>와 비교해서 한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양한 추리소설을 쓰며 '나카야마 시치리 월드'라는 특유의 세계관을 축조해가는 나카야마 시치리가 쓴 <작가탐정 부스지마>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이용해서 작가들의 삶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작가탐정 부스지마가 작가들이 얽힌 살인사건을 해결하며 작가들의 삶과 작가라는 직업의 현실을 보여주는 형식. 그 책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작가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에 비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소설>은 다양한 이야기로 작가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은 <작가탐정 부스지마>와 비슷하지만, 각 작품들간의 응집력은 약합니다. 마치 그때그때 저자가 작가들에 관한 소설을 써놓고 나중에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처럼. <작가탐정 부스지마>에 비해 일관성과 응집성은 약하지만 형식도 다양하고, 작가에 관해서 훨씬 더 넓은 영역을 다룬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서로 상이한 다양한 소설들이 모여 있는 작가소설집이라고 해야할까.

읽으면서 느낀 거지만 저는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 하나하나가 작가의 어떤 상황이나 모습에 대한 형상화라고 느껴졌습니다. 묶인 채로 죽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써야 하는 '글 쓰는 기계'가 나오는 <글 쓰는 기계>는 글 쓰는 기계로서의 작가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 같았고, <죽이러 오는 자>에서는 자신이 쓴 글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작가의 모습을 독자를 죽이는 작가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 같았고, <마감 이틀 전>에서는 마감 때문에 힘들어하다 환상에 빠지는 작가의 모습을 통해 마감의 고통을 나타내는 것 같았고, <기쓰코 선생>에서는 고등학생의 인터뷰에 삐딱하게 대응하는 작가의 모습을 통해 힘겨운 작가의 현실을 잘 나타내고, <사인회의 우울>은 작가가 겪어야 할 사인회의 모습을 악몽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작가 만담>에서는 대화의 형식으로 작가들이 가진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들만의 가치관을 잘 나타내고, <쓰지 말아주시겠습니까>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소설로 써낼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애환이 공포스런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고, <꿈 이야기>에서는 이야기 창조자로서의 작가의 모습이 판타지적인 느낌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이렇다 보니 읽다보면 독자는 작가에 대해서 예전보다 더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뭐 제가 예전보다 작가에 대해서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작가소설> 같은 작가에 관한 소설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라는 존재는 무엇이든 글로 써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자신들이 잘 알고 있고 잘 쓸 수 있는 작가에 관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내부자 소설로서의 묘미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런 책들이 계속해서 나온다고 한다면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에 관한 소설을 읽을 준비를 해야합니다. 그 소설들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작가와 그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작가소설'을 읽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작가소설>은 그런 우리의 준비를 위한 좋은 대응 교재가 될 것입니다. 작가소설이 앞으로도 어떻게 쓰여질지를 예측하는 대응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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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1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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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5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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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3.미겔 스트리트-V.S. 나이폴

"그런데 그 사람이 왜 그 소녀를 버렸을까?"

...

"그야 우리들 사이에서 사내답게 살기 위해서였지."(19)

우리 거리에서는 아무도 포포가 파렴치한 행위 때문에 감옥게 가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30)

엘리아스의 입에서 나온 그 '문핵'이란 말은 내가 들어본 말 중 가장 아름다운 낱말이었다. 그 말은 먹을 수 있는 것, 그것도 초콜릿처럼 맛이 아주 풍성한 그 어떤 것으로 들렸다.(52)

너 또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 그런데 너도 시인이라면 모든 것을 보고 울게 된단다.(72)

삶이란 참으로 끔찍스러운 것이라고. 불운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그저 앉아서 그 불운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니.(148~149)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딸이

양키의 돈을 벌러 일하고 있네.

온 나라에 양키의 돈!

오, 양키의 돈이여!(239)

트리니다드에서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고도 처벌을 면한 적이 있어? 트리니다드에서는 사람들이 결백하면 결백할수록 감옥살이를 더 많이 해야 하고 뇌물도 더 많이 먹여야 해.(265)

저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야기에 푹 빠져 지냈고, 이야기를 모아놓은 이야기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이야기에 홀려 있다고 해야할까요? 이야기에 홀린 사람이 현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을 그저 지나칠 수는 없겠죠. 맞습니다. 저는 이야기에 홀린 사람답게 현대의 이야기인 소설을 즐겨 읽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연속적으로 써 온 서평중에 90프로 이상이 소설에 관한 서평이니 말 다 했죠. 물론 저라고 소설만 읽는 것은 아닙니다. 올해 초부터 5월까지는 소설은 거의 안 읽고 동양고전,서양고전에 엄청 빠져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5월말 쯤에 칸트의 책 중에 <실천이성비판>인가 <판단력비판>인가 하는 책을 읽는데(정확하게 어떤 책인지 기억이 안 납니다^^;;) 갑자기 구토가 나올려고 하더군요. 책 읽다가 구토가 나올려고 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라서 당황했습니다. 제가 사르트르의 <구토> 속 주인공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지. '이런 이해도 안 되는 어려운 책을 왜 읽냐'하는 회의감도 들고, 읽으려고 책을 펴면 머리 아프고 도저히 못 읽겠고. 그래서 저는 책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완벽한 올스톱. 책읽다가 체한 셈치고 책읽기를 포기하고 두 달동안 지냈습니다. 책 말고 다른 걸로 취미생활을 하면서. 두 달의 휴식기간을 거치고 한 권씩 읽어보니 이제 읽을만 하겠더군요. 아직 완벽한 회복은 안 됐다고 생각해서 요새에는 제 전공분야인 이야기쪽으로만 파고들어 읽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홀린 사람이 자기 본분을 회복했다고 해야할까요?

현대판 이야기인 소설을 계속 읽다보니 저 나름다로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고대와 중세의 이야기꾼들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현대판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읽을 때면 저는 즐겁고 너무 기쁩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파고들어가서 이야기해보죠. 어떤 면에서 본다면, 현대의 소설가들은 모두 이야기꾼들의 후계자들입니다. 하지만 전통적 서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소설가들을 굳이 이야기꾼의 범주에 넣을 필요는 없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소설을 이야기꾼의 소설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소설은 그들 나름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취향의 측면에서 저는 그들의 소설보다는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더 즐겁게 봅니다. 취향의 문제라서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저를 즐겁게 하고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 좋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서사를 거부하는 소설가들의 소설을 안 읽는 건 아닙니다. 그런 소설들을 읽을 때는 이야기꾼들의 소설과는 다르게,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읽어나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들의 소설을 읽을 때는 아이처럼 기뻐한다는 건 사실이라서, <미겔 스트리트>가 좋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네요. ㅎㅎㅎ <미겔 스트리트> 서평을 쓰면서 <미겔 스트리트> 이야기가 이제야 나온다니 해도해도 너무하네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 인간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이번은 앞의 말들이 너무 많네요^^;; 앞으로는 서두 부분의 말을 줄이고 본문의 말을 늘이도록 하겠습니다.(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가죠. <미겔 스트리트>를 읽으며 다른 작가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중국의 모옌. 나이폴처럼 모옌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죠. 이야기꾼에 속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비슷하게 여겼던 건 작품에서 드러나는 '어떤 느낌'입니다. 모옌은 평범한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며 인간 삶의 복잡미묘한 부분을 복잡미묘하게 잘 드러내는 작가입니다. 어딘가 유머러스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유머러스한 삶의 진실을 이야기로서 잘 풀어낸다는 말입니다. <미겔 스트리트>는 저한테는 모옌의 소설과 같은 느낌을 전해주었습니다.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섬의 수도인 '포트 오브 스페인'의 하층민 거주지인 미겔 스트리트 사람들의 삶을 어린 '나'의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나'의 눈앞에 포착된 그들의 모습은 어딘가 우습고 권태롭고 그러면서도 슬픕니다. 비극과 희극인 기묘하게 섞여들어간 그들의 삶을 어려운 말 쓰지 않고 이야기로서 술술 풀어내며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닌 '삶의 극'으로 묘사해내는 게 '모옌'과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잘 쓰여진 이야기들은 비극과 희극을 넘나든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부분이 분명히 있는 거 같습니다.

차이점도 분명합니다. 모옌이 격동의 20세기 중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섬의 수도인 포트 오브 스페인에서 살아가는 식민지를 경험한 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거든요. 격동의 흐름 속에서 엄청난 파고를 겪었지만 모옌의 중국인들은 공통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고, 실제 현실이 어떻든 자기 삶을 살아나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나이폴의 식민지인들은 다릅니다. 노예로서 아프리카에서 강제로서 건너온 흑인들과 식민지 시절 식민지 경영을 위해 식민지 종주국이 강제로 이주시킨 인도계 사람들이 대다수인 트리니다드 섬은 모옌의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의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 개개의 사람들로서 존재합니다. 강제로 '이식된 삶'을 가진 식민지 거주민들이 단일한 국가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을 가질리는 없는 것이죠. 단일한 공동체적 정체성이 없으니 그들은 '주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식민지 종주국에 사회적,문화적,의식적으로 종속된 채 그들은 백인들의 삶과 문화를 동경하며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끊임없이 평가절하합니다. 공동체적 정체성이라는 뿌리 없이 식민지 종주죽에 종속된 객체로서의 삶이 트리니다드 섬 사람들의 삶입니다. 개개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부패와 부도덕이 널리 퍼진 건 말할 것도 없겠죠.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성공적인 삶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공된 삶을 살지 못하니 허무하며 권태롭죠. 허무와 권태, 부패, 부도덕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몸부림치는 성공하지 못한 삶. 그게 나이폴이 <미겔 스트리트>에서 그려내는 트리니다스 섬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섬을 빠져나가는 걸로 끝납니다. 마치 나이폴이 식민지를 빠져나가 영국에 가서야 자기 정체성을 자각한 것처럼, 소설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나'도 최후의 출구로서 식민지를 빠져나가는 걸 선택합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생각할 일이죠.

그렇다고 해서 소설에서 그려내는 식민지인들의 삶이 지옥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 몸부림치고, 나름 서로간에 온정을 간직하고, 서로를 돕기 위해 노력합니다. 온기와 온정, 연대의 몸부림, 동정 등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바탕인 거죠. 그곳은 지옥이 아니라 힘겹고 고달픈 삶이 사는 이들이 가득한 곳일 뿐입니다. 나이폴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로 그들의 삶을 우리가 쉽게 읽을 수 있게 풀어냅니다. 이야기꾼의 재능으로 너무나 먼 곳의 삶을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죠. 나이폴의 손 끝에서 빚어내는 이야기의 힘을 통해 독자의 삶에 그들의 삶이 다가온 순간 이야기의 마법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이 놈의 마법 때문에 제가 이야기를 끊을 수 없나 봅니다. 그리고 저 놈의 마법 때문에 앞으로도 나이폴 같은 이야기꾼들의 소설을 계속해서 읽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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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처 소나타 똘스또이 클래식
레프 톨스토이 지음, 김경준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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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2.크로이처 소나타-톨스토이

평생을 한 남자 또는 한 여자만 사랑한다는 건,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마치 양초 한 대가 영원히 꺼지지 않고 불을 밝혀 줄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겁니다.(27)

남편과 아내는 겉으로는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두 달 째부터 이미 서로를 증오하게 되고 헤어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도 그냥 사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끔찍한 지옥이 사직되는 거지요.(29)

진정한 타락이라는 건 말입니다, 육체적 관계를 맺은 여자에게는 윤리적인 처우를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짓입니다.(34)

여자들은 남자들이 숭고한 감정에 대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는 걸, 남자들이 필요로 하는 건 몸뚱이 하나뿐이라는 걸,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은 온갖 추잡한 짓을 일삼고 여자는 용서해도 꼴사납고 촌스럽고 추한 옷을 입은 여자는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겁니다.(49)

우리는 같은 쇠사슬에 묶여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서로를 독으로 중독시키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애써 보지 않으려 하는 두 명의 죄수였습니다.(107)

원래 음악이란 거 자체가 끔찍한 거지요. 그게 뭡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음악이 뭡니까? 음악이 뭘 만들어 낼 수 있죠? 음악이 뭔가를 만들어 낸다면 도대체 왜 그런 걸 만들어 내려는 거죠? 흔히들 음악은 정신을 고양시켜 준다고들 합니다만 다 헛소리고 거짓말입니다! 음악이 하는 거라곤 끔찍함을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음악은 저의 정신을 조금도 고양시켜 주지 않죠. 정신을 고양시켜 주지도, 그렇다고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흥분만 돋을 뿐이죠.(149~150)

정말로 끔찍한 게 뭔지 아십니까? 제가 하등의 의심도 없이 아내의 몸에 대한 소유권이 오롯이 저에게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제 몸도 아닌데 말이죠. 게다가 아내의 몸을 소유할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아내의 몸은 제가 소유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아내는 본인 마음대로 자기 몸을 쓸 수 있는 거 아닙니까?(168)

저번에 <신채호&함석헌> 서평을 쓰면서, 저는 비록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도 해도 현재에 충분히 도움이 된다면 그 유효성이 있고 그것을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맞는 말이죠. 철지난 과거의 것이라도 해도 현재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여 쓸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해보면 철지난 '시대착오적'인 것으로서 현재의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되는 과거의 것을 굳이 지금 이 시대에 받아들여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도 맞죠. 괜히 과거의 잘못된 것들을 받아들여 현재의 잘되고 있는 점을 버리면서까지 과거로 돌아가는 퇴행적 행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의 것으로서 현재에 쓰이기 어려운 시대착오적인 것은 과거라는 시대의 틀속에 묻어버리고 놔두면 됩니다. 그게 가장 좋은 행동일 겁니다.

<크로이처 소나타>는 지금 다시 쓸 수 없는 과거의 유산 같은 소설입니다. 이 책에는 톨스토이 말년의 기독교적 금욕주의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성욕을 적대시하고, 섹스를 경계하며, 피임과 그에 관련된 근대과학을 불신하고, 낭만적 연애를 싫어하고, 성과 성관계와 그것을 둘러산 그 시대 러시아의 가치관을 맹렬히 비판하는. '성욕'이라는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을 불신하고, 그것 때문에 남녀관계의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하며 사랑과 결혼과 섹스와 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 소설을 표현하는데 '시대착오적'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이 어디 있을까요? 저자인 톨스토이는 소설로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다 못해 '에필로그'를 덧붙이며 자신이 생각하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는 일단 먼저 '금욕'을 주장하고(^^;;) 그 다음으로는 기독교에 기반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농민상이 할만한 순수하고 서민적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아니, 성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그것을 강제로 억제한다고 해서 남녀 사이의 문제가 다 해결됩니까? 사랑을 오직 정신으로만 해야하는 겁니까? 육체를 통한 사랑도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나온다면 그것 또한 사랑인데 부정할 이유는 뭡니까? 도대체 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악마화해서 없애버려려는 겁니까? 주류적인 역사 해석에 따르면 1990년대에 공산권이 붕괴한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인위적으로 제어하려고 해서라는데, 그렇다면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금욕주의도 몰락한 공산권 국가들이 행한 것처럼 너무 억압적인 것이 아닐까요? 소설을 읽다가 온갖 반론이 떠올라서 힘들었습니다. 역시 지나가버린 낡은 것은 낡은 것으로 봐야겠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 황당한 면이 많아서요.

그런데, 이런 낡은 생각으로 가득찬 이 소설이 그냥 '낡은 것'으로만 치부되는 의미 없는 책일까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주장에 있지 않고, 문학적인 섬세한 심리 묘사에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한 인간의 내면의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그려내고 있습니다. 읽은 것만으로도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다 파악할 수있고, 내면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세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질투심에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의 몰락해가는 내면 풍경을 섬세하고 꼼꼼하게 그려내면서, 톨스토이는 인간이 어떻게 파멸하고 몰락해가는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셀로가 질투심에 서서히 사로잡혀 데스데모나를 죽이는 과정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톨스토이식으로 풀어낸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문제는 오셀로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의 결정적인 원인이 이아고라는 외부의 악한 인물에 있다고 한다면, <크로이처 소나타>의 주인공 뽀즈드느이셰프에게는 내면의 '성욕'이 '악'에 해당한다는 점입니다. 성욕의 악마화와 금욕의 강요만 아니라면, 이 소설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걸 견디는 게 쉽지는 않겠죠. 앞으로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읽으려면 그걸 잘 견뎌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의 '낡음'을 더욱 더 잘 견디는 미래를 그리며 이제 이 글과 이 책의 독서과정 자체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뵙도록 할께요. 그럼 이만.

*참, 톨스토이의 이 소설과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복잡한 면이 있어서 이 글에서는 하지 않겠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하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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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5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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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1.핀치콘티니가의 정원-조르조 바사니

미콜 머리 위쪽의 새파란 하늘은 어느새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여름 하늘이었다. 그 하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할 것 같지 않았고,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만큼은 실로 그 무엇에도 변함이 없었다.(63)

사물들도 죽어, 친구. 그러니까 사물들도 죽어야 한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죽게 놔두는 게 더 나아.(146)

가장 증오할 만한 반유대주의는 이런 것이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고 불평하다가, 또 반대로 그들이 주변 환경에 거의 완벽하게 동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평균적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불평하는 것이다.(208)

언제든 내 편에서 마음대로 현재를 사랑하고 응시할 수 있기에 현재가 순식간에 과거가 되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나의 불안감은, 그녀의 불안감이기도 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악습이었다. 즉 앞으로 나아가면서 항상 고개는 뒤를 향해 있는 것.(276)

그녀는 미래를 증오했고 미래보다는 "순결하고 강인하고 아름다운 오늘"을, 그리고 과거를, 친근하고 달콤하고 성스러운 과거를 훨씬 더 사랑했으니.(367)

문학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저는 지금까지 서평을 쓰면서, 독서모임에 나가면서 이 질문에 대한 백가지 서로 다른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이 글을 통해 문학에 대한 백 한번째 다른 정의를 내려보겠습니다. 문학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존재하게 만들거나(여기에는 SF나 판타지 문학이 속하겠죠.), 과거에 존재했지만 사라져버린 것이나 잊혀져버린 것들을 다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문학이라는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개인적으로 저는 어려운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언어로 '부재의 현전'을 만드는 예술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왜 뜬금없이 '부재의 현전'이라는 어려운 말로 문학의 정의를 내린 것일까요? 그건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때문입니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이라는 소설을 설명함에 있어서 '부재의 현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죠. 이 소설은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반의 이탈리아 도시 페라라의 유대인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배경으로, 현존하지 않는 그 때의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모습을 되살려내기 위해, 작가인 조르조 바사니는 자신의 기억을 최대한 활용하여, 부재가 현전하는 소설을 만들어냅니다. 그의 손끝에서 빚어진 '부재의 현전'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수용소로 들어가서 참혹하게 죽었거나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이탈리아 페라라의 유대인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지금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작가는 이렇듯 생생하게 되살려낸 부재의 현전으로 그 시대의 삶을 증언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던 유대인들이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고립되어 가고, 어떻게 몰락해가는지를. 그 중심에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와 핀치콘티니 가문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자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인물인 '나'는, 유대인 중산층 가문 출신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오면서 이탈리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핀치콘티니 가문 사람들은 부유한 유대인 가문으로서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거대한 저택을 짓고 거기에 틀어박혀 다른 이들과 교류하지 않고 고립된 삶을 살아온 이들입니다. 1938년에 '인종법'이 이탈리아에서 발표되며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차별을 받기 시작하자, 페라라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핀치콘티니 가문 사람들도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제서야 다른 유대인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고, 그 때에 그들 가문과 교류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 '나'가 있습니다.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가문이 외부의 강제적 고립에서 생겨나는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으로 도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교류를 선택한 것이죠. '인종법' 이후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던 '나'는 핀치콘티니 가문 사람들과 교류하며 외부 상황에서 겪는 불만족이나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고민들을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으로 대표되는 핀치콘티니가의 공간은, 자신의 불만과 고민이 해소되는 공간이자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게 만드는 꿈과 희망이 깃든 이상적인 공간처럼 보입니다. 특히 그들 중에서 가문의 딸인 미콜은 나에게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의 정수처럼 보이는 인물입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죠. 이상은 이상일 뿐이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이상'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랑이 실패하고, 자신이 이상처럼 생각했던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더 나아가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이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도 파악하게 됩니다. 꿈에서 깨어나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죠. '현실의 직시'는 나를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현실의 직시는 또다른 냉혹한 현실과 직면하게 만듭니다. 유대인 차별과 2차 대전이라는 현실. 그 현실 앞에서 가문의 사람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습니다. 내 눈앞의 현실에서 시대적 현실이라는 더 거대한 현실로의 상황 변화. 소설은 그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하며, '나'가 전쟁이 끝나고 몇십년의 세월이 지나 나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 모든 과정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들은 첫 부분에서 시작된 과거 회상의 이야기였습니다. 어른이 된 '나'가 자신이 어른이 된 과정을 회상하는 것이 이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제가 가장 독특하게 느꼈던 것은 이 소설의 담담함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사회가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고립으로 몰아넣는 시대적, 정치적 상황은 이 소설의 분위기를 이룹니다. 마치 공기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감싸고 있는. 소설은 그런 정치적이고 시대적인 상황을 하나의 배경처럼 쓰며, 인종차별적인 분위기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중점을 둡니다. 등장인물은 자신들을 차별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나갑니다. 저자는 '피해자로서의 유대인'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유대인'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것처럼 생각됩니다. 저는 저자가 유대인들이 피해자로서 시대에 차별받고 희생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비록 차별받고 피해받았지만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게 '문학적인 인간성의 복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시대적,정치적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문학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죠.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지만, 조르조 바사니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그의 펜 끝에서 페라리의 유대인들은 인종차별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사랑하고, 미워하고, 말다툼하고, 서로 존중하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오직 희생자의 틀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조르조 바사니의 <핀치콘티니가 정원>은 그래서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 됩니다. 홀로코스트 문학이 시대적,역사적,정치적 상황을 증언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인간적인 양상으로 형상화하는 것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문학적 자산으로. <핀치콘티니가 정원>이 알려주는 그 아름답고 슬픈 문학적인 진실 앞에서 저는 그저 감탄, 또 감탄을 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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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9-11-11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축하해요

짜라투스트라 2019-11-11 13: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